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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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집회서의 저자는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으로 가득 차 살아생전에 기적들을 일으켰고, 죽어서도 그의 업적은 놀라웠다고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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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일본 마쓰시다 전기의 창업자이자,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신입사원 면접 때 반드시 이러한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인생은 지금까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은 합격 당락이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더욱더 신중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듣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이 질문에 아무리 우수한 사람이라도 운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을 절대로 뽑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실력보다 운을 믿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니었습니다. “운이 좋았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 대해 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감사의 마음을 가진 겸손한 사람만이 좋은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그의 철학이었습니다.
자기 노력만으로 이 세상을 온전하게 잘 살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고, 그래서 주변 사람에게 감사의 마음을 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운이 엄청나게 나쁜 사람이지만, 자신이 이렇게 노력해서 이만큼이라도 왔다고 말하는 사람은 감사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을 자신의 경쟁 상대로만 바라보려 합니다. 회사로서는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감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불행의 이유만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평불만으로 세상에 혼자만 남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할 때 당시의 사람들은 빈말을 되풀이했다고 합니다. 뜻 없는 말을 계속 되뇌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기도를 길게 함으로써 하느님을 움직이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와 많은 말을 하는 기도 등은 다른 민족 사람들이 하는 기도이기에, 진정으로 하느님을 굳게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바쳐야 하는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께 대해 집중할 수 있게 합니다. 특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면서, 하느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닌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내길 기도하면서, 그 영광 안에서 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래서 그분 안에서만 희망을 두고 열심히 살 수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과 함께하는 커다란 행운을 가지고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감사의 마음을 가지면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한다면, 지금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모두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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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방법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bP-xJiKTp5g
오늘은 예수님께서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시니, 그냥 이 기도만 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개는 훌륭하다" 프로그램에 나온 알래스칸 맬러뮤트 샐리는 8살입니다. 샐리에게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두 보호자를 물어 손에 상당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그래서 샐리 견생 한 번도 털을 깎거나 목욕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또 밥을 먹을 때 먹여주려면 손을 물려고 하고 그렇다고 주인이 사라지면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인이 퇴근할 때까지 한 입도 먹지 않습니다.
남자 주인은 이 아이가 자신들보다 서열이 높은 줄 알기에 더 높은 서열의 셰퍼드를 데려와서 서열을 정리해야 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샐리는 이 밖에도 주위 경계가 너무 심하여 음식을 배달시키지도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하울링을 2~3시간씩 합니다. 새벽에도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강형욱 조련사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더니 조심스럽게 샐리는 착한 개 같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주인이 못됐다는 뜻이 됩니다. 주인은 개에게 너무 잘해주려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입장에서 잘해줍니다. 자기 손으로 음식을 주려 하고 자기가 빗질을 하며 자기가 목욕시켜주려 합니다.
강 훈련사는 개의 입장이 되어 개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청합니다. 샐리는 4개월 정도 키워주던 주인이 키우는 것을 포기해서 입양한 아이입니다. 그러니까 부모에게 버려진 아픔을 겪은 것입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부모가 목욕과 빗질을 시켜줄 때 살짝 물렸습니다. 알래스칸 맬러뮤트는 물이 묻으면 바로 얼어버리는 추운 곳에 적응되어 있기에 물을 싫어한다고 합니다. 이때 남자 주인은 신문지를 말아 버릇을 고치겠다며 개의 엉덩이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때 트라우마가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빗도 몽둥이로 인식하고 으르렁댔던 것입니다.
샐리를 데려왔을 때 이미 지금의 샐리 나이만큼 먹은 맬러뮤트가 한 마리 더 있었습니다. 둘리였습니다. 둘리는 처음부터 자신들이 키웠기에 매우 얌전한 개였습니다. 먹이를 줘도 주인 손을 다치지 않게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 둘리가 먼저 무지개 다리를 건넌 것입니다. 샐리는 또 친구를 잃었습니다. 주인들은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까지 돌아오지를 않았습니다. 또 버려지는 게 두려워 계속 하울링을 했던 것입니다.
강 훈련사는 저녁만이라도 샐리를 거실로 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이 방침에 잘 따릅니다. 샐리는 거실로 들어와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아주 맛있게 먹습니다. 샐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멋진 집도 아니고 주인과 함께 주인의 공간에서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주인이 자기를 새끼로 여겨주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은 샐리가 원하는 것보다는 샐리를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행복감을 맛보려 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이와 같을 것입니다. 내가 상대에게 잘해주려 해도 상대는 그것을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해 주는 것에 상대가 만족하기만을 바랍니다. 이러한 강요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샐리가 밥을 먹으면 그냥 주위에서 지켜보면 됩니다. 내가 음식을 주고 있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내가 주는 것을 받아먹을 때까지 개를 변화시키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나중에 내가 원하는 것을 샐리도 해주게 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께 드리는 기도와 희생, 봉사, 선행 등을 주님께서 당연히 기뻐하실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른 것을 원하고 계실 수 있습니다.
먼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주님의 마음이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하면 주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들어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마태 6,7-9)
‘어미 판다 이야기’를 소개해 드립니다. 숲속에 판다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 판다는 눈만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산골에 눈이 일주일, 열흘 내리면 판다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무 위에만 있었습니다. 나무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곰을 숲속의 다른 동물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비가 토끼에게 물었습니다.
“판다는 왜 그렇게 미련해? 왜 밥도 먹지 않고 나무 위에만 있어?”
토끼가 말했습니다.
“너는 기껏해야 네가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할 뿐이야. 판다의 마음을 모르면서 판다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지 마!”
토끼가 나비에게 들려준 판다의 이야기는 참 슬펐습니다. 판다가 살던 동굴에는 예쁜 새끼 판다들이 있었습니다. 어미 판다는 눈이 내리면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때문에 사냥꾼들로부터 새끼 판다들이 위험할까 봐 동굴에서 나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기 판다들이 며칠째 굶고 있자 어쩔 수 없이 먹이를 구하러 나갔다가 급히 동굴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반겨줄 아기 판다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에 어미 판다의 발자국을 거꾸로 따라온 사냥꾼들이 아기 판다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그날 이후 어미 판다는 눈이 내리면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미 아기들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마음의 상처를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나무 위에서 견디고 있었습니다.
위 이야기에서 어미 판다에게 모든 것을 얻어낼 수 있는 동물은 토끼밖에 없습니다. 토끼는 어미 판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자기 마음을 내어놓았습니다. 내 마음을 줄 수 있을 때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개들이 주인이 쓰다듬어 주는 것을 좋아할까요? 어쩌면 허락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받은 것이 있으니까. 그것은 주인인 원하는 일입니다. 개들은 그냥 주인이 밥만 주고 옆에 있어 주기만 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유튜브 채널 ‘포크포크’에 아버지의 날, 새아빠에게 입양신청서를 내민 9살 의붓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일라의 친아버지는 그녀가 갓난아기 때 떠나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날, 그런 마일라에게 든든한 아버지의 역할을 다해준 웨인에게 마일라의 편지는 이렇습니다.
“아빠가 언제 제 삶에 찾아오셨는지 기억하지 못해요. 전 그저 갓난아기였거든요. 하지만 아빠와 자란 건 기억해요. 늘 보호받고, 안전하게 느끼며 저를 보살펴 주셨죠. 제 친아빠는 그래 주지 못했거든요. 그래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신께서 아빠를 보내주셨기 때문이에요. 어려움을 겪을 때에도 우리 가족과 함께해 주셨고 항상 우리를 선택해 주셔서 감사해요. 제가 보호가 필요하면 위험을 무릅쓰고 어떤 경우에도 항상 저와 함께해 주셨죠. 아빠는 항상 본인보다 저와 엄마를 우선시했어요. 아버지의 날은 제게도 매우 특별한 날이에요. 왜냐하면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으니까요. 아빠에게도 특별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공식적으로 해요. 아빠는 아빠가 될 자격이 있어요. 아빠, 절 입양해 주시겠어요?”
제르뚜르다 성녀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내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나도 네 뜻을 따라주기로 결심했다.”
이 말을 깊이 새깁시다.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먼저 그것을 청합시다. 그러면 주님께서 내 모든 청을 들어주실 것입니다.
아무도 내가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타인이 원하는 것에 관심 갖기 전까지는. 마음을 얻는 법은 마음을 주는 것뿐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주님의 기도입니다. 내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쳐 주님의 마음을 알아 들을 수 있다면, 주님께서도 내 마음을 알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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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자유의 품위를 위하여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mZrYW_FPZW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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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이번 동북부 78차 엠이 주말에는 여러 지역에서 부부들이 참석했습니다. 뉴욕과 뉴저지에서 오시는 분들은 2시간 거리면 올 수 있었습니다.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서 오시는 분들은 6시간이 넘게 걸렸습니다. 서울에서 하는 교육에 멀리 진도나 부산에서 오는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교육을 마치고 6시간 넘게 돌아가야 하는 부부들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함께 한 부부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무런 문제가 없고 행복한 것 같았지만 사실 문제는 수면아래에 있었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무심한 것이 가정의 평화와 행복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아내의 권유에 마지못해 참석한 남편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그 사랑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서로 대화하고, 서로의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다면 무심은 애정으로 바뀔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툼은 부부 사이를 갈라놓은 장벽이 아니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팬데믹 이후에 처음으로 2박3일의 일정을 마치면서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지향을 받게 됩니다. 미사지향은 크게 2가지입니다. 세상을 떠난 분들을 위한 연미사지향이 있습니다. 연미사지향에는 기일을 기억하는 것이 있고, 불쌍한 영혼을 위한 지향이 있고, 연옥영혼을 위한 지향이 있습니다. 성인들의 통공과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청하면서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살아있는 분들을 위한 생미사 지향이 있습니다. 생미사 지향에는 감사미사가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청원미사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 바라는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공동체가 함께 기도하니 하느님께서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한국 순례단은 공동체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서 미사지향을 봉헌하는 것을 봅니다. 외국 순례단에서는 자주 볼 수 없는 한국순례단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순례의 여정 중에 특별한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순례를 더욱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 주셨습니다. 신앙인들이라면 누구나 매일 바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청원의 기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부,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건강, 승진, 합격을 청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청하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의로움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청합니다. 참새는 둥지 하나를 마련하면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다람쥐도 웅덩이에서 목울 축이면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낌없이 줄 때,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넘치도록 채워 주심을 믿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청합니다. 유혹은 욕망과 욕심이라는 기름을 좋아합니다. 욕망과 욕심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유혹의 불길이 타오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겸손과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유혹의 불을 꺼트리는 강력한 소화전입니다. 겸손은 유혹이 가장 두려워하는 보호막입니다. 악에서 구하시기를 청합니다. 악이란 행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란 하느님의 부재입니다. 하느님의 그늘에 머무는 사람은 악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나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요즘 내가 가족들과 함께한다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한다면,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면 바로 그 시간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요즘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자주 읽는 책,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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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그릇된 길로 나아갈때 교회가 침묵해서는 절대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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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기도’(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문 안에는 예수님이 가르치시려는 모든 말씀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주님의 기도'에는 주 예수님이 담겨 있고,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Oratio Domini)'라는 전통적인 표현에 대해서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전해 주신 우리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라는 뜻이다.”
(가톨릭교회교리서 2765)
우리가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 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 드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도를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에게 필수적입니다.
교회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중세시대로부터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사실 '이 기도'는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하느님의 일하심을 인정하고 초청하는 것이요, 하느님께서 주님 되시도록 해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새롭게 보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자신 안에서 하느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고, 하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고, 우리의 눈이 바뀌어 가고, 삶이 바뀌어 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올바르게 사는 것은 우리의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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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는 기도」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적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맞은 삶으로 기도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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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기도』
-송영진신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해서 ‘내가’ 바치는 기도입니다.
지금 당장 내가 아프고, 슬프고, 힘들어서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이긴 한데,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남의 사정을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아프고 슬프고 힘들어도, 남의 아픔과 슬픔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더라도,
동시에 남을 위해서도, 즉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는 ‘내가’ 바치는 기도라는 말은,
기도를 남에게 떠넘기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도, ‘기도’도 ‘내가’ 능동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나 자신’의 일입니다.
1)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바쳐야 합니다.
만일에 그 믿음 없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냥 떼쓰는 일이 될 뿐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으면,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것도
믿게 되고, 그러면 ‘결과’를 모두 하느님께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도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웃 사랑 실천으로 그 믿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원래 믿음이란,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이 아니라,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은 곧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고,
그것은 남이 대신 해 줄 수 없고,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3) 따라서 ‘주님의 기도’는 말로만 바쳐도 되는 기도가 아니라,
나의 ‘온 삶’으로 바쳐야 하는 기도입니다.
사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말만 해서 될 일들이 아니고,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주님께서 신앙인들에게 주신 ‘행동 지침’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란, 주님에게 일을 시키는 ‘지시’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주님에게 ‘이것을 해 달라.’,
‘저것을 해 달라.’ 라고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표현으로는 겸손하게 청하는
기도라고 해도, 그것은 주인이 하인에게 일을 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옳지 않은 기도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다 하면서,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 부탁하는 것이 올바른 기도입니다.
주님은 예수님이시고, 우리는 주님을 믿고 따르고 순종하는 신앙인입니다.
주님의 기도 앞부분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믿고 희망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드러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도 협력자로서 함께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복음화’ 활동입니다.
(사실상 선교활동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아버지의 이름을 세상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가 하루라도 더 빨리 오기를 희망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내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우리가 모두 함께 그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아버지의 나라가 올 텐데,
그때 나는 하느님 나라의 안에 있을 수 있을까? 밖에서 구경만 하게 될까?
(구경꾼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인간 구원’입니다.
구원은 이곳에서(땅에서) 시작되어서, 아버지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희망해야 하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결코 소홀히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것은,
‘나눔’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남의 배고픔’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서만 배불리 먹는 사람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자격이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이미 용서하셨음을 믿고, 이웃을 용서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용서할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빈말’이 될 뿐입니다.
12절과 14절-15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먼저 남을 용서해야만,
아버지의 용서를 받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아버지께서는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고,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용서의 은총’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일이라는 것이 우리 교회의 교리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일은,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용서의 은총’을 잘 ‘받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유혹을 물리치려고
노력하겠다는 다짐이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청하는 것은,
악에 맞서서 싸우겠다는 다짐입니다.
기도는 ‘말’로만 바치고 끝나는 일이 아니라,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해야 하는 일입니다.
청하기만 하고(말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기도는 ‘빈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내가’ 나의 온 삶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바치고 있는 주님의 기도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깨우쳐 주고 신앙생활의 방향을 정해 주는
‘삶의 등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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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용할 양식만
-김찬선신부-
어제 자선과 단식과 기도할 때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위선적으로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 주님께서 오늘은
그중에서 기도에 대해 따로 가르침을 더 주시는데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부분에 오늘은 저의 생각이 머물렀습니다.
하루에 필요한 양식만 청하고 더 청하지는 말라는 말씀으로 들리면서 말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꼭 하루치만 청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으셨겠지만
오늘 제게는 그렇게 들렸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시면서 하루치만 가지고 가라고 하셨는데
아마 그 뜻과 같을 겁니다.
언젠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로또와 주식에 대해 얘기가 나왔는데
요즘 젊은이들답게 주식을 하는 것을 문제로 생각지 않았고
제 생각에 그런 것에 부정적일 거라고 생각한 친구마저
주식은 하지 않아도 로또는 매주 산다는 거였고 그래서
로또 심리에 문제 의식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뭐가 문제냐는 것이었습니다.
하기사 꽤 오래 전에 제가 만났던 분은 당첨될 욕심이나 기대 때문이 아니라
로또를 안주머니에 넣고 다니면 왠지 든든해서 매주 산다고 하셨는데
그런 거라면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떡여줘도 되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요행이나 일확천금을 꿈꾸는 거라면 문제겠지요.
일용할 양식과 하루치의 만나는 이 일확천금의 꿈은 아예 꾸지 말라는 것이고,
욕의 씨앗은 싹수부터 제거하는 뜻일 겁니다.
욕欲이라는 씨앗을 아예 제거해야 욕이 욕구欲求가 되고,
욕구가 욕망과 욕심이 되는 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제가 미국에 있을 때만해도 한국의 좋은 소식은 신문에 나지 않고,
성수대교나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는 챵피한 얘기만 나던 때였는데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구속되는 얘기가 또 크게 났습니다.
그때 저는 이분들이 왜 이렇게 많이 축재를 했나,
백 억 정도만 가져도 죽을 때까지 넉넉하게 쓰고도 남을 텐데
수천 억씩이나 축재를 한 그분들에 대해 처음에는 분노가 치밀더니
나중에는 참 불쌍하고 불행한 인생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필요로만 치면 일용할 양식이면 되고,
일용할 양식을 청하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지만
일확천금을 욕심내는 사람은 하느님께 청하지도 않겠지만
청해도 하느님께서는 절대 그것을 주지 않으십니다.
진정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라면
욕의 씨앗은 아예 뿌리지도 말고 재물은 쌓지 말라는
일용할 양식의 뜻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일용할 양식을 청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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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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