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6일 부활 제5주 월요일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 요한 14,21-26)
“Whoever has my commandments
and observes them
is the one who loves me.
Whoever loves me
will be loved by my Father,
and I will love him
and reveal myself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자신들을 신처럼 대접하려는 리스트라 사람들을 소리 질러 말린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당신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이라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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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 워싱턴 주의 어느 식당 주인과 직원으로 있는 요리사가 다투었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아주 사소한 것이었습니다. 즉, 커피를 어디에다 마셔야 하냐는 것이었지요. 요리사는 찻잔에, 식당 주인은 아무 데나 마셔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분명 별것도 아니었는데, 서로 언성이 높아졌고 식당 주인은 이 요리사를 죽이겠다면서 총을 들고나와 발사했습니다.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한 싸움은 안타깝게도 한 명을 죽음으로 이끌었습니다. 누구였을까요? 총을 식당 주인이 들고 있었으니 요리사가 죽었을 것으로 예상했겠지만, 우리의 예상과 달리 식당 주인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발에 의한 것일까요?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식당 주인의 사망 원인은 심장병이었습니다. 극도의 분노와 더불어 격렬한 움직임까지 더해져서 급성 심근경색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분노는 우리의 몸을 크게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사람이 고혈압과 심장병으로 고생할 확률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따라서 분노를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말은 쉽지, 화가 나는 것을 어떻게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화가 날 때 주위를 딴 곳으로 돌리고, 가능한 그 환경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그 분노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자신의 마음이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미움,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나를 불행의 길로 들어서게 할 확률이 높게 만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의 구원을 위해 당신이 직접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행복은 ‘사랑’에서만 시작된다는 것을 계속해서 강조하셨고 당신이 먼저 그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사랑하시고, 사랑 가득한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 좋아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만약 사랑한다는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않고, 또 싫어하는 것만 한다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최고의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사랑을 주시는 주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을 사랑한다고 입으로만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모범을 따라 우리 역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조재형신부-
‘구글’은 검색엔진입니다. 궁금한 것을 입력하면 정보를 알려줍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 운전합니다. 구글에서 운영하는 유튜브를 이용해서 영상물을 봅니다. 팬데믹 상황에서도 구글은 성장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구글의 운영방식이 비대면 사회에 최적화 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구글의 경영 마인드가 ‘사용자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유튜브는 수익의 50%를 영상물을 올린 사용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합니다. 사용자를, 고객을 수익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익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로 보기 때문입니다. 고객의 만족을 넘어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기업은 어려운 경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감동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8년 전의 일인데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납니다. 여행 갔다가 신발이 문제가 생겼습니다.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했습니다. 신발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서비스센터에서는 사무실로 가지로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보통은 서비스센터로 갔었기 때문에 조금 놀랐습니다. 신발을 다 고친 다음에는 택배로 신발을 보내왔습니다. 사용자 중심의 회사였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회사였습니다. 그 신발회사의 이름은 ‘칸투칸’이었습니다. 저는 칸투칸 신발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졌습니다. 누가 신발을 산다고 하면 당연히 칸투칸을 추천했습니다.
본당에서 미사 시간은 정해져있습니다. 그런데 미사시간에 변동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장례미사입니다. 장례가 나면 연령회장님은 두 가지를 고려해서 미사시간을 부탁하였습니다. 요즘은 화장을 많이 하기 때문에 화장하는 시간을 고려합니다. 선산으로 고인을 모시는 경우는 선산까지 가는 거리를 고려합니다. 보통은 오전 7시나 10시에 장례미사를 하였습니다. 한번은 새벽 5시에 할 수 있는지 연락이 왔습니다. 장지가 멀기 때문에 유족들이 일찍 하기를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하기 위해서는 저도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전례봉사자, 성가대도 일찍 나와야 했습니다. 다행히 모두가 양해를 해서 새벽 5시에 장례미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용자 중심으로, 고객에게 만족을 주는 분이 2,000년 전에 계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은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으셨습니다. 우리와 같이 먹고, 우리와 같이 마시고, 우리와 같이 웃고 우셨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착한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 양들도 목자의 목소리를 안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밤을 새워 들판을 거닌다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면 기뻐하며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고 하셨습니다. 성체성사를 제정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을 나누어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고객 감동의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신’으로 섬기려 할 때, 두 사도는 단호하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할 따름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헛된 것들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또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느님께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입니다.” 원칙과 규칙을 지키는 것이 때로는 손해를 보고, 어리석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성공한 사람들은, 인류 문명에 공헌한 사람들은 모두 원칙과 규칙에 충실했던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한 주일을 시작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신앙인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사랑의 계명을 지키며 힘차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바로미터를 제시해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 14,23)
이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해보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금방 들통 납니다.
여기에서 '계명과 말씀을 지킨다'는 말은 우선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곧 사랑과 신의로 맺어진 예수님과의 결속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믿지 않고서는 그분의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래 '지키다'라는 동사는 '간직하다', '새기다' 혹은 '신경 써서 돌보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곧 마음이 담긴 행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의무나 규칙이나 형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이 전제됩니다.
그러기에 사랑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넘어,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지키는 것, 곧 마음으로 결속된 바를 사랑으로 실행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첫째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1요한 4,20)
그렇습니다.
사랑의 증거는 행실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이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한 14,21 참조).
이미 그이 안에 거처를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를 당신의 어좌로 삼으신 까닭입니다.
이미 그이 안에 함께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는 말씀은 ‘안에’(εν)서 함께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성령으로 일치를 이루어 산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내주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삼위의 사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표시는 지금 내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자 안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1요한 4,16)
그러기에 만일 지금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있고, 그것도 가장 보잘것없는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냉엄한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요한 14,23)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주님!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저 자신보다 당신을 앞세우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도 받아들이게 하소서.
당신을 믿고 신뢰하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지키게 하소서.
당신을 따르게 하소서.
당신을 사랑하오니, 당신의 말씀을 받아 지키고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 26)
-한상우신부-
성령의
이끄심으로
생명의
말씀을 읽는다.
말씀을
다시 열리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믿게 하신다.
한없이
가장 좋으신
성령을
매순간
우리들에게
주신다.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기억과 사랑의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신다.
성령의 시간이
바로 착한
열매를 맺는
은총의
시간이다.
살아야 할
이유를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다.
길을 다시
찾아 주신다.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새 마음으로
이어주신다.
예수님을
만나게
하시는
살아계신
성령이시다.
숨 쉴 때마다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성령이시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내려 놓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하신다.
십자가의
상처까지도
가장 좋은
사랑이 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다시 새롭게
다시 뜨겁게
하시는
사랑의 참된
보호자 성령께
우리의 삶을
맡겨드린다.
모든 것을
일치로
새롭게 하시는
성령이시다.
-박문수신부-
오늘 독서를 읽다가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멈추었습니다.
도대체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란 어느 정도를 두고 하는 말일까?
바오로 사도가 만난 앉은뱅이에게 그런 믿음이 없었다면,
바오로는 그에게 치유와 구원의 기적을 베풀 수 없었을까?
가톨릭 교회는 구원의 은총이 인간 편에서의 선행과 공로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자유롭고 자비로운 은총 안에서 허락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와 정반대인 듯 보이는
또 하나의 논리를 곁에 세워 두고 있습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만,
그 구원을 받고자 인간 편에서도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신학과 ‘행동이 따르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 사도의 신학을 동시에 병행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 편에서의 노력을
긴장 관계 안에 놓아두고, 그 둘 사이에 조화를 이루도록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통한 구원과 행실을 통한 구원,
이 둘을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쌓으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구원을 베푸시는 분을
사랑하는 것, 아니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 그것이 믿음과 행실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길이 아닐까요?
오늘 하루,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현존을 보여 주는 주위의 형제들을 마음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5주 월요일-정결한 복음 선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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