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19-31)
“Have you come to believe because you have seen me?
Blessed are those who have not seen and have belie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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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나자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난다(제1독서). 요한은 파트모스섬에서, 그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는 목소리를 듣는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나타나시어,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시며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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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토마스의 믿음
-키엣대주교-
우리는 사도 토마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토마스 또한 주님의 가르침을 듣고 주님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스승으로부터 직접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언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스승의 죽음에 의심을 가졌습니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권능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믿지만 당신께서 죽은 후 스스로 부활하셨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보다 더 그토록 존경하고 믿었던 최고의 권능을 가진 분이 십자가위에서 숨이 끊어지는 치욕을 당하는 것을 보았기에 절망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죽음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회피하듯 엠마우스로 떠난 다른 두 제자와 달리 절망과 실망 속에서도 공동체에 돌아왔다는 것은 그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비록 스승으로부터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한다’는 책망을 들었지만 그의 의심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믿지 않는 제자들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나타나야 하셨고 매번 제자들에게 당신의 상처를 보여주며 그들이 안정과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함께 음식을 드셔야 했습니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부활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지만 감히 이런 생각을 입밖으로 낼 수 없었습니다. 토마스만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고, 또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이와 같은 강한 표현들로 그에게 “의심 많은 사람, 증거를 볼 때까지 믿지 않고 고집스러운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여졌습니다. 토마스는 오로지 본 것만을 믿고 무엇이든 만져본 것만을 믿는 그 시대 사람들을 대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시험해 보고 스스로 입증해 봐야하는 토마스의 성격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의 상처를 직접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기에 우리는 그분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토마스에 의해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번 더 발현하셨고 예수님의 마지막 축복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의심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믿음을 과학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토마스는 자신의 신념을 확신하기 위해 증명을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이해시키려면 자신이 그것을 직접 보고 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만져본 후에야 그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이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토마스의 행동은 아마 우리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도 토마스가 예수님의 옆구리와 손바닥의 상처를 보여달라고 한 것은 오늘날 선교의 새로운 지표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말과 이론만 있는, 실상과 먼 약속은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좋은 이론은 좋은 결과로 검증되어야하고 좋은 말은 일이 잘 될 때만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은 신앙적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열심히 성경을 읽고 성실히 미사에 참여하고 다른 사람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 안에서, 불화로 서로가 분열된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어찌 그리스도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부정한 권력과 재산을 탐한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짓밟고 차별한다면 어떻게 그리스도가 사랑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최근 많은 가정들이 부부간의 불화와 자녀의 탈선, 가정폭력 등으로 가정해체의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웃들은 여러분의 가정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다운 올바른 생활을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에게 주님을 믿으라고 설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애와 상호존중, 인내와 겸손, 사랑의 삶이야말로 어떠한 아름다운 말보다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의 첫 번째 편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실천하면, 그로써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믿음은 평화입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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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고난을 보고 사도들의 믿음도 흔들렸습니다. 믿을 수 없는 절망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기에 당연한 것입니다. 고난이 닥칠 때마다 주님을 탓하지는 않습니까?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나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2. 좋은 말과 좋은 일을 하는 것,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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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은 평화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 가족에 대한 믿음, 이웃에 대한 믿음, 사회에 대한 믿음들을 하나씩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2.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하나씩 실천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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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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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한 지 벌써 20년이 넘었습니다. 이 운전경력이 이제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처음에는 운전이 제게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차선을 바꾸는 것도 힘들었고, 차 속도를 높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주차하는 것은 왜 이렇게 힘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모든 것을 능숙하게 할 수 있습니다.
운전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초보 때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보 때의 능숙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운전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신부님께서는 운전면허를 취득한 지가 얼마나 되셨어요?”라고 묻습니다. 사제서품 받고 나서 운전면허를 땄다고 말씀드리자, 그분께서는 “신부님, 저는 면허 딴 지 벌써 40년이 되었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40년 동안 단 한 번도 운전해본 적이 없답니다. 소위 장롱 면허 소유자였습니다. 면허증은 있지만 운전을 못 하는 아주 소용없는 운전자일 따름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도 실패도 체험하고 피하고 싶은 고통의 순간도 겪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시간을 통해서 주님을 더 자세히 알게 되고, 주님과 가까운 관계를 만들면서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실패의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모든 것을 지켜주셨던 예수님의 부재는 그들의 삶 자체를 흔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는 말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실패 안에만 머물도록 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침 그 자리에 토마스 사도가 없었기에, 나중에 들은 이야기만으로는 부활 소식을 믿을 수 없어서 제자들의 증언을 부정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사도도 있는 자리에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라고 이르십니다.
토마스는 자신이 말한 대로 손가락이나 손을 못 자국에 넣어 보지 않습니다. 곧바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요.
믿음의 유형은 이렇지 않을까요? 첫째는 보고도 믿지 않는 유다인들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몰았던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둘째는 보고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마지막이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의 많은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이 전혀 없어서, 어렵고 힘들면 곧바로 넘어질 사람입니다. 절대로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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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나에게 일어나는 두가지 변화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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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2DQBpBcYbwM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와 두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토마스 사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돌아온 토마스에게 나머지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했지만, 자존심이 상해서인지 토마스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나머지 동료들이 바보이고 그래서 헛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한 명의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마스에게 죄의 용서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
우리 각자에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야 하는 이유는 그분을 죄 없으신 어린양이요, 하느님으로 믿지 못하면 나에게 죄의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토마스도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을 보고는 상황이 많이 바뀝니다. 토마스는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때는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주님도, 하느님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은 내가 찌른 사람이 죄가 없음이 판명되었을 때 그 사람의 수준만큼 깨끗해집니다. 상대가 죄가 없음이 증명되는 순간이 부활입니다.
영화 ‘언포기버블’(2021)은 경찰관을 살해한 이유로 감옥에서 20년간 복역하고 가석방된 루스라는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루스는 다섯 살인 동생 케이트를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케이트는 단란한 가정에 입양되고 피아니스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케이트는 언니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지 못했고 만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케이티의 양부모는 20년간 루스로부터 편지를 받았지만, 케이티를 위해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루스는 차이나타운의 허름하고 낡은 집에서 생활하며 생선 공장과 목공 일을 병행합니다. 그러나 케이티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자기 이전 집에 사는 변호사를 찾아갑니다. 접근금지 명령을 넘어서 동생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변호사는 케이티의 양부모를 만나게 해 줍니다. 그러나 양부모는 케이티에게 관심을 끊을 것을 요구하고 그들이 편지를 다 감추었다는 것을 안 루스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그렇게 변호사도 더는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루스는 공장에서 사람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합니다. 거기서도 경찰관 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루스를 좋아하던 남자도 루스가 경찰관을 살해한 사람임을 알고 등을 돌립니다. 루스에게 살해당한 보안관의 두 아들은 루스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엔 그럴려고 하지 않았지만, 루스가 사회에 적응을 잘해 나가자 열을 받은 것입니다.
케이티의 양부모의 딸인 에밀리는 부모가 하는 말을 엿듣고 루스가 보낸 편지를 찾아냅니다. 그리고 루스를 만나 케이티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곳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죽은 보안관의 두 아들은 에밀리를 케이티로 착각하고 그녀를 납치합니다. 한편 동생을 만나도 되는지 허락받기 위해 변호사의 집을 찾은 루스는 변호사의 아내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합니다. 그러자 루스가 말합니다. 그때 케이티는 다섯 살이었다고.. 다섯 살이 무엇을 알았겠느냐고.. 루스는 동생을 위해 대신 감옥에 가는 것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에밀리를 유괴했던 스티브는 루스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부릅니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 동생을 죽이려는 것입니다. 루스는 그곳으로 가고 스티브의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방을 내어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려고 뒷문을 따고 들어오던 것이었는데 케이티가 말릴 틈도 없이 방아쇠를 당겨버린 것입니다. 이에 스티브도 후회하고 총을 내려놓습니다. 나중에 케이티는 아무 말 없이 언니 루스를 안아줍니다.
루스가 출소하여 자신의 무죄를 증명하기 전까지 루스를 보던 이들은 모두가 그녀를 용서 못할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뿐인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루스는 자신이 아무런 죄가 없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줄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면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녀를 용서하지 못하던 수많은 사람의 죄를 밝혀줄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다행히 영화에서는 그녀의 진심이 통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게 그녀를 죄인 취급했던 이들이 뉘우쳤습니다. 케이티도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하고 있었을 수 있습니다. 케이티도 어쩌면 언니가 살아있으면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서 언니가 출소하지 않기를 바랐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앞에서는 우리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부활은 한계가 있습니다. 부모를 찌른 이가 부모의 죄 없음을 깨달으면 부모처럼 되려고 합니다. 인간을 찔러서는 인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게 된다면 그분 죽음이 내 믿음이 없는 탓이었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됩니다. 토마스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이 그분처럼 될 수 있음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계3대 테너로 불리던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루치아노 파바로티 중 도밍고와 호세 카레라스는 유명한 앙숙 관계였습니다. 1984년 당시 카탈로니아 지역은 스페인을 다스렸던 마드리드 지역으로부터 자치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한창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마드리드 출신의 도밍고와 카탈로니아 출신의 카레라스 역시 적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순회하는 공연을 하면서 서로 같은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공연했을 정도로 사이가 나빴습니다.
카레라스는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 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 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러지게 됩니다. 당시에는 백혈병 치료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상황이었고, 카레라스는 매달 골수이식과 수혈 등 고통스러운 치료를 위해 미국을 방문해야만 했습니다. 생존 확률은 10%였습니다. 막대한 치료비로 인해 재정이 곤란해진 그는 더 이상 치료를 받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경제력이 한계에 다다른 그때 그는 마드리드에 백혈병 환자만을 위한 재단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에르모사(Hermasa)라는 재단의 도움으로 카레라스는 치료를 다시 시작했고 마침내 재기에 성공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표현하기 위해 재단에 가입하려던 카레라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신을 도와준 재단의 설립자이자 후원자가 도밍고이며, 애초에 그 재단을 설립한 목적이 카레라스를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도밍고는 도움을 받는 카레라스의 자존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익명으로 재단을 운영해왔던 것입니다.
카레라스는 크게 감동하여 도밍고의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관객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도밍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카레라스를 꼭 껴안았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호세 카레라스는 도밍고처럼 살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도밍고처럼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모습 자체로 우리가 죄인이고 피조물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오늘 토마스가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찔렀다는 죄책감에 그분은 이제 나의 주님이 되고 또 그 부활은 그분을 나의 하느님으로 고백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찌를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고 그렇게 닮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토마스는 그리스도처럼 순교하여 온전한 하느님 자녀가 됩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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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로 보내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SopkvXPLI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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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저의 생년월일은 주민등록에 있는 것과 집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다릅니다. 세상은 주민등록에 있는 저의 생년월일은 기준으로 저를 기억합니다. 집에서 이야기하는 생년월일을 기록하면 인정하지 않습니다. 학교의 학적부에도, 은행의 전산에도, 사제의 인명부에도, 여권에도 주민등록에 기록된 생년월일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1년 어리게 기록된 것 때문에 고민도 있었습니다. 신학교는 나이순으로 순서를 정하기 때문입니다. 1학년 때 50명이 같은 강당에서 잠을 잤습니다. ‘대침실’이라고 불렀습니다. 1년 늦은 나이 때문에 입구에서 가장 먼 자리로 배정 받았습니다. 본당 신부가 될 때도 1년 늦은 나이 때문에 조금 늦게 본당 발령을 받았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1년 늦게 기록된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1년을 더 젊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1년을 더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주민등록에 등록된 저의 생년월일보다는 부모님께서 알려주시는 생년월일을 본래의 생년월일로 믿습니다. 부모님께서 저를 낳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양치기 소년’을 읽었습니다. 양을 치던 소년은 심심했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습니다. 늑대로부터 양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늑대는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습니다. 다시 심심했던 소년은 ‘불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달려왔습니다. 그러나 불은 나지 않았습니다. 진짜 늑대가 나타났습니다.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라고 소리쳤지만 마을 사람들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늑대는 양들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진짜 불이 났습니다. 소년은 ‘불이야!’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오지 않았습니다. 소년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치기 소년의 장난은 마을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도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간디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들에게서 양치기 소년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믿음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째, 성공, 재물, 권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편리함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거짓믿음입니다. 불 속으로 날아가는 나방처럼 그런 믿음의 끝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과학, 기술, 수학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풍요로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현대문명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은 유사믿음입니다. 과학, 기술, 수학으로 쌓은 믿음은 바벨탑과 같아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셋째,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한 믿음입니다.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살아서 믿는 사람은 그 믿음 때문에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게 됩니다. 죽더라도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는 이 믿음으로 목숨을 바쳤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생년월일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공, 재물, 권력을 얻으려는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학, 기술, 수학의 법칙에 대한 믿음도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믿음 때문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까지 기꺼이 내줄 수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 때문에 목숨을 바쳤던 순교자들의 믿음입니다. 2000년 전에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말과 행동 그리고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평화를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잘못한 이를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가난한 사람, 아픈 사람, 외로운 사람, 억울한 사람, 갇힌 사람들과 연대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부활 하신 주님께서는 무슨 커다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것을 묻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오늘 우리가 만나는 이웃과 가족들에게 평화를 빌어 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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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토마스 사도가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에 넣어봤다는 표현은 없지만, 그의 성격상 끝까지 세심하게 확인해봤을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의 손가락을 구멍 뚫린 그분의 옆구리에 직접 넣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이런 신앙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복음 20장 28절) 토마스의 늦었지만 장엄한 신앙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말씀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복음 20장 29절)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나무 나도 특별한 사건이었기에 당시 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초대 교회 공동체에 주어졌던 가장 큰 과제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사건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전대미문의 대사건이었기에, 예수님과 동고동락했던 제자들 역시 부활 사건 앞에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부활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십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말을 걸어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돌아가시기 전과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사랑의 마음으로, 똑같은 자상한 얼굴로 불안과 공포에 떠는 우리를 안심시키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지니고 계신 절대불변의 속성, 극진한 사랑을 먼저 제자들에게 보여주심을 통해 당신의 부활이 참됨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 찬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극적인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두 번 다시 보기조차 싫은 십자가의 상흔, 손과 발에 뚫린 대못 구멍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극진한 노력 앞에 제자들은 의혹의 시선을 거두어들입니다. 스승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 앞에 너무나 기뻐 어쩔 줄 모릅니다.
우리들의 나약한 신앙을 굳게 하시려고, 흔들리는 우리의 믿음을 붙들어주시려고 당신께서 하실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시는 부활 예수님이십니다. 머리로만, 지성으로만, 논리로만 모든 것을 파악하려는 사람들에게 부활의 신비는 항상 베일에 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부활을 믿고, 느끼고, 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부활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그럼 매일 매 순간이 부활일 것입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부활 여드레 날인 부활 제2주일이고, '하느님의 자비주일'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의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를 만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 교회공동체에 베풀진 하느님의 자비가 신자들의 증가와 많은 표징과 이적을 통해 드러납니다.
화답송에서는 “주님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 118,1)를 찬양합니다.
제2독서에서는 ‘자비’가 마지막 날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계신 사람의 아들에게서 영원하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부활 첫째 날에 벌어진 자비와 여드레 째 날에 벌어진 자비에 대한 일을 함께 들려줍니다.
먼저, 부활 첫째 날 저녁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와 엠마오의 두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서 ‘두려워 문을 잠가놓고 있는’ 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을 질책하고 꾸중 할만도 한데, 오히려 “평화가 너희와 함께”(20,19.21.) 하시며 평화를 건네주십니다.
그들은 불신에 빠져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을 믿으시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하시며, 오히려 깊은 신뢰로 사명을 맡겨 파견하십니다.
사실 누군가에게 일을 맡긴다는 것은 그를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신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믿고서 사명을 맡기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당신 부활의 “숨을 불어넣어”(요한 20,22) 주십니다.
당신의 ‘숨을 불어넣는다’는 것은 당신의 생명, 곧 성령을 건네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토록 당신의 자비에 더하여 거듭 자비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이는 제자들에게 단지 '성령'을 선물로 주신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성령으로 용서받았음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말합니다.
나아가 '용서'하는 일, ‘자비를 베푸는 일’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주어졌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용서와 자비를 베푸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것입니다.
사실 ‘용서와 자비’는 '계약'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옛 계약’이나 ‘새 계약’이 맺어지는 과정을 보면 잘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계약을 갱신할 때 당신의 신원과 특성을 이렇게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은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다.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와 진실이 충만하며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풀고 죄악과 악행과 잘못을 용서한다.”
(34,6-7)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자비하신 분’으로, 그리고 자비의 본성을 ‘용서’하는 것으로 계시하십니다.
이처럼 ‘옛 계약’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로 맺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용서한다’라는 말에는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진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용서는 당신께서 손수 인간의 모든 잘못과 그 결과까지 걸머지면서 잘못을 없애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죄와 그 행위의 결과를 ‘걸머지는 일’인 것입니다.
또 ‘새 계약’에 대해서도 예언자 예레미아는 이렇게 예고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
(예레 31,33-34)
그러니 용서는 단지 죄를 면해주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일’입니다.
곧 그의 죄를 계속 곱씹지 않는 일입니다.
나아가서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죄와 상처를 오히려 사랑의 통로, 구원의 통로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그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의혹과 불신으로 두려움에 떨며 문을 닫아걸고 있는 제자들과 토마스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바로 여기에서 토마스는 토마스는 참으로 깊고 깊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체험하게 됩니다.
바로 이 용서와 사랑에 비로소 의혹과 불신의 벽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의 불신과 의혹은 믿음으로 바뀌고, 그의 거부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탄성으로 터져 나옵니다.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야 그 배신을 미리 다 알고도 먼저 믿어주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사랑하신 그분의 자비를 깨닫고 울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 ‘용서의 체험, 자비의 체험’이야말로 부활의 표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삶’은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삶’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용서와 자비'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계신다는 표징이 됩니다.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일’, 용서를 입었으니 ‘용서를 베푸는 일’, 바로 이 일이 오늘 저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저희를 거부하고 배척하는 이를 옆구리에 받아들여 믿어주고 끌어안게 하소서.
저희를 상처내고 비난한 이를 품고 도와주며 용서하고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저희가 당신의 사랑과 용서가 이루어지는 장소요, 당신의 희망과 믿음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마르 16,15)
주님!
제 자신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소서.
세상에로, 이웃형제들에게로, 모든 피조물들에게 나아가게 하소서.
먼저 다가가고,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자국민이나 이주민이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친구이거나 적이거나, 사람이거나 자연이거나,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형제가 되게 하소서
함께 걷되 손을 잡고 걸으며, 땅을 딛고 걷되 하늘을 바라보기 하소서.
세상에 살되 세상의 힘이 아닌, 복음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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