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5월 18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요한 15,1-8 )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할례 문제를 두고 공동체에서 분쟁과 논란이 생기자 사도들과 원로들이 모여 논의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풍성한 열매를 맺지만, 그러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말씀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바이러스의 감염 속도에 우리는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호흡기를 통해 감염됩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보다 더 빠른 전염 속도를 보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감정의 감염입니다.
걷어차인 고양이 효과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어느 회사의 중간 간부가 사장에게 심한 질책을 받았습니다.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채 자기 사무실에 들어왔고, 자기 밑의 부하 직원에게 사소한 것을 두고서 한바탕 화를 냈습니다. 이 부하 직원도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별것 아닌 이유로 화를 냈고, 억울한 아내는 침대에서 뛰어노는 아이를 혼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옆에서 뒹굴고 있는 고양이를 발로 찼습니다.
감정의 전염을 이야기하는 내용입니다. 감정의 연쇄 현상은 우리 삶에서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나쁜 감정이 돌고 돌아 내게로 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나쁜 감정의 전달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쁜 감정을 끊어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좋은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나쁜 감정을 끊어 버리고 대신 좋은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이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좋은 가지의 모습입니다.
포도나무를 가꾸는 농부는 열매를 많이 맺도록 2, 3월에 쓸모없는 가지를 쳐 냅니다. 8월이 되면 농부는 두 번째 손질하면서 돋아난 새싹들을 살피고 싹수가 노란 것은 따 버립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지의 역할은 좋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면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기에 쳐 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좋은 열매는 무엇일까요? 사랑입니다.
참포도나무이신 주님이기에 우리가 좋은 가지가 된다면 분명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좋은 가지가 되어야 사랑이라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참 신앙인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참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좋은 가지인 우리는 절대로 나쁜 감정의 전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에 집중해서 사랑을 세상에 전달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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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많이 내는 사람이 행복한 이유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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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7E7HZPulUSY
포도나무의 비유가 주는 역사적 교훈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ICPPUk3xAVY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애와 사도들의 사명을 겨냥하여 포도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농부이시고 예수님께서는 그 하느님께서 심으신 포도나무이며, 우리는 그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에 충실하면 풍성한 선교적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내쳐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가 스스로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 빈약한 성과를 내거나 또는 헛수고를 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초점은 사도들과 신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야 한다는 요청입니다.
또한 오늘 독서에서 초대교회는 내부에서 발생한 첫 시련을 맞고 있습니다. 바로,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선교활동에서 비롯된, 이방인 입교자에게 할례를 주어야 하느냐 아니면 면제해도 좋으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첫 사도회의를 열었으니, 사도들이 예수님 없이 성령의 이끄심을 식별하여 대처해야 했던 첫 공의회였습니다. 자칫하면 초대교회가 내부 갈등으로 말미암아 분열될 수도 있었던 중대한 위기에서 사도들의 식별 역량이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오늘 미사 말씀의 초점은 정체성과 식별의 문제입니다.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이틀에 걸쳐 소개해 드린 ‘고조선 문명’ 연구 성과는 실로 우리 역사학계의 오랜 숙원을 해결한 쾌거였고 국제학술계에도 이미 보고가 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기원에 대해 기록해 놓은 기존의 문헌들은 중국측과 일본측이 힘을 가지고 있던 당시에 모조리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하고 조작해 놓았기 때문에, 신용하 교수는 신빙성이 의심스러운 이들 문헌에 의존하지 않고, 영국과 프랑스와 독일 등 서구 학계의 연구성과 특히 고고학, 문화인류학, 기상학 등의 통섭적인 연구성과를 기본 자료로 삼고 또한 컴퓨터의 발달로 방대한 자료를 통계 처리할 수 있게 된 21세기의 흐름에 맞추어 한반도와 만주 등지에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을 객관적으로 검증함으로써 이런 엄청난 연구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문헌은 조작 가능하지만, 유적과 유물은 조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증사관’의 명분으로 포장하여 기존 왜곡된 문헌 사료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게 막아온 기성 사학계가 반박을 하지 못하는 것도 그 덕분입니다.
그런데 민족적 자부심을 한껏 드높일 만한 이 고조선 문명에 대한 연구에서도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자생했으며, 신앙과 종교가 자연발생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유적과 유물 등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는 과학적으로 접근하면서도, 이차럼 종교와 신앙 그리고 문화와 언어 등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비과학적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요 한계입니다.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하는 신관은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 풍조에서 보듯이 인간 관념의 투사(投射)일 뿐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선에로 지향되기는커녕 그저 인간이 지닌 능력을 과시하다가 자멸할 뿐이고, 하느님 신앙은 하느님께로부터 먼저 주어진 선한 인격적 체험을 계시받아서만 수용되고 전파된다는 것이 가톨릭 신학 신론(神論)의 상식이며, 이것이 사랑의 진리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도 부합합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첫 역사에 드리운 문화, 즉 제천의식(祭天儀式) 요소라든지 여기서 유래된 천손의식(天孫意識)이 홍익인간의 정신이나 평화 실현의 의지로 나타난 면모만 보더라도, 계시된 신관을 수용하기는 했으나 자신들만이 선택된 민족이라는 편협하고 국수적인 면모를 고수함으로써 자멸(自滅)했던 히브리 문명과는 분명히 달라서 더 보편적이고 개방적입니다.
우리 민족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민족의 기원 문제와, 또 이 기원에 깃든 신성을 알아보느냐 혹은 우리 민족의 종교와 신앙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고 치부하고 마느냐 하는 신성의 식별 문제는 우리 민족과 한국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포도나무의 비유에 담긴 역사적 교훈에 따라서, 과연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가 뜻한 바 풍성한 열매를 문화적으로나 선교적으로 맺을 수 있느냐의 성패가 이 정체성 식별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화사관(慕華史觀)과 식민사관에 물들었다는 혐의를 짙게 받고 있는 강단사학계는 물론 이들과 학문적으로 논쟁적인 대척점에서 한민족의 선진성과 우수성을 진작시키고자 하는 재야사학계와, 그리고 이 두 진영과는 독립된 입장에서 고조선 문명론을 주창한 신용하 교수 등이 이룩한 학문적 업적이 모두 무신론적인 학문 풍토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안하면, 우리 민족 역사에 깃든 신성을 추적하는 일이나 또한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식별 작업은 신학계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져 있는 신학 토착화의 과제입니다. 이는 서구에서 들어온 까닭에 서양 종교라는 선입견이 다분한 그리스도 신앙을 한국인의 정서와 사색으로 해석해 내야 하는 신앙 토착화의 과제와 함께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져 있는 정체성 확립의 과제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진 현상과 사태, 즉 신앙 진리의 자발적 수용, 성사적 갈망에서 이루어진 놀랄만한 선교 성과, 박해에 맞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자 전국에 교우촌이 세워진 현상, 치명의 용기를 불사한 만여 명의 순교자들의 존재와 이 과정에서 갈수록 늘어났던 입교자들의 존재 등에 담긴 역사적 교훈을 이해하기 위해 그러합니다.
이 한국 초대교회의 자생적 발생 현상과 백년 박해 속에서 지속된 순교 사태는, 가톨릭교회의 2천년 역사 안에서도 전무후무한 이례적 현상이거니와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 안에서도 역시 전무후무한 이례적 사태였습니다. 이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편 초대교회 시절에 유다교와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공동생활 양식을 제국내 영토 곳곳에 전파하여 끝내 로마제국을 그리스도교 국가로 변모시키긴, 성령의 사기지은 효과로만 설명 가능합니다.
우리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인지, 또 우리 가지의 뿌리는 과연 포도나무에서 나온 것인지를 식별하는 역량에 따라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열매가 달라질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 읽은 동화입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상황에서 간절히 기도하니 하니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습니다. 오빠와 동생은 그 줄을 잡고 무사히 하늘로 갔습니다. 아이들을 잡으려고 호랑이도 기도했습니다. 하늘에서 줄이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습니다. 호랑이는 올라가다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이들에게는 튼튼한 줄이 내려왔지만 호랑이에게는 썩은 줄이 내려왔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살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호랑이에게는 그런 간절함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양파 한 뿌리에서 읽었습니다. 생전에 착한 일이라고는 가난한 이웃에게 양파 한 뿌리를 나누어 준 것 밖에 없던 노인이 있었습니다. 노인은 지옥에 갔습니다. 할머니의 수호천사는 양파 한 뿌리를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그 양파의 뿌리를 잡고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뿌리를 잡고 올라가는데 다른 사람이 할머니의 발을 잡고 그 뒤로도 사람들은 매달려서 올라왔습니다. 할머니는 뿌리가 끊어질 것 같아서 발에 매달린 사람을 밀어냈습니다. 그러자 잘 올라가던 양파 뿌리가 끊어졌습니다. 이유는 혼자만 살려는 할머니의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할머니가 떨구어내지 않았다면 모두가 살아서 천국으로 갔을 것입니다. 줄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의 마음이 문제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되었던 할례가 나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할례가 중요한 전통이지만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고통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할지에 대해서 화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개최된 최초의 공의회입니다. 결론은 이방인에게는 할례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구원을 위한 튼튼한 동아줄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내린 결론은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교회의 전통은 복음을 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와 율법이 아니었습니다.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입니다.
연이 하늘을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연을 움직이게 하는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무게 중심을 잡아주는 몸체와 방향을 정하는 꼬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줄입니다. 연줄은 연의 자유를 속박하는 것 같지만 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연줄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어떤 연도 연줄이 끊어지면 곧 땅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연도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면 바람을 이겨낼 수 없을 것입니다.
우주는 물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모두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주는 에너지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속한 은하수 은하, 우리와 한참 떨어진 안드로메다은하도 에너지의 관점에서는 모두 연결된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도, 뜨겁게 타오르는 저 붉은 태양도 모두가 소중한 것입니다. 우주의 모든 물질이 에너지의 관점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라면 신앙은 당연히 신앙의 시작이며 마침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점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이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여러분 안에 머무르면,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여러분은 가지입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진실로 원줄기이신 주님께 제대로 붙어있기는 한 것입니까?
-양승국신부-
포도나무 비유에 대한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 주교님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당신의 사랑에 뿌리박는 것이 얼마나 필요하고 또 당신께 붙어있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를 보여주시고자, 당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시고 당신과 결합되어 당신께 붙어있는 이들을 그 가지에 비유하셨습니다. 실상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나누어 받게 되었습니다.”
“포도나무 뿌리가 가지들에게 양분을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이, 성부의 외아들이신 하느님의 말씀께서도 성도들에게 당신의 신성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이 당신과 가족 관계를 이루게 하시고, 신앙을 통해서 결합되어 있는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베풀어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기 위해 세 가지 측면에서 노력하라고 당부하고 계십니다.
① 어떻게 해서든 포도나무 원줄기, 곧 주님께 딱 붙어있으십시오.
② 다른 일 다 제쳐놓고 주님 안에 항상 머무르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③ 주님께 붙어있고, 머무는 것에 그치지 말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풍성한 결실을 맺으십시오.
주변을 살펴보면 정말 안타까운 유형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름 주님께 딱 붙어있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머물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계속합니다. 규칙적인 성사생활과 기도생활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매일 미사와 기도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 속에서의 열매는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 국가나 사회 전체가 겪고 있는 고통이나 슬픔에 무감각합니다. 지척에 살아가는 동료 인간이 감내하고 있는 참혹한 현실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습니다.
그릇된 이념이나 가치관에 깊이 함몰되어 빠져나올 줄을 모릅니다.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성장이나 쇄신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더 나은 세상 건설은 남의 일로 여깁니다.
조금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서 친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는 가차 없이 쳐낸다 하시니, 빨리 삶의 태도를 바꾸셔야 할 것입니다. 진실로 원줄기이신 주님께 제대로 붙어있기는 한 것인지? 주님 안에 정확히 머물고 있는 것인지? 진지한 점검과 성찰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 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 곧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세 가지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오늘 복음에서 우선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 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 그리하여 '열매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제자는 예수님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 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됩니다.”
(1코린 6,17)
그러기에 '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곧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요, ‘상호교제’요, ‘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 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고, 참으로 신비로운 방식으로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 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요,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 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
“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그리고 그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를 ‘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곧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여 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 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 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 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저는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
아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나를 지배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논리를 펼쳐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된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이가 늘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신앙의 삶을 통해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송영진신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요한 15,1-2).”
이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하시는 말씀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는 ‘한 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1코린 12,27).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또 예수님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구원’과 ‘구원받기 위한 노력’을 모두 뜻합니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면서도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붙어 있으면서’는 뜻으로는 ‘붙어 있으면서도’입니다.)
세례를 받고 세례대장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가 그렇게 열정적으로 선교활동을 한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 확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고 ‘끝까지’ 노력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누가 보아도 위대한 사도이며 선교사입니다.
그런 위대한 성인도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니,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는 “심판 때에 멸망을 선고하신다.”입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신앙인입니다.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라는 말씀은,
주님의 ‘가르침’과 ‘보호’와 ‘인도’를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여기서는 가지치기를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즉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시험과 시련과 고난을 뜻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는 “구원과 생명을 주신다.”입니다.
<이 말씀은, 충실한 신앙인들만 차별적으로 보호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모든 사람을 보호하시는데,
그것을 거부하거나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은 자기들이 거부하고
무시해서 그 사랑과 보호를 받지 못합니다.
충실한 신앙인들은 능동적으로 그 사랑과 보호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3-6).”
“너희는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은,
발을 씻어 주실 때에도 하셨던 말씀입니다(요한 13,10).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보호와 인도로
이미 ‘구원’에 거의 가까이 가 있는 상태이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 머물러라.” 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도 지금 ‘구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목적지에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끝까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머무르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말은,
예수님과 우리의 ‘결합과 일치’를 뜻합니다.
그 결합과 일치는, 예수님 쪽에서는 우리를 지켜 주시는 일이고,
우리 쪽에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니까,
예수님과 우리의 결합과 일치는 우리 쪽의 응답과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 없이는 구원도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받기를 바라면, 끝까지 예수님만 믿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은 “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이고,
밖에 던져진다는 말과 태워버린다는 말은 멸망을 당한다는 뜻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붙어 있다가 떨어져 나가서 멸망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바오로 사도는 떨어져 있었던 사람인데, 극적으로 회개하고,
예수님 안에 머물러서 많은 열매를 맺은 사람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7-8).”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는 “아무거나 청하여라.”가 아니라,
“구원과 사랑의 실현을 위한 일을 청하여라.”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서, 예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성모님처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청하게 됩니다.
그 기도는 틀림없이 이루어집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은, “너희가 참으로
나의 제자로 살면서 많은 열매를 맺으면(구원을 받으면)”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일이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목적지가 어디인지, 또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분명히 알고서
그곳을 향해서 걸어가는 사람인데, 눈앞의 현실이 너무 힘들 때가 많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목적지를 잊어버리고 방황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항상 변함없이 내 안에 머물러 계신다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떠나 있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떠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믿음으로 더욱더 간절히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구원을 향해서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5주 수요일-고독은 살되 고립은 살지 않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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