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8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6. 8. 06:21

 2022 6 8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남에게도 지키도록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것 이다." 
(마태5,17-19)

 

 Whoever obeys and teaches these commandments
will be called greate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야의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자, 온 백성이 주님이야말로 하느님이시라고 부르짖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가 되고서 얼마 안 되었을 때, 선배 신부님께서 저를 자기 본당에서 특강을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담되었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신자들 앞에서 특강을 합니까? 저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세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 너를 위한 거야.”

당시에는 만만한 후배라고 부려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때의 초대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진짜로 저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남을 가르침으로 인해 자기 공부가 됩니다. 저 역시 많은 강의를 통해 제 생각들을 정리하고 제 안에서 정립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람들 앞에서 벌벌 떨었던 울렁증 같은 증세도 말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무엇보다 계속 똑같은 강의를 할 수 없으니, 쉬지 않고 공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만만해서 부려 먹은 것이 아니라, 저를 성장시켜 주신 귀한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 순간에는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정말로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예수님의 모습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을 치유해주셨고, 죄인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사람들과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지요. 율법에 참뜻을 부여하셔서 진정한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 즉 세상이 끝날 때까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은 율법은 그 모든 권위를 계속해서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율법을 우리는 모두 따라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받은 율법은 주님의 권위를 받아서 세상에서 환하게 빛나게 됩니다. 이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일까요? 만약 율법을 완성하지 않았으면,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안식일만 강조할 것이고 겉으로 보여주는 예식만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새로운 모습으로 늘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행복해지려면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마라(알베르 까뮈).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라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uTQ7vP1KDh8

1932년 LA 올림픽 때 이반 펠레 선수는 뜀틀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저건 나도 하겠다’라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2012년 런던 올림픽 때의 양학선 선수의 모습을 보면 가히 신기할 정도로 하늘을 날아다닙니다. 그러면 이반 펠레 선수는 연습을 게을리했던 것일까요? 그는 그 해 올림픽의 2관왕이었습니다. 
  
    1908년에는 남자 다이빙 경기에서 공중 2회전이 금지되었습니다. 너무 위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10살만 되면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시에는 그런 기술들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 대단한 존재인지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못 한다고 믿으면 못 하고, 한다고 믿으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나를 만들어준 분에게서 옵니다. 이 지상에서 나를 만들어준 분은 부모님입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기지도 못할 때부터 이미 우리를 향한 꿈을 꾸고 계십니다. 
    피카소의 어머니는 피카소가 어렸을 때 이런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나에게 ‘군인이라면 장군이 될 것이다. 사제가 된다면 교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나는 화가이고 피카소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피카소가 무엇일 될지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명품이 될 것은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모님의 기대, 부모님의 믿음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기대라고 하면 어떤 말로 바꿀 수 있을까요? ‘계명’, 곧 ‘율법’입니다. 율법은 이것을 하지 마라, 저것을 하지 마라가 목적이 아닙니다. 계명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성장해주기를 바라서 내려주시는 규정들입니다. 
  
    피카소의 아버지는 피카소에게 새의 발만 수천 번을 그리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짜증이 났지만 수천 번의 그림을 통해 새의 발이 다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새의 발만 봐도 그 특징을 잡아내어 바로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우리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 위함이 아닌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라기를 바라시며 우리에게 주시는 지시인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넘어진 숫자보다 걸은 숫자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는 부모는 자녀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효도하고 싶다면 더 완전함으로 나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부모가 자녀를 낳을 때 불완전하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호락호락한 모습이 되기를 바라며 만드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 하느님은 최고의 작품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셨다면 최고의 걸작일 수밖에 없습니다. 
  
    박세리 선수를 쫓아다니던 아버지는 박세리 선수가 그냥저냥 한 선수가 되기를 바랐을까요? 김연아 선수를 쫓아다니던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최고가 되기를 원하고 자녀가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이렇게 율법의 일점일획도 거스르지 않으면 우리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전한 작품이 됩니다. 
  
    이렇게 율법을 따라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모습이 되어가려는 사람에게 나오는 것이 ‘창의력’입니다. 
    미국의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라는 곡이 있습니다. 이 곡에서 연주자는 단 한 음도 연주하지 않습니다. 공연장의 소리로만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존 케이지는 음악이 듣는 것만이 아니라 행위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장에 존재하는 모든 소음이 음악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이런 짓을 했다면 욕을 먹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존 케이지는 음악가입니다. 음악가가 이런 창의적 발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은 최고라는 자존감입니다. 이미 최고이고 최고가 될 것이기에 자기 스스로 모든 과정을 시험해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최고를 만듭니다. 
모든 자수 성공한 사람들은 이미 자신들이 그렇게 성공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 두려움 없는 용기가 창의성을 발휘하게 하고 실제로 그들을 최고로 올려놓았습니다. 
  
    정주영 회장이 조선업을 시작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정 회장은 우리나라가 한창 포항제철을 밀어주고 있을 때 그 철을 이용해 커다란 배를 만들어 팔면 이윤이 많이 남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기술, 돈, 수요였습니다. 배를 만들 기술도 없었고 조선소를 지을 돈도 없었으며 당연히 배를 사겠다는 사람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정주영 회장은 이루어 냈습니다. 우선 기술부터 자문받아야 했습니다. 전 세계를 돌아다닌 끝에 영국의 조선 기술 기업 ‘애플도어’의 회장이었습니다. 이제 기술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소를 지을 돈이 없었습니다. 애플도어 회장은 ‘버클레이 은행’을 설득하기는 힘들 것이라 했습니다. 
정 회장은 조선소를 지을 백사장이 찍힌 사진만 들고 무작정 은행을 찾아갔습니다. 당연히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때 정 회장은 당시 500원짜리 지폐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1,500년도부터 이런 배를 만들었습니다. 영국은 1800년도부터지만 우리가 쇄국정책을 해서 그렇지 그 기술은 우리가 그대로 갖고 있습니다.”
  
    버클레이 은행 사장은 웃으며 추천서를 써 줍니다. 허락을 받아낸 것입니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우선 돈을 빌려줄 때 수출보증기구의 승인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수출보증기구에서는 조선소를 지어도 배를 살 사람이 없으면 차관을 갚을 수가 없으니 수주계약을 먼저 받아오라고 하였습니다. 정 회장은 너무 당연하고 합리적인 말이어서 조선소를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습니다. 정 회장은 초라한 백사장 사진을 들고 배를 살 사람을 미친 듯이 찾아다녔습니다. 
  
    그러자 정 회장처럼 이상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 해운업자 선박왕의 처남 ‘리바노스’였습니다. 그는 26만 톤 두 척을 현대에 주문했습니다. 이 주문서를 수출보증기구에 알렸고 차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돈과 기술력으로 5년 뒤에 전달할 선박을 2년 6개월 만에 성공적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는 기업에는 어려움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쟁만 아니면 다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창의성을 발휘하게 했고 그 창의성이 결국 성공에 다다르게 한 것입니다. 먼저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 유일의 작품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 뜻, 곧 계명만 잘 따르기만 하면 그분이 우리를 향해 꾸시는 꿈을 반드시 이뤄낼 수 있습니다. 
  
    참 효도의 길은 무엇을 하든 최고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러기를 바라는 이의 율법을 한 점, 한 획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결심이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는 자는 창의력도 뛰어납니다. 믿는 대로 되는 과정에 창의력이 있습니다. 하느님도 우리에게 같은 기대를 하시며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빗자루질하더라도 성 마르티노 데 포레스처럼 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계명은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빗자루질하던, 요리하던, 봉사하던 그곳에서 최고가 될 것을 결심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이미 그러한 결심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창조에 보답하는 일은 그분의 꿈을 이루시기 위해 아주 작은 그분의 계명까지 꼭 지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인공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KZ4Q6rsAJA

 -조재형신부-

 

2006년입니다당시 캐나다에서 영화 ‘300’을 보았습니다.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가 수백만의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다는 내용입니다용맹한 군사가 왕을 중심으로 단결하였고페르시아 군이 들어오려는 길목을 장악했습니다페르시아 군은 여러 번 공격했지만 실패하였고스파르타 군의 용맹함에 고무된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을 물리쳤다는 이야기입니다싸움은 숫자가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잘 훈련된 군사가 중요합니다그리고 그 군사를 하나로 묶어줄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저는 어릴 때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을지문덕 장군은 고구려를 침략하려는 수나라의 군대를 맞이해서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이쯤에서 그만하자는 화해의 편지였습니다그러나 수나라는 자신들의 수와 힘을 믿고 계속 싸우려고 하였습니다전설적인 이야기지만 을지문덕 장군은 적은 군사로 수나라의 대군을 물리쳤습니다강을 둑으로 만든 뒤 수나라 군대가 강으로 들어오면 둑을 열어서 공격하는 수공을 펼쳤습니다그것이 유명한 살수대첩입니다맞습니다싸움은 숫자와 힘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이스라엘에는 엘리야 예언자만 남았습니다바알에는 450명이 넘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엘리야 예언자는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누구의 신이 강한지 증명하자는 것입니다엘리야가 나무로 제단을 쌓고 소를 바치는 것입니다바알의 예언자들도 나무로 제단을 쌓고 소를 바치는 것입니다강한 하느님께서 먼저 제단을 불사르고 제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바알의 예언자들은 450명이라는 숫자를 믿고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고 장담합니다그리고 제단 주위를 돌면서 바알의 신에게 청하였지만 하늘에서 불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가득 부으라고 하였습니다그리고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사악의 하느님야곱의 하느님께 청하였습니다그러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바친 황소를 제물로 받아 주셨습니다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예언자의 숫자가 아니었습니다하느님께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대한 열정과 믿음이었습니다.

 

2022년에도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러시아는 엄청난 군사와 화력으로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였습니다많은 전문가들이 3일이면 전쟁은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고 예측하였습니다우크라이나의 힘이 약했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전쟁은 5달이 지나가지만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명분이 없었습니다러시아의 군인과 국민들은 명분 없는 전쟁에서 군인들이 희생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우크라이나에는 조국을 지키려는 애국심이 있었습니다영화 300에서 스파르타를 도와줄 그리스 연합군이 있었던 것처럼 우크라이나에게는 자유와 민주를 수호하려는 이웃 국가들이 있었습니다이웃국가들은 식량과 무기를 지원하였습니다교황님께서도 이번 전쟁의 부당함을 이야기하였고평화적으로 전쟁이 마무리 될 수 있도록 호소하였습니다이미 세상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힘 있는 강자가 약한 나라를 침략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전쟁도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하루속히 전쟁이 끝나고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본당 사목도 비슷합니다신자수가 많고공동체의 시설이 잘 갖추어진 성당도 있습니다본당신부와 보좌신부가 있어서 역할을 분담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미국 본당에 세 들어 사는 공동체도 있습니다미사 시간을 정하는 것도친교를 나누는 것도 미국 본당과 협의를 해야 합니다신자 수가 작기에 사제를 모시는 것이 힘들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사랑이 넘치는친교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렇습니다하느님나라의 공동체는 숫자와 시설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나라의 공동체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작은 공동체이기에 매주 친교를 나눌 수 있기도 합니다작은 공동체이기에 장례가 나면 모두가 와서 연도를 합니다작은 공동체이기에 모두가 빠지지 않고 전례에 참석합니다중요한 것은 신앙에 대한 열정입니다하느님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이상과 꿈을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하느님 나라는 여성죄인병자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잡신 문화와 우상숭배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양승국신부-

 

바알 예언자들의 무리가 존재하지도 않는 헛된 신을 믿고, 그 신을 불러내느라 안간힘을 다하며 쌩고생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가련함을 넘어 비참하기까지 합니다. 

 

번제물로 준비한 황소 앞에 조잡한 제단을 쌓습니다. 아침부터 한낮이 되기까지 목청이 터져라 바알 신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이 눈앞에 나타나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어떤 응답도 없자 바알 예언자들이 취한 행동을 보십시오. 끔찍하고 기괴합니다.

  

다들 다리가 성한 예언자들이었는데, 일부러 절뚝거리며 자기들이 만든 제단 주변을 돌았습니다. 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요? 바알 신에게 동정심을 유발시키는 차원에서 그랬는지, 아무튼 웃기지도 않습니다. 그것도 소용이 없자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연출합니다. 

 

멀쩡한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칼과 창으로 찔러댔습니다. 여기저기 피가 낭자했습니다. 있지도 않은 바알 신을 불러내느라 생쑈를 다하는 예언자들이 모습이 가련하기까지 합니다.

  

바알 예언자들의 기괴하고 유치한 행동을 바라보며 혹시라도 우리 역시 은연중에 그런 잡신 문화에 젖어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우리 역시 입으로는 유일무이하신 하느님, 천주의 창조주, 절대자이신 하느님만 흠숭한다면서 실제로는 다양한 잡신과 우상에 빠지고, 그에 의지해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재물이라는 우상, 권력이라는 잡신에 의지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매일이 길일이요 매일이 축복과 구원의 날입니다. 따라서 아무 날이나 이사를 가도 되는데, 굳이 거금을 주고 이삿날을 정하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머무는 그곳이 하느님의 성전이요 명당입니다. 따라서 돌아가신 부모님 모실 명당을 찾아서 전국 산천을 돌아다닐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오로지 하느님 섭리의 손길에 맡겨져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살며 최선을 다해 몰입하는가에 따라 우리 미래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자녀가 어느 대학에 원서를 넣어야 하는지 점집을 찾아다닐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은 이제 주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의 손길 안에 온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세상을 떠난 모든 분들을 가엾이 여기시며 당신 따뜻한 품에 꼭 안고 계십니다. 

 

따라서 남아있는 분들이 고인들이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채 못 다한 사랑의 실천을 대신 채워드리는 것, 그것이 고인을 향한 가장 큰 선물일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반영억신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 하나 정리를 못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기도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율법』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어떤 눈먼 이를 고쳐 주셨을 때, 그 일을

‘하느님의 기적’으로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날이 안식일이라는 것만

생각하면서 그 일이 하느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몇몇은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므로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이 아니오.’ 하고,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징을 일으킬 수 있겠소?’ 하여, 그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났다(요한 9,16).”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하느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죄인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에도, 예수님이 유대교 율법과는 다른

새로운 율법을 세우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당신이 ‘하느님의 율법’을 없애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율법과 예언서들’은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인데,

여기서는 구약성경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말씀들, 계명들, 율법들을 뜻합니다.

“완성하러 왔다.” 라는 말씀에서 ‘완성’은 ‘실천의 완성’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 계명들과 율법들을 제대로

실천하지 않고 있어서, 완전하게 실천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었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안 오셨을까?”

아마도 그랬을 것입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가 그것을 잘 나타냅니다.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3-37).”

주인이 소작인들에게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의 ‘율법 실천’을 완성시켜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율법 실천의 완성’은 ‘구원의 완성’으로 이어집니다.

바리사이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율법을 지키는 것은,

율법 실천이 아니라, 하느님의 율법을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죄입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그런 잘못을 바로잡으려고 오신 분입니다.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계명들과 율법들의 본래의 정신을 깨닫고, 완전하게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말씀에 대한 보충설명입니다.

‘한 자 한 획도’ 라는 말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에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도 없고, 불완전한 부분도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이 폐지되거나 변경되는 일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구약 율법을 폐지하신 것처럼 보이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음식에 관한 규정을 폐지하신 일이(마르 7,19) 좋은 예입니다.

원래 구약시대의 음식에 관한 규정은,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5).” 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한

세부 실천 지침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상위법인 하느님 계명의 실천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위법인 실천 지침을 폐지하셨습니다.

나중에 사도들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하라.”는 규정만 남기고 유대인들의 관습들과

세부 실천 지침들을 모두, 특히 할례를 폐지했습니다(사도 15,29).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들을 폐지하거나 개정한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변경한 일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이신(마르 2,28)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계명 실천을 완성하기 위해서 한 일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라는 말씀은,

“종말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계명들과 율법들이 없는 나라인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사람들이 하느님을 직접 뵙고

섬기기 때문에(묵시 22,3-4) 그 나라에는 성전이 없습니다(묵시 21,22).

성전이 없다는 것은 종교 제도가 없다는 뜻이고,

다른 것들도 모두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종교의 폐지가 아니라, 종교의 완성입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라는 말씀은,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계명들을 크고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작은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무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크고 작은 것 없이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 라는 뜻이고,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간다.” 라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큰사람도 작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들어가기만 하면, 그 나라에서는 전부 다 큰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이’는 가르치는 직분을 맡은 이들,

종교 지도자들, 사제들, 교사들을 뜻합니다.

똑같은 죄를 지어도 그들의 죄는 더 큰 죄가 됩니다.

잘못 가르쳐서 ‘남을 죄짓게 하는 죄’는

대단히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마태 18,6-7).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한상우신부-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공동체를
완성하시는
예수님이시다.

적극적인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생명이신
하느님을 가리킨다.

율법과 예언서는
사랑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달려 있다.

생활의 길이
올바르면
우리들 삶도
올바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올바른 생활의
질서는 모순된
우리의 삶까지
치유한다.

사랑이
지켜지지 않는
우리의 현실을
예수님께서
아프게
진단하신다.

자발적인 참여와
올바른 실천이
필요한 때이다.

사랑의
성숙으로
사랑을
성화시켜
나가야 한다.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삶은
어느 시대
어느 환경에서도
꼭 필요한
사랑의 완성이다.

사랑의 정신을
알고 실천하는
것이 계명의
깨어있는 삶이다.

목적지도
중요하지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이 여정도
중요하다.

율법과 예언서로
우리 삶의
모든 차원을
사랑으로
들어 높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생명은
생활의 질서가
필요하다.

공동체는
이 사랑의 생명이
모여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공동생활이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이 여정을 통해
인격을 폐지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격을
완성하시는
분임을
깨닫게된다.

공동체와
개인 모두를
살리는
사랑의 정신이다.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다.

완성을
가르치시는
주님이시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0주 수요일-엘리야의 고독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 10일 연중 제10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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