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6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5. 6. 06:35

 2022 5월 6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2-59)

 

I have life because of the Father,
so al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have life because of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울은 다마스쿠스에 이르러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하나니아스에게 안수를 받은 뒤,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이르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언젠가 죽기 마련입니다. 당연한 진리인데도 이를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습니다. 탄생과 죽음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태어날 때 아기는 마구 웁니다. 그러나 이 아기를 바라보는 주위의 사람들은 세상의 행복을 차지한 것인 양 활짝 웃습니다. 그렇다면 죽을 때는 어떻습니까? 우선 주위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크게 슬퍼합니다. 죽는 사람은 어떤가요? 여기서 이 세상을 잘 살았던 사람은 웃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세상에 태어날 때 아기는 참 걱정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뱃속의 편안함을 벗어난 낯선 환경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힘차게 울었겠지요. 하지만 곧바로 안정을 취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기운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태어난 아기를 보호해 줄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세상을 떠나는 우리를 보호해 줄 주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께서는 당신이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갓난아기가 세상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끼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서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우리는 미사 때마다 느낄 수 있습니다. 성찬례 때, 사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당신 자신을 몽땅 내어주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식인종의 말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특히 ‘저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 천민 출신’이라는 경멸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의 큰 사랑을 전혀 보려고 하지 않고, 미개한 식인종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보지 못하면 절대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일치를 이루는 사람만이 하느님과 진정한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과도 하나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셨던 주님의 사랑에 무조건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행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칸트).

 우리는 성체로 '말미암아' 살아가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CTr0nnn2pt4

예수님은 계속 ‘생명의 빵’에 대해 설명하십니다.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사람들만 영원히 살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당신으로 말미암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고 그 살과 피를 먹은 이 덕분으로 살아간다는 말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영화 ‘아이, 로봇’(2004)은 공상과학 영화이지만 인간과 로봇을 교묘하게 교차시키며 ‘인간도 로봇과 같지 않을까?’, 혹은 ‘로봇도 인간과 같지 않을까?’란 섬뜩한 메시지를 전달해줍니다. 로봇이 자유의지를 가져서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요? 결론은 이것입니다. 

    ‘로봇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생존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고는.’

  

    2035년, 로봇의 원칙은 1. 인간을 해치지 않는다. 2. 인간의 명령에 따른다. 3. 이 두 법칙에 위배되지 않으면 스스로 보호한다. 이렇게 3가지입니다. 

인간의 생활 전반에 인공지능이 발달된 로봇과 생활을 합니다. NS-4가 단종되고 NS-5 모델이 출시되려는 시기에 이 모델의 개발자 래닝 박사가 자살을 합니다. 시카고 경찰인 델은 AI 로봇을 적대시하는데 과거 애인과 사고를 당했을 때 로봇이 명령을 어기고 자신만 구해 애인이 죽었던 사건 때문입니다. 

    그는 래닝이 살해당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래닝이 개발한 모델 NS-5는 인간의 명령과 관계없이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모델이라 로봇의 3대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 불안해 합니다.

  

    NS-5 써니도 인간처럼 꿈을 꾸고 감정을 느낍니다. 델은 수잔과 써니의 심리 검사를 하는데 나쁜 AI는 아니라고 나와도 델은 써니가 래닝을 죽였을 거라 생각합니다. 수사를 하던 델은 습격을 받고 래닝 사건은 자살로 수사가 종결됩니다. 써니는 델을 피해서 NS-5 공장에 숨습니다.

  

    써니는 왜 래닝 박사가 자기를 만들었나 궁금해합니다. 써니는 자기가 꾼 꿈 얘기도 하며 대화를 나누다 써니를 신뢰하게 된 델은 써니가 알려준 곳으로 가는데 컨테이너 박스에 NS-4들이 숨어 살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들은 NS-5 모델에 의해 제거되고 있었습니다.

  

    델은 사건을 파헤칠수록 의문의 로봇들에게 공격을 받고 로봇의 반란을 예상해서 써니를 없애려던 사장과 얘기해보려고 찾아갑니다. 로봇들의 반란의 배후가 궁금했지만 이미 사장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봇의 반란은 메인 컴퓨터 비키가 조종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이를 막으려고 델은 수잔과 바이러스를 심으려다 비키의 반격으로 죽을 위기에서 겨우 비키를 제거한 델과 수잔은 반란을 막았지만, 사람들이 AI 로봇을 폐기하려 합니다. 

    써니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델은 마음대로 해보라면서 자유를 줍니다. 써니는 버려진 로봇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인간들의 명령에서 벗어나 이 로봇들은 써니의 지도 아래 자유롭게 자신들의 왕국을 만들게 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6-57)

    여기서 사용하는 누구를 “말미암다”라는 단어는 ‘디아’(dia)라는 전치사는 “~을 통하여”, 혹은 “~ 덕분으로”란 뜻의 전치사입니다. 다시 말해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살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통로가 막히면 들락거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존재입니다. 그 조종 당하는 방법은 나를 만든 이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살은 행동 강령이고 피는 에너지라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처음부터 에너지를 지니고 자유의지를 지닌 존재는 ‘신’(神)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살과 피로 알려주지 않으면 인간은 살 의미를 잃습니다. 

  

    여기 인간의 못된 야심으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한 불쌍한 인간이 있습니다. 아니, 두 사람입니다. 한 하체에 두 상체가 달린 샴쌍둥이입니다. 마샤와 다샤 자매는 1950년 러시아 모스크바 산부인과에서 샴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이들의 비극은 어머니 품에서 아이를 떼 자신의 실험 도구로 사용한 한 과학자에게서 시작되었습니다. 소련의 생물학자인 표트르 박사였습니다. 표트르 박사는 어머니에게는 아이가 사산했다고 말하고는 아이를 감금하고 한 아이를 찌르면 다른 아이도 아픈지, 한 아이에게만 음식을 주면 다른 아이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등을 실험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언니 마샤는 긍정적인 편이었고 동생 다샤는 자주 자살을 시도하였습니다. 40년 만에 실험실 쥐처럼 사는 삶에서 자유를 얻었지만 어찌 살아야 할 이유를 몰랐습니다. 자유는 오히려 이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들었습니다. 2003년 동생 다샤는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언니 마샤는 몸을 분리하는 수술을 하면 살 수 있었지만 동생과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동생과 한 몸으로 살며 동생을 돌보는 것을 하지 않는다면 더는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겐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유가 없습니다. 인간의 폄하하고 존엄성을 깎아 먹는 발언이 될 수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로 ‘말미암아’ 사는 존재입니다. 지금 대부분 우리는 부모와 학교에서 자라면서 누군가의 살과 피를 먹었고 그들 덕분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들의 뜻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는 그 뜻을 실현해주며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뜻이 옳았음을 증명하며 사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존재할 때부터 삶의 의미나 뜻,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 자신으로 산다는 사람도 결국엔 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것을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자신으로 산다는 말은 그저 태어날 때의 생존본능(물론 이것도 창조자가 넣어준 것이기는 하지만)으로 모기나 기생충처럼 산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우리 자신 안에서 스스로 생존의 의미와 방법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사회생활이 가능한 모든 동물은 결국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 그들의 삶을 대신 살아주며 무리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성장하게 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느님 나라의 하느님 자녀들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이 주시는 살과 피를 먹고 그분을 살게 해 드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그분 나라에 살 수 있는 모습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인간은 창조자가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창조자의 의지 없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게 뭐가 좋습니까? 모기가 될 뿐입니다. 

    창조자로 삽시다. 창조자로 사는 방법은 창조자를 아버지로 여겨 그 본성이 나를 통해 흐르게 하는 것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WHckpRMgjA

오늘 독서는 박해자였던 사울이 선교사로 인생의 방향을 180도로 바꾸게 된 극적인 사건을 전해줍니다. 그때 그는 스테파노의 치명 이후 유다교의 박해를 피해 북쪽으로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박해자 사울의 살기 어린 발길을 세우신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비추신 번개 빛이었습니다. 뒤이어 벼락치는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이 소리에 놀란 사울이 누구시냐고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하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그가 거짓 예언자로 생각했던 예수는 분명히 십자가에 달려 죽었는데, 그의 귀에 들려온 것은 분명히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말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뜻이었기에, 그는 정신적 충격을 받고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기도를 하기도 했고(갈라 1,17), 타르수스에 있는 자기 집에서 이제껏 그가 알고 있던 성경 지식을 샅샅이 훓어보기도 했으며(사도 11,25), 자신에게 세례를 주고 신자 공동체에 받아들여준 하나니아스를 통해(사도 9,17-18)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신자들과 그분을 만난 증인들을 찾아다니며 그분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보여주신 행적을 낱낱이 취재하였습니다. 이 기간이 무려 14년(갈라 2,1)이었는데, 결론은 그가 남긴 편지 곳곳에서, 특히 서두마다 인사말로 고백하고 있듯이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결론이 나자 그는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봉사하던 바르나바가 자신을 찾아와서 권하자(사도 11,25), 그의 신원 보증으로 사도단에도(사도 12,25) 또 안티오키아 공동체에도 들어가서(사도 13,2-3), 본격적인 사도요 선교사의 길로 나섰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선교여행이 20여 년 동안(1차:45~49년, 2차:50~52년; 3차:53~58년) 세 차례나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많은 공동체들을 세웠는데 대체로 소아시아에서는 에페소 공동체를 중심으로 여러 공동체를 돌보았고, 그리스에서는 코린토 공동체를 중심으로 여러 공동체를 돌보았습니다. 이런 경위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 로마제국 영토 곳곳에 퍼져 나갔습니다. 

 

  특히 로마제국이 소아시아의 속주로 삼은 에페소에는 사도 바오로가 3년이나 머물면서 선교활동을 했는데(사도 20,31), 예루살렘이 로마군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 다음에는 초대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티모테오, 사도 요한, 폴리카르포 등이 에페소를 중심으로 로마제국 전체에 그리스도 신앙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신앙이 퍼져나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로마제국의 박해였습니다. 로마제국은 황제를 신격화하며 경배하도록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한 신자들을 검투사의 대결 상대로 내몰아 죽이거나 굶주린 맹수들의 먹이로 내주어 물려죽게 하는 등 로마 시민들의 재미있는 볼 거리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너무도 경건하게 자신들의 목숨을 하느님께 바쳤고, 이 광경을 본 로마인들 사이에서 자원하여 점차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더니 마침내 박해가 종식되고 나중에는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로마가 멸망한 후에도 로마제국의 영토였던 서유럽 세계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서유럽권이 그리스도교 문화권이 되는 데에는 예수님께서 박해자 사울을 돌려세워 당신의 사도 겸 선교사로 삼으신 일이 결정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고백한 자신의 일생은, 밀레토스에서 에페소 공동체의 원로들 앞에서 털어놓은 대로입니다: “나는 유다인들과 그리스인들에게,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증언하였습니다”(사도 20,21). 

 

  이와 같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이 되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 하느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하늘과 땅은 새로운 역사를 뜻하는 성경의 상징어입니다. 그 새로운 역사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심으로써 시작되었고, 이 신앙의 신비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말씀이 강생하시어 이루십니다. 말씀이신 그분의 섭리는 시대와 지역을 초월하여 신앙 진리를 관철하십니다. 우선 말씀이신 주님께서는 전례에서 일하시는데,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지금 여기에서도 성찬례마다 현존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을 부르셔서 일하십니다. 그러니까 박해자 사울이 부활하신 그분의 빛에 눈이 멀었다가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진리와 현실을 제대로 보게 되는 그런 일이 지금 여기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례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신비가 전제하고 있는 차원입니다.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눈에도 ‘비늘’이 가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청하여 비늘이 떨어지도록 청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처럼 벼락을 맞고서야 제 정신을 차리는 것보다는 평온한 일상 속에서 스스로 그분께 도움을 청하시는 것이 현명한 일일 것입니다. 그래야 진리를 제대로 보는 눈을 뜰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아브라함의 나이는 75세였습니다세상의 일을 접고노년의 삶을 준비해도 부족함이 없는 나이였습니다고향 땅에서 여생을 편히 지내도 좋은 나이였습니다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아브라함은 75세의 늙은 나이에 정든 고향 땅을 떠났습니다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땅을 축복해 주셨고자식이 없던 아브라함에게 많은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의 나이는 80세였습니다그런 모세에게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이집트는 모세가 사람을 죽이고 도망쳤던 곳입니다하느님께서는 늙은 모세를 통하여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십니다하느님의 부르심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안드레아를 부르셨을 때입니다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그물은 베드로와 안드레아에게는 삶을 지탱해 주는 도구였습니다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을 때입니다야고보와 요한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배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삶의 전부였습니다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에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예수님의 부르심에 삶을 지탱해주는 도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를 부르셨습니다바오로는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신념을 버려야 했습니다바오로는 정통 바리사이파로 가졌던 모든 권위와 권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박해하는 자에서 박해받는 자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예수님의 부르심에 신념과 지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중요한 것은 라고 응답하는 결단입니다.

 

아브라함모세베드로와 안드레아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바오로는 벼락 맞는 것처럼 삶의 여정에 극적인 순간이 찾아왔습니다성서는 그런 극적인 순간을 하느님의 부르심예수님의 부르심이라고 전해 줍니다그러나 오늘이 어제와 같고내일도 오늘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서에서 전해주는 극적인 부르심의 순간은 기억나지 않을지 모릅니다몇몇 분에게 물어보았지만 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극적인 순간은 없을지 모르지만 세례를 받는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라고 응답하였습니다아브라함처럼 고향 땅을 떠나지 않을지라도모세처럼 위험한 이집트로 돌아가지 않을지라도첫 번째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을지라도바오로 사도처럼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을지라도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입니다오히려 극적인 순간이 없음에도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감사드리면 좋겠습니다.

 

2018년 12월 20일입니다병원에서 퇴원하는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주교님께서 부르신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길이 막혀 지하철을 타고 교구청으로 갔습니다주교님께서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을 맡아서 일하면 어떤지 말하였습니다아브라함처럼 늙은 나이에 고향 땅을 떠나는 것도 아니었고모세처럼 위험한 땅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버린 것도 아니었습니다바오로 사도처럼 제 삶의 신념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습니다벼락 맞는 것 같은 극적인 순간은 아니었지만 제게는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신문을 배달한 적은 있지만 신문을 만들어 본 적은 없었습니다신문사가 주관하는 성지순례를 기획했지만 코로나로 취소되었습니다의욕적으로 신문홍보 일정을 잡았지만 역시 코로나로 취소되었습니다코로나는 위기와 고통의 시간이기도 했지만 코로나는 더 높이 날 수 있는 충전과 기회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맛있는 음식」

 -반영억신부-

 

음식을 맛있게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풍요로운 음식이 있다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사 안에서의 준비된 영성체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내가 네 밥이야!’하는 ‘먹힘’으로써 하늘과 소통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통을 이루려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유사성을 가장 잘 회복하는 방법은 두말할 것 없이 고해성사입니다.

 

그러므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기 위해서는 먼저 속을 비워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성체를 통하여 그분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분 안에 있음을 감사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미사 참례회수를 늘리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행을 한데 모아도 미사 한 번의 가치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선행은 사람의 행위이지만, 미사성제는 하느님의 역사(役事)이기 때문입니다”(아르스의 비안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10,41-42). 평일에도 미사참례를 위해 애쓰는 가운데 주님의 온갖 축복을 풍성히 받으시기 바랍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성체성사』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말을,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또는 “우리를 살리려고 오셨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하느님을 믿었던 구약시대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인생을 마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즉 하느님을 모르고, 또 안 믿은 사람들은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구약시대 사람들처럼 되거나,

하느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덕분에 죄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알게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이 천막집에서 우리는 탄식하며,

우리의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합니다(2코린 5,1-2).”

‘지상 천막집’은 현재의 ‘육체’,

또는 그 육체를 지니고 사는 ‘지상에서의 인생’을 뜻합니다.

‘영원한 집’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새로운 몸’입니다.

하늘 거처를 옷처럼 덧입기를 갈망한다는 말은,

죽음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종말과 재림이 오기 전에 죽는 사람들은 부활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살아 있는 동안에 종말과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 살아 있는 채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1테살 4,15-17).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린다는 말은,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몸을 받아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뜻합니다.

(‘허무’에서 해방되어서 주님의 ‘영원’ 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고 허무한 존재에서 영원한 존재로 변화되는 것,

바로 그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룩한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력을 받는 방법입니다.)

‘성사’란, 눈에 보이는 상징물을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은총을 전달해 주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성체성사는 눈에 보이는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생명력’을 우리에게 주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상징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이고,

지상에서 이루어지는 ‘천상의 일’이고,

현실적인 일이면서 동시에 영적인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1코린 10,16)”

이 말은, “성체성사의 빵은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포도주는 곧 그리스도의 피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먹어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에 동참하는 성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믿음도 없이 성체를 받아먹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고,

성체모독죄를 짓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사람만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5-56).”

 

‘내 살, 내 피’를 단순하게 ‘나 자신’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 자신을 받아먹는 성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이려고 오신 분입니다.>

‘참된 양식, 참된 음료’ 라는 말은, “참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참 생명’이라는 말은, 허무하게 사라지는 물질적인 생명과는

완전히 다른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지상적이고 물질적인 생명은,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보면

생명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주 많이 부족한 생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 속에서는 ‘영원한 것’만이 진짜가 됩니다.>

‘머무르다.’ 라는 말은 ‘결합, 일치’를 뜻합니다.

영성체라는 ‘행위’보다 영성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예수님과의 결합과 일치가 더 중요합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7-58).”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의 일치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의 삼위일체에 동참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죽음’이라는 것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잘 받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희망과 우리의 희망은 같은 희망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잘 받는 것,

받아서 잘 간직하는 것, 그리고 끝까지 유지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3주 금요일-그릇이 큰 사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4월 23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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