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그 두 제자는
그분이 예수시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루가 24,13-35)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and gave it to them.
With that their eyes were opened and they recognized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자선을 청하는 불구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 준다(제1독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본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직업은 무엇일까요? 그의 이름을 들으면 곧바로 그의 작품들이 떠올려질 것입니다.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살바토르 문디 등등…. 이 유명한 작품들을 통해 그의 직업을 화가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생존해 있을 때, 본업은 음악가였다고 합니다. 30세에 밀라노의 스포르차 궁정에 초빙되어 노래와 연주를 했었다고 하더군요. 당시 문서에는 그에 대한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가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회화에도 비범한 재능이 있다.”
이렇게 그의 본업은 음악가이고, 부업은 미술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음악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미술 작품이 널리 알려졌지요. 이런 이유로 미술가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음악가입니다.
이렇게 지금 자신이 잘하는 것으로 먼 후대에 알려지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모습으로 나를 쓰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점을 기억한다면 어떤 순간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한번 희망을 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보다 절망을,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좌절해서 주저앉고 맙니다. 하느님의 힘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서 약간은 실의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니, 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을 만난 모든 신자가 예수님의 참모습을 알아보기까지는 그들의 믿음이 굳어지는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아본 순간이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였습니다. 바로 미사 중에 이루어지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 우리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알아보는 순간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과거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리아 막달레나도,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역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죄 많은 우리는 과연 어떨까요? 그래서 더 열심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지는 시간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의 섭리에 맡길 수 있는 우리의 겸손이 필요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에 맞춰서 움직일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 겸손으로 믿음이 다져지면서 어느 순간 예수님을 알아보게 될 것입니다.

죽으려고 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QpyBpSMqwLk
엠마오 마을의 발현 체험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bqJ2Yk29ypo
오늘 복음은 주간 첫날에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첫 날로서, 새벽녘에는 무덤을 찾았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에게 나타나시더니 한낮에는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뽑으신 열두 제자단에 들지는 못했어도 그분의 복음을 듣고 하느님 나라가 다가오기를 열렬히 갈망하며 그분을 따르던 토박이 지지자들로서 이 열두 제자가 이스라엘 방방곡곡으로 파견되었을 때 모은 예순 명을 합해 일흔두 명으로까지 확대되었던 제자단에는 들어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너무도 무기력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크게 실망해서 제자로서 살기를 포기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낯선 나그네 차림을 하고 다가오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루카 24,16). 이들도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생전에 미리 말씀하셨던 바, 수난과 부활 예고를 들었을 텐데도 부활의 영광만을 기대하고는 수난을 거쳐야 한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낯선 나그네로부터 구약성경 전체에서 메시아의 수난기약에 관한 예언을 다시 생생하게 들으니까 비로소 어이없이 느껴졌던 십자가의 예수 죽음이 비로소 이해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허투루 쓰여진 것이 아니고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이치를 그제서야 깨달은 것입니다. 수난 없이 부활 없다는 이치는 수난을 거치는 한 반드시 부활한다는 이치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진리이신 하느님 말씀이었습니다. 진리는 믿는 이들의 마음을 뜨겁게 합니다.
그래서 헤어지기 아쉬워서 날도 저물었길래 들른 엠마오의 집에서 두 제자는 낯선 나그네와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나그네가 빵을 떼어 나누어주면서 “받아먹어라, 이것이 너희의 죄 사함을 위하여 내어준 내 몸이었느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제서야 그 두 제자는 그 나그네가 예수님이심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수난은 메시아가 거쳐야 할 수난이었고, 자신들 앞에 나타난 그 나그네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아보는 눈도 뜨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수난과 부활로 당신 생애를 완성하신 예수님처럼, 메시아를 따르려는 제자들도 빵이 떼어 나누어지듯이 진리를 위한 수난을 각오해야 하고, 그래서 그 수난을 거치면 반드시 메시아 백성으로 부활하리라는 것까지도 깨닫는 눈을 떴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낯선 나그네로 나타나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예루살렘 다락방에 숨어 있던 열두 제자들에게로 가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곧바로 그리로 달려간 이 두 제자들은 방금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발현 소식을 전해들었고(루카 24,34), 그들도 자신들이 겪은 발현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루카 24,35).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기지은을 발휘하시어 동산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그리고 또 예루살렘 다락방에서 동분서주하시며 나타나신 이 일들은 여인들이나 두 제자, 그리고 열한 제자 모두를 사도로서 업그레이드시키기 위한 예수님의 활약이었습니다. 제자 단계에서 사도 단계로 진급하자면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의 이치를 깨달아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예수님께 실현되었음을 믿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그들 자신도 예수님처럼 진리를 위한 수난과 헌신으로 살아감으로써 메시아 백성으로 부활해야 한다는 것을 다짐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치신 자기봉헌의 제사를 제자들도 바치는 것이 오늘날 미사요 성찬 전례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한 뜻으로 예수님과 일치하게 되는 것이 예수 재림입니다.
오늘날 미사에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대로 빵과 포도주를 축성한 사제는 거룩하게 변화된 성체와 성혈을 나누어주기 전에 그분의 재림을 청하는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 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그리고 영성체 예식에서 성체를 보여주면서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줍니다: “그리스도의 몸!”
이 말은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메시아 백성,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으로서 그분과 일치하는 몸이 되시겠습니까 하고 물어보며 다짐을 받으려는 쐐기말입니다. 과연 그 두 제자는 성령 강림 때 모여 있던 백스무 명 사도단의 일원이 되어 사도로서 세상에 나아갔고, 열한 제자 중의 베드로와 요한 역시 기적을 베풀 수 있는 믿음과 기운을 받아서 태생 불구자를 일으켜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일어나서 걸었고 뛰기도 했으며, 하느님을 찬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눈이 가리어진 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들으면서도 수난과 부활의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또 다행히도 그 수난과 부활이 예수님께 실현되었음을 믿는 경우에 자신들도 그 길을 따라가야 함을 모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영성체할 때마다 “아멘!”으로 대답해 놓고서도 그렇습니다.
-조재형신부-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보기도 하고, 사진으로 보기도 합니다. 나의 행동과 삶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때로 주관적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과 판단을 통해서 나의 행동과 삶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수님께 전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하였고, 죽은 세례자 요한이 살아온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을 보고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과테말라에서 선교하는 후배 신부님이 휴가차 뉴욕에 왔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가서 같이 식당으로 갔습니다. 점심을 먹고 계산을 하는데 옆 좌석에 있던 자매님이 저를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신부님이 계산하는 것을 처음 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교우들의 눈에 사제가 계산하는 것을 본 적이 거의 없었나 봅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계산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모임의 자리에 먼저 앉은 적이 많았지만 제가 먼저 계산한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계산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 보다는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은 매주 친교를 합니다. 샌드위치, 김밥, 베이글, 떡, 빵과 같은 것을 마련합니다. 지난주에는 김밥 만드는 교우 집엘 가보았습니다. 10명 정도의 교우들이 열심히 김밥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김밥을 만드는 분, 만든 김밥을 썰어 용기에 담든 분, 포장지에 젓가락을 붙이는 분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숙련된 솜씨로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저도 김밥 한 줄을 말아보았습니다. 생각보다 쉽지 않았습니다. 김밥을 맛있게 먹었지만, 제가 만들어 본 적이 별로 없었습니다. 김밥 한 줄에도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사제는 복음 3덕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3덕은 정결, 가난, 순명입니다. 독신은 단순히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있는 것입니다. 혼사 살면서 권위적이고 교만하며 자신 밖에 모른다면 그것은 참된 독신이 아닙니다. 가정을 가졌어도 하느님이 삶의 중심에 있다면 정결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혼자 사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가난은 영혼을 맑게 만드는 ‘향기’와 같습니다. 교회가 부유해지면, 사제의 삶이 부유해지면 그리스도의 향기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제는 병든 이, 가난한 이, 외로운 이, 장애인, 독거노인, 냉담자를 우선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모든 것을 가지셨지만 스스로 가난함을 선택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순명은 좋은 것만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도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셨듯이, 고난의 잔을 마셨듯이 나쁜 것도 괴로운 것도 주님을 위해서 따르는 것이 참된 순명입니다. ‘신자들 때문에, 주교님 때문에, 시간을 잘못 만나서, 친구들 때문에’라며 핑계를 대는 것은 참된 순명이 아닙니다. 사제는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해야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가는 길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에게 엠마오는 더 이상 의미도 가치도 없어졌습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예수님께서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곳이 언제 어디서이든지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본당 신부로 있어도, 학교 교수 신부로 있어도, 교구청에 있어도, 병원의 원목으로 있어도, 교포사목을 해도, 저같이 신문사에 있어도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엠마오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살아간다면 그곳은 바로 엠마오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하느님 나라도 어쩌면 그와 같을 것입니다. 돈으로, 명예로, 권력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내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삶을 산다면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친절하고 자상한 동반의 달인이신 예수님!
-양승국신부-
엠마오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친절하고 자상한 ‘동반의 달인’이십니다. 아직 눈을 못 뜬 미성숙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배려를 한번 보십시오.
스승 부재 상태에서 큰 상실감과 혼란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먼저 예수님께서 다가서십니다. 무얼 그리 고민하고 있는지 먼저 물어봐 주십니다. 무지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다그치지 않으시고 하나하나 자상하게 설명해주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들과 함께 묵으십니다. 식탁에 앉으셔서는 그들에게 손수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자상함과 친절이 지나칠 정도여서 제자들이 송구스러울 정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었던 짧은 여행길이 얼마나 감미로웠던지, 제자들은 마치 천국의 오솔길을 걷는 듯 했습니다. 그 만남이 마치 짧은 봄날처럼 너무나 아쉬웠던 그들이었기에 예수님께 간절히 청했던 것입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이런 예수님의 친절과 지극정성과 배려는 큰 감동을 선사합니다. 그 감동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그들의 눈을 뜨게 만들고, 그들의 눈을 열어주며, 마침내 예수님을 알아 뵙게 만듭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 뵌 그들은 그 감동이 얼마나 컸던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상처 입은 영혼들이 너무 많은 이 세상입니다. 외로움에 절망감에 홀로 울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요즘입니다. 예수님을 닮은 자상한 영적 동반자가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다그치지 않고, 너무 앞서가지도 않고, 자상하게 일러주면서, 일으켜 세우면서, 다시금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갈 힘을 줄 동반자, 많은 새들이 거처로 삼는 넉넉하고 큰 나무 같은 동반자가 되어 주어야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동반자로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오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이영근신부-
아마 우리 모두는 실망과 절망에 빠져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가던 길을 중단해버릴 만큼 희망이 꺾인 적도 있을 것입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버릴 만큼 믿었던 바가 의혹과 불신으로 바뀌어버린 적도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과 예수님께서 동행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루카 24,16)
그들은 자신들의 희망과 믿음이 무너졌고 절망하고 슬픔에 빠져, 예수님께서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그들의 희망과 믿음이 변화되고, 깊어지고, 정화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먼저 말을 건네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루카 24,17)
“무슨 일이냐?”
(루카 24,19)
그들은 먼저 그분에게서 일어난 일이 무슨 일인지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사실 실망과 절망에 빠질 때가 가장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기회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실망하고 절망에 빠지고 슬퍼질 때, 바로 그때가 우리의 희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우리의 믿음을 내려놓아야 할 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때가 우리의 뜻과 생각이 변해야 할 때입니다.
바로 이 때가 우리의 눈이 가려져 있음을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요한 20,25)
그렇습니다.
알아야 할 바를 제대로 알아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설명해주시고,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주십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루카 24,31)
여기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리는 세 과정을 봅니다.
곧 우리의 생각이 열리게 되고(open mind), 가슴이 열리게 되고(open heart), 우리의 뜻이 바뀌게 되는(open will) 과정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개방과 말씀의 수용과 말씀으로 말미암은 변형입니다.
말씀을 듣고서 깨달아 알아듣고, 알아들은 바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믿으며, 믿는 바를 그분의 뜻에 따라 실현함으로써 변화되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외적인 눈이 열리고, 속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리고, 마침내 그분을 뵙게 되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6)
주님!
저는 고통을 없애주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고통을 함께 지라 하십니다.
저는 평화롭기를 바라지만, 당신은 평화를 위해 일하라고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부패를 비난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이 되라 하십니다.
저는 세상의 어둠을 탓하지만, 당신은 세상의 빛이 되어 밝히라 하십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빛 안에서 걷게 하소서.
아멘.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반영억신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일을 치르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이제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낌새를 알고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 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는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성경 풀이를 듣고 마음이 타올랐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재빨리 움직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는 마음’, ‘듣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1열왕3,9)을 청한 이유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특별히 말씀과 성체를 통하여 예수님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께서 눈을 열어 주셔서 뜨거운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다.』
-송영진신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일은,
당신이 특별히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그 두 제자는 누구였을까?
18절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의 이름은 ‘클레오파스’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5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와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와 마리아 막달레나가
서 있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클로파스’와 ‘클레오파스’가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클레오파스(클로파스)’와 그의 아내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 두 사람을 선택하셨을까?
복음서에는 아무런 설명이 없는데,
그 두 사람이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떻든 그 두 제자는 ‘예수님 부활’의 중요한 증인들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루카 24,13-16).”
‘엠마오’는 그 두 제자의 집이 있는 마을입니다(29절).
두 제자는 과월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축제가 끝나자 집으로 되돌아가는 중입니다.
그들은 걸으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했고,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옆에서 함께 걸으시면서
한동안 그들의 대화를 들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두 사람은 낯선 나그네가 옆에서 함께 걸으면서 대화를 듣고 있는데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 침통한 심정에 빠져 있어서 그랬던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일과 같습니다(요한 20,14).
‘눈이 가리어’ 라는 말은 ‘영적으로’ 눈이 가려졌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아 있는 분’으로서 바로 옆에서 함께 걸으신다는 것은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고, 예수님을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루카 24,19ㄴ-21).”
여기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 라는 말은,
“행동과 말씀으로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낸 예언자”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라는 말은, 온 백성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고 있는 예언자로 인정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말은,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로 믿었고, 이스라엘에 해방과 구원을
가져다주실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은 분이 너무나도 허망하게 사형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그들이 실망하게 된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에게 속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고,
“왜 그런 일이 생겼을까? 이해할 수 없다.” 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인용하면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 것 같습니다(27절).
복음서 저자가 예수님의 설명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독자들이 그 의미를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입니다.>
26절의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그리스도는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기 전에
그러한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로 고쳐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루카 24,30-31).”
여기서 예수님과 두 제자의 식사는 성체성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나누어 주시는 동작을 보고서 성체성사를 연상했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음성 덕분에 예수님을 알아보았고,
엠마오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동작 덕분에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어떤 사람은 ‘성체’를 통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무엇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께서 주신 빵을 받아먹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는 점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예수님께서 금방 사라지셨는데도, 두 제자가 놀라지도 않았고,
서운해 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두 제자의 태연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은,
그들이 아주 생생하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체험’을 했음을 나타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눈에 보이면 좋지만,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 나와 함께 살아 계신다고 확신하게 해 주는 체험,
그 체험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 체험’입니다.
<두 제자가 걸어간 ‘엠마오로 가는 길’은,
실망해서 신앙을 거의 포기하고 세속으로 되돌아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확신에 가득 차서 신앙을 증언하려고 간 길이었습니다.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첫 번째로 한 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일이었다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모범이 되고 교훈이 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팔일 수요일-빨리 포기하는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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