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7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59)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keeps my word
will never see deat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계약을 영원한 계약으로 세우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 선언하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순대국 7,000원, 순대국(특) 8,000원, 순대국(스페셜) 12,000원.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메뉴에도 마케팅 효과가 적용된다고 합니다. 스페셜 순대국은 원래 먹으려는 순대국보다 5,000원이나 비싸고, 순대국(특)은 1,000원밖에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조금 특별한데 5,000원이 아닌 1,000원의 차이니 대부분 일반 순대국이 아닌, 순대국(특)을 주문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미끼효과’라고 하더군요. 순대국(스페셜)을 넣음으로 인해, 순대국(특)의 판매를 늘렸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스스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논리적이지도 또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순간의 감정에 더 크게 영향을 받습니다.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마케팅에 적용하는 예는 너무나도 많다고 하더군요. 똑똑하다고 여기고 잘난 척을 많이 해도 이런 심리 전략에 너무 쉽게 넘어가는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요? 이러한 부족함에서도 계속해서 남을 향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않는 교만으로 가득한 우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철저히 순명하신 것 같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물들어 있는 죄를 없애는 해독제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오히려 마귀 들렸다면서 빈정대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과는 대화가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일들에서 충분히 하느님의 영광이 보임에도 믿지 않는 그들의 불신앙이 자기들이 정의한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돌을 집어 듭니다. 구원으로 이끌어줄 하느님께 오히려 돌을 집어 든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신성모독이 되고 맙니다.
부족한 존재인 인간이면서도, 다른 이를 향해 끊임없이 자기 입장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우리입니다. 그 순간에는 정의라고 말하지만, 오히려 불의일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잘못된 판단과 단죄가 하느님의 뜻과 정반대가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믿음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아브라함과 이벽의 경우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oJ0w9enSj8
아브람은 칼데아 우르에서 살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 고향과 집은 수메르 문명이 번성하던 곳이었고 인류 역사의 초기 문명을 대표할 만한 사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까지 인류는 종교적인 문화양식을 갖추기는 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상상력과 영감으로 고안해 낸 것이어서 하느님께서 보시기에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담기에는 터무니없이 모자란 탓에 우상숭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상숭배적 종교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참된 신을 찾고 있던 아브람에게 처음으로 말을 건네셨습니다. 그것이 방금 소개해 드린 부르심의 말씀입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아브람이 그 말씀을 알아 듣고 고향과 집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역사가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 보면, 그런 아브람에게 하느님께서 다시 말씀을 건네시고는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는 하느님의 조건은 쌍무적인 것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그 후손들을 늘어나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보호해 주시겠다고 하셨고,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그 계약의 표시로 두 가지를 명하셨는데, 하나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라는 것과 할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새 이름과 할례로써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 인류 역사에서 생겨난 표시가 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서 하느님과 맺은 이 계약은, 모세를 통해 하느님과 맺은 시나이 계약으로 구체화되었고, 다윗을 통해 하느님과 맺은 시온 계약으로 더욱 구체화되어 나갔습니다. 이러한 계약의 흐름은 예수님께서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하여 열두 제자와 맺으신 성체와 성혈의 계약으로써 집대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원을 일찌감치 알아본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 세례자 요한인데,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다”(요한 1,29).
교회는 성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이 계약을 상기시키고 갱신하며 계승합니다. 새롭고 영원한 이 계약을 맺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을 내놓으셨고 당신 피를 흘리실 각오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계약에서는 빵을 당신 몸이라, 포도주를 당신 피라 부르시면서 앞당겨 일치를 시키셨습니다. 빵에 떼어 나누어지듯이 당신 몸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포도주가 나누어지듯이 당신 피가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리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세우신 계약입니다. 당신 제자들로 하여금 당신의 삶을 기억하여 계승하게 하기 위한 계약이었던 것이요, 이 제자들이 이미 저질렀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한편 세상의 죄에 대해서도 물들지 않기를 바라는 뜻으로 세우신 계약이었던 것입니다.
이 계약을 염두에 두시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시요, 생명의 물이심을 밝혀주셨으며, 간음하다 끌려온 여인의 죄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심판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보여주셨습니다. 이것이 그 옛날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계약을 맺으신 흐름의 결정판이었던 겁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하느님 곁에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첫 계약에서도 이 빵과 물과 자비의 은총을 베풀고 계셨으며, 때가 차자 드디어 당신이 직접 당신 백성에게 오셔서 인류가 하느님과 제대로 관계를 맺는 길을 알려주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며, 그분의 용서를 체험하면서도 유다인들은 그분께서 천지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라는 신성과 선재성(先在性)을 짐작할 수도 없었기에 예수님을 오해했고 돌을 던져 죽이려고 했으며, 결국 아브라함 이래의 계약을 계승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에게 일어났던 다행스런 일이, 그리고 하느님의 섭리로 세례자 요한에게도 일어났던 은총스런 일이 일어나서 리스도 신앙의 진리가 이 땅에 오묘한 섭리로 들어오던 18세기 무렵에 예수님을 알아본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이벽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 당시 조선 사회의 무신론적 성리학 사조와 무지막지한 신분차별에 염증을 느끼던 차에 조상들로부터 천주학 서적을 물려받아 마음껏 독서하며 탐구할 수 있었던 이벽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천주교 교리에 통달함은 물론 스스로 신앙의 수련을 쌓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사문난적의 사상통제를 뚫고 같은 처지에서 개혁의 열망을 품고 학문에 정진하고 있었던 구도적 선비들과 함께 한국교회는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기적적인 오묘한 섭리에 담긴 뜻은 분명합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 믿음의 조상이 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창립 주역이 된 이벽에게 있어서도 믿음은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조재형신부-
시간을 직선으로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고, 지금은 현재입니다. 저도 직선의 시간에 익숙해져있습니다. 사무실에는 탁상용 달력이 있습니다. 달력에는 지나간 일정이 적혀있습니다. 지나간 일정을 보면서 제가 만났던 사람, 제가 했던 일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달력에는 앞으로의 일정도 적혀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해야 할 일을 준비합니다.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하고, 서류를 준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직선의 시간 속에서 ‘생, 노, 병, 사’의 과정을 경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도 직선의 시간을 이야기합니다. 아브라함도 죽었고, 예언자들도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들판에 있는 묘지는 직선의 시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시간을 순환으로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직선으로 자라는 나무에는 원으로 자라는 나이테가 있습니다. 나이테가 있기에 나무는 곧게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을 계절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매년 우리를 찾아옵니다. 일출과 일몰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낮과 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도로와 순환지하철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흘러가는 직선이 아닙니다. 순환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돌아오는 곡선입니다. 교회의 전례는 순환하는 시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림을 통해서 2000년 전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립니다. 사순을 통해서 주님의 수난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나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임을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주님을 믿는 우리들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땅과 후손’을 약속하십니다. 그 땅과 후손은 직선적인 시간에서의 땅과 후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과 후손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후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계절이 매년 바뀌면서 우리에게 오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하느님의 나라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도 직선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생명은 모두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야기하시는 영원한 생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집 앞에서는 하루가 천년 같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은 순간도 영원과 같습니다. 바로 그런 삶을 꿈꾸면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 하신 말씀은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물리법칙에 따라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관계의 관점에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긴 겨울을 참아내며 꽃을 피워내는 나무처럼, 신앙인들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의 꽃을 피워야 하겠습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그제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의 신원과 당신의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위에서 오신 분’으로서 당신 말씀을 지키는 이는 생명을 얻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마귀 들렸다고 비방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여기서 “내 말을 지키는 이”란 곧 말씀을 진리로 믿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보호를 받을 것입니다.
잠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혜를 저버리지 마라.
그것이 너를 보호해 주리라.
지혜를 사랑하여라.
그것이 너를 지켜 주리라.”
(잠언 4,6)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는 것이 곧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들어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그리고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벗어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뒤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오직 한분의 참된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또한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한 17,3)
하지만 완고한 유대인들은 여전히 아버지도 그리스도도 받아들이지 않고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채,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음을 들어 반박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8)
여기서 “태어나기 전”은 지나간 시간을 나타내고, “전부터 있었다.”는 현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전에도 계셨고 후에도 계십니다.’
곧 항상 현재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다.”고 하지 않으시고,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당신께서는 시간과 관계없는 지속적인 현존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언제나 존재하시며, 언제나 우리보다 앞서 다가오시고 먼저 건네주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언제나 앞서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펼치시는 이 사랑의 드라마, 이 구원의 드라마에서 그 어느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늘 함께 하는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요한 8,51)
주님!
당신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뼈 속에 새겨진 말씀이 심장에 와 타는 불이 되게 하소서.
말씀의 바퀴가 제 삶을 굴리게 하소서.
저를 지키는 당신 사랑 따라 말씀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의 권위 아래서」
-반영억신부-
창세기를 보면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2,7).고 적고 있습니다. 사람이 있기 전에 생명의 숨이 있었고 그 숨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사람보다 앞서신 보이지 않는 분이 생명을 불어넣지 않으면 흙의 먼지로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을 받아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습니다’(요한1,1-2). 그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요한 1,14). 그렇다면 그분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하고 편협한 믿음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 하였습니다.
유다인들은 아브라함을 권위가 있는 분으로 존경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미지의 세계로 떠났고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있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다인들에게는 조상에 대한 모욕이고 신성모독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은 지금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히브11,3)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내가 모르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것을 먼저 내려놓고 가르침을 받아들이면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4,6-7). 따라서 주님의 권위를 받아들임으로써 생명을 풍요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돌을 들어 던지려 할 때 그들과 맞서지 않으시고 몸을 숨겨 성전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억지를 이기는 길은 잠시 여유를 주는 것입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서로의 격한 감정을 삭이기 위해서는 때로 자리를 뜨는 것도 약입니다. 서로의 관계 안에서 서로의 다른 점을 인정한다는 것이 말같이 쉽지 않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부분입니다. 마음이 흔들릴 때에는 잠시 주님과 함께 자리를 비우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죽음마저 극복하는 진정한 해방과 행복을 만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얽매여 살지 않으셨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사셨습니다. 우리도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 예수님의 완전한 통교 안에 초대받고 있음을 결코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만드셨으니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십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의 권위 앞에 머리 조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아시듯 우리도 주님을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삶,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아는 방법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실천하는 만큼 그분을 알게 됩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주님을 아는 사람이 되어 그분과 더욱 친밀해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때로는 인간적인 좌절과 실패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차지하면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그것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의 성공에 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권위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권위 앞에 순명한 아브라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아야 하고 주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부디 세상의 권위를 쫓지 말고 천상의 권위에 머물러 기쁨과 평화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요한 8,51).”
이 말씀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여러 번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 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요한 5,24).”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요한 11,25-26)”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으로 사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이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복음 선포의 목적이고,
신앙생활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은 시간 낭비가 될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여기서 ‘불쌍한’이라는 말을 ‘어리석은’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총들 가운데에서 가장 크고 영원한 은총은
‘영원한 생명’인데, 그것을 희망하지 않고(청하지 않고),
허무하게 지나가버릴 현세의 복만 비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현세적이고 이기적인 복만 비는 신앙을 ‘기복신앙’이라고 부르는데,
기복신앙은 사실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당신은 마귀 들렸다.’(미쳤다.) 라는 반응을
보이면서, 아브라함도 예언자들도 모두 죽었다고 반박합니다(요한 8,52).
사람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죽지 않고 승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잊어버렸거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죽지 않고 엘리사 예언자가 보는 앞에서
승천했습니다(2열왕 2,11-12).
창세기에는 ‘에녹’이라는 사람이 죽지 않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창세 5,24).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모세도 죽지 않고 승천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르타의 경우에는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요한 11,24).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에는 마르타처럼 ‘마지막 날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래서 예수님을 비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 말씀을 “나를 믿으면
죽음 자체를 면제 받는다.”로 오해하고서 “마지막 날에는 부활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고 반박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에 대해서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두 번째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묵시 20,14).
‘두 번째 죽음’은 최후의 심판 때 구원을 받지 못한 자들이 당하게 되는
‘멸망’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두 번째 죽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씀과 뜻이 같고,
표현만 다를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죽지 않고 곧바로 승천한 사람 외에는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라는 말이 진실일까?
바오로 사도는 살아 있는 동안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예수님을 맞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1테살 4,15-17).
그런 사람들의 경우에는 ‘첫 번째 죽음’을 면제받게 됩니다.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요한 8,5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8,58).”
이 말씀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인데,
사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세심한 해석이 필요한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는, “아브라함은 메시아
시대를 희망하면서 즐거워하였다.”이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메시아 시대가 틀림없이 온다고 믿고 기뻐하였다.”입니다.
이 내용은 구약성경에는 없고,
예수님께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지만,
메시아는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 내가 바로 그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존재다.”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장 1절,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라는 말과
같은 뜻의 말씀입니다.
(‘한처음’은 창조 이전의 영원한 시간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하신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논쟁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닙니다.
“나는 왜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왜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는가? 왜 부활절을 기다리고 있는가?
예수님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인생의 마지막 시점이 되었을 때, 안 믿는 사람들처럼 허무하다는 말만 하면서,
지나간 날들을 후회만 할 것인가? 영원을 향해서 기쁘게 나아갈 것인가?>
말씀 나누기 - 사순 5주 목요일-하느님을 아는 법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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