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6. 9. 06:17

 2022 6 9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마태오 5,20-26)

 

wh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ll be liable to judgment,
and whoever says to his brother,
‘Raqa,' will be answerable to the Sanhedrin,
and whoever says, ‘You fool,' will be liable to fiery Gehenna.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엘리야가 아합 임금에게 올라가서 음식을 드시라 하고 기도하자 큰비가 내리기 시작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고 돌아와 예물을 바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다른 사람의 말에 큰 상처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남이 듣기에는 별문제가 없는데도, 큰 모욕을 당했다며 그 사람을 향해 심한 욕을 하기도 하고,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라는 표현까지 쓰면서 자신이 받은 상처의 아픔으로 인해 어쩔 수 없다고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나의 말과 생각을 24시간 쉬지 않고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그런 내가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과 생각을 계속해서 하고 있다면 어떨까요? 남의 말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서 자기를 더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남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한 모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부정적인 말만 하면 똑같이 부정적인 말로 상대하면서 거리를 두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나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를 향한 진심 어린 배려가 필요합니다.

긍정적인 말, 사랑 가득한 말, 용기를 주는 말…. 이런 말들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질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배려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국 작가 토마스 플러는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의 친구가 되어라. 그러면 다른 이들 또한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말’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지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솔직히 ‘이 말씀은 너무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보’나 ‘멍청이’는 종교적인 의미의 말이었습니다. ‘바보’는 (머리가) 빈 놈이라는 뜻으로 생각이 없어 하느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멍청이’는 하느님도 모르는 놈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함을 깨닫습니다.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해서, 똑같이 잘못함으로 응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의로움’은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철저하게 ‘사랑’에 기반하십니다. 사랑을 잃어버리는 모든 말과 행동은 의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반복되면서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화해라는 사랑의 실천이 지금 당장 이루어집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과 화해하면서 좋은 말들을 많이 해야 합니다.

사랑받는 것은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은 끝없이 지속되며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는 힘이다(오귀스트 로뎅). 

 화가 멈추는 때: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일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Ks_sg0wKGCI

대한 신경정신의학회 조사 결과 한국 성인의 50%가 분노 조절 장애를 겪고 있고 이 중 10%는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왜 우리나라는 분노 조절을 잘 못 하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대부분은 부모 때문입니다.   

 

    ‘응답하라 1988’ 중에 언니랑 생일이 3일 차이라 매번 언니 생일날 생일파티 하는 덕선이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니가 불은 케이크 초를 덕선이 나이만큼 빼고 다시 초를 붙이려 합니다. 케이크값을 아끼려는 부모의 마음이고 부모는 아이가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덕선이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신만 무시한다고 분노합니다.  

 

    이때 부모의 반응은 정말 미안한 마음입니다. 분노에 분노로 맞대응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아이는 더는 부모에게 마음을 터놓지 않을 것입니다. 분노를 삭이다가 누군가에게 터뜨릴 것입니다. 

사흘이 지난 뒤 덕선의 아버지는 케이크를 사서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짜잔, 우리 딸 언제 이래 커버렸을까? 허허. 아빠가 미안하다. 잘 몰라서 그래. 이 아빠가 태어날 때부터 아빠가 아니잖아. 아빠도 아빠가 처음인디. 그니까 우리 딸이 쪼까 봐죠, 응?”

  

    이때 덕선의 표정은 다시는 부모에게 화를 내지 않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리고 정말 화를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부모가 화를 내니까 자녀가 보고 배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먼저 화가 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쉬울까요?

  

    오늘 복음에 따르면 화를 안 내려는 사람은 바리사이에 속하고 화가 안 나게 하려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자에 속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20,22)

  

    아예 형제들에게 원망을 품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 상태에서 제물을 드리고 성체를 영해 봐야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20,23-24)

  

    하지만 살다 보면 어떻게 화가 날 일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화가 나는 원인이 ‘나의 이익’ 때문임을 안다면 화가 덜 날 것입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정말 상대를 사랑해서일까요, 아니면 손해를 보려 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화를 내지 말라는 이유는 화 자체가 이기적인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기적이면 상대도 그런 사람으로 보여 화가 나는 것입니다.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김미경 강사는 아들은 어머니가 잘나가는 것에 비해 매우 소심하고 소침해서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중학생 때 학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학교 출석 일수가 부족하여 빨리 자퇴하지 않으면 퇴학 처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며 어머니는 울며 겨자 먹기로 아이를 자퇴시켰습니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3개월 남겨놓고 음악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학원에 보내주었더니 예고에 가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피아노 전공이어서 잘 압니다. 다른 아이들은 여섯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쳐도 예고에 들어가기 힘든데 어떻게 지금 건반을 처음 두드리는 자신이 예고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더 말이 안 되는 것은 아이가 악보를 전혀 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3개월 동안 한 곡의 악보를 외워서 결국엔 외고에 합격하고 맙니다. 하지만 1년을 버티더니 고등학교도 계속 버틸 수 없었습니다. 워낙 기반이 안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또 자퇴하고 폐인 생활을 합니다. 

아들은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 4에 들어와 몰래 컵라면을 방에서 먹곤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을 무려 5년이나 했다고 합니다. 그걸 보는 아버지는 화가 끓어오릅니다. 하지만 엄마는 생각이 달랐습니다. 새벽 4시까지 기다렸다가 아들에게 따듯한 밥을 해 주었습니다. 남편이 화를 버럭 내었습니다. 이때 김미경 강사는 남편 방으로 따라 들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 눈에는 얘가 나쁜 애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아픈 애야. 한 번만 또 버럭 하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이렇게 어머니가 자신을 믿어주자 아이가 들어오는 시간이 빨라졌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자존감을 되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일본 여행을 떠나보겠다고 합니다. 자기 손으로 자기 먹을 것은 벌어보겠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어머니는 기꺼이 엄마는 기쁜 마음에 돈을 대 줍니다. 아이는 일본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언어 시험도 치릅니다. 손톱이 빠질 정도로 박스 나르는 일 하다가 이젠 햄버거 가게에 취직합니다. 

  

    그곳에서 어떤 누나를 알게 되었고 그를 성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 누나는 한국과는 다른 일본의 입시제도에 관해 설명해줍니다. 어떤 교수의 마음에 들면 그 학교에 입학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보를 보지 못하는데도 피아노 교수를 하는 일본 교수를 만납니다. 그 교수는 악보를 볼 줄 모르는 이유 중 하나는 청각이 발달하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줍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져오면 대학에 입학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국에 급히 들어와 검정고시를 보고 간신히 통과합니다. 어머니는 아이 반 친구였던 이들을 초대하여 집에서 졸업식을 해 줍니다. 상장도 열다섯 개나 준비합니다. 아이는 상장 다섯 개를 받을 때부터 울기 시작합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음대에 들어간 아들은 하루에 6시간씩 피아노를 연습합니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정도나 되어야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갑니다. 기쁨에 차서 엄마에게 돌아옵니다. 일본 여자 친구와 함께.

  

    그녀는 ‘어쩌다 어른’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아들의 편지를 읽어줍니다. 

    “엄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엄마 생각 정말 많이 했어. 근데 나는 엄마 생각하면 제일 속 썩였던 중학교 때가 생각난다. 엄마 그날 생각나? 내가 중학교 때 우리 집 부엌에 있던 식비 5만 원 없어진 날 말이야. 누가 가져갔냐고 이모도 고모도 다 내가 가져갔다고 말했어. 나 그때 정말 화가 났어. 모두가 나를 무시하는 거 같았거든. 왜 나를 무시하냐고 길길이 날뛰면서. 엄마 나 그날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 책상에 있는 책 다 집어던졌고, 그래도 분이 안 풀렸어. 그때 엄마가 강의 갔다가 돌아오셨는데, 엄마가 내가 던지는 책을 온몸에 맞으면서 걸어오더라. 엄마, 그때 많이 다쳤지. 진짜 미안해. 그때 엄마가 나 안고 말했어. ‘엄마는 너 믿어, 우리 아들 안 가져간 거 알아. 누가 너한테 가져갔다고 그래?’ 엄마만 내가 돈을 안 가져갔다고 믿어줬어. 진짜 고마워 엄마. 근데 엄마 있지, 그 돈 내가 가져간 거 맞아. 진짜 어이없지 엄마. 근데 엄마, 엄마만 그거 알아줬잖아. 내가 돈을 가져간 것보다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는 게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 집에 엄마 한 사람뿐이었어. 엄마만 나 믿었거든.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 말 아무도 안 듣고 엄마 말만 듣고 큰 거야. 그래서 내가 항상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었던 거야. 엄마 땜에. 엄마는 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는 내 인생의 파트너이자, 그리고 무엇보다 엄마는 나를 살려준, 나를 인정해 준 내 인생의 첫 번째 은인이야. 엄마 사랑해!”

  

    김미경 씨는 아이를 바라볼 때 나쁜 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아픈 놈으로 보았습니다. 중학교 때 이미 “엄마, 내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어! 나 진짜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거든. 근데 나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것을 마음으로 듣고 있었습니다. 

김미경 강사도 아들이 중학교 자퇴했을 때 처음에 한 이 말이 가장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나 어떡해!”

그리고 빨리 후회하고 상대를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려고 마음을 다잡았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나쁜 놈이 아니라 아픈 놈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먼저 의사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의사라는 믿음을 가지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하면 이제 ‘나 어떻게’에서 ‘너 어떻게’로 건너갑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사랑을 내 안에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로마 5,5 참조). 

    의사가 아픈 사람을 보고 화를 내는 일은 없습니다. 만약 화를 낸다고 한다면 그건 상대가 더 나빠져서 자기 명예에 손해를 끼칠까 봐 그런 것입니다. 사랑하면 상대가 ‘아픈 놈’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화가 안 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하느님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3GIGXYjAdws

 -조재형신부-

 

요즘은 일기예보가 정확한 편입니다스마트폰을 보면 1주일간의 일기예보를 볼 수 있습니다일기예보를 보면서 잔디에 물을 주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운동약속도 일기예보를 보면서 취소할 때도 있습니다특히 겨울에 눈이 온다는 예보가 내리면 가급적이면 외출을 자제하기도 합니다일기예보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일기예보는 자연의 현상이며 슈퍼컴퓨터는 기상의 흐름을 예측하고 있습니다과학기술이 발전하지 않았던 고대에는 날씨를 예측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여겼습니다많은 제사장들이 기우제를 드렸고임금도 기우제를 드렸습니다농사는 천하를 다스리는 근본이었기 때문입니다오늘 제1독서에서 엘리야는 바다 쪽을 바라보면서 비가 올 것을 예측하였습니다성서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엘리야가 기도하자하늘이 비를 내렸다.’ 지금과 같은 일기예보 시스템이 없는 시대에는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일기예보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을 이야기하셨습니다하느님의 뜻은 형제와 다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라는 것입니다하느님의 뜻은 율법과 예언서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라는 것입니다내가 남에게 바라는 만큼 남에게 해 주라는 것입니다제물을 바치려고 할 때 형제와 다툰 것이 생각나거든 먼저 찾아가서 화해하고 제물을 바치라고 하십니다그렇습니다하느님의 뜻은 특별한 능력으로 놀라운 업적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뜻은 자연현상을 거스르면서 물위를 걷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의 뜻은 풍랑을 잠재우는 것도 아닙니다하느님의 뜻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신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베로니카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린 것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여러분 중에 가장 굶주린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여러분 중에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당한 사람을 업고 여관으로 데려간 일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가난한 과부가 정성껏 제물을 제단에 바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세리가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백인대장이 예수님께 그저 한 말씀한 마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믿음을 보인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것입니다아이티에서 굶주린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는 신부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필리핀에서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을 먹여주는 수녀님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은 무엇으로 평가를 받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신앙인은 외모능력재산명예권력으로 평가를 받지는 않습니다신앙인은 남을 비난하고욕하고원망하고미워해서는 안 됩니다신앙인은 얼마나 사랑했는지얼마나 희생했는지얼마나 봉사했는지얼마나 겸손했는지를 가지고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율법과 규율이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 아닙니다편리한 문명의 이기들이 우리를 편안하게는 하지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우리를 해방해주고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을하느님의 뜻을 내 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많이 누군가를 향해 성을 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쳤는데, 불붙는 지옥이라니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생각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인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우리는 여전히 산상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하십니다.

‘의로움’은 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로,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또 다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라는 말씀으로 거듭 선포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이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사도 바오로도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갈라 3,11)고 옛 율법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는 의로움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그 의로움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첫 번째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율법의 “살인하지 말라”는 외적 행동의 의로움을 넘어서, 죄의 뿌리인 내적 지향의 의로움을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것까지도 ‘살인하지 말라’는 내용에 포함하십니다.

사도 요한도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1요한 3,15)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시고, 그 본질을 꿰찔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이는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합니다.

곧 용서와 형제애, 우애가 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를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중요시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하느님께서는 제단에 예물을 바치는 우리에게 ‘너의 예물이 무엇이냐?’ 묻지 않으시고,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성찬례를 거행하기 전에 혹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하고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 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반영억신부-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나!’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적으로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의롭습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5,20). “능가하지 않으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송영진신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ㄴ).”

 

이 말씀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하느님께서 보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에게만 보이려고 하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척 하는 위선자가 되지 마라.”>

여기서 ‘의로움’이라는 말은, ‘올바르고 진실한 신앙생활’을 뜻하는 말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위선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았다고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위선자는, 껍데기는 고급 승용차인데 속에 엔진이 없는,

거짓 자동차 같은 사람입니다.

겉모습으로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지만,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속과 겉을 모두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 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 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1-22).”

 

위선자들은 속으로 무슨 마음을 품고 있든지 간에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증오하고, 화를 내고, 모욕하고, 폭행을 하면서도, 죽이는 것은 아니니까

십계명을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죽이는 것만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모두 십계명 제5계명 위반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은,

생명이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지 말라는 계명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그 뜻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거스르는 일은 제5계명을 위반하는 죄가 됩니다.

작은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재판, 최고의회, 불붙는 지옥’은 점층법을 사용한 표현으로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뜻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을 겉으로만 지키지 마라.

‘마음으로부터’ 지켜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의롭다고 선고받기도 하고,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단죄받기도

할 것이다(마태 12,34.37).”

이 말씀은 ‘선한 말’만 하면 선한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선한 마음’으로 ‘선한 말’만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악한 마음을 감추고 겉으로만 선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준 피해와 상처는 생각하지 않고서, 자기가 받은

피해와 상처만 생각하고, 그래서 자기가 용서해야 하는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나는 하느님 앞에서는 죄가 없다는 말을 못하지만,

사람들에게 죄를 지은 적은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 자체가 위선입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이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천사 같은 사람이라면

“나는 이웃에게 죄 지은 적이 없다.” 라는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라는 말씀은, 형제와

화해하지 않는 상태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위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먼저’ 라는 말 때문에 하느님보다 이웃이 먼저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형제와 화해하는 일은

‘동시에’ 실천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만일에 ‘내가 먼저 가서’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고, ‘내가 먼저’

화해하려고 노력해도 그 형제가 용서와 화해를 거부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경우에는 거부하는 쪽에게 책임이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거부당하더라도 ‘내가 먼저’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마태 5,25-26).”

 

이 말씀은,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고소한 자’는 나 때문에 상처받은 피해자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수호천사일 수도 있습니다(마태 18,10).

‘법정’은 ‘하느님의 법정’이고, ‘타협’은 ‘회개’와 ‘화해’를 뜻합니다.

우리 인생은 ‘법정으로 가는 도중’입니다.

회개한 사람의 인생은 상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회개가 부족하거나 회개를 거부한 사람의 인생은

심판과 처벌을 받으러 가는 길입니다.

(결국 심판이란, 지금 각자 자기가 선택하는 셈입니다.)

하느님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회개할 기회가 없으니,

회개는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이라는 말씀은, 보속을 ‘완전히’ 마쳐야만

연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지 말고,

끊임없이 회개와 보속을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화가 나거든

 -김찬선신부-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오늘 주님의 말씀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지만

저는 형제와 싸웠더라도 그리고

아직도 미움과 분노가 태산 같더라도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고

그와 화해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너무도 좋겠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미움과 분노가 태산 같으면 그럴 수 없고,

그럴 수 없는 상태에서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 면목 없어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슬슬 하느님을 피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웃과 화해를 한 다음 하느님께 가야 한다면

영영 못 가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분노와 미움이 태산 같더라도

그래서 카인처럼 그놈을 때려죽이고 싶을 지라도 기도하러 가라.

가서 하느님께 그놈 나쁜 놈이고, 때려죽일 놈이라고 고자질하고

화가 풀릴 때까지 마음껏 욕하고 흉보라고.

그렇게 하여 혹 화가 풀리고 그래서

하느님 말씀 들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하느님 말씀도 들으라고.

 

이것이 제가 얘기하는 화날 때의 기도입니다.

기도에 대한 저의 지론은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안에 사랑이 가득하고 찬미가 저절로 나와야만 기도하는 게 아니라

화가 나고 그래서 저주밖에 나올 것이 없어도

그 저주를 하느님께서 내려주십사고 청하면 그것도 기도입니다.

 

시편을 보면 저주의 기도가 있는데,

저주를 내가 직접 퍼붓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 기도로 청하고,

누구를 욕하거나 흉보고 싶을 때에도

하느님 앞에서 욕하고 흉보면 기도가 됩니다.


그에게 직접 욕하거나 다른 사람을 찾아가 흉보는 것보다

이것이 더 낫고 기도가 되니 좋지 않겠습니까?

 

이게 저의 생각이니 화해하고 예물을 드리라는 주님 말씀이

너무도 지당한 말씀이기는 하지만 토를 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화해를 할 수 있기 위해서 그러니까 화해의 전 단계로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 화풀이 기도를 해야 합니다.

 

화풀이는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화는 반드시 풀어야 하는데, 화풀이는 그 화를 푸는 행위입니다.


화를 풀지 못하고 혼자 꿍꿍 하는 사람이 있고,

화를 당사자에게 무식하게 풀거나

엉뚱하게 다른 사람에게 푸는 사람도 있는데

화풀이를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이 최고이고,

그것이 곧 기도이고 굿으로 치면 살풀이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복음에서 눈여겨 볼만한 표현이 있습니다.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라는 표현입니다.


미움과 분노 가운데서도 일단 주님 앞에 간 겁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참된 예물이 되려면

형제와 먼저 화해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느님께로부터 물러나 형제를 찾아가는 겁니다.


얼마 전까지 “바보”, “멍청이”라고 한 사람을,

우리말로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개새끼”라고 해야 할 사람을

이제 형제로 받아들이기로 하며 찾아가는 겁니다.


개의 새끼가 아니라 하느님의 새끼이고 그래서 나의 형제인 그를

화풀이 기도 안에서 받아들이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떳떳합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화해를 형제간에 해서 떳떳하고

혼자 가지 않고 형제가 같이 아버지 앞에 가서 떳떳하고 행복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