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 22일 부활 제6주일

Margaret K 2022. 5. 22. 06:19

 2022년 5 22 부활 제6주일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요한 14,23-29)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everything
and remind you of all that I told you.

Peace I leave with you; my peace I give to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사도들과 원로들은 사람들을 뽑아 안티오키아 공동체에 편지를 보내며,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전한다(제1독서). 요한은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본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평화를 남기고 간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짓는 사람들

-키엣 대주교_

 

재해가 사라지면 마치 지구가 멸망할 것처럼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재해는 막대한 인명과 물질적 손실은 물론 살아남은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무자비하게 파괴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을 무릎쓰고 재해 현장에 뛰어드는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기도 합니다. 국가와 언어, 종교를 초월하여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한 마음으로 모이는 모습들을 보면서 다시금 하느님의 존재하심을 느끼곤 합니다.

지리적, 물리적 공간에 얶매이지 않고 선(善)을 파괴하는 악에 함께 대응하며 박애와 자선을 향하여 함께 나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지난주 복음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처럼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늘나라의 국적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사람들을 언어와 인종 등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 단지 그 사람의 마음만으로 결정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주님 나라의 국경을 보여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주님 나라의 국경 또한 산과 바다 등 물리적인 구분이 아니라 마음으로 구분 지어집니다. 사랑의 벽으로 둘러 쌓였기에 경계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의 안과 밖이 아니라 사랑의 안과 밖이라는 것입니다. 즉 비록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더라도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면 주님의 나라에 있는 것이고, 몸은 교회 안에 있으나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결국 주님의 나라 밖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을 갖고 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의 선과 사랑입니다. 넓고 열린 사랑으로 아픔을 공감하고 나눔과 봉사를 하는 사람, 믿음이 없지만 박애와 사랑을 지닌 사람은 모두 주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지만 좁고 협소한 빈약한 마음으로 자신만을 돌보는 사람과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람에 따라 주님의 나라는 참으로 넓고 큰 나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폐쇄된 너무나 작은 나라일 것 같습니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만들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은 세계 각처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맞이하기 위하여 사방 팔방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사랑으로 만들어졌기에 제단은 없지만 사랑이 있는 곳이면 그 어느 곳이든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곧 빛이기에 그 곳에는 조명도 필요 없습니다. 넘치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반짝이는 옥과 투명한 수정으로 지어진 성은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사랑을 밝게 비춰 주고 있습니다.

박애와 사랑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주님의 사랑을 지닌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금도 계속,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예루살렘 성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와 우리들입니다.

주님, 저희 마음이 수정처럼 빛나고 단단한 돌이 되어 하느님께서 자리하실 새로운 예루살렘 성을 세울 수 있게 하여주소서. 그리고 이것을 위해 저희가 주님의 사랑을 배우는 노력을 영원히 멈추지 않게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예루살렘 성’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2.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착한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사람도 주님의 자녀라고 생각합니까?

3. 교회의 안과 밖, 그리고 사랑의 안과 밖 나는 어느 쪽을 향하고 있습니까?
 
말씀의 실천

1. 주님의 사랑은 실천입니다. 주일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성경도 열심히 읽지만 그것이 단지 나를 위한 것이어서는 부족합니다. 내 마음 속의 주님의 사랑을 작은 것부터 가족과 이웃에게 실천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5년 전 자기 모습을 떠올린 뒤 그때 이후 생긴 변화를 종이에 써 보십시오. 다 적었으면 이제 앞으로 5년간 변하고 싶은 부분도 적어보세요.”


다 적었으면 이제 두 목록을 비교해 보십시오. 분명 5년 전의 모습에서부터 이루어진 변화가 앞으로 5년간 변하고 싶은 변화보다 훨씬 더 길고 놀라운 변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업은 행동과학자 그레이스 로던이 했던 것으로 이를 통해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과거를 돌아보며 큰 변화를 겪었다고 생각하지만, 다가올 5년 동안은 그리 대단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는 착각에 불과합니다.”

과거 5년 동안의 변화가 있었듯이, 다가올 5년 역시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단순하게 시간이 지나면 다가오고 마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하지만 이 미래 역시 나의 변화를 가져올 소중한 시간입니다.

다가올 5년의 미래, 아니 그 이상 넘어가는 미래를 향해 걸어가는 지금, 자기의 장애물을 하나하나 줄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최종 목적지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에서 환하게 웃을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림 모두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두 하느님 나라에서 환하게 웃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당신 말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주님을 사랑한다면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이 요구됩니다.

여기에 우리를 위해 성령을 약속하시지요. 성령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도록 해 주십니다(요한 14,26 참조). 성령을 통해 우리는 이 땅에 살며 용기를 갖게 됩니다. 이제 걱정할 것도 없고 두려워할 것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의 평화는 진리와 빛과 생명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삶의 기쁨이 됩니다.

세상이 말하는 평화는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단적인 예로 전쟁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화는 마음이 산란해지는 것도, 겁을 내는 것도 아닌 진짜 평화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지지 않습니까? 성령을 받아서 주님의 평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을 멀리하면서,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희망을 품고 지금을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숨을 쉬는 한, 나는 희망한다(Dum spiro spem 라틴어 속담).

 기도를 믿는다는 말과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동의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n9CFJj868uo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명령하시고 그 지킬 힘이 되실 성령님을 보내주실 것도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화가 당신의 계명을 지키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주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가야 합니다.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당신보다 위대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것이 우리에게 기쁜 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고 남편에게 가서 돈을 받아서 자녀를 위해 먹고 살 걱정 없이 해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들은 이 평화 속에서 어머니의 뜻을 잘 따를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가 아버지께 돈을 받으러 가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가는 것으로 비유한다면 이를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기도라는 큰 그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기도는 내가 말씀과 성령을 주어야 할 자녀들을 위해 그것을 주실 분을 만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면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할 줄 모른다면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느님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심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내가 더 위대해서 하느님을 나의 뜻대로 움직이려는 잘못된 신앙에서 비롯됩니다. 평소에 내가 하느님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나를 그분이 좌지우지하시게 했다면 언제나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힘든 일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도하면 다 된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은 아직 기도할 단계는 아니라고 합니다. 마치 자신들이 그러한 처지가 된 것이 하느님 탓을 하는 것 같습니다. 화가 나서 하느님과 대화하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기도 하지 않는 신앙은 그래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않는 것이고 그 이유는 내가 더 위대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사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그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을 찾아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는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그들은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하지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감사가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자신들을 안타깝게 지켜보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그들은 호숫가에 있었던 낡은 배 한 척이 자신들을 향해서 떠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기도할 수 없었던 이유는 내가 그분의 능력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랑을 의심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 원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느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을 키웠다면 나는 그분께 무언가를 청해도 합당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할 수 있는 것이고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반면 기도하지 않으면 하느님 사랑도 믿지 않고 하느님 능력도 믿지 않고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셨음도 믿지 않음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하느님을 위대한 분으로 믿으며 그분께 청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실패요 동시에 성공으로 손꼽히는 어니스트 섀클턴이 지휘했던 남극탐험대의 이야기입니다. 때는 1914년 8월 섀클턴은 27명의 대원과 함께 남극 횡단에 나섭니다. 이 시대는 모험의 시대로 수많은 이들이 바다와 북극과 남극, 혹은 높은 산을 정복하려던 영웅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인듀어런스호 호는 웨들해의 해류에 밀려 바다 위를 떠도는 얼음 섬에 부딪혀 표류하게 됩니다. 겨울은 점점 다가왔고 이는 곧 죽음이 다가옴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극한의 상황에서도 대원들은 서로를 위해 주고 각자의 일을 착실히 수행했습니다. 

  

    1916년 4월 20일 섀클턴이 대원들을 모아 놓고 중대 발표를 합니다. 그의 지휘 아래 몇몇 대원들이 제임스 커드 호(작은 구명보트)를 타고 사우스조지아섬에 있는 포경기지로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막 엘리펀트 섬(해역에 서식하는 바다코끼리에서 따온 지명)에 도착한 처지에 그것은 실로 엄청난 계획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우스조지아섬까지는 무려 1280km. 그토록 멀고 까마득한 곳을, 겨우 6m 길이의 갑판도 없는 배를 타고 지구에서 가장 험난한 바다 위로, 그것도 겨울에 지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바다에는 시속 100km의 바람이 불고 20m 높이의 거대한 파도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계획은 만만찮은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대원 중 선원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듯이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섀클턴은 한 달 후에도 자신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 섬을 탈출하라고 명령합니다. 비틀거리는 배에 부딪힌 파도는 곧바로 얼어버렸고, 9일째가 되면서 커드 호의 움직임이 점점 위험스러워졌습니다. 나무와 돛, 줄이 꽁꽁 얼어붙은 채 간신히 물에 떠 있는 상태였습니다. 섀클턴은 고통스러웠던 그 날의 상황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대원들 모두가 뼛속까지 젖고 얼었다. 7개월 동안 벗지 않은 젖은 옷 때문에 몸을 추스르기가 더욱 힘들었다. 젖은 발과 다리는 하얗게 변한 채 심하게 부풀었고, 손은 때와 고래 기름, 동상, 스토브의 연기 때문에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손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전신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였다.” 

  

    1916년 5월 (천신만고 끝에 조지아 섬에 도착한 직후) 섀클턴은 새로운 계획을 발표합니다. 그와 다른 두 사람이 섬을 가로질러 반대편의 스트롬니스 포경기지까지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 해발 3천m, 험한 바위와 위험한 크레바스가 곳곳에 있고 대부분이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몹시 위험했습니다. 아무도 넘어본 적이 없는 미지의 산이었고 당연히 지도도 없었습니다. 

    “섬의 지형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사우스조지아의 해안에서 안쪽으로 단 1km라도 들어가 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섀클턴)

  

    장장 36시간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산을 넘습니다. 당시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구조선을 얻는 데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한편 와일드는 섀클턴 일행이 떠난 후 22명의 대원을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섀클턴이 꼭 돌아온다는 희망을 잃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섀클턴이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1916년 8월 30일, 누군가 소리쳤습니다. 

    “배가 왔어요!” 

갑판에는 섀클턴이 망원경으로 얼음 섬에 있는 생존자의 숫자를 세고 있었습니다. 대원들은 숨을 멈추고 섀클턴이 다가오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이윽고 서로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거리가 되자 그들은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두 무사합니다!” 

조난한 뒤 무려 634일 만에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전 대원이 구조되었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탐험의 성공보다도 더 큰 성공이었습니다. 인간성의 위대함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섀클턴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희망과 믿음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통해 분명 더 위대한 분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는 섀클턴처럼 십자가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희망은 주님께서 주신 희망입니다.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이 믿음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사랑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까지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국 마지막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은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1SPCJCORp8

 -조재형신부-

 

지금은 운전할 때 내비게이션을 사용하지만 예전에는 주로 지도를 보았습니다자동차에는 전국지도가 책으로 한권씩 있었습니다차량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고길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습니다요즘은 지도를 가지고 길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인공위성에서 위치를 알려주는 내비게이션에 의지하면서 길을 찾습니다내비게이션은 지도로는 얻을 수 없는 정보를 주기 때문입니다가장 빠른 길을 알려줍니다실시간으로 도착시간을 알려줍니다교통경찰이 있는 것도속도위반을 측정하는 카메라가 있는 것도 알려줍니다지금보다 더 빠른 길을 찾아서 알려줍니다지금은 걸음마 단계이지만 10년 이내에 자율주행 자동차가 거리를 다닐 것이라고 합니다원하는 목적지만 입력하면 자동차가 알아서 가장 빠른 길을 찾아가는 때가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유대교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 유대교의 전통과 계명을 지켰습니다예수님께서도 유대인이셨고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을 준수하셨기 때문입니다그러나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면서 초대교회는 몇 가지 문제를 만났습니다이방인들에게는 이방인들의 전통과 관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은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복음의 기쁨은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 때문에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이방인들에게 할례는 생소하면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습니다예수님이 전한 하느님나라복음의 기쁨은 할례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유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례를 꼭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이방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할례를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습니다지도에서 내비게이션으로 발전하였듯이 초대교회는 회의를 통해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그것은 할례를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중요한 것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유대인들의 전통과 계명에서 자유로워진 초대교회는 더 많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30년 동안 공무원으로 있다가시골로 가서 洗心院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서 지내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마음을 정화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그분은 열쇠를 100개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누구나 원하면 하루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집입니다물론 비용은 받지 않았습니다세심원을 이용하는 비용이 한 달이면 300,000원 정도 든다고 합니다그 정도의 비용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집주인이 매일 하려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누군가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빨갛게 타오르는 나무를 보면서 본인도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시간이 나면 보리를 심는다고 합니다보리는 추운 겨울에도 파란 싹이 돋아난다고 합니다보리를 보면서 삶의 시련이 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틈이 나면 집 주위에 를 심는다고 합니다차의 향은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기 때문입니다언제가 차가 자랄 것이고또 누군가는 그 차를 마시면서 정신을 맑게 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정말이지 사랑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사랑은 실천이며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예전에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게 됩니다우리는 신앙으로 잉태되었습니다세례를 통하여 재생의 삶으로 탄생하였습니다어머니이신 교회의 교리와 교훈으로 젖을 먹고 생명의 빵으로 자라납니다우리는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되며 지혜와 혼인을 합니다우리의 자녀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우리의 유산과 재물은 하느님 나라의 복된 생활입니다우리가 거처할 곳은 하느님 나라이며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의 제독서는 끝 날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그 끝 날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뽑히는 이들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다만 중요한 것은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당당하게 거슬러 가는 사람그 세상의 흐름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맞서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오늘 우리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그들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세상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협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네 인생사 그 한 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시는 성령

 -양승국신부-

 

예수님의 유언(遺言)에 따르면, 지금 우리 시대는 ‘성령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떠나가신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가득 찬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의 협력자이자 우리들의 보호자, 당신과 일심동체이자 분신(分身), 당신의 대체자이자 우리들의 동반자이신 성령을 선물로 남겨주셨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삶 구석구석을 파고드십니다. 때로 구차스럽고, 때로 옹색한 우리네 인생사, 그 한 가운데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때로 자연 안에, 때로 한 인간 존재 안에, 때로 매일 발생하는 사건 안에도 굳건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고맙게도 너무도 오랜만에 단비가 내렸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껏 수분을 섭취한 초목들의 얼굴이 어제와는 달리 무척이나 행복해 보입니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만난 꽃과 나무들이 활기찬 목소리로 제게 인사를 건넵니다.

  

천천히 바라보니 성령께서는 자연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셨습니다. 성령의 흔적과 그분의 손길, 성령의 움직임과 역사하심을 조금이라도 감지하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 측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좀 더 눈을 크게 떠야겠습니다. 좀 더 마음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육으로만, 세상으로만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영으로, 불변의 진리로 되돌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체험하는 바처럼, 성령은 조금은 알쏭달쏭한 분이십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분, 아니 계시는 듯, 그러나 분명코 계시는 분, 안개 속에 계시는 분, 마치도 구름 같고 바람 같으신 분입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바람처럼 ‘쌩’, ‘쓱’ 하고 신속히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가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감지하고, 그분을 느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온몸으로 느끼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사실 성령께서는 지천으로 피어오르는 작은 들꽃 한 송이 한 송이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안에 하느님 아버지 사랑의 손길이 담겨있으니, 성령께서 그 안에 현존하고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께서는 이웃들의 작은 음성이나 작은 몸짓 그 안에 살아 숨 쉬고 계십니다.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 속에, 이웃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자극과 예언자적 목소리 속에 성령께서 분명히 현존하고 계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계십니다. 우리 내면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해 측은지심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우리 안에서 기도하고픈 마음, 다시 주님 안에서 새롭게 시작하고픈 마음, 이웃들에게 복을 빌어주는 마음, 불의 앞에 정의로움이 용솟음친다면,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언젠가 형제들과 함께 큰 축제를 성공리에 마치고 회식을 할 때였습니다. 삼겹살을 원 없이 구워 먹었습니다. 어디 삼겹살만 먹었겠습니까? 기분도 좋겠다, 소맥을 제조해서 셀 수도 없는 잔을 비웠습니다.

  

거기다 철판 비빔밥까지 비벼서, 몇 공기나 먹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습니다.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술기운에 정신도 몽롱하고, 그저 드러누울 생각밖에 나지 않았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기도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움직임도 뒷전이었습니다. 영적인 생각들도 조금도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우리 매일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역동적인 성령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그분의 인도 아래 살고 싶다면 어느 정도의 결핍이 필요합니다. 춥고 배고픔, 긴장과 자극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부활을 보증해주고 드러내주는 성령에 관한 말씀이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성령 안에서 풀어가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곧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사도 15,28)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요한은 성령께 사로잡히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게 됩니다.

곧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주었습니다.”(묵시 21,10)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의 고별담화의 한 부분으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요한 14,23)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이유가 당신을 사랑한 까닭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진정 당신을 사랑하는 자만이 당신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는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실행할 수 없다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지 못함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까닭이라는 말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당신의 말씀을 조금만 지키고 실행하고 있다면, 당신을 조금만 사랑하고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곧 당신을 사랑하는 이에게서 당신의 사랑이 드러나고, 당신의 현존이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신 이름으로 보내실 아버지의 선물로 가능해질 것이라고 밝히십니다.

곧 “협조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6)라고 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오시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모든 것을 깨닫게 해 주실 것이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실행할 수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분명한 것은 성령께서는 새로운 것을 가르치지 않으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깊은 뜻을 열어 주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고별사’에서 ‘성령’에 대한 약속을 다섯 번에 걸쳐 반복하십니다.

오늘 복음 외에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보호자를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14,16-17)

“보호자,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5,26-27)

“보호자가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16,7-11)

“진리의 영께서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16,12-15)

 

이는 성령께서 예수님의 구원 행업을 설명하고 완성하심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의 하느님의 현존은 성령의 오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토록 성부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곧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새로운 현존관계를 유지하십니다.

 

그러니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는 분이십니다.

결국 오직 성령께서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완성하십니다.

그러니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요한 14,27)고 하신 예수님의 선물 역시 성령께서 완성시키실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요한 14,28)

 

‘간다’와 ‘온다’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가고 오심’이 인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줍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요, 십자가의 현양은 끝이 아니라 성부께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출발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이별은 재회를 위한 필연적인 과정으로 기뻐해야 할 일이요, 희망의 예시가 됩니다.

그러니 사실 우리가 부모형제를 떠나보내는 일도 이와 같이 기뻐해야 할 일이 되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희망과 믿음을 간직하면, 당장의 그 어떤 슬픔과 고통도 아버지 안에서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라고 말씀은 우리를 의아하게 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당신의 말씀과 모순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분명히 일어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완전히 인간이 되셨다는 것이고,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께 의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고로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라는 표현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그렇다 할지라도 12장 24절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바와 같이 ‘태초부터 당신 것이었던 하느님으로서의 영광’으로 이제 돌아가게 되니,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것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라고 “일이 일어날 때 우리가 믿게 하려고”(요한 14,29 참고) 미리 말씀해주십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사랑을 베푸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크나큰 주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요한 14,27)

 

주님!

평화를 위해 가시관을 쓰게 하소서.

창에 찔리신 당신 가슴으로 세상을 품게 하소서.

누르고 빼앗고 장악하고 차지해서가 아니라, 내어주고 비워져서 평화로워지게 하소서!

잔잔한 호수처럼 마음이 가라앉아서가 아니라, 당신과 함께 있음에 평화롭게 하소서.

오늘 하루, 평화롭기를 바라기보다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

아멘.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 28)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은총의
시간이다.

평화가
시작되는 곳에
삶의 참된
방향도 있다.

삶의 방향과
삶의 참된
목적지를
가르쳐 주시는
주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사랑의 삶을
기쁘게 살아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삶이다.

우리를
빚어 만드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이다.

모든 기쁨의
귀결은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품고 품어서
사랑이
되게 하시는
하느님이시다.

날마다 구원의
이 여정을
걸어가게
하시는 참된
보호자이시다.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밀어 주시는
사랑이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업고
쏟아지는
은총의 길을
걸어 가신다.

끝내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가시는
하느님이시다.

기쁨과 평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끊어지지 않는
위대한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사랑으로
끝내 승리하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다.

기쁨의 원천이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아름다운
성모성월의
기쁨이다.

기쁨으로
활짝 열리는
사랑의 놀라운
찬미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기쁘게 만나고
기쁘게
기도드리는
기쁨의 날이다. 

말씀 나누기 - 부활 제6주일-기억과 실천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5월 26일 부활 제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