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 12일 삼위일체 대축일

Margaret K 2022. 6. 12. 06:53

 2022 6 12일 삼위일체 대축일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져 왔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로마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요한 22세 교황 때였다.

 

☆☆☆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 16,12-15)

  
  Jesus said to his disciples:
"I have much more to tell you,

but you cannot bear it now.
But when he comes, the Spirit of truth,
he will guide you to all truth.
He will not speak on his own,
but he will speak what he hears,
and will declare to you the things that are coming.
He will glorify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하느님의 지혜는 한처음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태어났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하나되는 삶
-키엣대주교-

 

 

 

삼위일체의 신비,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것이기에 신비라고 합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통해 사랑의 신비인 삼위일체의 신비를 볼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나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생각과 행동 모든 순간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안에 머무는 것, 사랑 안에서, 사랑으로 서로 일치되는 사랑, 그것이 삼위일체의 사랑입니다.

“나와 나의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일체가 되었다는 것은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삼위가 완전히 하나의 옥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참으로 온전한 결합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봉헌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아들이신 예수님께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기에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모습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과 뜻, 모든 것을 다시 아버지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죽어가는 순간 두려움에 소명을 버리고 싶었지만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따라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주 삼위는 완전히 봉헌하는 삼위일체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봉헌은 자신을 위한 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바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생명을 만드는 사랑입니다.

봉헌은 사랑을 궁핍하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충만한 사랑을 만들고, 주면 줄수록 더욱 풍부해지기에 줄 수 있는 능력이 점점 많아집니다. 풍부한 사랑은 우주 만물에 넘쳐 흘러내립니다. 삼위일체가 계시는 곳의 충만한 사랑은 인류가 영원한 생명으로 존재하게 하고, 무한한 사랑의 원천을 깨닫고 그것을 향해 나감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빌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 때만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 삼위의 사랑 안에 함께 있을 때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죄로 인해, 주님의 사랑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의 마음으로 나의 모습은 망가지고 일그러져 더 이상 주님의 얼굴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시 삼위일체의 모습을 따르는 삶을 깨달아야 합니다. 서로 하나가 된 일체의 삶, 자신을 봉헌하고 내어 주는 삶, 나눔을 알고 박애의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는 삶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이기적인 나를 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버리고, 내가 가진 넘치는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뜻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나의 뜻을 버릴 때 비로소 주님의 뜻을 받아드릴 수 있고 주님의 모습과 같아질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삶을 위해 이기적인 사랑을 버릴 때 주님의 사랑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행복이며 우리 삶이 지향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이신 주님, 저희가 나의 사랑, 나의 삶을 버림으로써 주님의 모습과 닮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이론적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활 속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매우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 신비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2.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처럼 창조되었습니다. 주님께 충실한 자녀, 주님의 모습을 닮은 자녀가 되기 위하여 노력해 보십시오.

3. 삼위일체 하느님은 행복의 원천입니다. 행복을 얻으려면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함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하나가 된 일체의 삶, 자신을 봉헌하고 내어 주는 삶, 나눔을 알고 박애의 정신으로 조화를 이루는 삶의 실천은 나 자신과 가족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하나되는 사랑을 실천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난 3월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는 역대급 선거라는 말을 합니다. 2위와의 득표율 차가 0.73%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몇몇 분으로부터 “이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0.73%라도 더 지지받았다는 것을 왜 잊을까요?

자기는 옳고 남은 틀렸다는 생각입니다. 만약 자신이 반대했던 후보에게 투표한 사람 모두 사라져서 자기가 지지했던 후보가 100%의 지지로 당선된다면 어떨까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견제 세력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발전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0.73%의 득표율 차는 양측에 큰 깨달음을 주었을 것입니다. 잘 하지 않으면 더 큰 반대를 받을 수 있다는 것과 새로운 변화로 지지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요?

서로 이념의 차이로 갈라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념을 떠나 사람에 대한 사랑으로 하나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이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각기 다른 위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 몸을 이룬다.”라는 뜻의 삼위일체입니다. 잘 이해하기 힘든 교리입니다. 그러나 이 안에 담긴 사랑만을 보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그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역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무상으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베푸셨습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그 베푸심을 계속해 나가십니다. 이처럼 참사랑을 주시기 위해 성격이 다른 세 위격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셨듯이, 우리 역시 이제 후회할 짓을 하지 않고, 특히 우리 신앙의 공동체가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삼위일체의 삶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이 얼마나 삼위일체의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했으면 합니다. 사랑 없이, 자기의 기준만을 내세우면서 판단하고 단죄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서로 사랑과 신뢰로 하나를 이루면서,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에 그런 삶을 충분히 살 수 있습니다.

정면으로 죽음을 마주하며 살아가면서, 나는 이제야 삶을 시작하는 기분이다(라이너 마리아 릴케). 

 삼위일체 사랑 참여 방법: 기도와 말씀 봉사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FhMSU8NyquM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어려워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사실 모든 사랑은 삼위일체 신비입니다. 사랑하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면 창조자가 되고 그러면 영원히 삽니다. 우리가 어떻게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유방암 투병 중인 미국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학기 마지막 날, 제자들의 선물을 받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피아노 반주에 맞춰 학생들의 노래가 강당 가득 울려 퍼집니다. 교단에 앉아있던 선생님은 정성을 다해 부르는 제자들의 모습에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합니다. 학생들이 유방암 투병 중인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께 바치는 사랑의 세레나데입니다. 

  

    애드리아나 로페즈 선생님은 말합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학생들이 부른 곡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한 미국 가수의 노래, 원곡 멜로디에 자신들의 마음을 담은 이야기로 가사를 바꿔서 불렀습니다. 

합창단 감독인 그렉 브라인버그는 로페즈 선생님에 대해 이렇게 평합니다.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 헌신적인 교사입니다.”

합창을 마친 학생들은 힘찬 응원과 격려로 스승의 쾌유를 기원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응원 때문이었는지 치료를 잘 마치고 완쾌하였습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있습니다. 분명 그렉 선생님과 로페즈 선생님, 그리고 아이들이 하나의 사랑을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그렉 선생님이 로페즈 선생님에게 힘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그렉 선생님의 사랑에 동참하였습니다. 노래를 배우고 꽃을 준비하고 깜짝 선물을 해 주었습니다. 로페즈 선생님은 아이들의 사랑을 받아들여 건강을 회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이렇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2-13)

     

    여기서 예수님은 그렉 선생님입니다. 주고 싶은 것이 있는데 본인 힘만으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동원하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도와줄 성령을 동원하십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렉 선생님에게 순종하였듯이, 성령께서도 그리스도께 순종하시고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3-14)

  

    ‘그렉 선생님 – 아이들 – 로페즈 선생님’이 삼위일체이듯이 ‘그리스도 – 성령 – 교회’가 삼위일체입니다. 이 삼위일체 신비는 두 사람의 사랑을 이어주는 성령과 같은 아이들의 역할에 의해 완성됩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비가 아닌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이들처럼 삼위일체 사랑에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처럼 그렉 선생님으로부터 노래를 배우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또 그것을 로페즈 선생님에게 불려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를 ‘기도와 말씀 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배우는 시간이고 말씀 봉사는 그 배운 것을 가르치는 시간입니다. 

  

    초대 교회 때 사도들이 바빠서 부제 일곱을 뽑았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삼위일체 신비에 온전히 참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사도 6,2-4)

  

    기도와 말씀 봉사로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이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입니다. 

  

    저는 ‘개는 훌륭하다’에서 개를 키울 자격이 없는 수준의 견주가 나온 적이 있었습니다. 코비라는 보더콜리를 키우는 모녀인데 강형욱 훈련사의 지시를 전혀 따르지 않았습니다. 코비가 활동량이 부족하여 옷도 찢고 사람도 무는데, 말도 없이 또 다른 강아지 담비를 입양한 것입니다. 코비는 담비를 괴롭히고 담비는 변기 뒤에 숨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도 “쟤네 원래 저렇게 놀아요!”라고 말합니다. 

  

    보더콜리는 워낙 지치지 않는 활동량을 자랑하기 때문에 하루에 3번 정도는 산책시켜줘야 하고 엄청난 애정을 쏟아부어야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 조련사는 모녀에게 무릎을 꿇고 담비를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은 그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에 촬영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도 촬영을 이어가기 위해 훈련장으로 코비만 데려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모녀는 담비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아주 간단한 훈련을 하는데도 견주는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촬영이 중단됩니다. 모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는 배우러 온 건데…. 그런 쪽으로 훈련을 한 게 없고…. 잘 모르겠어요.”

 

 

    오늘 복음에서 성령께서는 아드님께 순종하시고 아드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와 교회를 이어주십니다. 배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분께 무릎 꿇는 행위입니다. 그렇게 배운 순종을 알려주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 성령의 역할을 할 때 삼위일체에 속하게 됩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입니다. 순종 없는 사랑은 그래서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요? 기도와 말씀 봉사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 오실 하느님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2BKrPVGYYuA

 -조재형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은 복음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치유의 은총을 주셨습니다눈이 먼 사람귀가 먼 사람은 보고 듣게 해 주셨습니다중풍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고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나눔의 은총을 주셨습니다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제자들에게도 아낌없이 주라고 하셨습니다우리가 주는 만큼 하느님께서 넉넉하게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목숨까지 내어 주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은 주님을 위해서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의 영광을 받아들였습니다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근원이 됩니다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모세를 보내셨습니다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고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이끌고 나와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예언자들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느님께 인도하였습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하느님과 더 멀어졌을 때입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지극하신 사랑 때문에 우리를 심판하기를 바라지 않으셨습니다우리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어서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요한 1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서로 사랑합시다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요한1서 4장 7-12)”

 

성령의 친교는 우리를 하나로 묶어줍니다성령을 체험한 사도들은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었습니다사도행전은 그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그때에 예루살렘에는 세계 모든 나라에서 온 독실한 유다인들이 살고 있었는데그 말소리가 나자 무리를 지어 몰려왔다그리고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지방 말로 듣고 어리둥절해하였다그들은 놀라워하고 신기하게 여기며 말하였다. ‘지금 말하고 있는 저들은 모두 갈릴래아 사람들이 아닌가그런데 우리가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우리가 저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듣고 있지 않는가?(사도행전 2, 4-11)” 성령의 친교는 교회의 직분에 다양한 은사를 주었습니다어떤 이는 가르치는 은사를어떤 이는 예언하는 은사를어떤 이는 복음을 선포하는 은사를어떤 이는 심령의 언어를 말하는 은사를어떤 이는 치유의 은사를 받았습니다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친교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고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이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나눔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성자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나눔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성호경을 할 때마다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저희 사제들에게 언제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매년 어떻게 하면 신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어떤 때는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이레네우스 교부)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 신비와 관련된 박준양 신부님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그 신비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삼위일체 신비를 몸으로 살아 나갈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 위하여 노력할 때, 성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 안에 함께 하시어 내주(內住)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를 우리는 ‘삼위일체적 삶’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어느 한 위격에게 드리는 기도가 더 효과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지금 내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우리 삶의 자리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더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기도드리면 됩니다. 한 위격만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며 바치는 기도라 할지라도 이는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이영근신부-

 

'삼위일체', 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신비입니다.

알아듣기에는 어려워도 참으로 벅찬 사랑의 신비입니다.

너무 깊어 헤아려지지 않아도, 오히려 다 헤아려지지 않기에 더 깊이 매료당합니다.

다 이해되지는 않아도, 그 사랑은 충분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는 이 신비의 내용을 알아듣는 데는 한계가 있다손 치더라도, 중요한 것은 이 신비를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아듣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그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삼위일체라는 이 사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그 신학적 의미를 아는 일입니다.

 

그것은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생겨나게 된 역사적 배경 안에서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곧 교회 안에서는 3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이 실제 하느님과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성령과 하느님이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주장에 맞서 교회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앙고백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알아듣는 하느님이 실제의 하느님이시고, 신앙인들 안에 숨결로 일하시는 성령도 실제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하느님께서 '삼위로서 일체이신 분'이시라는 이 사실은 단지 하느님의 신비를 말해주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신비입니다.

곧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는지를 말해주는 축복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이 세상 가운데 나타났는지를 말해주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드러내시는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신비는 세상을 사랑하시어 아드님을 보내시어 우리를 구원하신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축복을 말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참사랑의 신비입니다.

 

이 참사랑을 단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 안에서 당신 생명의 진리가 나타나게 하시고, 당신의 숨결인 성령께서 그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 깨달음과 실천으로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시라는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으로 살아계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리고 '함께 한다'는 것은 복음적 의미로는 '사랑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함께 있음'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삼위로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 이름마저도 ‘항상 함께 계시는 분, 임마누엘’이시듯이,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에, 사랑하시기에,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이 참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우리와 함께 하는 그분의 사랑’이 ‘이미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바오로 사도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로마 5,5)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서 벌어질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신다.”

(요한 16,13)

 

이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 속에 깊이 결속되어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계시하고 예수님의 구원행위를 계속함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나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전하여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요한 16,14)

 

그렇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시고, 그분께로 인도하시며, 그분을 영광되게 하심으로써 아버지를 영광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진리의 성령께 자신을 의탁해야 할 일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하느님은 멀리만 계시며 그리스도는 과거에만 머물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복음은 죽은 문자이며 교회란 한낱 조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권위란 한낱 지배하는 것일 뿐이며, 선교란 한낱 선전광고일 뿐이고, 전례란 한낱 과거의 회상일 뿐일 것입니다.

성령이 계시지 않다면 그리스도인의 행위는 노예들의 윤리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정교회 이냐시오 대주교(1920-2012)가 웁살라에서 열린 WCC 세계교회협의회 총회(1968)에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요한 16,13)

 

주님!

진리의 옷을 입고 당신 정원에 심어진 한 그루의 나무가 되게 하소서.

하여, 당신의 정원에서 행함으로 꽃을 피우고 의로움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모상에 따라 새로워지게 하시고, 진리의 영의 숨결 되어 흐르는 거룩한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모두 나의 것이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우리를 이웃과 하나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 시간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으로 계신다는 계시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총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빚어 만드시는 조소가 이시고 아들은 조소가의 손이시며 성령은 빚어 만든 흙덩이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곧 생명을 주신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목표이시며 시작이요, 마침이십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위해 아들을 넘겨주신 분입니다.

 

아들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이십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바치시며 존경과 순명을 가르치신 분입니다. 죄인의 대변자요, 억압 받고 소외 받는 이들의 변호자이십니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구원자 이십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 머물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시고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해 주시며 또한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대신해서 탄식해 주시고 새로움을 더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각기 역할이 구별되면서도 삼위일체로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 신비는 사랑의 관계 안에서 받아들여집니다. 루카 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의 잉태에 관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탄생과정부터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께서 개입하시고 결실을 이루시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루가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시는데 하늘이 열리며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 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루카3,21-22) 라고 적혀 있습니다. 세례 때도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18-20)고 하시며 아버지의 모든 권한을 받아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16,14).하시며 역시 아버지와 하나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요한 16,13.14).하셨는데 요한 17,17에 보면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1장 1절 이하에서는 “한 처음에 말씀이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아들과 성령께서도 하나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무한히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을, 아들은 무한히 수용하는 사랑을 성령께서는 무한히 자신을 남에게 연결하고 전달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살아 움직이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기도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성자는 기도를 도우시며 중재하시는 분으로, 성부는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으로서 우리의 영적 생명 안에 활동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부디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신비가 사랑 안에서 확인되고 체험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흔히 부부간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부부는 일심동체라고 표현합니다. 일심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한 마음이 되고, 한 마음이 되면 두 몸은 이미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한마음, 한 몸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가난해도 풍요로울 수 있고 상황이 어려워질수록 더욱 의지하고 더욱 일치합니다. 사랑하면 힘들면 힘이 들수록 더 큰 사랑이 요구됨을 압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사랑은 사랑하는 이들끼리 서로 닮아가서 상대방의 모습으로 바뀌기까지는 결코 완전한 것일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가진 것이 많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높은 지위에 있어도 외롭고 쓸쓸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은 능력이고 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계명도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게 되고 믿음이 더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사랑하십시오. 그리하면 많이 행하게 되고 주님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혹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사랑으로 하나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생각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남자는 체면을 먹고 살고, 여자는 기념일을 먹고 산답니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들의 불평, 불만을 먹고 산다고 합니다.

체면이나 기념일, 불평 불만을 먹고 살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살아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사랑을! @@@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송영진신부-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의 감사송을 보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주님의 계시로

저희가 믿는 주님의 영광은, 아드님께도 성령께도 다름이 없나이다.

그러므로 위격으로는 각각이시요 본성으로는 한 분이시며,

위엄으로는 같으심을 흠숭하오며, 영원하신 참하느님을 믿어 고백하나이다.”

용어들이 어려운 말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아니어서

비현실적인(너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라는 느낌을 줍니다.

‘위격, 본체, 본성’을 좀 더 쉬운 말로 바꿀 수는 없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다른 적당한 용어가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고 어떤 사물로 예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물은 우리 인간 세상에는 없습니다.

억지로 설명하다가 교리를 왜곡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라고 그냥 넘어가야 하는가?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해가 안 되어도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닙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언젠가는 삼위일체 교리를 비롯해서

알아듣기 어려운 교리들을 깨닫게 되는 때가 오고,

그 깨달음을 통해서 더 깊은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머리가 좋거나 나쁜 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무슨 공부를 많이 하고, 무슨 학위를 딴다고 해서

그 깨달음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이 가장 중요합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 4,12).”

이 말은, ‘삼위일체의 신비’ 같은 ‘하느님의 신비’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에 관한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라는 말은,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고 이해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날까지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는.)

그래도 하느님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라는 말은,

사랑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라는 말은, “완전한 사랑에 도달하면,

하느님의 신비를 온전히 깨닫게 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데,

머리가 아니라 ‘삶’으로 실천하면

누구든지 그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고,

온몸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받아들인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성모님입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이 말을 보면, 아버지 하느님과 성령과 아들 예수님이 구분되어 있고,

하시는 일도 구분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 그러나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한 일인 ‘동정 잉태’와 ‘메시아 강생’이라는 일 안에서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천사의 말만 듣고서 곧바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전히 알아듣고 이해하셨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성모님께서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온몸으로, 또 ‘온 삶’으로

받아들이셨고,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때까지

예수님과 함께 하시면서 그 신비를 깨닫고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의 본성에 속한 것이니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신비가 우리에게 계시된 이유가 무엇인지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우리가 모두 구원받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입니다.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면서,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는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분께서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1요한 5,1-6).”

 

위격으로는 ‘삼위’이지만, 본체로는 ‘한 분’이라는 말에 대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으면(그 신비를 왜 우리에게

드러내셨느냐고 물으면), 우리를 사랑하시니까, 우리가 구원받아서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기를 바라시니까, 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표현을 하든지 간에

말장난으로 들리겠지만, 믿고 사랑하는 우리는 믿음과 사랑을 통해서

점점 더 깊이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한상우신부-

사랑의
위대한 힘을
믿는다.

삼위일체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우리들
생명이다.

삼위일체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기에
소중하고
고귀한
품위를 지닌
사랑의 값진
존재들이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온전한
사랑이시다.

사랑은
사랑의 관계로
흘러간다.

사랑의 관계는
신뢰와
내어드림
확신으로
더욱 깊어간다.

이렇듯
사랑의 본질은
서로의 관계성
안에서

친밀감과 열정
헌신으로
드러난다.

성부의 선의와
성자의 나눔과
성령의 일치로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더욱
풍요롭게
하신다.

삼위일체의 삶에
응답하는 삶이
하느님 자녀들의
올바른 삶이다.

올바른 삶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이끄심에
순명하는
삶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시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의 원천이신
하느님과 함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랑의 대축일이다.

삼위일체
하느님께
우리의 현실을
전적으로
봉헌하는
은총의
신비이다.

삼위일체는
가장 좋으신
하느님의
뜻이시다.

하느님의 뜻은
가장 좋은
사랑의 나눔이다.

우리의
나눔 안에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말씀 나누기 - 삼위일체 대축일-삼위일체를 꼭 믿어야 하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16일 삼위일체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