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20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5. 20. 06:32

2022년 5월 20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요한 15,12-17)

 

"This is my commandment:

 

love one another 
as I love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과 원로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고 당부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미국의 뇌신경학자 데이비드 린든은 그의 책 ‘터치’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생후 이삼 년 동안 아이를 많이 만지지 않거나, 껴안지 않거나, 쓰다듬어 주지 않으면 재앙이 발생한다. 접촉의 결핍은 결코 나중에 만회되지 않는다.”

실제로 이를 실험해 본 사람이 역사 안에 있었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프레데릭 2세 황제입니다. 그는 원초적인 언어를 찾기 위해, 갓난아기를 독방에 두고 인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하는 상태로 키워봤습니다. 인간의 말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 가장 원초적 언어라는 판단을 한 것이지요. 결과는 갓난아기 모두 얼마 못 가 죽고 말았습니다. 접촉의 중요성을 생각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 주실 때, 늘 접촉하셨습니다. 당시에는 죄의 결과로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만지는 것을 절대로 안 되는 것으로 생각했고 심지어 가까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병자들을 만지셨고, 살이 뭉그러져 끔찍한 나병환자 역시 만지셨습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접촉입니다.

코로나 초창기, 어떤 할머니께서 제게 오셨습니다. 코로나 확진자와 같이 있었다면서 안수를 청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셔서 검사하셔야 할 것 같은데, 저를 찾아와 바이러스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기도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겁이 났습니다. 하지만 기도를 청하는 분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습니까? 안수해드리고, 이상이 생기면 연락 달라고 했습니다. 저 역시 검사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예수님께서 만져주신 손길을 묵상해 봅니다. 사랑이 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런 사랑을 간직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사랑이 사람을 살리고, 사랑 안에서 함께 사는 길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시고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이는 단순히 입으로만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도저히 접촉할 수 없는 사람을 향해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주님께서는 종이 아닌 ‘나의 친구’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종과 주인은 수직적 관계이지만, 친구는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그만큼 주님과의 친밀감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습니까?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발견하는 것(츠베탕 토도로프).

 나는 너희를 '친구'라 부른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QEJcXOzkJU4

오늘 복음도 역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내려주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면 당신 ‘친구’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계명으로 우리를 친구로 만들고 싶으신 것입니다. 

  

    친구는 대등한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등하게 여기시려 하는 것은, 물론 우리도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시려는 뜻도 있지만, 그래야만 당신이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하실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시는 이유는 아버지께 영광을 드려 다시 아버지께 영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인간을 대하는 방식으로 하느님의 지위를 유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와를 생각해봅시다. 하와는 죄를 짓고 자기 본성을 타락시켰습니다. 이때 한 행동이 무엇일까요? 아담도 자신처럼 낮은 본성으로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내밉니다. 아담은 그것을 받아먹고 같이 타락합니다. 하와는 여기에서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를 만들고 싶은 것뿐입니다. 

    만약 온 세상에 인간이 나 혼자밖에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라도 인간을 만들고 싶을 것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큰 욕구는 ‘소속감’입니다. 하느님이나 죄인이나 다 옆에 있는 사람을 자기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부부도 결국 오래 살면 친구가 되어가지 않습니까? 어쩌면 모든 관계의 끝은 ‘친구’일 수 있습니다.  

 

    ‘캐스트 어웨이’(2000)에서 톰 행크스는 무인도에 표류합니다. 너무 외로워 배구공을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그와 친구를 맺습니다. 누가 봐도 미친 짓입니다. 하지만 미친 짓이라도 친구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엄마의 젖을 먼저 찾을까요, 아니면 엄마의 따듯함을 먼저 찾을까요? 해리 할로우의 실험에 의하면 새끼 원숭이조차 어미의 젖보다 따듯함을 먼저 찾습니다. 먹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관계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을 조금씩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함께 머무는 것은 내가 포기해야 할 고통이 따릅니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습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친구들을 많이 만들어냅니다. 다 하느님의 본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와가 아담도 자기와 같은 본성으로 만들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뱀이 하와를 끌어 내리고 싶은 것도 당연합니다. 유혹자가 우리를 죄짓게 하고 싶은 것도 당연합니다. 다 자기 본성대로 친구를 하나라도 더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아담의 문제는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와와 친구가 되면 하느님 자녀의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휘둘리는 것입니다. 

    감옥에 갔던 어떤 조폭이 깊이 회개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사람은 극악무도한 조폭 두목이었는데 교도소에 갇히니 자신을 쇠사슬로 묶어놓고 발도 묶어 항상 허리를 굽히고 다니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꼭 이래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교도관이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희는 짐승이라 하늘 볼 자격이 없어!”

이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나는 아직 인간이다!’라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고 이 말은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구원과 영생에 대한 꿈까지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담에게 이 정도의 믿음이라도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따라서 우리가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당신을 동등하게 여기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의 친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 이 믿음이 성체성사를 통해 들어옵니다. 이 믿음이 있으면 나를 끌어내려 친구로 만들려는 낮은 본성의 인간들에게 휘둘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이 믿음 하나 주러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약해집니다. 이를 강화하기 위해 미사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면 강화됩니다. 하지만 내가 이웃을 나의 본성으로 만들어 친구로 만들려 하지 않으면 이 믿음은 매우 약해집니다. 이웃을 끊임없이 인간이라고 여기며 자기는 하느님이라는 믿음을 강화할 수 있을까요? 친구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애플 TV의 ‘핀치’(2021)란 영화가 있습니다. 핀치와 제프라는 인공지능 로봇, 그리고 굿이어란 개 한 마리, 또 개처럼 생긴 로봇 듀이가 나옵니다. 태양의 플레어 폭발로 인해 지구 오존층이 파괴되어 사람들이 대부분 죽은 세상입니다. 핀치는 과학자였기에 연구소에서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굿이어는 자신이 맡아 키우고 있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식량을 구하려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한 여자아이의 가방에 들어있던 개입니다. 자신에게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는 굿이어를 위해서라면 핀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 거대한 모래폭풍이 다가와 오랫동안 그곳을 뒤덮을 예정입니다. 곧 이동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핀치는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죽으면 굿이어를 돌보아 줄 주인이 없습니다. 듀이는 개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생명이 있는 개를 돌볼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엔지니어였던 핀치는 굿이어를 위해 인공로봇을 만듭니다. 

  

    이 넷은 먼 여행을 떠납니다. 로봇 제프는 사람처럼 생겼지만, 사람과 같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사람의 마음을 알지는 못합니다. 제프와 함께 이동할 때 로봇 개인 듀이가 죽었지만, 제프는 슬프지 않습니다. 핀치는 자기 몸이 죽어감을 알면서도 제프에게 굿이어를 맡길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그래서 ‘신뢰’란 단어를 알려줍니다. 그러나 제프는 신뢰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핀치는 제프에게 신뢰란 단어를 자기 경험을 통해 알려줍니다. 그가 직장에 들어왔을 때 가장 신뢰가 낮은 팀원들과 함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큰 건을 처리해 사장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때 핀치는 “제가 혼자 한 것이 아니라 팀원들과 함께한 것입니다”라고 공을 팀원들에게 돌렸습니다. 이것이 신뢰라고 알려줍니다. 제프도 조금씩 팀워크를 익혀갑니다. 하지만 여전히 공놀이를 하면 굿이어는 제프 대신 핀치에게 공을 가져옵니다. 아직 제프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핀치는 숨을 거둡니다. 

  

    제프는 핀치가 자신에게 강아지를 맡겼음을 압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 통조림을 따서 음식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통조림통이 제프의 가슴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자동으로 통조림이 따집니다. 핀치는 제프의 가슴에 굿이어에게 음식을 주도록 장치를 미리 만들어놓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강아지에게 음식을 주자 강아지는 로봇을 따릅니다. 공을 던지면 자신에게 물어옵니다. 

  

    강아지는 본래 로봇에게 귀찮은 존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답하지 못하는 그에게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마치 핀치가 살아나 자신을 안아주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얻습니다. 자기를 만든 창조자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드님께 마치 제프에게 굿이어를 맡기듯 교회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양식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보답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께 어떤 보답도 해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써 아버지께 인정받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보답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내어줍시다. 그러라고 우리를 파견하였습니다. 보답은 마지막 우리가 생명까지 내어주었을 때 예수님께서 안아주심으로 다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보답받으려고 하다가는 인간에게도 하느님께도 보답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이웃에게 무언가 주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줄 수도 있고 성체를 줄 수도 있습니다. 성체를 주면 “당신도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고, 선악과를 내밀면 “우리는 하느님이 될 수 없어. 그저 인간일 뿐이야!”라는 믿음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만들려는 본성이 바로 나의 본성입니다. 남을 죄짓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을 하느님처럼 만들려고 해야 내가 하느님 자녀입니다. 누구나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옆에 있는 이에게 성체를 주고 있나요, 아니면 선악과를 내밀고 있나요? 이것이 ‘나’입니다. 누구나 친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친구란 ‘믿음’을 주는 대상입니다. 나는 친구에게 어떤 믿음을 주고 있나요? 

  

    예수님은 우리를 하느님처럼 여겨주셨습니다. 내 안의 주님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 해 보시고, 이웃을 향해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 해 보십시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제가 지금까지 찾아낸 가장 완전하고도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나의 신적 본성을 강화합니다. 이렇게 친구를 만들면 하느님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회복하는 복음의 사회적 매력-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wU5-rh9ZaQ

-조재형신부-

 

신부님들과 아일라(Islay)’라는 섬엘 다녀왔습니다아름다운 바다가 있었습니다들판에는 하얀 양들이 있었습니다팬데믹의 장벽을 넘어 오랜만에 여행을 다녀왔습니다섬의 한 카페에서 주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문을 잠그지 않습니다차의 열쇠도 차 안에 넣어 둡니다.’ 그래도 누구도아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섬에서 아름다움과 평화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매일 식사하는 탁자에 의자가 있었습니다아무리 조심해서 앉아도 소리가 낮습니다나중에 의자를 바꾸니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앉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오래된 의자가 문제였습니다예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은 아닙니다안식일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율법과 계율이 사람의 자유를 속박한다면 율법과 계율의 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유대인들이 지녔던 율법과 계율이라는 의자를 과감하게 바꿀 수 있었습니다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내린 결정은 당시 이방인들도 거부감 없이 지킬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한국에 전래된 교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천국에 대해서 깊은 감명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교회는 한국인들이 오랜 전통으로 이어왔던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하였습니다우상숭배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조상에 대한 제사 금지는 한국의 초대교회가 박해를 받는 큰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훗날 교회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한국의 오랜 전통으로 인정하였습니다.

 

500년 된 집에서 차를 마시면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제목은 왜 걱정합니까?’였습니다. “오직 두 가지의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건강할 것인가 혹은 아플 것인가.’입니다건강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만약 아프다면 두 가지의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치유될 것인가 혹은 죽은 것인가.’입니다치유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만일 죽는다면 두 가지의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천국으로 갈 것인가 혹은 지옥으로 갈 것인가.’입니다천국으로 간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만일 지옥으로 간다면 친구들은 만나서 악수하느라 바쁠 것입니다그렇다면 걱정할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그러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말씀하셨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렇습니다아직 오지도 않은 걱정 때문에 지금 맛볼 수 있는 기쁨이 사라지는 경우가 많습니다맞습니다내일의 걱정은 내일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라우리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좋은 글이 읽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친구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유순함을 가르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에게 조심성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은

나에게 자립심을 가르쳐 줍니다.

 

참된 사랑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나를 미워하는 사람나에게 무관심한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란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양승국신부-

 

‘진정한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과거 인디언들의 설명이 기가 막힙니다. “친구란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가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표현도 참 좋습니다. “친구란 내 기쁨을 두 배로, 내 슬픔을 반으로 줄여주는 마술사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하나 사귄다는 것은 또 하나의 세상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친구란 서로의 눈빛만 보아도 속마음을 다 알 수 있는 사람, 아무런 말 없이 내 흐느낌을 오래도록 기다려주는 사람, 멀리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아도 언제나 존재 자체로 큰 위로가 되는 사람입니다.

  

친구란 존재, 정말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고마운 사람입니다. 때로 가족에게 하지 못할 말들도 친구이기에 속 시원히 털어놓습니다. 매일의 삶이 ‘연옥’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친구가 있기에 그래도 견디며 살아갑니다. 이 냉혹한 세상 친구마저 없다면 과연 무슨 낙으로 살아가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하도 팍팍해지다 보니 진정한 친구를 사귀기가 힘들어집니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나보다 더 나를 챙겨주는 친구, 내 슬픔을 자신의 등에 짊어지고 갈 친구를 찾기 힘들게 만듭니다. 사는 게 점점 더 외로워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오직 나밖에 없구나!’ 하면서 홀로 쓸쓸히 소주잔을 기울입니다.

  

이런 우리들 앞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친히 우리의 친구가 되어주시겠다고.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복음 15장 14절)

  

여기서 정말 놀라운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 친구 먹자고 제안하신 예수님이 누구입니까?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파견하신 당신의 분신이자 외아들이십니다.

 

아니 하느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 결국 하느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친구 먹자고 하신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자기 낮춤이며 한없는 겸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잘 나가는 유명인사 가운데 친구가 한명 있다면 덩달아 어깨가 으쓱합니다. 그러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크게 자랑합니다. “그거 알아? 모모 국회의원이 바로 내 초등학교 동창이야.” “이번에 임명된 그 장관 있잖아? 나하고 소꿉장난 친구였어!”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그런 친구 두지 못한 것 하나도 섭섭할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 창조주 하느님께서 우리의 친구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 즉 하느님 아버지와 친구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은총이며 감지덕지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이거 보통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큰 자부심이 필요합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친구가 된 것에 대한 큰 자긍심을 지니며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이영근신부-

 

오늘도 우리는 여기 공동체에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함께 모여 살고 있는가요?

우리가 꼭 함께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뭔가요?

대체 왜 모여 살아야 하나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에서는 '서로 사랑하기 위함'이라고 가르쳐줍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모여 살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려면 먼저 함께 있어야 하니까요.

곁에 함께 있지 않고서 서로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함께 모여 사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지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랑을 해야 서로 사랑할 수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

 

그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되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고 당신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본보기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벗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요한 15,13)

 

왜 벗을 위한 사랑이 원수나 죄인을 위한 사랑보다도 더 큰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대체 '벗'이 누구이기에 그러실까?

나에게는 그러한 벗이 있는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 부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알려주시며’(요한 1,15 참조),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함께 깊이 믿기에 예수님과 서로 친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예수님의 친구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벗'인 우리 주님과 함께 즐거운 날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

 

주님!

당신께 받은 그 사랑을 건네게 하소서.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랑하고 끝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위하여 내어주고 진심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오로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사는 이유가 되게 하소서.

아멘.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반영억신부-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으나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증거되어야 하고, 기회는 많지만 실제로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사랑을 말하지만,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사랑보다는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사랑에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유를 주지 못하고 일방적이며, 상대를 속박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을 이유로 붙잡고 집착하며 기대를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상처를 주고받으며 후회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 안에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진실한 사랑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도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15,12-13).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데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심한 모욕과 침 뱉음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하시는 모습으로 우리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 고 선언하시며 당신 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벗으로 삼으시고 벗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사실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은 모두를 바쳤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미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고 마지막 남은 것을 주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최고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자기의 모두를 내놓는 것입니다. 자신을 희생할 기회는 끊임없이 주어지지만 지금 놓치면 그 기회는 이미 사라진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기회는 또 다른 기회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하십시오. 지금 후회 없이 사랑하십시오. 그러나 나의 일방적인 방식으로 하지 말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너무 많은 사랑을 요구하여 무거운 짐을 지우지 말고, 아무런 구속이나 강요가 없이 자유를 주는 사랑으로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이는 날로 기뻐하고 자유롭도다. 사랑은 짐을 모르고 모든 것을 이해하고 무엇이든지 하려고 하기에…”(성녀 젤뚜르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이에게 자유를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이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자유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자유의 유일한 존재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랑의 노예가 되는 데 있습니다. ” 사랑은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잘 꾸며놓은 연극, 그저 생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한번 해 본 빈말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피에르신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를 뽑아 세우셨으니 내가 예수님께 맞춰야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뽑으신 분에게 맞게 나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자유를 주는 사랑, 고통을 감당하는 사랑에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송영진신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됩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은 예수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예수님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기 쉬운데, 사랑은 생각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1요한 4,20).

여기서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은

“너희끼리만 서로 사랑하여라.”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라.”입니다.

사랑은 편을 가르지 않습니다.

또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이 말씀은, 앞의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이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목숨을 내놓는 큰 사랑’입니다.

이 말은 십자가 수난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를 포함해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 전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사랑한다는 말만 하지 말고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요한 15,14-15).”

 

여기서 ‘친구’는 뜻으로는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이 말씀은, 8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요한 8,34-35).”

신앙생활의 목표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집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계명들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명령’이라는 말은,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강제 명령이라는

뜻이 아니라, ‘간곡한 호소’를 뜻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려 주고, 우리가 들어갈 수 있도록

집의 대문을 열어 놓는 일은 예수님께 하시지만,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은 우리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들어가기 싫다는 사람을 붙잡아서 억지로 끌고 들어가는 일은 없습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라는 말씀과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를 ‘아버지의 자녀’가 되라고

불렀다.(초대했다.)”입니다.

자유가 없는 종이라면 무조건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자녀는,

사랑하니까 아버지의 뜻에 사랑으로 응답합니다.

여기서 ‘모르다. 알려 주다. 알다.’ 라는 말들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관련된 표현으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모르고서 종처럼 복종만 하면(계명을 실천하면)

지옥은 안 가겠지만, 아버지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곳은 ‘사랑 없이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청하는 것을 그분께서 너희에게

주시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은 이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6-17).”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부르심은 사랑이며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라는 말씀은,

‘신앙’이란, 인간 세상의 협상이나 거래나 흥정 같은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랑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는 일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강압적인 명령이 아니라, ‘권고’이고, ‘초대’입니다.

우리의 응답은 무조건적인 복종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지고서 행하는 자유로운 선택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일의 대표적인 모범은 성모님의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어느 날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성모님의 의사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하느님께서 성모님을 부르신 일은

일방적으로 하신 일이 아니라, 성모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

당신의 구원사업에 성모님을 협력자로 초대하신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셨고, 순종하셨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성모님의 응답을 보면, 천사가 성모님의 응답을 기다리다가

‘응답의 말’을 듣고 나서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1,38).

만일에 하느님의 부르심이 강제 명령이었다면, 그래서 성모님이

자유의지 없이 억지로 복종한 것이라면, 그 복종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우리가 높이 평가하면서 존경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기서 ‘열매’는 부르심과 응답의 결과인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은 억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원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얻는 은총입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5주 금요일-안주하지 않는 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15일 부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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