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6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42)
"If you remain in my word,
you will truly be my disciples,
and you will know the truth,
and the truth will set you fre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그의 신들을 섬기지 않은 세 젊은이를 불가마에 넣지만, 천사가 그들을 지켜 주는 것을 보고 탄복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머무르면 당신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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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로 유명한 자신의 책 ‘팡세’에서 ‘내기’에 관한 논증을 이렇게 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 쪽에 내기를 걸었다면, 그분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지 않았고 얻은 것도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다. 반면에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쪽에 내기를 걸었다면, 그분이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은 것은 없다. 그러나 그분이 존재하신다면, 당신은 모든 것을 얻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이 존재하신다는 쪽에 내기를 거는 게 현명하다.”
하느님 안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은 지금 삶에서 의미를 찾기에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결코 손해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파스칼의 말처럼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하늘 나라에서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데 어떻게 손해가 되겠습니까?
이 세상 안에서 지혜로운 사람인 것처럼 살면서, 정작 어리석은 삶을 사는 우리가 아닐까요? 하느님을 부정하고 의심한다고 해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자유롭지 못한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랫동안 외국의 점령되면서 민족적인 종살이를 해온 처지였지요. 이집트에서 종살이했고, 바빌론에 끌려갔었고, 현재는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번영의 약속을 굳게 믿고,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언젠가 외세의 종살이에서 완전히 끝나게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율법이 아닌 진리가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제까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며 항변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지금 종살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외세에서의 해방이라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죄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시간은 언젠가는 끝낼 수밖에 없지만, 하늘 나라에서의 시간은 영원합니다. 따라서 더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의 해방을 넘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죄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이 죄로부터의 자유를 위해 필요한 것이 진리, 즉 주님을 알고 굳게 믿는 신앙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사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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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불가마 앞의 인간 선언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hHh7ZZe-YY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인을 희생시켜 함께 옭아매려던 바리사이 유다인의 프레임에 맞서서 예수님께서는 그 프레임의 사악함을 폭로하시고 그 악인들을 꼼짝못하게 쫓아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진리가 인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신앙이 참된 신성을 증거하는 진리임을 밝히신 것이고, 동시에 율법을 내세운 인습적인 바리사이즘은 이미 하느님의 신성을 반영하지 못하는 거짓 종교라고 폭로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는 바빌론 유배시절에 신상과 황제를 우상처럼 숭배하는 바빌로니아 왕국의 박해에 맞섰던 유다 젊은이들의 용감한 처신을 하느님께서 어여삐 보시고,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 그들을 구해 내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독서로 배치된 다니엘 예언서는 바빌론 유배 시절에 그 통치자들의 우상숭배에 물들고 협력했던 유다인들의 어두운 과거를 반성적으로 깨우치고자 후대에 쓰여진 교훈문학입니다.
사실 불가마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셨을 때, 우상숭배자 같은 유다인들은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놀리면서 만일 내려오면 믿어 주겠다며 조롱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을 그런 조롱거리에 대응하느라고 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초대교회 시절 신자들은 그토록 부당한 십자가 수난에 대하여 당신의 신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처럼 죽임을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겸손이야말로 그분의 신성이라고 뒤늦게 깨달으면서 복음이 퍼져나갔고 교회가 곳곳에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이 땅의 박해시대에도 우리 신앙 선조들은 조정과 노론의 잔혹한 박해에 속수무책으로 고통당하고 죽임당했지만, 그것은 신체적으로 드러난 무기력이었을 뿐 정신적으로는 박해를 가하는 사악함에 저항하는 용감한 승리였습니다.
그러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 등 유다 젊은이들의 항변과 배짱은 후대 유다인 아나빔들의 희망사항의 반영이면서, 설사 불가마 속에서 죽게 되더라도 부당한 박해에 대해서는 결코 굴복하지 않고 진리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른 신앙을 버리지 않겠다는 인간 선언이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을 운명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따라서 지금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과 그 결과로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죽느냐가 우리의 인간 존엄성 무게를 결정합니다.
-조재형신부-
2년 만에 함께 모여서 피정을 하였습니다. 피정 중에 간식을 준비 하였습니다. 귤을 준비하였습니다. 30명이 모였는데 300개를 준비하였습니다. 30개 였으면 금세 없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300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귤을 안 먹는 사람이 있다면 혼자 20개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지 피정이 끝날 때까지 귤은 넉넉히 남았습니다. 세상에는 귀하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 있습니다. 금,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적기 때문에 소중한 것도 있습니다. 천연기념물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많았지만 남획과 자연의 파괴로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천연 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지 않으면 멸종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연 기념물로 지정해서 보호하지 않으면 도시화가 되면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산업이 발달하면서 사라진 것들이 있습니다. 엿장수의 가위소리,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 동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 정말 많은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흔했던 것들이 있습니다. 동네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냇가에는 빨래터가 있었습니다. 마을 입구에 커다란 느티나무가 있었고 그 아래 평상에는 어른들이 장기를 두셨습니다. 그리 바쁠 것도 없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이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족해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도가 있고, 세탁기가 있고, 에어컨이 있습니다. 오늘과 내일이 다른 긴장이 있습니다. 가족이 모여서 대화를 하기보다는 각자의 방에서 인터넷을 하고, 식사할 때에도 스마트 폰을 검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문명의 편리함을 얻은 대신에 가족과 이웃과의 대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라져가는 것들이 귀하고 그립습니다. 21세기 첨단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무 귀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우리가 기대고 의지할 것들이 너무 많이 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전에는 이런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그리고 '하느님!'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TV , 유트브 , 영상 매체가 넘쳐납니다. 사순시기를 정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성찰하고, 묵상하지 않으면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사라지지 않을까요? 이렇게라도 우리가 40일 동안 단식하고, 절제하고, 기도하고, 나누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도 ‘천연 기념물’이 되지 않을까요? 2022년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하루 예전에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져 그리운 것들을 생각해 보면 어떠신지요?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귀한 것,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느님을 신뢰한다면 용광로처럼 뜨거운 불화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그런 고난과 역경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지에서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 올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떠난 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을 멀리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현혹되었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통해서 하느님의 권능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의지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하느님께서는 불가마 속에서도 능히 지켜주실 수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이 그토록 추구하는 재물, 명예, 권력은 결코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율법과 계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율법과 계명은 진리를 향해 나가는 정거장과 같습니다.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같습니다. 율법과 계명은 진리를 가리키는 작은 손가락일 뿐입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하루하루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안에 살아갑시다!
-양승국신부-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은혜롭고 또 은혜로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복음 8장 32절)
이 한세상 살아가다 보면, 왠지 모르게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물 안에 갇힌 물고기처럼 아무리 발버둥 쳐도 묵직한 속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무언가에라도 홀린 듯 노예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돈의 노예, 쾌락의 노예, 죄의 노예, 과도한 일의 노예, 사람의 노예...
결국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떠나 살 때, 매일 선포되는 복음 말씀과 멀리 동떨어진 삶을 살아갈 때, 주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쇠고랑만 차지 않았다 뿐이지, 노예 같은 굴종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행스럽게도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대자유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갖은 속박과 부자유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를 향해 자유를 주시겠다고 공언하십니다.
그런데 그 자유로움은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필요함을 강조하십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조건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식은 죽 먹기입니다.
하루하루 진리이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 안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매일의 복음 말씀을 화두처럼 붙들고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내 구체적인 생활 안에 조금이라도 적용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 안에 살아갈 때,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지는지 오늘 첫 번째 독서인 다니엘 예언서는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세 청년은 자신들의 생사에 대한 전권 손에 쥐고 있는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서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습니다. 우상 숭배를 강요하며, 숭배를 거절할 때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 던져질 것이라는 임금의 협박 앞에서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다니엘 예언서 3장 17~18절)
세 청년의 놀라운 용기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그들은 평소 주님의 말씀 안에 푹 잠겨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매일 주님 말씀을 정성껏 봉독하고, 마음에 새기고, 구체적인 삶 속에서 적용하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주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 안에 살아왔던 세 청년은 활활 타오르는 불가마 속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혹시라도 도망갈까봐, 그들을 꽁꽁 밧줄에 묶어 불가마 속에 그들을 던졌지만, 그들은 화상이라고는 조금도 입지 않고, 태연한 얼굴로 불가마 속을 거닐면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꺠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 8,31-32)
이는 이미 믿는 이들에게 당신의 제자가 되는 길을 알려주시며 당신의 제자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달을 것이고 진리가 그들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지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을 넘어서, 나아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에로의 초대임과 동시에 진리에로 그리고 자유에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에 응답의 첫걸음은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들을 지탄하여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 8,37)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삶 안에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머무른다.’는 것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말한 대로,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듯이 말씀이신 그분께 ‘붙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그분 영의 수액을 받아먹듯이 그분의 생명에 머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단지 상대 안에 머무르는 단순한 머무름이 아니라, 역동적인 상호 교환, 곧 서로에게 건너가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extasis와 kenosis)을 내포합니다.
그리고 이는 본질적으로 서로 향하여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향하여 있으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르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이 머무르는 자리요, 궁전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 말씀이 우리의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같은 복음서 1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요한 16,13)
그렇습니다.
말씀과 우리가 이렇게 상호내주하면 진리를 깨달을 것입니다.
진리이신 말씀이 우리의 삶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곧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말씀이신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노예이고”(요한 8,34), 진리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진리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6)
주님!
제 안에 당신 말씀이 있을 자리를 마련하게 하소서!
제 삶이 당신 말씀이 머무르는 보금자리가 되게 하소서!
당신 말씀이 제 삶 안에서 지켜지고 실현되게 하소서!
당신은 진리이오니 저를 자유롭게 하소서.
아멘.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반영억신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 주기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를 따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송영진신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들은 인간들을 구원하는 ‘계시 진리’입니다.)
‘자유’는 ‘구원’을 뜻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어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믿고, 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은, “내 말을 그대로 실천하면서 살면”이고,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는 “참된 신앙인이 된다.”입니다.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이라는 말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는 다릅니다.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받아서 구원의 단계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죄’와 ‘죽음’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죄를 통해서 죽음이 들어왔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분, 즉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안 믿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도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죄와 죽음의 억압 속에서 계속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자유인으로 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고,
그냥 ‘죄의 종’으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라는 말씀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자는(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죄의 종으로 살겠다고 고집부리는 자다.” 라는 뜻입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지만”이고,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는 “회개해서 하느님 자녀의 지위를
회복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자유를) 주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 8,37-38).”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요한 8,39ㄴ-41ㄱ).”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요한 8,42).”
이 말씀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만 내세우지 말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신앙인답게 살아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 아비’ 라는 말은 ‘악마’를 뜻합니다(요한 8,44).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인간적인 혈통으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지만,
‘사는 모습’을 보면 악마의 자손이다.” 라고 꾸짖으십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죽이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듣고서 이해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라는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는데”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악마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다.”, 즉 “구원을 거부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같은 신앙’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인간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만이
예수님의 활동의 유일한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구원을(참된 자유를) 얻어라.” 라고
가르치시는데, 사탄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라.
그것이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고 유혹합니다.
어쩌면 지옥은 하느님의 반대쪽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하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마음대로(욕망대로) 사는 곳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는 평화도 없고, 안식도 없고, 행복도 없고, 전쟁뿐입니다.
하느님 없는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지옥입니다.
천국이 천국인 이유는 하느님(예수님)과 함께 사는 곳이기 때문인데,
그곳은 이기적인 욕망은 없고 형제애만 있는 곳입니다.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 36)
-한상우신부-
하얀 목련과
하얀 벚꽃이
자유로이
피어난다.
자유가 사라지면
하느님의 현존도
사라진다.
우리가 찾았던
참자유가
다름아닌
예수님임을
깨닫게 된다.
가려졌던
참자유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자유를 버린
우리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주신다.
예수님을 통해
자유를 다시
얻게 되었다.
변하지 않는
하느님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다.
자유가 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
자유에서
시작되는
복음이다.
고통을 치유하는
십자가의 자유이다.
사람이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참된 자유이다.
죄를
벗어 버리고
소중한 자녀로
하느님과
하나가
되게하시는
자유가
우리를 자유로
이끄신다.
이 자유를
따른다.
자유의
모상대로
창조되었기에
자유를 향한다.
하느님은
자유이시며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정녕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해방이며
구원이
우리를 다시
살게하신다.
우리또한
하느님의
자유이며
자유인인
것이다.
말씀 나누기 - 사순 5주 수요일-자유로운 복음 3덕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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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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