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6월15연중 제1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2. 6. 15. 06:28

 2022 6월15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1-6.16-18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is doing,
so that your almsgiving may be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엘리야를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엘리사는 스승 엘리야의 영의 두 몫을 청해 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 자녀에게 “나처럼만 살아라!”라고 말씀하시는 부모가 있을까요? 부모들에게 “자녀가 여러분과 같은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아니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살아 진정으로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부모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살기가 과연 쉬울까요? 부모와 함께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을 무시하고 어떻게 전혀 다른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자녀가 잘되길 바란다면 자신이 후회하지 않는 삶을 먼저 살아야 합니다. 세상눈으로는 자랑스러워 보이지 않는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떳떳하게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모습을 보고서 자녀 역시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삶은 돈을 많이 벌어야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볼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즉,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주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감을 높이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 삶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의 삶을 보고 잘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또 절망과 좌절 속에서도 헤어 나올 수 있도록 직접 십자가까지 짊어지셨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셨다는 점에 우리는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로운 일이란, 유다인의 3가지 실천 사항인 자선, 기도, 단식에 대해 충실함을 뜻합니다. 그러면서 이를 단순히 보이기 위해서 하는 이를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면서 꾸짖으시지요.

위선자는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 말에서는 이 용어가 패륜아, 사악한 자 등의 뜻으로 쓰이는 것을 볼 때, 하느님을 거스르는 악인이 될 소지가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은 하느님께서 좋아하시지도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삶이 아닌, 하느님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삶이 내 주위 사람들에게 큰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느님에게 보이기 위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하느님 나라가 우리 자리에서 조금씩 완성되어 갈 것입니다. 그래야 모든 구원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온전히 마음을 열고, 하느님 안에서 참 행복의 삶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가장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도 아니고, 가장 똑똑한 자가 살아남는 것도 아니다. 변화할 수 있는 자야말로 유일하게 살아남는 자다(찰스 다윈).

 개에게 애정을 구걸하면 개가 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_-X5PBRrZyE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선행이나 단식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요? 
  
    ‘개는 훌륭하다’에서 모든 가족을 다 물어 재끼는 데도 개를 너무나 불쌍하게 여기는 한 어머니가 나왔습니다. 강 훈련사의 말은 이렇습니다.
    “개에게 많이 물리는 보호자의 특징이 뭐냐면 자책이 많아요. 누가 물려도 개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고 보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개에게 지배당하게 돼요.”
    강 훈련사는 온 가족을 다 물고 다니는 개를 정신 나간 개라고 하지만, 엄마는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워합니다. 강 훈련사는 말합니다. 
    “뭐가 죄인 줄 알아요? 사랑만 한 게 죄인 거예요.”
  
    사랑만 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개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개에게 영광을 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온 가족이 물리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영광을 받으려는 대상은 내가 섬기는 대상이고 그러면 그 대상에게 지배당합니다. 그러면 그 대상처럼 됩니다. 
  
    어머니는 강 훈련사가 개를 길들이려고 하자 매우 불쌍한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강 훈련사는 주인이 안쓰러워할수록 봄이는 더 엇나간다고 말합니다. 어머니는 강 훈련사가 개를 길들일 때 눈물까지 흘립니다. 이는 개를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개의 수준으로 내려가려는 행위입니다. 나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그 개에게 물리는 자기 가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개에게 영광을 구걸해서는 안 됩니다. 개는 자기 성질에 못 이겨 대소변도 싸고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립니다. 강 훈련사는 개가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를 교육합니다. 개에게 영광을 구하지 말고 가족에게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야 개가 피를 흘리더라도 자기 가족을 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더 개를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강 훈련사처럼 개를 길들이려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개에게 영광을 구하는 어머니일까요? 개를 길들이려면 어느 정도는 개에게 미움과 분노를 감수해야 합니다. 피를 흘리게도 해야 하고 똥을 싸게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개에게나 자녀들에게 피해를 주는 엄마가 됩니다. 
  
    이 어머니는 왜 개의 감정에 그렇게 집착할까요? 아마 어렸을 때 자신이 이 개처럼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개와 자신을 동일시하여 어렸을 때 받지 못한 사랑을 대신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받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기연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진짜 가족들을 물리게 만드는데도 멈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이 개냐?”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무엇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있었을까요? 바로 짐승입니다. 사람이 동물을 보면 길들이려고 하지만, 같은 동물은 동물을 길들일 수 없습니다. 동물에게 잘 보이려고 합니다. 따라서 동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애벌레에서 나비로 새로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나비가 애벌레에게 영광을 구해야 할까요? 그러면 아직 애벌레란 뜻입니다. 개에게 자란 옥사나 말라야에게 잘 보이려 하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도 그런 수준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옥사나를 바라보면 어떨까요? 안타깝습니다. 사람인데 짐승처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길들이려 노력합니다. 길들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나에게 영광을 올리도록 만드는 일입니다. 이것을 왕직이라 합니다. 
  
    위와 비슷한 라오라는 개가 나온 적도 있습니다. 강 훈련사는 훈련하다 이빨이 부러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개 앞에서 우리가 인간임을 잊을 때 개에게 잘 보이려 하고 그러면 진짜 개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을 끌어올려 주는 사람이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라오도 이름을 듣고 주인에게 반응하지 않는 개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개입니다. 주인에게 영광을 올릴 줄 모르는 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개에게 애정을 구걸합니다. 힘으로 하다 안 되니까 불쌍한 척도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필요하고 나에게 순종하게 될 때까지 훈련을 멈추면 안 됩니다. 이미 그 과정을 거치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자녀가 된 이들은 이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한 줄 압니다. 그래서 상대를 위해서도 아픔을 줄 줄 압니다. 
  
    강 훈련사는 좁은 우리에 개를 가둬놓고 함께 머뭅니다. 그러며 말합니다. 
    “넌 지금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거야. 제일 싫은 사람하고!”
거의 학대 수준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 안의 공격성을 꺾어놓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개의 수준으로 끌어내림이 아니라 개를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만이 개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수준이 되었다면 인간이라고 믿는 이들을 이렇게 대하고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주어야 하는데, 어떻게 영광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잘못된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강 훈련사는 주인과 함께 작은 풀장에서 개를 빠뜨리고 주인이 아니면 자신을 구해줄 대상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야 주인에게 순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오는 벽이 아니라 보호자에게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보호자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과 함께 살 수 있는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해서도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합시다. 하느님이 되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이미 하느님이 된 사람만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으면 사람들이 영광을 구해야 할 대상이 아닌 본성을 끌어올려야 할 대상으로 보입니다. 
  
    영광을 받으려면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애벌레를 나비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는 나비밖에 없습니다. 나비가 고치를 만드는 법을 알려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고마운 존재가 아니라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길들일 수 있습니다. 왕직을 수행해야 할 대상에게 마치 신하처럼 영광을 구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습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니미께서 갚아주시리라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WeYC5oJubk

 -조재형신부-

 

동북부 엠이 78차 모임엘 다녀왔습니다. 3년 만에 엠이 주말이 열렸습니다팬덱믹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많이 모일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습니다한국에서는 해 보았지만 미국에서는 처음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20 부부를 보내 주셨습니다팬데믹 이전보다 더 많은 부부가 함께 하였습니다발표 부부들의 도움으로 부담감은 자신감으로 변하였습니다미사 경본이 언어가 달라도 내용은 똑같은 것처럼 엠이 주말의 발표 내용도 미국과 한국이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주말에 참가한 부부는 결혼한 지 61년이 되는 노부부도 있었고결혼한 지 2달이 된 신혼부부도 있었습니다노부부에게서는 결혼생활의 관록과 사랑의 의미를 볼 수 있었습니다신혼부부에게서는 이제 막 시작한 사랑의 신선함과 발랄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부부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이를 먹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부부들에게 내 배우자의 사랑스러운 점은?’이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사랑해서 결혼했는데사랑해서 많은 것을 희생했는데매일 같이 지냈는데 막상 사랑스러운 점을 찾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부부들이 많았습니다자식들 때문에일 때문에바쁘다는 이유로 정말 소중한 것들을 잊고 지낸 부부들이 생각보다 많았습니다배우자의 사랑스러운 점을 찾아가면서 부부들은 조금씩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다른 부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기도 하고놀라기도 하고가슴을 저미기도 하였습니다마지못해서 왔던 부부들도 주말 체험을 통해서 혼인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사랑해서 왔던 부부들은 그 사랑의 소중함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부부들의 모임에 독신생활을 하는 사제가 함께하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혼인은 당사자들이 사랑해서 하는 것이지만 혼인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시는 성사이기 때문입니다오늘 나의 배우자의 사랑스러운 점은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오늘 내 이웃의 사랑스러운 점은 무엇인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에는 링컨 대통령이 있습니다링컨 대통령은 분열될 수 있었던 미국을 통합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링컨 대통령 이후 미국은 비로소 아메리카 합중국이 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링컨 대통령은 헌법에 특허의 권리가 인정될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합니다특허의 권리를 인정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산업의 발전에 헌신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미국의 특허권수는 유럽의 특허권수를 능가하였다고 합니다발명과 혁신으로 미국은 경제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링컨대통령은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의 필요성을 알았고대륙횡단 철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고 합니다이로서 동부와 서부의 물류는 연결될 수 있었고미국 산업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합니다그러나 미국의 역사는 링컨 대통령만의 역사는 아닙니다. 1대 대통령인 워싱턴 대통령과 46대 대통령인 바이든 대통령까지 이어지는 역사입니다그러한 대통령들을 선택한 미국 국민들의 역사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언자입니다바알의 거짓 예언자들과 싸워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었습니다아합왕의 위선과 거짓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비난하였습니다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그러나 이스라엘에 엘리야 예언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하느님께서는 엘리야 예언자의 뒤를 이을 예언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쟁기와 소를 버리고 엘리야를 따랐던 엘리사도 있습니다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한 아모스 예언자도 있습니다임마누엘 구세주의 탄생을 전한 이사야 예언자도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하느님의 뜻을 전할 예언자들을 보내주셨습니다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였고이스라엘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예언자들은 하느님 구원의 역사입니다그리고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역사는 한 사람의 마라톤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역사는 많은 사람이 함께하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우리 신앙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성인과 성녀만의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아 구원받으려는 모든 신앙인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2022년 6월 15입니다우리들 또한 이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가 되면 좋겠습니다우리가 물려받은 신앙을 지키고 보존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단식과 기도 그리고 자선의 목적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다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기도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의 신앙은 급격한 하락세를 보이고 있었는데, 그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지도자들의 위선적 삶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고생하고 있던 백성들은 신앙 안에서나마 위로와 힘을 얻고자 기대했지만, 성전 주변에는 위선자들이 득실거렸던 것입니다.

  

위선자들은 기도할 때 조차도 집중하지 못하고 인간의 칭찬을 찾아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들의 기도가 겉으로는 그럴 듯 해보였지만, 그 기도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았습니다.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지만, 그래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지만, 정작 하느님 앞에 그들의 기도는 기도도 아니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힐라리우스 교부의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성도들은 맹수 앞에서도, 감옥에서도, 불길에 휩싸여서도, 바다 속 깊은 곳과 짐승의 배 속에서도 기도합니다.” 

 

기도에는 진정성과 열정, 지극정성이 요청됩니다. 건성건성, 적당히,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듯한 어정쩡한 기도가 아니라, 때로 목숨을 건 기도, 삶 전체를 바친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란 한 인간이 자신의 근원이자 시초인 하느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일입니다. 따라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몸과 마음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토록 거룩하고 진지해야할 기도 행위에서 조차도 하느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위선자들의 대표 선수로 손꼽히는 자들이 있었으니 율법학자들이요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가만히 집에 잘 들어앉아 있다가도 기도하는 시간인 9시, 12시, 오후 3시만 되면 길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왕래가 잦는 회당 앞이나 큰 길 모퉁이에 멈춰 서서 멋들어진 폼, 거룩한 표정까지 지으며 열렬히 기도를 바치곤 했습니다.

  

숨은 일도 다 보시는 예수님께서 가증스런 그 꼴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기도의 가치와 위상을 추락시키고 기도를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 아니라 한 인간을 멋들어지게 포장하는 도구로 훼손시킨 위선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제대로 한방 날리십니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을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오 6장 6절)

  

공동체 전례, 하느님 백성과 함께 바치는 공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가끔씩 골방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어디에나 계시고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씩 영혼의 깊은 궁방 속으로 들어갈 필요도 있습니다.

  

성당이나 수도원만이 영성의 보고이며 곡창지대가 절대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나만의 공간, 하느님과 내가 편안하게 통교할 수 있는 내 작은 독방 역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자신의 골방에서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은 성당은 물론이고 이 세상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방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각 개인차가 있습니다. 참으로 다양하면서도 포괄적입니다. 따라서 한 가지 형태의 기도만 고수하고 거기에만 가치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공동체적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장엄한 공동체 전례가 더 빛나기 위해서는 거기에 참석하는 개개인의 열정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공동체와 무관한 개인기도는 자칫 고립되어 엉뚱한 방향으로 빠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골방에서도 열심히 기도하지만, 똑같은 열성으로 공동체 전례가 장엄하게 거행되는 성전으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 여전히 '의로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진정 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 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광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광고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지지 않는 것이 있고, 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도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 저는 어둠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

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천사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마귀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하지도 않은 선을 행한 것처럼 과시하지도, 저지른 악을 가리고 숨기며 거짓으로 치장하지도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 기도할 때 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늘 빛이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어지고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기도로 순결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라」

 -반영억신부-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 다 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치레는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든, 자선을 베풀든, 단식을 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나 자선, 단식을 함에 있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명확히 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 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희망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드러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함께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앞서 하느님의 시선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공연한 인간적 명성은 참된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송영진신부-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4).”

 

이 말씀을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너희는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의로운 일, 자선을 베푸는 일’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니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에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의로운 일, 자선을 베푸는 일’은, 그 일 자체가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전 재산과 목숨을 내놓는다고 해도 사랑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 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은, “나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즉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설마, 사랑이 없는데도 전 재산을 내놓거나, 자기 목숨을 내놓을 사람이

있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자신의 선행에 대해서 보상을 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간이 감히 하느님께 먼저 요구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하느님의 보상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요구해서 받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없이 하면서도 사랑을 실천하는 척 하는 것은 ‘위선’이고,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고 생색내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그 나라는 위선자들과 교만한 자들은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라는 말씀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선행을 실천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말고 실천하여라.” 라는 뜻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라는 마음으로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이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사람들이 못 보는 일도 다 보고

계시고, 사람들이 모르는 일도 다 알고 계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먼저 보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데, 위선자들은 자기가 위선자인 줄 모르고,

교만한 자들은 자기가 교만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위선과 교만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면서 성찰해야 합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을 하는 ‘연기’(演技)입니다.

그것은 위선보다 더 큰 죄, 즉 사기죄입니다.

여기서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에” 기도하라는 말씀은,

기도는 항상 숨어서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가짜 기도를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조금 다르게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경우에는 일부러 사람들 보라고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시국 기도회’가 그런 경우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이 성당에 숨어서

개인의 복을 비는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결코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기도’도 역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자녀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자주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1)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또 굶주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그리고 회개와 보속과 사랑 실천을 위해서 단식합니다.

따라서 단식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중요합니다.

2) 위선자들의 단식은, 회개도 보속도 사랑 실천도 아닌,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한 단식입니다.

물론 위선자들도 실제로 밥을 굶고, 실제로 배고픔을 참지만,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니, 그 단식은 ‘헛일’이 될 뿐입니다.

3)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단식일로 정해져 있는

날이어서 어쩔 수 없이 의무감만으로 단식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에 없는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위선자들의 단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4) 단식을 했다면 그만큼 음식이 절약되었을 것이고,

그 음식은(또는 음식 값은) 이웃 사랑 실천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라는 말씀은, 단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안 하는 척을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을

조금 강하게 표현하신 말씀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3)

-한상우신부-

간절한
비가 내린다.

오른손과
왼손
하늘과 땅은
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

왼손과
오른손의
만남이
진정한
우리들의
공동체이다.

마음 씀씀이를
다시 배우는
시간이다.

마음을 잃어버리면
오른손과 왼손은
늘 갈등과 분열
모순에서
허우적댄다.

내용과
겉치레 사이에
우리가 살고있다.

점점
메말라가는
우리 영혼이다.

말 없는
사랑의 실천이
간절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여기도
저기도
너무 말이
많다.

참된 신앙은
참된 자선으로
이어진다.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자선은
하느님을
드러낸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자선은
자기기만과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참된 자선의
길잡이가 되시는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진심으로
진실을
실천하신다.

진실한 관심
진실한 자선이다.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사람이며

사람을 다시
아름답게
하는 존재도
사람이다.

따뜻한 손길
진실한 마음이
담긴
자선(慈善)이

우리의
위선(僞善)을
바로잡아
주고 있다.

삶의 길은
위선이
결코 아니다.

자선과 기도
단식의
중심에는

가장 좋은
만남으로
바꾸어 주시는
주님이 계신다.

자선은
도움이 필요한
예수님과의
참된 만남이다.

참된 만남은
요란스럽지
않다.

 말씀 나누기 - 연중 11주 수요일-짝사랑이 좋고 짝선행이 좋다.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6월17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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