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Margaret K 2022. 4. 18. 06:13

2022년 4월 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마태오 28,8-15) 

"Do not be afraid.
Go tell my brothers to go to Galilee, 
and there they will see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는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고 자신들은 모두 그 증인이라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여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안하냐?”라고 하시며,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도록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을 읽다가 강화도 화문석에 대한 글을 보았습니다. 화문석은 꽃 화(花)자에 무늬 문(紋)자를 써서 화문석(花紋席)입니다. 그런데 꽃 그림이 있는 화문석보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무문석(無紋席)이 더 비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장사꾼에게 강화가 화문석으로 유명한데, 왜 아무런 무늬가 없는 무문석이 더 비싸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장사꾼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화문석은 무늬를 넣으니 짜는 재미가 있지만, 무문석은 민짜라 짜는 사람이 지루해서 훨씬 힘듭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런 변화 없이 사는 삶을 어떻게 쉽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렵고 힘든 일도 겪고 또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쁨과 보람도 느껴야 신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다면서 불평불만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최고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또 그냥 산다고 하면서 의미를 찾지 않는 사람도 변화가 없으니 삶이 고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화를 이루는 삶을 주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변화를 선택하셨습니다. 바로 부활이었습니다. 이 큰 변화가 우리 신앙인에게 가장 큰 희망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 부활 희망을 통해 우리는 최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보고를 들은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경비병들을 매수하여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다 감추고 부활했다고 주장한다는 낭설을 퍼뜨리도록 종용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소문은 널리 민중들에게 퍼져 있었습니다(마태 28,11-15 참조). 그래서 사도들은 이에 대항하여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입증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부활 후 발현 사실이 복음서와 사도 바오로가 보고한 것을 모으면 모두 열한 번 나옵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도 부활 이후의 발현 사실입니다. 여자들이 빈 무덤을 뒤로 하고 급히 달려가던 길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평안하냐?”라는 말로 인사하셨지요. 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아마 기쁨과 함께 처음 경험해 보는 부활 사건이기에 두려움도 컸을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시지요.

두려움이 생기면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해 진리를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또 두려움을 가실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악은 자기 잘못을 감추려고만 합니다. 그래서 부활 사건 자체가 사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의 부활은 감춰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부활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변화를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기다리지 마라. 적절한 때는 결코 오지 않는다(나폴레온 힐).

 

 갈릴래아로 가라!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Hyx1l5y9vDg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실 때나, 주님의 천사들이 그분의 부활을 전해줄 때에, 한결같이 하는 전갈이 있었으니, 그것은 “갈릴래아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릴래아로 간 제자들은 무엇을 어찌 해야 할 지를 몰라서 그저 예전처럼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토록 어려서부터 잘 알아온 호수인데, 그래서 물고기들이 다니는 물길도 시시때때로 다 알고 있고, 어디쯤 가서 그물을 내려야 물고기를 만날 수 있는지도 다 알고 있는데, 허탕만 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밤에도 나가서 밤새 애를 써 보기도 했는데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고 그들은 다른 발현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분께서 예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목소리만은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는 대로 깊은 데로 배를 저어 나가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내려보니,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지경으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때 잡힌 물고기의 숫자를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는데, 153입니다. 이 숫자는 마법의 숫자, 즉 Cubic Number입니다. 1부터 17까지 모조리 더하면 이 숫자가 나오는데, 맨 마지막의 17이란 숫자는 십진법의 완전수인 10과 칠진법의 완전수인 7을 더한 숫자로서, 완전함에 완전함을 더한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또한, 1과 5와 3의 세제곱을 더해도 다시 153이 됩니다.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를 두고 풀이하기를, 제자들이 사도가 되면 십계명을 잘 지키고 성령칠은을 충만히 받은 하느님 백성을 모을 수 있다는 뜻이라고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겁이 많고 움츠러들었던 마음을 담대하고 용감하게 변화시켜 주셨을 뿐이지만,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그 담대하고 용감한 믿음으로 사도가 되어 선교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독서에서 사도 베드로가 유다인들 앞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유다인들에게 잡혀갈까봐 두려워서 예루살렘 다락방에 숨어 있었던 그가 공개적으로 그 유다인들 앞에 나서서 예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은 그들 유다인들이라는 것, 그들이 빌라도의 손을 빌려 죽였기 때문에 빌라도의 죄보다 유다인들의 죄가 더 크다고 분명하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포함한 유다인들 모두가 우러러보는 다윗도 메시아께서 오실 것은 미리 내다보았는데,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셨다는 것도 처음으로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로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죽으셨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메시아를 다시 살리셨고 자신들이 그분 부활의 증인이라는 것도 담대하게 선언하였습니다. 이 설교로써 베드로는 선교의 배를 깊은 데로 저어 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이 설교를 들은 유다인들이 마음이 꿰찔리듯 아파하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사도 2,37) 하고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유다인들의 이 물음으로써 그들은 베드로가 배 오른쪽에 내린 그물에 잡힌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 2,38) 하였습니다. 이 말씀 한 마디로 베드로는 그물을 끌어 올린 셈입니다. 베드로의 말을 받아들인 이들이 세례를 받았는데, 그날에 신자가 삼천 명 가량 늘었습니다(사도 2,41). 선교 성과로 나타난 마법의 숫자가 그날은 3천이었습니다.

 

  1981년에 조선 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는 한국교회가 박해 이후 처음으로 한국 사회의 대중 앞에 공개적으로 모인 자리였습니다. 그 당시에 한국 전체에서 천주교 신자는 백만 명에 못 미쳤습니다. 그런데 여의도 광장에 모인 숫자가 80만 명이었으니 그 열기를 짐작할 만 합니다. 그 열기로 1984년에 앞두고 있는 천주교 선교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가 열릴 때까지 신자들이 2백만 명이 되게 해 달라고 묵주기도를 바쳤습니다. 특히 단 한 명이라도 성인이 나오게 해 달라고 순교자들에게 전구를 청했습니다. 그랬는데 신앙대회가 시성식을 겸해 열렸던 1984년도에 2백만 명을 돌파했고 103위 순교자들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시 순교성인들께 전구를 청해서 신자 수 3백만 명이 넘게 해 달라고 열심히 기도 바쳤고, 드디어 1989년에 세계 성체대회가 열리고 나서 1992년에 이 목표도 넘어섰습니다. 그리하여 1980년대 이후 한국 사회에 일기 시작한 천주교 붐의 결과로 2011년에는 5백만명을 넘겼습니다. 경이적으로 성장한 한국교회의 마법의 숫자가 5백만인 셈입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는 주춤하고 있습니다. 예비자가 줄고 성소자는 더 줄었으며, 냉담자는 80%가 넘는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듣고 있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라! 깊은 데로 배를 저어나가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내려라!”

-조재형신부-


대화 중에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자매님 한분은 아들을 믿는다고 하였습니다사랑해서 결혼한 남편도 믿지만아들을 더 믿는다는 말에 조금 놀랐습니다생각하니 남편은 유전적으로는 남입니다아들은 유전적으로 50%는 같습니다아들은 낳아서 길렀고자라는 모습을 온전히 보았기 때문에 더 믿는 것 같습니다남편은 살아온 길이 달랐고생각도 다를 때가 있고때로 상처를 주기도 하기 때문에 그 믿음의 깊이가 아들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돌아보니 저의 어머니도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나약해서 때로 넘어지고부족해서 앞가림을 잘 못할 때도 어머니는 저를 믿어주셨고 기다려 주셨습니다믿으면 세상이 편하고걱정도 별로 없습니다하지만 의심하면 세상이 불안하고걱정이 앞을 가로막습니다예수님께서도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그저 한 말씀만 하면 치유가 이루어질 거라고 믿었던 백인대장을 칭찬하셨습니다제자들의 나약한 믿음을 걱정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가시지 않았습니다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갈릴래아로 가겠다고 하셨습니다갈릴래아는 제자들이 고기를 잡던 고향입니다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곳입니다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곳입니다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참된 행복을 설교하셨고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곳입니다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고쳐주셨고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주셨고소경을 보게 하셨고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게 하셨습니다물위를 걸으셨고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그렇습니다주님의 부활로 세상이 변한 것은 없었습니다갈릴래아의 호수도갈릴래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도 모두 그대로였습니다주님의 부활로 변한 것이 있습니다제자들의 믿음입니다나약했던 제자들의 믿음이 목숨까지 바칠 수 있는 강한 믿음으로 변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저에게도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제게 갈릴래아는 주교님께서 파견하신 신문사입니다코로나로 상황이 좋지는 않지만 기쁜 마음으로 신문을 만들어야 합니다제게 갈릴래아는 브루클린 한인성당입니다하느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공동체에 복음의 기쁨을 전해야 합니다제게 갈릴래아는 신문 홍보를 위해서 가는 성당입니다가는 길이 멀고 힘들어도 즐거운 마음으로 홍보를 해야 합니다세상은 변하지 않았습니다중요한 것은 저의 마음입니다. ‘갈릴래아로 오라고 전하여라그곳에 내가 있을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우리가 어디로 가야 부활 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알려 주셨습니다부정한 돈을 받고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자신들의 지위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진실을 은폐하려는 사람들은 만나고 싶지 않은 분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갑자기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주님의 부활은 로또가 당첨되는 것도 아닙니다주님의 부활은 일상의 삶에서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가난한 이들의 모습에서아픈 이들의 모습에서외로운 이들의 모습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침묵의 열매는 기도입니다기도의 열매는 믿음입니다믿음의 열매는 사랑입니다사랑의 열매는 봉사입니다그리고 봉사의 열매는 평화입니다.” 달리 말하면 침묵하지 않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얻지 못합니다믿음이 없으면 사랑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사랑이 없는 봉사는 진정한 봉사가 아닙니다평화는 이웃을 위한 봉사에서 시작합니다평화를 얻고 싶으시다면 봉사하십시오봉사의 기쁨을 알고 싶으면 사랑하십시오사랑하려면 하느님을 믿고 이웃을 믿어야 합니다사랑은 기도의 샘물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기도하고 싶으십니까침묵의 시간을 가져 보십시오.

 

두려워하지 마라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부활은 건너갑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부활 사건의 표징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여인들의 내면 상태는 다양한 감정들이 교차했습니다.

 

① 두려움: 무엇보다도 여인들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한 경천동지할 부활 사건 앞에 여인들이 느낀 두려움입니다. 일종의 경외감이랄까요. 동시에 스승님께서 부활하셨다면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일이겠만, 혹시라도 자신들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에서 온 두려움입니다.

  

② 기쁨: 꿈에 그리던 스승님께서 되살아나심으로 인한 기쁨입니다. 영영 이별인 줄 알았던 그분과 다시 재회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죽음을 물리치고 영광스럽게 부활하셨다는 데서 오는 충만한 기쁨입니다. 주님께서 고별사를 통해서 말씀하신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뺴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신 예언의 성취로 인한 기쁨입니다.

  

③ 서두름: 이 기쁜 소식을 우리만 간직하고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에서 온 서두름입니다. 어서 빨리 사도들에게, 주님께 의지하고 따랐던 수많은 사람에게 이 은혜로운 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조바심에서 오는 서두름입니다. 

 

이렇게 복잡미묘한 감정을 품고 달려가던 여인들 앞에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주 다가 오셨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바로 그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안하냐?”(마태오 복음 28장 9절)

  

얼마나 기쁨으로 충만했던지 여인들은 예수님 앞으로 다가가 엎드립니다. 더 이상 그분을 놓치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그분의 발을 붙잡습니다. 너무나 반가웠던 나머지 연신 그분께 절을 했습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혹과 불신으로 가득한 우리를 향해 마주 다가오십니다. 살아생전 그 인자하고 자상한 눈빛, 세상 따뜻한 목소리로 우리의 안부를 물어봐 주십니다. “평안하냐?”

  

존경하는 송봉모 신부님의 부활 신앙에 대한 설명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부활 신앙은 세 가지를 믿는 것이다. 첫째, 예수님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분이 부활이요 생명의 주님이심을 믿는다. 둘째, 바로 그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순례 여정을 이끌어주심을 믿는다. 셋째, 우리가 순례 여정을 마치는 날 우리의 영혼은 천국에 들어갈 것이요, 우리의 약하고 비천한 육신은 새로운 영광의 몸을 받을 것임을 믿는다.”(송봉모, 요한복음산책7, 평화가 너희와 함께, 바오로 딸)

  

이제는 하늘의 별이 되신 의정부 교구 전숭규 신부님의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는 말씀 또한 마음에 새길만 합니다.

  

“부활은 건너갑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재물을 섬기는 삶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으로, 이기적인 사람에서 베푸는 사람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마음에서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건너갑니다. 이 건너감의 끝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 부활입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영근신부-


알렐루야!

부활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달려와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2)

 

그렇다면 그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혹 여러분도 그분이 어디에 모셔졌는지 모르십니까?

진정 부활하신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디에 모시고 계십니까?

 

‘부활하신 분이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를 보기 위해 먼저 ‘부활은 대체 어디에서 벌어지는지?’를 들여다봅니다.

그것은 당연히 무덤에서 벌어집니다.

곧 죽음에서 벌어집니다.

 

그러니 죽음이 있는 곳에 부활이 있습니다.

이는 죽음 없이는 부활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내 삶 안에서 죽음을 맞아들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그냥 죽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탄생으로 건너가는 죽음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대체 왜 죽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을 것입니다만, 우선 모든 죽음의 공통적이고 일차적인 이유는 ‘태어났음’에 있습니다.

그 누구도 태어나지 않고서는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탄생이 죽음의 제1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단 한 분’ 예외가 있습니다.

부활의 신비는 바로 이 분에게서 드러납니다.

이를 니사의 성 그레고리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분의 탄생의 결과라고 말하기보다 그분이 죽을 수 있도록 탄생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탄생’이 발생했다는 것은 탄생이 죽음의 원인이 아니라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는 뜻입니다.

 

'죽음이 탄생의 원인'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지만, 분명 이 죽음에는 탄생이 있습니다.

곧 탄생에 죽음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탄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곧 죽음이 부활의 새로운 탄생이 됩니다.

여기서는 탄생, 죽음, 부활이 하나로 삼위일체를 이룹니다.

 

이 참 생명을 인간에게 건네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경이로운, 이 얼마나 크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랑의 신비인지요!

이를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못 박히시고 잉태되셨다.

그리고 세상은 만들어졌다.”

 

그러니 ‘못 박힘’은 성령으로 날인되어 잉태됨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잉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무덤으로부터 부활한 ‘새로운 창조’를 말합니다.

그렇게 세상은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비로소 부활과 함께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 새로운 삶의 방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살아야 합니다.

곧 우리는 부활과 함께 새 생명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를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백성에게 선포하고 증언하라고 우리에게 분부하셨습니다."

(사도 10,41-42)

그러니 우리에게는 부활을 삶으로 증거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다시 질문해 봅니다.

‘이 부활’, ‘이 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이러한 삶을 파스칼은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끝 날까지 고통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고통과 죽음 가운데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고통받고 죽으면 부활을 맛볼 것입니다.

고통 받기를, 죽기를 거부하면 부활을 체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삶 안에 사랑의 순교가 자리 잡으면, 곧 사랑하여 자신을 내어주면, 그 안에서 함께 죽으시면서 함께 살아계신 그분의 생명을 체험할 것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지금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죽음 가운데 있고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의 타인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고통과 죽음의 삶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 안에 살아계신 야훼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의 고통과 죽음 속에서 동행하시며 저희와 함께 부활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알렐루야!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무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요한 20,8)

 

주님!

제 안에 드소서.

아버지께서 제 안에 마련해 두신 텅 빈 자리에 드소서.

드시어 제 안에 숨겨진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소서.

오늘, 죽음의 무덤을 비우시고 당신 사랑이 드러나는 생명을 살게 하소서.

아멘.

「부활에 대한 믿음을 확고히 하자」

 -반영억신부-


어느 어린이집에서 예수님의 최후만찬에 대한 설명을 하고 발씻김 예식을 거행하였는데 5살 된 한 어린이가 너무슬프니까 예수님은 죽어도 수녀님은 죽지 말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뜨려 수녀님도 아이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답니다. 혹 수녀님이 죽으면 그 아이의 상처와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데 그 수녀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면 그 아이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요?  코로나19를 핑계삼아 세족례를 생략한 전례를 거행한 곳도 많은데 어린이집에서 만찬예식과 세족례를 했다니 감사합니다. 

 

사람을 사고 음모를 꾸밉니다. 헛소문이 전해집니다. 결국 시기와 질투가 사람을 죽입니다. 돈과 속임수가 손을 잡고서 거짓을 퍼뜨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마태28,13).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습니다. 돈이 좋긴 좋은가 봅니다.

 

그러나 빈 무덤의 부활 사건을 덮을 수는 없었습니다. 진실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28,10).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기쁨과 두려움을 안고 그곳으로 달려간 사람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끝까지 지켜본 여인들이 그분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권력과 돈으로 무덤을 덮으려 하였지만, 무덤은 덮을 수 있어도 살아 나오신 주님을 가릴 수는 없었습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움직일 수는 있어도 결코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두려움을 이겨 수 있는 기쁨이 되고, 누군가에게 전해진 부활 사건은 거짓말이 됩니다. 전해 받은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 부활은 달라집니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과 정의가 살아있고, 사랑의 희생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졌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그들을 “내 형제들” 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과의 관계의 끈을 여전히 놓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에 대한 주님의 사랑은 여전한데 늘 우리가 주님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약속된 갈릴래아로 가는 사람은 주님을 만나게 되고 관계를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죄악의 어둠을 밝게 비추시고 새로 나게 하시어 어려운 환경과 처지 안에서도 진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살아나셨고. 우리도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기에 매일 매순간이 한 점 부끄럼이 없는 거룩함으로 지켜져야 하겠습니다.

 

성 끌레멘스는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헛된 수고들, 즉, 불화와 질투심을 버리고 예수그리스도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간절히 청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생각, 불화, 질투, 탐욕까지도 그분의 십자가 앞에 굴복시키며 오로지 십자가의 사랑과 자비를 청하십시오. 반드시 부활의 은총을 얻어 누릴 것입니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결국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구체적인 믿음의 생활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삶입니다. 주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것, 그분이 우리 인생 안에서 행하신 모든 것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을 잊지 말기로 합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희망을 잃고 희망이 없는 그리스도교인들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기억, 그분의 선하심과 우리 마음을 울리던 그 생명의 말씀을 기억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부활하신 분의 징표들을 알아볼 줄 아는 새벽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되기 위하여 그분에 대한 기억을 되새기면서 우리의 것으로 만듭시다.

 

사랑하는 교형자매 여러분, 그리스도는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열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고 그분이 주시는 희망의 선물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하여 우리를 개방하고 걸어가기로 합시다. 그분의 말씀과 업적에 대한 기억은 찬란한 빛이어야 하며 그 빛은 영원한 그 파스카를 향한 우리의 신뢰 어린 발걸음을 인도할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경비병들이 매수되다.』

 -송영진신부-


“여자들이 돌아가는 동안에 경비병 몇 사람이 도성 안으로 가서, 일어난 일을

모두 수석 사제들에게 알렸다. 수석 사제들은 원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한 끝에

군사들에게 많은 돈을 주면서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밤중에 와서 우리가

잠든 사이에 시체를 훔쳐 갔다.‵ 하여라. 이 소식이 총독의 귀에 들어가더라도,

우리가 그를 설득하여 너희가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해 주겠다.’

경비병들은 돈을 받고 시킨 대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 말이 오늘날까지도 유다인들 사이에 퍼져 있다(마태 28,11-15).”

 

복음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쓴 책입니다.

따라서 ‘사제들이 경비병들을 매수한 이야기’도

신자들과 예비신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박해자들을 향해서 “너희의 주장은 거짓이다.” 라고 반박하려고 기록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자들과 예비신자들에게 “박해자들의 거짓 주장에

현혹되지 마라.” 라고 말하기 위해서 기록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일어난 일’이라는 말은, 마태오복음 28장 1절-4절을 가리킵니다.

“안식일이 지나고 주간 첫날이 밝아 올 무렵, 마리아 막달레나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러 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났다. 그리고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더니 무덤으로 다가가 돌을 옆으로 굴리고서는 그 위에 앉는

것이었다. 그의 모습은 번개 같고 옷은 눈처럼 희었다. 무덤을 경비하던 자들은

천사를 보고 두려워 떨다가 까무러쳤다(마태 28,1-4).”

경비병들은 큰 지진을 경험했고,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고,

그 천사가 무덤 입구의 돌을 옆으로 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경비병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본 것은 아닙니다.

또 바로 까무러쳤기 때문에,

천사가 여자들에게 전한 ‘예수님 부활 소식’을(마태 28,5-7) 못 들었습니다.

(그러나 까무러쳤다가 깨어나서 천사의 말을 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여자들을 추궁해서 천사가 무엇을 말했는지를 알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경비병들은 자기들이 본 것을 사실대로 사제들에게 알렸는데,

사제들에게 가기 전에 무덤 내부를 들여다보고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까지 사제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것을

사제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절-4절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천사가 내려오기 전에

부활하셨고, 경비병들 모르게 무덤에서 나가셨습니다.

천사가 무덤 입구의 돌을 옆으로 굴린 것은,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가시는 것을 도와드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부활하셨는지, 또 ‘큰 바윗돌’로 입구가 막혀 있는 무덤에서

어떻게 나가셨는지, 본 사람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경비병들이 본 것은 ‘부활 후의 상황’일 뿐입니다.

아마도 사제들은 “예수의 시신은 어떻게 되었나?” 라고 경비병들을

심문했을 텐데, 그들은 “저희는 모릅니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신자들 중에도

“혹시 사도들이?” 라고 의심한 사람들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의 부활 순간을 본 사람도 없고,

‘빈 무덤’을 설명할 방법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상황에서 사도들은 “우리는 예수님의 시신을 옮기지 않았다.” 라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갔다.” 라는 적대자들의 주장은

증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일 뿐인데,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라는 사도들의 주장도 역시 증명할 수 없는 일방적인 주장입니다.

그 문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과 신자들에게 나타나심으로써

한 번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런데 경비병들과 사제들 사이의 ‘은밀한 거래’를

복음서 저자는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그것은 경비병들과 사제들 중에 누군가가 사도들에게

진실을 고백한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사도 6,7).”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제들 가운데에 ‘그 일’에 직접 관련되었거나

‘그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제들은 왜 경비병들을 매수했을까?

이 질문은 앞의 27장 62절-66절에 연결됩니다.

“이튿날 곧 준비일 다음 날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가서 말하였다. ‘나리, 저 사기꾼이 살아 있을 때, ′나는 사흘 만에 되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한 것을 저희는 기억합니다. 그러니 셋째 날까지 무덤을

지키도록 명령하십시오.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내고서는, ′그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셨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 마지막 기만이 처음 것보다 더 해로울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당신들에게 경비병들이 있지 않소. 가서 재주껏 지키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가서 그 돌을 봉인하고 경비병들을 세워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마태 27,62-66).”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걱정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아니라 ‘사도들의 예수님 부활 선포’였습니다.

사제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천사를 목격했다는 경비병들의 말을 부정할 수도 없었고,

또 예수님의 무덤에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경비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거짓말을 하라고 시킨 것도 죄이고,

‘하느님의 힘’이 작용했음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짓말로 덮으려고 한 것도

죄인데, 사실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는 것은 ‘큰 죄’입니다.

사제들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알면서도 그런 일을 한 것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탐욕 때문입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일일이 반박하는 것은 필요한 일도 아니고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서로 반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같은 체험을 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경비병들이 예수님을 믿는 여자들과 같은 체험을 했다는

증언을 전하는 것이, 이 이야기를 복음서에 기록한 주목적일 것입니다.

(사실 ‘빈 무덤’ 자체는 부활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래서 사제들의 거짓 주장은 별로 효과가 없었고, 예수님의 부활 후에

여러 가지 체험을 한 사람들의 증언이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를 보게 될 것이다."(마태 28, 10)

-한상우신부-

부활의 방향은
예수님을 만났던
만남의 역사로
우리를 초대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잊을 수 없는
만남의
마음을 주셨다.

잊고 지냈던
첫 마음
첫 약속을
다시 만나는
시간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바로
첫 마음의
갈릴래아이다.

갈릴래아
사람인
예수님을 다시
만나는 제자들의
첫 마음이다.

만남의
마음을
잃어버린
서글픈
우리들 삶이다.

만남은
끝난 것이
아니다.

만남은
마음을 위로하고
마음은 만남을
풍요롭게한다.

첫 마음을
보살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다시 우리들
첫 마음으로
돌아오셨다.

모든 것을
내어맡겼던
첫 마음의
설레임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첫 마음으로
우리를 다시
불러들이신다.

첫 마음의
부활이다.

부활의 본질은
사랑의 마음이다.

우리들 첫 마음
거기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다.

마음 안에
계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첫 마음으로
마음을 다시
차려주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은
사람에게
중요한
첫 마음
첫 약속을
다시
가르쳐주는
마음의 여정이다.

다시 첫 서원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부활의 기쁨이다.

첫 마음이
가장 큰
은총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팔일 월요일-사람의 찬가, 생명의 찬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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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5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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