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5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진리 편에 선 사람은
내 말을 귀담아듣는다.”
(요한 18,1 -19,42)
For this I was born
and for this I came into the world,
to testify to the truth.
Everyone who belongs to the truth
listens to my vo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다고 한다(제2독서). 요한 복음서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우리에게 전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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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 세상 안에서 주어지는 죄의 유혹에 올바르게 살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죄의 구렁텅이 안에 있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뉴스를 보면 너무 쉽게 볼 수 있는 악행의 모습들을 보며 진짜로 그렇다는 확신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남들처럼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남들처럼 무감각하게 죄짓는 것이 당연하고, 오히려 이런 환경을 주신 하느님을 원망해야 할까요?
창세기에 나오는 롯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아브라함의 조카로, 땅을 나눌 때 자신의 욕심 차리기에 급급해서 비옥해 보이는 소돔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악으로 가득 찬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서 나그네로 보이는 천사에게 행한 그의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천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힘을 동원하지요. 결국 이런 사랑의 행동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속에서 탈출할 수 있게 했습니다.
오히려 악인이 가득한 소돔에 있을 때 그가 선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장소나 상황이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 지금의 자리에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성인들도 위기 체험을 통해 거룩해졌다고 하지요.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수도회에서 독방에 갇혀 있어야 했었고, 이냐시오 성인들도 교회로부터 거부를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불평불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순명하셨습니다. 이 안에서 주님께 대한 사랑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냅니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억합니다. 주님께서 왜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가장 큰 사랑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셨고, 사랑에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자신을 향해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라고 외쳤던 사람들이 이제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며 적의를 보입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지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이 이제 감히 예수님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습니다. 모든 악이 이 안에 가득한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 안에 커다란 은총이 있었습니다. 우리 구원의 시작이 이 악을 이겨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도 악의 한 가운데 있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불평불만으로 이 악을 이겨낼 수 없다면서 남들처럼 사는 편한 방법을 선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악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면서 이겨내셨듯이, 우리 역시 이 안에서 주님께 순명하면서 사랑에 철저하게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십자가의 길. 그 길이 바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나의 구원도 가까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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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리스도를 잡아 바치는 사람이 꼭 '나'여야 하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3JSbxxTRU2I
제가 비르짓다의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면서 궁금했던 것 하나는 나의 죄를 대신해 그리스도를 바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첫 번째로 짓는 중죄를 막기 위해 “예수님의 첫 번째 상처와 그 첫 번째 고통과 첫 번째 피흘리심을 바치나이다”라고 하던가,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기 위해 “올리브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마음으로 당하신 무서운 고통과 흘리신 그 하나하나의 핏방울을 모두 바치나이다”라는 식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치는 사제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요한의 수난 복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겉옷과 속옷을 나누어 가지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병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의 겉옷을 네 개로 쪼개어 나누어 갖고 속옷은 제비를 뽑았습니다. 사제의 속옷은 흰 아마포로 되어있었고 정결함을 상징했습니다.
저는 왜 우리가 직접 그리스도를 죽여 바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하는지 알렉산드로와 마리아 고레티의 예를 들어 다시 들며 설명해보고 싶습니다.
알렉산드로는 순결한 마리아 고레티를 칼로 수십 차례 찔러 죽였습니다. 그는 회개하지 못하고 감옥에서도 난동을 부렸습니다. 이때 마리아 고레티는 알렉산드로에게 나타나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주었습니다. 그제야 알렉산드로는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욕정이 순결한 그녀를 죽게 했음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마리아 고레티가 알렉산드로에게 준 백합이 오늘 복음에서는 로마 병사가 제비를 뽑아 갖게 된 예수님의 속옷과 같습니다.
속옷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제비는 운입니다. 운이 좋은 사람만 그리스도의 순결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이 흠이 없이 정결한 것이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워 그 죗값으로 그가 죽게 만들어야 그 순결한 이의 순결한 옷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정결하지 못한 여인을 죽인 것이라면 알렉산드로는 정결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에서 부정한 것을 없앴다고 오히려 자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나의 죄 때문에 나의 가장 사랑하고 순결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했다고 느낄 때 그 순결함을 내가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곧 내가 그리스도를 봉헌한다고 다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분으로부터 백합을 받는 이들만이 그분의 순결함을 입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이 내 죄 때문임을 끊임없이 묵상하는 이들에게 이 행운을 주십니다.
그렇다면 겉옷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바로 ‘지위’입니다. 옷은 지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네 개로 나누어 가졌다는 말은 이 지위를 원하는 이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은총의 풍부함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한 줄기였던 물이 나중엔 네 줄기로 나누어져 온 땅을 비옥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득 채울 수 있는 풍부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말합니다.
알렉산드로는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기에 순결한 마리아 고레티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나온 뒤 고레티 어머니를 찾아가 용서를 청하고 자신은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정원지기로 살며 보속하다가 죽습니다. 그때 채우지 못했던 욕정을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마리아 고레티가 가진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그녀를 찌름으로써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찌름으로써 하느님의 지위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가 찌른 이가 누구인지 보아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이교도에게 총을 맞은 적이 있습니다. 다행히 위험한 부위를 지나쳐서 살 수 있었고, 교황은 그 광신도를 찾아가 용서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는 분을 자신이 믿은 종교 때문에 그렇게 다치게 하였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그 종교에 계속 머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황이 지닌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지위 탓이 아니라고 여기면 교황이 주려는 겉옷을 입을 수 없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자신을 에사우라고 하였듯이, 내가 그리스도를 죽이는 이유는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겉옷을 입는 이유입니다.
짐 엘리엇(Jim Eliot, 1927-1956)은 미국의 침례교회 선교사입니다.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 및 세계 성서번역 선교회(GBT)선교사이며, 에콰도르 원주민을 선교하려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짐 엘리엇은 1927년 10월 8일 미국 오리건 주 포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이주한 아버지 프레드(Fred)와 스위스 출신의 어머니 클라라(Clara)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자란 짐 엘리엇은 1945년 가을 일리노이 주서부 시카고에 위치한 복음주의 기독교(evangelical christian) 학교인 휘튼 대학교(Wheaton College)에 진학하여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선교를 위해서 생애를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명문 휘튼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SIL 교육기간을 거쳐 1952년 봄 에콰도르에 도착한 짐 엘리엇은 와오다니(Waodani)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현지에서 언어와 풍습을 익히며 함께 선교활동을 할 친구들을 모았습니다.
몇 달 전부터 비행기를 이용하여 선교 방송과 함께 선물꾸러미를 투하해 접촉을 준비한 짐 엘리엇과 일행 4명(네이트 세인트,피트 플레밍,로저 유드리언,에드 맥컬리)은 1956년 1월 8일 와오다니(Waodani) 부족민들과 직접 접촉하려고 했으나, 백인에 대해 적대적인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전원 사망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들의 주머니에 권총이 그대로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을 향하여 발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아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엘리엇은 아우카족에게 제대로 복음도 전하지 못했고 성경책 한 권도 전해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그 열매는 매우 컸습니다.
짐 엘리엇의 아내 엘리자베스(Elisabeth)는 남편이 순교한 지 2년이 지난 1958년 가을에 그녀 역시 목숨을 걸고 남편이 이루지 못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어린 딸 밸러리(Valerie)와 함께 아우카 부족을 찾아갔습니다. 엘리자베스가 만나 본 아우카 부족은 남자 어른이 8명에 불과한 56명의 작은 부족이었습니다.
이 종족은 여자들은 죽이지 않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노력으로 아우카 부족이 복음화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을 살해한 3명이 현재 와오라니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이 되었습니다. 목사들을 죽인 이들이 목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를 죽이고 부모처럼 된 사람들입니다. 부모의 속옷과 겉옷을 입었습니다. 부모의 피를 통해 우리 동물적 본성이 정결하게 되었고 부모의 인간성을 물려받아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렇듯 나는 지금 누군가를 죽이고 그 누군가의 정결함과 정체성을 입어 지금의 내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누군가가 사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가진 자들이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 살려면 하느님 자녀를 죽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정결함과 지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그분에게 채찍질하고 멱을 따고 십자가에 못 박고 껍질을 벗기고 토막 내 불살라야 합니다. 이것이 제물을 바치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누구셨는지 알아가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의 정결함과 지위를 얻어 영원한 나라에서 살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돌아가신 이유고 이것이 내가 그분을 죽여 봉헌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망가진 나의 종은 새순처럼 돋아나리라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MiamumY7KE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받는 주님의 종 즉 메시아의 수난을 내다보는 넷째 노래에서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모습이 사람 같지 않게 망가지고, 그의 자태가 인간 같지 않게 망가져, 많은 이들이 그를 보고 질겁하였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으스러뜨리고자 하신 것은 주님의 뜻이었고, 그를 병고에 시달리게 하신 것도 주님의 뜻이었다. 그가 자신을 속죄 제물로 내놓았으니, 그를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리라. 의로운 나의 종은 많은 이들의 죄악을 짊어짐으로써 그들을 의롭게 하리라.”
이사야의 예언이 놀라운 까닭은 5백 년 후에 나타나실 메시아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적인 고난의 운명이었습니다. 더 놀라운 이유는 메시아가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 오시리라는 것과, 그러한 속죄를 대신 행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의롭게 해 주시리라는 것, 즉 대속자(代贖者)로 오시리라는 것을 꿰뚫어본 데 있습니다. 이 대속의 지향과 행위 그리고 결실로써 메시아께서 당신 사명을 완수하리라는 것이 이사야 예언의 꽃입니다.
이사야의 이 예언 이후 5백 년 후에 세례자 요한도 동시대의 인물 예수님께 대해서 같은 예언을 하였는데, 아직 그분의 공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의 일이었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 과연 예수님의 공생활 3년은 세상의 죄와 대결하려는 날카로운 지향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선포하는 노선으로 일관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교회가 전례로 기념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은 그러한 대속의 완성이었고 그 열매는 부활로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것까지도 내다보았습니다. 그래서, “망가진 나의 종은 새순처럼 돋아나리라.” 하고 예언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으려던 당시 세상의 죄악은 치열하고 집요한 바가 있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악을 전부 동원하여 사탄의 하수인들은 그분께 총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에 비해 그분의 편에 서 있던 제자들과 아나빔들의 힘은 너무나 미약했고 그들의 노력 또한 한참 모자랐습니다. 그런데 악인들의 치열하고 집요한 노력을 단 번에 쳐부수고, 의인들의 부족하기 짝이 없는 노력을 역시 단 번에 채운 하느님의 한 수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악인들은 그분을 죽임으로써 승리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더 이상 그들은 그분과 하느님의 뜻에 대하여 방해하고 저지할 수단을 송두리째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기지은을 발휘하여 믿는 이들을 붙드시고 늘리시고 맹활약하게 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아나빔들도 예수 부활 이후에는 180도로 달라졌습니다. 담대한 믿음, 두려움 없는 용기로 순교를 불사하는 각오로 새로운 세상을 살아갔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 앞에는 세상의 악을 조종하는 사탄의 계략이 여전히 작동합니다. 그래서 어둠도 짙게 깔려 있고, 또 사탄의 힘이 내면화된 욕심과 이기심이 우리들 마음 안에도 또아리 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그분께서 함께 해 주시는 현존의 힘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패배의 길을 따라 가지 아니하고 그분처럼 승리의 길을 따라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마치 죽지 않을 것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하느님 없이도, 돈이나 권세만 있으면 아무 부족함이나 불행을 겪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다고 여기며 함부로 힘을 휘두르는 자들도 제법 많습니다. 믿는 이들이나 착한 사람들이 종종 이 악인들과 죄인들에게 휘둘리며 흔들립니다. 돈도 힘도 없지만 자기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둘리는 이들이 속물로 전락하여 살아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웅변합니다. 십자가가 승리하였다고 선언합니다. 언제 어디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승리의 삶으로 살아가라고 재촉합니다. 일찍이 죽음을 이긴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와 부활로 당신을 믿는 이들을 의롭게 변화시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당신께 순종하는 우리의 대속자이시고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오늘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왔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게 하십시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은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돈 때문에 친구를 배반합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은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까지 위험하게 합니다. 명예는 지킬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은 희생과 나눔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정당화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신앙인에게 진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사다리를 타고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삶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을 치유해 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걱정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이를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절망에서 희망을 보았고, 슬픔에서 위로를 받았으며, 또 다른 세상을 보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달리 새로운 권위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죽었지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병약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천국의 성인과 성녀들이 걸어간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숨을 거두신 ‘성 금요일’ 예식을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 생의 한 가운데서 가장 부끄럽고, 가슴 아팠던 순간들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분은 친구를 배반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고 짓밟은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다른 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아내 모르게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지난날들의 기억 중에서 꼭 용서를 청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저 역시도 사제의 길을 걸으면서 말과 행동으로 많은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오늘 성금요일 전례를 함께 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이야기하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베드로를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를 생각합니다. 나는 또다시 그 옛날 베드로처럼 유다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아니 예수님을 팔아넘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오늘 주님의 수난과 십자가상의 죽음을 생각하며, 우리가 또 다시 주님께 모욕을 드리고, 조롱을 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십자나무 세상 구원이 여기에 달려 있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깊은 경배를 드립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일어나 갑시다.’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이 외로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구십 평생을 한결같이 수많은 청소년들과 교우들 사이에서, 존재 자체로 기쁨의 원천, 기쁨의 샘물, 기쁨의 사도로 살아가셨던 저희 수도회 노숭피 로베르토(1932~2022) 신부님께서 거룩한 성주간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노숭피 신부님께서는 한국전쟁 직후, 우리나라가 지구상 가장 가난했던 시절, 당시 가장 잘나가던 나라, 미국을 떠나 우리 땅으로 건너오셨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서 겪었던 고초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만, 한국을 제2의 고향으로 여기고 그렇게 사랑하며,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살아생전 “왜 이름이 노숭피냐?”는 질문을 많이 받으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한국의 숭늉과 미국의 커피가 합해진 것이라며, 유머 넘치게 설명해주곤 하셨습니다. 이름부터 시작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신 것입니다.
40여년전 노숭피 신부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광주에서 수련을 받던 시절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참으로 청빈하셨습니다. 웬만하면 걸어 다니시던지, 버스를 타고 다니셨습니다.
교우들이 좋은 옷을 사주면, 잘 챙겨놓았다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셨습니다. 당신은 늘 공동체 옷방에 널려있는 허름한 옷을 즐겨 입으셨습니다. 송광사로 소풍을 가면, 문화재 관람료 천원 아깝다며, 당신만 알고 계시는 개구멍으로 저희를 안내하곤 하셨습니다.
같이 살아보니 친화력이 정말 탁월하셨습니다. 그 누구라도 단 한 번만 만나면 십년지기 절친처럼 만들어버리셨습니다.
더 이상 찬란할 수 없는 눈부시게 환한 미소와 함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시고, 근황을 물어봐 주시고, 이것저것 신경 써주시니, 남녀노소 그 누구든 홀딱 반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던 수많은 사람이 신부님의 위로와 격려에 힘입어 힘겨운 세상을 기꺼이 견뎌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신부님을 영적 스승으로 모신 것은 너무나도 큰 영광이요 기쁨이었습니다. 철없던 젊은 수도자 시절,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겨워 다 때려치우고 싶었던 순간, 별것 아니라며, 다 지나간다며, 힘내라며 등 두드려 주시던 그 모습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그렇게 탁월한 기쁨 전도사였던 신부님께도 고통은 어김없이 찾아오더군요. 만년에 이르러 엄청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그 유쾌하고 친절한 모습, 기쁨으로 충만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신께 다가온 고통을 견뎌내고 이겨내느라 소진되고 쇠락한 신부님의 모습을 뵙기가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 한 가지! 신부님께서는 극심한 고통 한가운데서도 당신 특유의 환한 미소를 잃지 않으셨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당신께서 기쁨의 사도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맞이할 죽음도, 예수님의 죽음처럼, 노숭피 신부님의 죽음처럼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죽음이면 좋겠습니다.
우리 각자의 죽음이 주님의 확고한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죽음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있음을 확증하는 아름다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준비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죽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죽음을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여주는 것은, 가장 큰 증거요 사랑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헨리 나웬 신부)
「십자가는 나의 교과서」
-송영진신부-
십자가는 패배요, 절망의 상징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는 이들에게는 그 십자가가 희망과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써 십자가의 의미를 새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3)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친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차마 피할 수가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이 넘쳤고 의인을 위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을 위한 죽음이었기에 거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하고 당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시며 악의 고리를 끊어야만 하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감당하였습니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그것이 옳은 길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를 위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아야 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이 살아있는 책”(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어야 합니다. 한국의 두 번째 신부인 최 양업 신부님은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1,24).하고 콜로사이 공동체에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보다 강한 사랑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고 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고난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서 그분처럼 사랑을 증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일상에서 오는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도 합니다”(성 요한 비안네).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은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오늘 십자가 경배를 통하여 사랑의 십자가, 구원의 십자가를 삶의 교과서로 삼을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울러 “누구를 찾느냐?”(요한 18,4).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 좋겠습니다. 나의 욕심을 채워줄 무엇인가를 찾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찾고 그 안에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는지? 영혼에 필요한 분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되짚어 보다.』
-송영진신부-
신약성경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몇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기록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에 있는 ‘예수님의 수난기’는,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고 있고, 알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어 보기 위해서’ 기록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장에서 보고 듣는 대로 곧바로 기록한 이야기가 아니라,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그땐 그랬었지.” 라고 기록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당시에는,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금방
부활하실 것이라는 생각을 아예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절망감과 허무감, 그리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수님이 그렇게 돌아가신 것에 대한 슬픔과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예수님 부활 직후에 곧바로 복음서를 기록했다면,
부활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인지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예수님의 부활을 ‘당연한 진리’로 믿고 있는
상태에서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은 간단하게 기록하고,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수난과 죽음을 겪으셔야만 했는가?”를
묵상하면서, 수난기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예수님의 수난기를 읽을 때,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처럼 읽을 것이 아니라,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읽어야 하고,
수난기를 기록할 때의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의 심정을 묵상하면서
읽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수난을 회상할 때 어떤 심정이 되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부끄러워하면서 계속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라고 변명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을 버려두고 달아나서
예수님만 체포되고 자기들은 무사했던 것을 몹시 부끄러워했을 텐데,
그 일이 사실은 그들을 보호하려는 예수님의 의지가 작용한 일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8,8-9).”
만일에 제자들에게 ‘부활 신앙’이 있었다면,
즉 예수님께서 금방 부활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달아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말은, 그 뒤에 사도들의 ‘삶과 죽음’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에 ‘부활 신앙’으로 완벽하게 무장되어 있었던
사도들은 예수님 수난 때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용감하고 위대한 순교자들로 변화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있고, 우리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고,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들과 인생살이에서 만나는 고난과
시련들을 ‘부활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부활 신앙’이 있더라도 아픈 건 아픈 것이고, 슬픈 건 슬픈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은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의 인생은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죽음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현세의 삶’만 생각하다가 허무하게 끝나지만,
신앙인들은 죽음 너머에 있는 영원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다면,
내 신하들이 싸워 내가 유다인들에게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18,36).”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해도 꼭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갈 필요가
있는가? 좀 더 쉬운 길을 찾는 것이 현명하지 않은가?” 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 말은, 예수님에게 “어차피 부활할 거라면 처음부터 곧장 부활로 직행하지
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쳤는가?” 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로마 5,18).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일, 우리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죽음으로 끝나버렸다면(부활이 없다면),
그 일은 그냥 ‘허망한 일’이 되어버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로마 6,9).”
‘주님 수난 성금요일’의 수난 예식과 십자가 경배 예식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거행하는 예식입니다.
(십자가만을 경배하는 예식이 아니라, 십자가 너머에 있는 부활을
경배하는 예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에도 참여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거행하는 예식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 6,4-5).”
성금요일은 부활절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그런데 결코 생략할 수 없는 징검다리입니다.
지금의 우리 인생도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징검다리입니다.
사람에 따라 더 힘들거나 덜 힘든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목적지는 같고, 그곳에서 누리는 행복도 같습니다.
지금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가 남들보다 더 무겁고 힘든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불공평하게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도착해서 보면, 모든 것이 공평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
-한상우신부-
빠알간
제의를 입고
주님 수난
여정에
동참한다.
예수님 일생을
다시 만나는
십자가의
시간이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만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가
지나간 길에
사람의 길이
피어난다.
사람의 길은
사랑의 길이다.
십자가
아닌 사랑이
없다.
십자가의
수난없이
사랑은
완성될 수
없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지 않으시며
십자가와 함께
앞으로 나가신다.
최선의
사랑으로
우리를
되살리신다.
십자가는
우리 영혼을
다시 감싼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를
불러 세운다.
우리의 뜻을
내려놓을 때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진다.
십자가는
가짜가 아닌
진짜가
되게하는
삶이다.
하느님의
간절함을
십자가로
만난다.
십자가의
시간 위에
부활이
피어난다.
산다는 것은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마지막이
부활임을
믿는다.
삶의 마지막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봉헌하신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을
증언하시고
십자가는
예수님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보여주신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일치가
다 이루어졌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십자가이시다.
죽어야 사는
십자가의
은총이
피와 물처럼
생명을 다시
흐르게 한다.
십자가 안에
삶과 죽음의
모든 해답
부활이 있다.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말씀 나누기 - 2022년 4월 15일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에페소 평화기도 다락방 말씀 기도 (ofmkorea.org)
고 도미니코 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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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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