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1일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루가 24,35-48)
"Peace be with you."
You are witnesses of these thing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에게 배척당하신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셨다고 깨우쳐 준다(제1독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평화를 기원하시며 당신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음을 보여 주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8~90년대, 동네에는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1,000원 또는 2,000원의 대여료를 내고서 테이프를 빌려 집에서 편하게 영화를 봤습니다. 그러나 2,000년 초반에 들어서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대신 화질이 좋은 DVD로 넘어가고 있었지요.
친한 선배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비디오 대여점을 열었습니다. 공무원 생활로는 돈 벌기 힘들다면서 90년대 말에 대여점을 연 것입니다. 초반에는 잘 되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결국 이 사업을 접게 되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들처럼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변화를 추구해야 하지만, 남따라 하는 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넷플릭스를 알 것입니다. 미국 콘텐츠 플랫폼 및 제작사로 스트리밍 엔터테인먼트 기업입니다. 이 기업의 시작은 DVD 대여 사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업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계속 변화와 혁신을 시도했기에, 현재 전 세계 2억 명 이상의 회원을 보유한 기업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변화와 혁신을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남 따라 하는 변화보다, 자기 본연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도 우리 고유의 변화를 원하시지, 남 따라 하는 변화를 원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를 다르게 만드신 것이겠지요.
예수님 부활 소식이 계속 들려왔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증언, 이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 보는 줄로 생각했다는 증언으로 볼 때, 제자들이 얼마나 불안정한 심리상태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배반한 전력이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고 따르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십자가의 죽음 이후 뿔뿔이 흩어졌고 지금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잘못했다는 부끄러움에, 살아계신 예수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겠지요.
이런 제자에게 당신의 오상을 보여주십니다. 육신상의 부활임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라고 물으시지요. 이 역시 육신의 부활을 드러내는 증거가 됩니다. 영혼은 세상의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확실한 부활의 표징을 보여주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제는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당신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믿음으로 세상에 구원을 위한 주님의 일을 계속하는 변화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도 이 변화를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주님의 일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네 단계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1e81DwC8n4Q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당신 손과 발을 보여주시고 만져보라고 하시고 심지어 생선토막까지 먹어 보이시자 그들이 믿게 됩니다.
믿으면 일어나는 첫 번째 현상입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성경에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라고 하듯 기쁨에 놀라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첫 번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기쁨’입니다.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사실 완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경의 이해’입니다. 여러분은 구약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낼 수 있으신가요?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는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에 긴가민가하면서도 기뻐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4-45)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사실 모든 성경 내용이 그리스도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의 가장 처음에 나오는 ‘아담’은 누구의 모습일까요? 아담은 옆구리가 뚫려 하와를 창조하기 위해 갈비뼈를 봉헌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납니다. 당연히 당신 옆구리에서 물과 피로 교회를 창조하게 하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새 아담은 이제 새 하와인 교회를 당신 신부로 삼으십니다.
‘에사우’는 어떨까요? 야곱에게 당신의 의로움의 가죽옷을 입혀주고 자신은 죽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병사 400명을 이끌고 야곱을 맞으러 나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에사우가 메시아의 모습으로 보일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 판’은 어떨까요? 우리 자아인 황금송아지를 없애기 위해 한 번은 깨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만들어졌습니다. 십계명 판은 우리가 지켜야 할 법입니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 하십니다. 당신이 사랑의 모범이요 법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이어가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어쨌건 우리에게 예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면 그 시각으로 구약을 보기 때문에 비로소 구약이 그리스도의 이야기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믿는 프레임 안에서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부활을 믿으면 성경해석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다음 변화는 ‘소명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소명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루카 24,47)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나요? 예수 부활을 믿으면 우리가 선포하는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를 수 없습니다.
만약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는 우리로서는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사람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미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을 그는 선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전능한 힘 중에 하나만 주어진다면 무엇을 하겠느냐고 할 때,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을 청하겠다고 했습니다.
혹은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그들은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고 다닙니다. 생각의 에너지를 옷 고르는 데 쓰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 생각을 사로잡는 세상 것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세상 집착을 끊어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면 누구처럼 될까요?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는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죄에서 벗어나는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아버지 뜻에 순종하여 목숨을 봉헌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회개란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위해 죽으려고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으로 죽으면 영원히 부활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아직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확신은 ‘그분으로부터 힘을 받은 일’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머물 것을 제자들에게 권고하십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힘, 곧 성령을 받을 준비를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9)
마지막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은 하늘에서 오는 힘을 어디서 받는지 압니다.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면 어머니가 주시는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살아계신다면 양식을 어디서 먹을 수 있을까요? 자녀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로서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 성령께서 오십니다.
유튜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 엄마의 밥’에서는 엄마들이 직접 호주에서 공부하는 자녀들을 위해 몰래 집밥을 해 주는 내용의 동영상입니다. 자녀들은 엄마의 밥을 먹고 눈물을 흘리며 힘겨운 유학 생활의 힘을 얻습니다.
엄마는 자녀가 있는 곳에 갑니다. 그리스도의 자녀들은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나라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우신 하나인 교회는 가톨릭교회입니다.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알면 어쩌면 그것 자체로 그리스도께서 보내시는 성령께서 어디로 오시는지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JTBC Voyage, ‘엄마의 손맛 재현에 감동한 스타들 모음’이란 유튜브 동영상이 있습니다. 쯔이와 바다, 그리고 박철민 씨가 셰프들이 재현한 어머니의 음식을 먹으며 눈물을 흘리는 내용입니다. 그냥 음식이지만 지금은 함께 계시지 않는 어머니의 음식만으로 큰 힘을 얻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를 위해 힘을 주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지금 살아계십니다. 그러면 그분은 자녀들이 모인 곳에 당신 음식을 내어주실 수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성사로 내려오시는 가톨릭교회에 머물 줄 아는 것이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는 증거입니다. 내가 교회에서 살아갈 성령의 에너지를 얻을 줄 안다면 그 성령은 분명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시는 것이기에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산 사람만이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
- -이기우 신부-
-조재형신부-
외출할 때면 꼭 지니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마트폰, 지갑, 손수건입니다. 스마트폰은 외부와의 연락을 위해서 가지고 다닙니다. 지갑은 계산을 할 때 열게 됩니다. 깨끗하게 빨아서 접어놓은 손수건은 제 몸에서 나오는 이물질을 받아주는 고마운 친구입니다. 일교차가 심한 날에 산보를 하면 콧물이 자주 나오기 때문에 손수건은 꼭 필요합니다. 손수건을 다 쓰고 빨래바구니에 넣으면서 한 번도 고맙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운동하면서 구겨지고, 지저분해진 손수건을 보니 문득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땀과 눈물 그리고 콧물까지 아무런 불평 없이 받아주는 손수건이었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손수건으로 닦아드렸습니다. 베로니카의 따뜻한 마음이 있어서 예수님 고난의 길에 조금은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교회의 전승은 베로니카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였고, 십자가의 길 6처에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림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상처 난 손과 발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령은 육체가 없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면서 유령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성경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는 고난을 받아 죽겠지만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죽었지만 다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증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놀라운 표징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여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했던 나약한 베드로였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용기 있는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회개’는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성찰하는 것이지만, 진정한 회개는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행동이 변했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에서 희망과 열정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할 일 가운데 ‘상처를 치유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 가장 필요합니다. ‘교회는 전투가 끝난 뒤의 야전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심각하게 다친 사람에게 콜레스테롤이 높은가 혈당치가 어떤가 물어보는 일은 쓸모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고 나서 나머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습니다.” 깨끗하게 빨아 곱게 접혀진 손수건은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증인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구겨지고, 지저분할지라도 내 몸의 오물을 받아준 손수건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옷에 진흙이 묻을지라도, 상처에서 흐르는 피가 묻을지라도 교회는 세상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영성이란 정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향해 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죽은 후에 얻어지는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서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여 부활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여인들, 그리고 엠마오 길의 제자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도단에 직접 부활하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제자들 가운데 서신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통상적인 관습에 따른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발현 등 일련의 사건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비는 인사는 가장 필요한 인사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반가워하고 기뻐하기보다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수단으로 끔찍한 기억으로 인해 보고 싶지 않은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난 아직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는 그분께서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표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영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육신과 더불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못 자국 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 다음,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제자들 앞에서 잡수시는 광경을 통해 당신의 완전한 부활을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한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과 발현이 어쩌면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간절한 인간적 동경의 산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가 아닐까 생각도 했습니다.
초세기 교회 예수님의 부활하신 육체를 착시 차원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사를 강조하였던 것입니다.
더 강력히 부활의 실재성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께서 나서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루카 복음 24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손에 드시고 그 자리에서 맛있게 발라 드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특유한 존재 양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분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몸으로 된 육체를 그대로 간직한 채 발현하셨습니다. 목소리도 예전의 그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제 전과는 다른 존재 방식을 취하셨습니다. 시공을 초월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신 것입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에게는 더 이상 육신의 욕구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드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진실로 육신으로 부활하신 것을 보여 주시고자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하고 당신께서 그들과 똑같은 살과 피로 이루어진 몸으로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자,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이영근신부-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보아라.”
(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성사를 매일 만지고 먹으면서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마태 24,45)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루카 24,45)
주님!
제 마음 속 깊은 곳을 여시어 침묵의 언어로 새겨진 당신의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깨달은 바를 제 삶으로 인쇄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의 말씀을 기록하는 잉크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선과 질서, 당신의 뜻과 지혜, 형언할 수 없는 당신의 신비들을 온몸에 새기며 살아가는 당신의 복음서가 되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부활 팔일 목요일-주님이 주시는 믿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4월 23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토요일 (0) | 2022.04.23 |
---|---|
2022년 4월 22일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0) | 2022.04.22 |
2022년 4월 20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0) | 2022.04.20 |
2022년 4월 19일 부활 팔일 축제 내 화요일 (0) | 2022.04.19 |
2022년 4월 1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월요일 (0) | 2022.04.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