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6일 파스카 성야
파스카 성야의 모든 예식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거룩한 밤을 기념하여 교회 전례에서 가장 성대하게 거행한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셨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를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주신 날을 기념한다. 따라서 교회는 장엄한 전례로, 죽음을 이기시고 참된 승리와 해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한다.
파스카 성야 미사는 죄의 노예살이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어둠이 덮인 이 세상에 빛으로 오시어, 죄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기뻐하는 미사입니다. 이를 위하여 이 미사는 빛의 예식, 말씀 전례, 세례 전례, 성찬 전례로 구성됩니다.
빛의 예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신 그 밤을 기억하며,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하느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다짐을 표현하고자 사제가 축복한 파스카 초에서 불을 댕겨 교우들의 초에 옮깁니다.
말씀 전례에서는 어떻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구약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마침내 어떻게 당신 아드님을 통하여 신약의 백성과 인류에게 보편적 구원을 완성하셨는지 들려줍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서 일곱, 곧 창세기 2개, 탈출기 1개, 이사야서 2개, 바룩서 1개, 에제키엘서 1개의 독서를,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 둘, 곧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과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파스카 성야에 이처럼 길게 성경 말씀을 듣는 이유는 이 미사의 기본이 하느님 말씀의 봉독이며 경청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전례는 강론 뒤 이어지는데, 세례 받을 예비 신자가 있으면 이때 세례성사를 거행합니다. 그리고 성야 미사에 참석한 모든 교우는 세례 서약을 갱신합니다.
끝으로, 성찬 전례를 거행합니다. 모든 이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남에 다시 한번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성주간 전례 가운데 성삼일 전례, 그 가운데에서도 파스카 성야 미사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바탕이며 본질이고 정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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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1-12)
“Why do you seek the living one among the dea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2022년 부활 담화문/장 봉 훈 주교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콜로 3,1)
1.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을 축하드리며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부활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풀 수 없고 넘을 수 없는 궁극의 문제는 죽음입니다. 사람은 죽음으로 모든 희망이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인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보고 무척 당황했다고 했습니다(부활 밤 미사 복음, 루카 24,4 참조). 성경의 원문은 여인들의 이 놀라움과 당혹감을 “출구가 없다”(‘문이 없음’, 아포리아)고 표현했습니다. 여인들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는데, 자신들 앞에 벌어진 도저히 믿기지 않는 현실에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문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습니다. 한 발짝도 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는 새로운 문,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아니시면 불가능한 새로운 길입니다. 이것이 예수 부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의 실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희망은 본질적으로 우리를 위해 수난하시고 죽으시고 마침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서 옵니다. 이것이 해마다 온 교회의 신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구원의 공동체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그분의 부활을 경축하고 감사드리는 이유입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의 운명은 죽음으로 끝나고 무덤에서 멈추었지만, 이런 어둠과 절망의 역사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종결되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합체된 모든 신자는 썩지 않고 부패하지 않는 주님의 생명으로 변화될 희망을 안고 자신의 부활을 기다리며 이 세상을 순례하게 되었습니다(1코린 15,52-54 참조).
3. 세례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과 부활 이후의 세상이 완전히 다른 것처럼, 세례 받기 전과 세례 받은 후의 우리 인생도 완전히 다릅니다. 초대교회는 부활절을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예식 가운데 하나로서 믿는 이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부활절은 일 년에 한 번 가장 귀한 세례의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교회는 해마다 부활절을 지내며 세례성사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부활 신앙과 세례성사는 서로 떼어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세례 성사를 통해 세례를 받는 모든 이가 예수님의 죽음에 일치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다가 함께 부활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27항; 로마 6,3-4 참조). 이처럼 우리는 세례 성사를 통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갑니다. 우리는 세례 때 물에 세 번 잠김으로써 미리 죽음을 맛보지만 이는 죄에 대해서 우리 자신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에서 다시 나올 때 우리는 성령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존재로 다시 태어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39항, 1262항 참조). 초대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에게 부활을 상징하는 흰 옷을 입히고 아기처럼 우유와 꿀을 먹였습니다. 오늘도 해마다 부활성야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이전에 받은 세례 때의 서약을 갱신합니다. 마귀와 그 행실을 모두 끊어버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섬기며 살겠다는 세례 때의 서약을 다시 새롭게 함으로써 예수님과 함께 죽고 묻혀 그분의 부활에 참여하리라는 희망과 믿음을 다시 확인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254항 참조). 이처럼 세례를 받은 모든 신자는 부활에 대한 희망과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4. 그러면 세례 받은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부활 신앙은 먼 미래에 있을 부활, 나의 죽음 이후에 있는 부활을 생각하고 그날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은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이 자리에서 새로운 존재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으로 매일매일 거듭 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례를 받고 하느님 아버지의 영원한 집을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부활 낮 미사 제2독서, 콜로 3,1-3). 우리도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저 위에 있는 것”(3,1)을 추구해야 합니다. 일시적이고 현세적인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들을 바라보며 실천해야 합니다. 세례로 시작된 우리의 삶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는 사랑과 희생의 삶이 될 때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 부활에 대한 희망도 더욱 커져갈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살피고 성찰하면서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며 겸손하게 주님의 길을 따라 살도록 노력합시다. 가진 것이 없는 이와 불쌍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고 그들을 찾아가 돌봄으로써 가난하고 미소한 형제들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만나도록 합시다(마태 25,31-46 참조).
특별히 전쟁의 종식과 평화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으로 수많은 난민들과 희생자들이 생겨나고, 무고한 어린이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평화의 모후이신 성모님께 인류 가족의 미래를 맡겨드리고 전쟁과 폭력이 종식되어 고통이 멈춰지기를 하느님 아버지께 한 마음으로 기도해 주십시오. 또한 크나큰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는 일에 동참하여 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5.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지난 성 요셉 대축일에 저희 교구 사제 김 종강 시몬 신부님이 저희 교구 제 4대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셨습니다. 새로운 교구장님과 함께,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희망으로, 형제애로 가득한 공동체를 이루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평화를 지역 사회에 널리 전하는 활력 넘치는 교구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기도합니다.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2022년 4월 17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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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19 바이러스 확산으로 힘들어했을 때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버스를 탔는데 어느 역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버스가 고장 났나?’ 싶어서 고개를 내밀어 앞을 보니, 운전기사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립니다.
“마스크 쓰세요. 마스크 쓰지 않으면 버스에 탑승하실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어도 마스크를 쓰지 않은 승객은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험악한 모습을 지으면서 욕을 하며 말합니다.
“마스크 안 써! 나 코로나 걸리지 않았다고!”
분위기가 아주 안 좋았습니다. 운전기사는 마스크를 쓰라고 소리 지르고, 승객은 안 쓴다며 욕을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현장에 있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분위기를 조성해서 이 승객을 버스에서 내리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무력을 써서 강제로 버스에서 쫓아낼까요? 이것도 아니면 그냥 모른 척 가만히 있을까요?
사람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 여고생이 그 승객 앞으로 가서 무엇인가를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마스크가 없으신가 봐요. 이거 쓰세요.”
이 여고생이 내민 것은 마스크였습니다. 그런데 이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여고생의 손을 보았다고 합니다. 벌벌 떨면서 내미는 가냘픈 손을 말이지요. 얼마나 두려웠을까요? 혹시 이 험악한 아저씨가 자신에게 어떤 위협을 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고생은 두려운 상황이지만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솔직히 우리는 자기의 변화보다 남의 변화를 더 많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더 옳게 살 것을 생각하기보다, 남이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진짜 변화해야 할 것은 자기의 변화이고, 이 변화를 통해서 더욱 더 올바르게 살아야 할 ‘나’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토요일을 보냅니다. 어제 주님 수난 성금요일을 지내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죽음 뒤에 곧바로 부활이라는 영광을 보여주지 않고, 예수님 부재의 빈 공간을 마련하심으로 인해 우리가 더 깊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도록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맛있는 밥을 먹기 위해서 뜸을 들이는 것처럼, 부활의 큰 기쁨을 얻기 위해 뜸 들이는 시간이 바로 오늘 성토요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 자신의 변화를 생각하면서, 특히 사랑을 실천하는 자신을 떠올리면서 주님의 부활을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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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부활하셨도다, 알렐루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8cj3jPFoezU
1.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 부활은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께서 당신 자리로 되돌아가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부활을 깨달은 제자들은 십자가 죽음 이전에 그분이 알려주신 가르침이 모조리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임도 뒤늦게 깨닫게 되었으며, 그분이 베푸신 기적들도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신 표징이었음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실로 예수 부활이 아니라면, 제자들의 믿음이 생겨날 수도 없었고, 사도가 된 제자들의 믿음이 없었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도 세워질 수 없었으며, 우리의 믿음도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예고하신 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2. 이렇듯 믿음을 굳게 지니게 된 제자들에게는 그 믿음을 전하고자 하는 불타는 의지가 생겨났고,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자신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발현 체험이 숨어 있었습니다. 발현 체험이 부활 신앙의 비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모든 이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 수난과 죽음 이전에 당신을 알아보고 믿었던 제자들과 소수의 아나빔들에게만 나타나셨습니다. 박해한 자들과 예수님을 멀리한 자들에게는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이 엄연한 사실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그분의 부르심이 먼저 있어야 하지만 그 부르심을 들은 인간의 응답과 노력도 필수적임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부르심과 응답이 오고 간 후에라야 발현 체험이 가능해지고 그 체험 위에서 부활 신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 신앙으로 거듭 태어난 사도들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맞부딛친 현실은 유다교와 로마 제국의 박해였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유다인이었고 예수님께서 율법적 유다교에 의해 박해를 받아 돌아가셨기에 자신들은 여전히 이스라엘이기는 하지만 ‘참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새 이스라엘’이라고는 여기지 않았고 따라서 ‘옛 이스라엘’에 속했던 유다인들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3.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도, 유다인들을 향한 복음선포 활동도 이런 과정을 거쳐 이루어질 수 있었고, 이는 매우 놀라운 선교 성과를 가져 와서 베드로 사도의 설교를 듣고 한 번에 삼천 명 가량이 세례 받은 적도 있었습니다(사도 2,41).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제자 시절의 비겁한 처신과 얄팍한 믿음 대신에 용감한 처신과 담대한 믿음으로 여전히 박해를 가하려 하던 유다교 최고의회 앞에서 당당하게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죽을 각오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처신이었고, 더 근본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내주신 성령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처신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부활하신 녜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울도 돌려세워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삼으신 덕분에, 그리스도 신앙과 예수 부활 믿음은 당시 로마제국이 통치하던 지중해 세계 전체로 퍼져 나갔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유다교를 고집하던 해외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은 참 이스라엘로 자부하던 그리스도인들을 시기 질투하였고, 로마 당국에 고발하기도 하였고 이 옛 이스라엘에 속한 유다인들의 고발이 로마 박해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에서 다신교 풍습을 물려받았는데, 이들 다신교의 신들은 사람으로서 특출난 재능을 발휘하여 죽어서 신이 되었다고 여긴 존재들이었기에 황제도 선정을 베풀면 죽은 후에 신이 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도미티아누스 황제부터는 이미 살아있는 시점에서 신으로 자처하는 황제숭배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제국이 된 로마는 이민족들과 벌인 숱한 정복전쟁을 통해 종교와 사상과 문화가 제각기 다른 민족들로 이루어진 대제국을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하여 도처에 황제의 흉상을 세워 놓고 이 상에 경배하도록 하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은 한낱 사람에 불과한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라는 우상숭배 정책에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4. 눈에 보이는 자연과 사물을 인간 이성으로 추리하고 분석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합리주의적 가치관이 그리스적 사유방식입니다. 이를 물려받아 실용적으로 적용해서 지중해 세계를 한 제국으로 통합시켜 다스리려 했던 로마인들이 보기에 한낱 사람에 불과한 나자렛 예수가 정치적 반란을 일으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실을 가지고, 그가 부활했다고 입증될 수도 없는 허무맹랑한 미신을 퍼뜨리고 심지어 그 나자렛 예수가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로마 박해 250년 동안 사도들과 신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희생되었으며 치명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신자들은 더욱 치열하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묵상하며 숙고에 숙고를 거듭하였고,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자기비허의 신앙을 깨달았으며, 사기지은을 발휘하시어 성령으로 이끄시는 예수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기에, 그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신자들은 늘어났고 공동체들은 더욱 널리 퍼졌습니다. 이에 대한 산물이 네 복음서요, 사도행전이며, 사도들의 편지들이고, 묵시록 등 신약성경입니다.
5. 그래서 신구약성경의 핵심만을 발췌하여 말씀으로 선포하는 부활 성야 미사는 일년 중 교회가 거행하는 미사 중에서 가장 장엄하고 성대한 전례입니다. 창세기가 진술하는 창조 신앙에서부터, 탈출기가 증언하는 해방 신앙을 거쳐서, 여러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 대망 사상에 이르기까지 무려 아홉 꼭지의 성경 말씀이 봉독되었습니다. 그만큼 인류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선포함으로써 참된 하느님 신앙을 받아들이기까지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러야 했고, 대단히 많은 구도자들이 일생 동안 치열하게 사색을 거듭해 왔으며, 수많은 신앙인들이 이 귀하고 어렵게 얻은 진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바쳐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편하고 기쁘게 예수 부활을 축하하며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네 육신 생명이 어머니 뱃속에 생겨날 때 단세포 생명체 시절부터 인류가 진화해 온 자취를 압축해서 되풀이한다고 하듯이, 우리네 영혼의 생명을 드러내는 부활 신앙도 이 부활 성야 미사를 기점으로 되풀이합니다. 예수님을 생전에 잘 알고 그분의 가르침까지도 수도 없이 들었으면서도 좀처럼 믿음을 간직하기 어려웠던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가톨릭교회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세례를 받고 숱하게 성경 말씀을 들었고 성찬 전례에 참여하여 성체를 받아 모셨으면서도 기계적이고 자동화된 습관이 되어 버린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신앙이 미숙한 채 머물러 있게 됩니다.
6.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발현 체험을 시켜주신 덕분에 제자들은 믿음을 성숙시킬 수 있었고, 성령까지 받은 다음에는 사도가 되어 용감하게 신앙을 전하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남겨주신 발현의 양식은 다섯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로,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십니다. 말씀에서 주님을 알아보는 뜨거운 체험이 믿는 이들에게 첫 번째 부활 신앙의 기운을 줍니다.
두 번째로, 주님께서는 성찬으로 오십니다. 당신의 몸과 피를 우리 영혼 생명을 먹여 살리는 음식으로 내어주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도 당신처럼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자기비허의 영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은총을 받기를 촉구하십니다.
세 번째로 서로의 발을 씻어주듯이 섬기고 특히 되갚을 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그렇게 섬기는 삶이 세속적인 눈으로는 어리석어 보일지언정 그것이야말로 최후 심판에서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귀한 기준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네 번째로, 모든 세례 받은 신자에게는 성령께서 머물러 계시므로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할 때 비로소 살아있는 교회가 죽음도 물리치지 못하는 천국의 열쇠가 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로, 그리하여 믿는 이들이 세상에 나가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도직을 행할 때 서로를 존중해서 공동으로 합의하는 인격적이면서도 민주적인 구조를 입증할 때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빛이 되리라고 보증하셨습니다. 이 다섯 가지 현존 양식이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발현 체험의 장입니다.
7. 매사에 합리적이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물려받은 로마인들이 지중해 세계의 다민족을 정복하여 다스리며 매사에 실용적이고자 했으면서도, 유독 그리스도 신자들에 대해서만은 굶주린 맹수의 먹잇감으로 던져주는 등 야만적으로 죽이며 박해를 했던 데에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났다는 부활 신앙에 대한 몰이해와 조소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도 양상이 겉으로 달라지기는 했을 뿐 이런 몰이해와 조소는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시하여 알려주신 하느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풍조와 행태가 모두 다 여기에 해당됩니다. 비인간적인 물신풍조와 자본숭배사상이 그러하고, 심지어 반인간적인 생명경시풍조와 대규모 난민을 발생시키는 국제분쟁과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전쟁 행위 등이 또한 그러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는 이렇게 알아듣기 어려웠어도 하느님께서 베푸신 자비와 사랑을 겸손되이 실천하는 믿는 이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전 세계에 그리스도 신앙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미 부활을 살아간 이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에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하느님께서 되고 싶으셨던 존재인 인간이,
십자가에 달려 못 박힐지언정 그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물러서지 않으며 취소될 수도 없는 존재인 인간이, 그리하여 육신 생명 그 이상의 귀함을 갖춘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 존엄한 존재라는 진리도 사회적이고 법적으로 보장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진보가 예수 부활 신앙의 조각들입니다. 발현 체험이 부활 신앙의 비결이라는 신앙의 공리는 제자들에게나 오늘날의 제자들인 우리에게나 여전히 유효한 진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찾아오시는 현존양식에 충실하시기를 부탁드리면서, 그리하여 이룩될 우리의 부활과 함께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조재형신부-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기뻐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을 열고 3일 만에 다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도 절망과 두려움으로 닫힌 문을 열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면 좋겠습니다. 부활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나감’입니다. 그 지나감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체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셨을 때입니다.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에 있는 모든 맏배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양의 피를 바르도록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재앙은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다른 모든 집의 맏배가 죽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죽음이 그냥 지나갔습니다. 마치 백신을 맞은 사람들은 코로나가 지나가는 것처럼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재난이 지나갔습니다. 10번째 재앙이 지나간 뒤로 파라오는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나감의 두 번째 체험은 오늘 3번째 독서에서 들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것입니다. 10번째 재앙을 겪었던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 주었지만 다시금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뒤에는 이집트 군사들의 전차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홍해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런 절체절명의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바다에 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눈 앞에서 바다가 갈라지는 모습을 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합니다. 거칠고 황량한 죽음의 바다였습니다. 바로 그 바다가 갈라지면서 생명의 길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넜던 체험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시고,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을 기억하며 ‘과월절(파스카)’을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파스카 만찬을 나누면서 빵과 포도주를 들고 "이것이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시며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유다인 파스카 축제는 보통 그리스도인의 부활절과 겹치는데 이는 예수께서 파스카의 희생양이 되신 수난 사건이 바로 파스카 축제 기간에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체험했던 파스카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1년 중 가장 중요한 전례인 성주간의 3일인 성목요일, 성금요일, 성토요일을 파스카 성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아담이 지은 원죄로 우리에게는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들 또한 악의 유혹을 받아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결과 우리들 또한 죽음이라는 바다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바다를 건넌 사건입니다. 악의 유혹을 받아 죄를 지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우리들 또한 죽음의 바다를 건널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2022년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건너야 하는 ‘파스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내가 건너야 하는 파스카를 모른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월절을 축제로 지내듯이, 부활절은 1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축제가 될 뿐입니다. 근심과 두려움의 바다를 건너서 희망과 용기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교만과 욕망의 바다를 건너서 겸손과 온유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게으름과 나태의 바다를 건너서 성실과 충실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불신과 의혹의 바다를 건너서 믿음과 사랑의 땅으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파스카는 오늘을 사는 나의 파스카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나는 또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가 나의 규정들을 따르고 나의 법규들을 준수하여 지키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빈 무덤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강력한 표지입니다!
-양승국신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잠들어있는 무덤에 대한 예우는 각별합니다. 한식이나 추석 때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무덤으로 향합니다.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았을까? 잡목이나 잡초가 무성한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선친의 무덤에 오랜만에 성묘를 갔는데, 묘소가 파헤쳐지고, 관뚜껑이 열려있고, 시신이 사라졌다면, 얼마나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겠습니까? 자녀된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고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여제자들에게 그런 기상천외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참혹하게 운명하시고 난 후, 이제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 한 가지는 오로지 예수님의 시신이었습니다.
서둘러 치른 매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들에게 참사랑을 일깨워주신 분, 새 삶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위해 남아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골몰했습니다.
여인들은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서둘러 최고급 수의와 향유를 을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경황없었던 어제였기에 다시금 차분하고 꼼꼼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신새벽에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무덤에 다다르기 전 세 여인에게는 고민거리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통상적인 유다인들의 무덤은 동굴 형에다가 개폐형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흙을 파서 관을 묻고 다시 흙을 덮는 봉분형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무덤이었는데, 이 무덤은 한 마디로 동굴 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동굴 방 안쪽 바닥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았습니다. 입구를 막은 돌을 옆으로 굴려야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여인들로서는 힘에 벅찬 일이었기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 걱정거리는 덜었습니다. 이미 무덤 문이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다른 걱정이 엄습해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여인들이 서둘러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혼비백산했습니다.
갑자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었겠지요. 그들은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복음 24장 5~7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극진하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여인들의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은 머지않아 주님 부활 체험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예수님 빈 무덤 사건,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앙 안에서 큰 획은 긋는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그냥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의 시신으로 그냥 무덤 안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창시자의 무덤에 대한 의미 부여가 대단합니다. 작은 조각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회당이나 법당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창시자 예수님의 무덤이 이제 더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빌리셨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소유의 무덤은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참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빈 무덤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부활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의 세력조차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빈 무덤은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강력한 표지입니다!
-이영근신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했던 사람이 잠들어있는 무덤에 대한 예우는 각별합니다. 한식이나 추석 때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무덤으로 향합니다. 혹시라도 훼손되지 않았을까? 잡목이나 잡초가 무성한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합니다.
그런데 혹시라도 선친의 무덤에 오랜만에 성묘를 갔는데, 묘소가 파헤쳐지고, 관뚜껑이 열려있고, 시신이 사라졌다면, 얼마나 놀라고 당혹스러워하겠습니까? 자녀된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하고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간 여제자들에게 그런 기상천외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토록 참혹하게 운명하시고 난 후, 이제 그녀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생각 한 가지는 오로지 예수님의 시신이었습니다.
서둘러 치른 매장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자신들에게 참사랑을 일깨워주신 분, 새 삶을 선물로 주신 예수님을 위해 남아있는 일,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골몰했습니다.
여인들은 있는 돈을 탈탈 털어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서둘러 최고급 수의와 향유를 을 것입니다. 너무나 황당하고 경황없었던 어제였기에 다시금 차분하고 꼼꼼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신새벽에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무덤에 다다르기 전 세 여인에게는 고민거리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통상적인 유다인들의 무덤은 동굴 형에다가 개폐형이었습니다. 우리처럼 흙을 파서 관을 묻고 다시 흙을 덮는 봉분형과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해둔 무덤이었는데, 이 무덤은 한 마디로 동굴 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은 동굴 방 안쪽 바닥에 안치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입구는 큰 돌을 굴려 막았습니다. 입구를 막은 돌을 옆으로 굴려야만 무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여인들로서는 힘에 벅찬 일이었기에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에 도착했을 때 그 걱정거리는 덜었습니다. 이미 무덤 문이 열려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즉시 다른 걱정이 엄습해왔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가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여인들이 서둘러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혼비백산했습니다.
갑자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이었겠지요. 그들은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루카 복음 24장 5~7절)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성이 극진하면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움직인다는 말입니다. 여인들의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주님을 향한 극진한 사랑은 머지않아 주님 부활 체험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예수님 빈 무덤 사건,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 역사와 신앙 안에서 큰 획은 긋는 중요한 대사건이었습니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그냥 일반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의 시신으로 그냥 무덤 안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무의미합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창시자의 무덤에 대한 의미 부여가 대단합니다. 작은 조각의 유해를 모시고 있는 회당이나 법당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는 창시자 예수님의 무덤이 이제 더이상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잠시 빌리셨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 소유의 무덤은 더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바로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바로 예수님의 진정한 부활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만왕의 왕임을 드러내는 확증입니다. 빈 무덤은 참으로 그분께서 부활하셨음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빈 무덤 앞에서 슬퍼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빈 무덤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부활을 만천하에 알리는 부활의 사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죽음을 이겨냈음을, 예수님의 겸손과 순명이 죽음의 세력조차 물리쳤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입니다.
『 부 활 』
-송영진신부-
1) ‘부활’은 옛날의 일이 아니라 현재의 일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옛날에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살아 계시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부활 대축일’은 옛날에 일어난 일을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금’ 내가 만나는 날입니다.
‘신앙’이란 원래 항상 현재의 일입니다.
부활 신앙은 언제나 항상 현재의 신앙입니다.
2) ‘부활’은 이론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나의 부활도 믿고 희망하면서,
부활 후의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입니다.
만일에 삶이 없다면, 부활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도
부활을 말로 설명하는 것은 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만 있을 뿐입니다.
그 사도들과 신자들의 삶과 죽음이 예수님 부활의 증거입니다.
또 부활은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학문이 아니라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3) ‘부활 신앙’은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혼자서 만났는데,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사도들에게 보내셨고,
당신을 만난 일을 그들에게 알리라고 지시하셨습니다(요한 20,17-18).
<하느님 나라는 혼자서 사는 나라가 아니라 공동체가 사는 나라입니다.
만일에 다른 사람은 하나도 없는 곳에서
혼자서만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산다면?
그곳은 영원한 지옥일 뿐입니다.>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루카 24,1-9).”
여기서 ‘새벽’은 여자들의 신앙 상태와 심리 상태를 상징합니다.
‘새벽’은 아직 어두운 때이고, 동시에 서서히 어둠이 물러나는 때입니다.
(‘어둠’은 죽음과 절망을 뜻하고, ‘빛’은 생명과 희망을 뜻합니다.)
복음 말씀에 나오는 여자들은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지만,
수난 전부터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존경한 사람들이었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었고 그 가르침대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혼에 이미 ‘부활 신앙의 씨’가 심어져 있었고,
마음속에는 이미 ‘희망의 씨’가 심어져 있었습니다.
(물론 여자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부활 신앙 없이 사는 사람들은, 죽음은 인생의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죽음 너머에 있는 생명에 대한 믿음과 희망 없이 사는 사람들,
그래서 어둠 속에서 살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돌’도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인생은
출구 없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것과 같은 인생입니다.
천사들이 나타나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려 주었다는 것은,
‘부활 신앙’은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무슨 학문을 연구하듯이 연구해서 얻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믿는 것은, 또는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은총으로 주어진 계시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이야기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거나
천사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로 보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만일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수천, 수만 군중 앞에 나타나셨다면?
그랬더라도 안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안 믿었을 것이고,
믿는 사람들만 믿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신 것은,
그들이 믿을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라는 말은,
“예수님은 ‘지금 너희 가운데에서’ 살아 계신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나의 삶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도 ‘살아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예수님의 생명력을 가득히 받는
신앙생활을 해야 온전히 살아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 부활 전에는, 부활에 관한 가르침들은 그냥 이론이었는데,
분명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는 순간부터
‘부활은 신앙인들의 삶’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신앙은 공부가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여자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사도들과 모든 이에게 알린 것은,
부활 신앙은 공동체의 신앙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활 신앙을 증언하고 고백하는 것은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신앙은 혼자서 독점하면 안 되는 것,
언제나 어디서나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삶’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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