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2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니케아 공의회(325년)에 참석하였다. 또한 그는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로서 아리우스 이단과 투쟁하는 가운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성인은 특히 정통 신앙을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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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2-29)
Do not work for food that perishes
but for the food that endures for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스테파노와 논쟁을 벌이던 이들은 그의 지혜와 성령에 대항할 수 없게 되자, 그를 최고 의회로 끌고 가 거짓 증인들을 내세워 모함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 힘쓰라고 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 버클리 대학의 심리학자 오즈렘 에이덕(Ozlem Ayduk)과 미시간 대학의 이선 크로스(Ethan Kross)가 벽에 붙은 파리를 예를 들어 설명한 것에 유래한 벽에 붙은 파리 효과(Fly-on-the-wall effect)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에 갇혀 있을 때, 그 안에서 빠져나와 제삼자의 객관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면 전보다 더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내 고민이 아무리 크더라도 벽에 붙은 파리가 듣는다면 ‘그거 아무것도 아니네’라고 여길 것처럼, 제삼자의 객관적 시선으로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일인칭 시점에서 부정적 상황을 떠올리면 혈압과 심박수가 올라가면서 불쾌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삼인칭 시점으로 보면 감정의 변화도 줄어들고, 그 안에서 긍정적인 가치를 찾게 됩니다.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하자고 하신 것도 일인칭 시점인 ‘나’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배려가 아닐까요? 주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새로운 ‘나’를 볼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주님과 함께할 수 있도록 더 힘을 쏟아야 합니다. 나만을 떠올리고, 내 탓만 따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할 수 있는 것이 너무나도 많아지게 됩니다.
빵의 기적이 있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세상 요구의 만족을 위하여 예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안락한 생활을 꿈꾸며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호칭에서도 ‘랍비’라고 말합니다. 이는 대체로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모를 때 부르던 사회적 존칭이었습니다. 즉,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못하니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라고 명령하십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하느님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했습니다. 바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에서 벗어나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믿음이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하면,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임을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믿음은 하느님과 우리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 없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연결은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 연결이 있어야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는데, 연결 자체를 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어리석음은 아니었을까요?
객관적으로 주님과 나의 관계를 묵상해보시길 바랍니다. 나의 입장에서가 아닌 주님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 시선이 바로 믿음의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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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처럼 보였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qDxKWdvHL0
초대교회 시절에 부제로 선출되었지만, 공생활 시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진실을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던 스테파노는 부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들보다 앞서 나갔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이 예수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는 광폭 행보를 하다가 대사제의 경고를 받은 이후 가급적이면 유다교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보신(保身) 행보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스테파노 부제 홀로 이방 디아스포라 출신 과부들을 비롯해서 초대교회의 신자들 중 가난한 이들이 당할 수도 있었던 불공정한 대접을 공정하게 만들어 놓았음은 물론, 성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백성 위에 군림하고 있었던 사두가이들과의 일전(一戰)도 불사하려는 선명한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반면에 베드로와 그 동료 사도들은 유다교의 기도 시간에 맞추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는 등(사도 3,1) 마치 유다교의 신흥교파처럼 처신하고 있었습니다.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부활한 그리스도의 몸이라던 예수님의 가르침 정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듯한 처신이었습니다.
결국 스테파노는 유다교 당국자들에게 미운 털이 박히고 괘씸죄에 걸려서 돌에 맞아 죽는 형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사형 집행을 당하던 스테파노의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다(사도 6,15)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스테파노 본인의 확신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도 특별한 보호를 하고 있었음을 전한 루카의 기록입니다. 은총과 능력이 충만한 스테파노의 언행은 이미 큰 이적과 표징들을 일으켰던 바 있었기에(사도 6,8) 초대교회 안에서 베드로의 노선에 비해서는 스테파노의 노선이 더 옳았음을 후대의 사가로서 루카가 확인해 주고 있는 흔적입니다.
이 스테파노의 노선은 이후 사울에 의해서 계승되게 됩니다. 사울은 스테파노의 죽음에도 찬동할 정도로 열성적인 바리사이였으나, 예수님께서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벼락을 쳐서 그 발길을 돌려세우심으로써 박해자의 길에서 선교사의 길로 인생을 전환하였습니다. 개별적으로만 보면 스테파노의 죽음은 허망하게도 아무런 성과도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스테파노를 이끄신 성령의 손길은 바오로를 거쳐 수도 없이 많은 이들에게 감화를 미쳤으므로 신생 초대교회를 거대한 이방인 출신 신자 집단으로 성장하게 만들었고, 베드로의 노선이 그토록 집착했던 유다인 출신 신자들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소수 집단으로 줄어들었고 로마의 침공으로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모든 유다인들이 추방되자 교회 안에서 주류의 지위마저 내놓아야 했습니다.
이후 고대교회 시절까지 스테파노가 이끌었던 카리스마적 노선은 수도 없이 많은 제2의 스테파노와 제2의 바오로들을 출현시켜서 그리스도교를 이끌었습니다. 고대교회 4,5백 년 간의 숱한 이단 논쟁은 그 소산입니다. 예수님을 오해하여 생겨난 이단들, 특히 입양설 이단은 성자의 신성을 인정하되 성부의 신성보다 하위에 두려던 노선이었습니다. 십자가 수난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셨다는 주장이었는데, 이 이단 노선은 유다인 출신의 그리스도교 신자들로부터 한때 열광적인 지지를 받기도 했지만 곧 정통 신앙을 견지하려는 스테파노류(流)의 신앙인들에게 덜미를 잡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사도신경이고 그 안에 담겨진 열두 가지 신앙조문입니다. 그 핵심은 예수님께서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시며,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으로서 일체이시라는 고백이지요. 성 아타나시오 역시 정통 신앙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이단에 맞서 공로를 세운 인물입니다.
스테파노가 유다인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때, 대사제와 최고 의회 의원들은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처럼 빛났던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습니다. 이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소행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오히려 스테파노의 처신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했음을 눈치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타볼산에서 세 제자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소환하여 이야기를 나누실 때, 빛나는 얼굴로 변화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바도 있었습니다(마르 9,2).
시대를 초월한 통공과 지역을 넘어선 연대로 이루어지는 애덕 실천 활동에서 정통 신앙을 증거하고 있는 수많은 스테파노들의 얼굴은 여전히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고 있습니다. 이 정통 신앙 노선의 은총은 공동체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충분히 뒷받침되고 있습니다. 즉, 정통 신앙의 진리에 대해서는 세상의 죄악이 절대로 건드리지 못해서 그 진리성이 상하지 않고, 정통 신앙의 진실을 믿는 깨우침에 있어서 빛나며, 지역을 초월하여 사랑을 실천하는 연대에 있어서 빠르고, 시대를 초월하여 통공함으로써 시공의 간격을 사무치는 사기지은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 땅에 복음이 들어와 자생적으로 세워진 교회의 창립 과정과 자발적인 성사 활동, 박해 중에 전국에 세워진 교우촌의 기적, 교우촌 신자들의 순교와 그 후손들의 순교정신 계승 활동 등도, 마치 정통 신앙 노선을 견지하다가 희생되었으나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던 스테파노처럼 한민족의 역사 안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정통 신앙의 카리스마적 노선에 대해 자부심을 지니시고 계승하시기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산보 길에 나무를 봅니다. 꽃이 예쁘고, 열매가 큰 나무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줄기가 튼실하지 못합니다. 아마도 양분을 꽃과 열매에 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활엽수와 침엽수들은 줄기가 튼실합니다. 목재로 쓰기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양분을 나눠줄 꽃과 열매가 없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꽃과 열매를 맺는 나무도 창조하셨고, 목재로 쓰기에 적합한 나무도 창조하셨습니다. 내가 처한 현실을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주어진 현실을 감사드리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꽃과 열매를 맺었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아직 인생의 꽃과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면 누군가를 위한 거름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하며 감사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잃어버린 동전’을 말씀하셨습니다. 10개의 동전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찾으면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도 며칠 전에 비슷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신문 홍보를 가려고 자동차 키를 찾았는데 없었습니다. 방에도, 거실에도, 책상에도, 주머니에도 자동차 키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도 한번 잃어버린 경험이 있기에 가슴이 뜨끔했습니다. 자동차 키를 복사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제가 머문 곳이 두 곳이 있었습니다. 한 곳은 식당이고, 다른 한 곳은 성당이었습니다. 자동차 키를 복사하기 전에 먼저 식당으로 찾아갔습니다. 종업원이 웃으면서 자동차 키를 보여주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예수님 비유의 말씀이 제 삶으로 쑥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관념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말씀 또한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음을 열고, 삶을 들여다보면 하느님의 말씀이 살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람들은 신실한 스테파노 부제를 모함합니다. 스테파노 부제가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한다고 모함합니다.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다고 모함합니다. 성서에 보면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산나는 두 노인으로부터 부정한 행동을 했다는 모함을 받았습니다. 나봇은 아합 왕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모함을 받고 포도원을 빼앗기고 죽어야 했습니다. 아벨은 카인의 시기와 질투 때문에 들판에서 죽어야 했습니다. 비단 성서에만 억울한 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에도 억울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간첩으로 누명을 써서 평생 감옥에 있었던 분도 있습니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고문을 당하던 분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희생당하는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억울한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들의 눈에 흐르는 땀과 눈물을 깨끗하게 씻어 주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열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무엇이 썩어 없어질 양식일까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것입니다. 그 탑에는 시기와 질투, 교만과 욕망이 들어 있습니다.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채우면 채울수록 더욱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쌓아 올리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은 블랙홀이 되어서 아름다운 지구의 환경을 파괴합니다.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생명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습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일일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빛이 모든 곳을 골고루 비추듯이 하느님의 일은 모든 이를 위해서 모든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이 녹아 음식에 맛을 주듯이 하느님의 일은 희생과 봉사로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빵 만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힘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영근신부-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는 ‘먹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맛 집’을 찾습니다.
맛이 좋은 음식, 몸에 좋은 음식을 찾습니다.
한편 '일용할 양식'마저 없어 죽어가는 이들도 많습니다.
양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양식을 가진 자들이 나누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밥그릇만 키워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오늘 대체 어떤 양식에 허기져 있는가?
그리고 어떤 양식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복음에서 호수를 건너 가파르나움으로 몰려 온 군중은 대체 무엇을 찾아 온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5)
그렇습니다.
군중들은 이미 빵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과 자신들의 이익에만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요한 6,27)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얻습니다.
바로 당신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βροσισ)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마을에서 돌아온 제자들이 예수님께 “무엇을 좀 잡수십시오.”라고 하였을 때,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34)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중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하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8)
우리는 여기에서 아주 익숙한 단어인 “하느님의 일”이란 단어를 만납니다.
여기서, ‘일’(εργα)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은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과 그분의 뜻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고 실행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양식을 소화시키는 일은 그 양식을 믿고 받아먹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진정 이것이야말로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믿는 일’,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일’안에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의 일을 완성해 나갑니다.
그래서 믿음은 행위가 되고 실현이 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께서 저와 함께 하시는 당신의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말씀이 먼저다」
-반영억신부-
사람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살지 못합니다. 무엇을 먹든 먹어야 합니다. 다른 방법으로 영양을 보충할 수 있겠지만 일시적입니다. 단식을 한다고 해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영양을 보충 시켜야 합니다. 음식을 통해서든 다른 방법을 통해서든 영양을 섭취하지 않으면 육체를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무엇을 먹어야 삽니다. 영양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밥을 먹는 것 보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에 항상 말씀이 먼저 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삽니다”(마태4,4). 그리고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행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하느님을 만나고 구원을 완성하게 됩니다. 요한 일서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지상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천상의 양식이 더 소중한데 그 천상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는 것입니다(요한6,29). 결국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동의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인간이 거부할 수 있으니 신앙은 하느님의 일인 동시에 인간의 일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남들이 성경에 관해 많이 알고 통성기도를 잘 하는 것을 보면 부러워합니다. 특히 전교에 동분서주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열성을 부러워하고 말 잘하는 그들을 보며 주눅이 듭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앞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습니다. 노력하지 않으면서 거저 얻으려는 마음이 너무 큽니다.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왜 그 말씀을 듣기를 주저하고 실천하기를 두려워합니까? 그야말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은총은 풍부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에는 눈이 번쩍 뜨이면서도 천상의 영원한 생명에는 굼뜬 우리의 모습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성 베르나르도는 “하느님의 위안은 다른 위로를 찾는 사람에게는 있을 수 없습니다. 진실한 것이 헛된 것과, 영신적인 것이 육신적인 것과, 최고의 것과 최저의 것과 혼동되기도 하지만 천상의 것과 지상의 것을 똑같이 맛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십시오. 지상에 살면서도 지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지 말고 천상에 있는 것들에 마음을 두십시오. 우리의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하여 빵을 먹어야 하듯이,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자주 접하고 미사 안에서의 영성체로써 신앙의 건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성체는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성체보다 더 깊고 완전한 사랑의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습니까?”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
-송영진신부-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요한 6,24-25).”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행하셨을 때(요한 6,11), 그 빵과 물고기를 받아먹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그런데 그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혼자서 산으로 가셨고, 아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는 일을 자기들끼리 의논만 하다가 멈추었을 것입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을 찾아서 카파르나움으로 간 사람들은
의논만 하다가 멈춘 그 일을 실행하려고 간 사람들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갔을 것입니다.)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라는 사람들의 질문은
“어떻게(어떤 방법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서 호수를 건너가셨다는 것을(요한 6,16-21)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기들보다 먼저 카파르나움에 가신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요한 6,26-27)”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먼저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시면서,
정말로 추구해야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고 가르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임금이 되어 달라고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으로 해석됩니다.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내가 행한 ‘빵의 기적’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입니다.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는
“육신의 배를 채우는 빵만 원하기 때문이다.”입니다.
<이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이 연상됩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필리 3,19).”
이 말에서,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을 인생의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는 뜻입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찾지 말고”입니다.
세속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권력, 재물, 출세, 성공 등은
‘썩어 없어질 양식’일 뿐입니다.
그런 것을 얻으려고 힘쓰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인생을 허비하는 일입니다.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는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여라.”입니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는
“내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시고 메시아시라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만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29)”
사람들은 ‘힘써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어떤 ‘일’을 하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고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해석됩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와 목적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만일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표로 삼지 않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만 빌고 있다면,
그것은 유일하게 중요하고 귀한 것을 외면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찾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이 질문과 대답은,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영원한 생명을 받는 방법을 물은 이야기에 나오는 대화와 비슷합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루카 18,18)”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루카 18,22).”
재물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는 말씀은,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완전히 버리라는 뜻이고, 또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는 일을
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를 따라라.”는 “나를 믿어라.”입니다.
그런데 그 부자는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 수가 없어서,
슬퍼하면서 떠났습니다(루카 18,23).
<요한복음 6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듣기가 거북하다면서 떠나버립니다(요한 6,60-66).>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 너무 막연하고, 비현실적이고,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으로
바꿔서 생각할 필요도 있습니다.
인생살이의 여러 가지 고통이나 어려움들 때문에 힘들어 하고
지쳐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행복과 영원한 기쁨을 누리는 삶”을 소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행복과 기쁨’은, 눈앞의 고통을 잠시 잊게 만드는
마취제가 아니라, 그 고통들을 극복하고 계속 살아갈 힘을 주는 치료제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3주 월요일-힘이 없는 사람이 폭력을 쓴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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