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5일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요한 8,21-30)
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He has not left me alone,
because I always do what is pleasing to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광야에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께서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백성이 죽는다. 모세가 기도하자 주님께서 구리 뱀을 매달게 하시고, 그것을 보면 살아나게 하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당신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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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생 때, 방학을 맞이해서 본당에 있는데 사무장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이 왔는데 조금 만나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형제님이었는데, 이 형제님께서는 스스로 ‘재림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신학생이면서 나를 못 알아보느냐?”
스스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이 사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정말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11)
예수님께서 하신 놀라운 표징을 통해 충분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자기를 믿으라고 말했지만, 보여 준 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입으로만 믿으라고 말합니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습니다. 연락받고 성당에 오신 그분의 부모님께서는 집에서도 자기가 예수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가족을 폭행했다고 하더군요. 알아보지 못해서 화가 난다며, 집안의 집기류를 집어던지고 욕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이신 주님께서 이렇게 폭력적인 모습으로 오실까요?
과거의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정신이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스로 하느님이라는 예수님의 말을 도저히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봐야 했습니다. 그 행하신 일은 전혀 보려하지 않고 무조건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믿으려 들지 않는 유다인들을 향해 마지막 소리를 돋우어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쓰십니다. 믿음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로 올려져 생명을 얻게 될 것이며, 믿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잃고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믿기 힘들다면서 “당신이 누구요?”라고만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한낱 갈릴래아 사람, 나자렛 예수 등으로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틀 밖에 있는 예수님 모습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보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알려줘도 그들에게는 우이독경이라는 사자성어처럼 소귀에 경 읽기입니다.
아버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믿으려 들지 않는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보낸 분이라는 사실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분명 주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갖출 수 있도록 많은 사랑과 은총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나 과거 유다인들처럼 믿을 수 없는 이유만을 만들면서 주님 곁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의 구원도 멀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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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부모를 사랑할 수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 8,23)라고 하시며 사람은 아래와 위, 두 세상에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은 하늘에서 와서 하늘로 돌아가 하늘에 속하고 유다인들은 땅에서 와서 땅에 속한다고 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다 땅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으면 육신이 썩어 땅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속한 곳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늘에 속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당신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4)
여기서 “내가 나”라는 뜻은 모세가 들은 하느님의 이름, 곧 ‘나는 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임을 믿지 않으면 우리는 죄 속에서 죽습니다. 하늘에 속할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입니다. 내가 예수님이 되면 아버지의 뜻을 따라 나의 아버지가 하느님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 속하게 됩니다. 자신이 속한 세상은 아버지가 만든 세상입니다. 아버지를 바꾸지 않으면 아버지의 세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스페인 영화 ‘늑대의 살갗 아래’는 돈만 아는 아버지를 둔 두 딸의 인생이 그려집니다. 너무 큰 추위에 아무도 살지 않는 스페인 북부의 한 마을에서 늑대사냥을 하며 사는 사냥꾼이 있었습니다. 겨우내 사냥하고 늑대 가죽을 무두질하여 이틀이나 걸쳐 산 밑으로 내려가 가죽을 팔아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본성은 사냥꾼이었습니다. 사람과 잘 소통하지 못합니다.
그는 사실 방앗간 한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과부였습니다. 그는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주고 그 여인의 아버지와 거래합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큰돈을 받고 딸을 팔아넘깁니다. 그녀는 임신하였지만 몸이 약했습니다. 그곳엔 의사가 올 수 없었기에 사냥꾼이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돌봤지만, 그녀는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기를 낳다가 여인이 죽습니다. 아기도 죽습니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가 딸이 이미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도 자신에게 팔아넘겼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챕니다. 분노에 가득 찬 그는 아내의 시신을 지고 장인을 찾아갑니다. 장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이제 막내딸을 보여주며 돈을 내고 딸을 데려가라고 합니다. 딸은 이 사실도 모른 채 사냥꾼을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는 사냥꾼이 파놓은 언니와 조카의 두 무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직감합니다. 아버지는 막내딸에게 도저히 참을 수 없으면 사용하라고 독약과 같은 약초를 줍니다.
딸은 임신하여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곳을 탈출해야겠다고 여기고 차에 독초를 타서 남편을 죽이려 합니다. 사냥꾼은 이유도 모른 채 몸이 약해져 갑니다. 이를 틈 타 아내는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짐승을 잡기 위해 설치해 놓은 덫에 걸립니다. 사냥꾼은 간신히 아내를 찾아 데려왔지만, 아내는 얼어서 거의 죽음 직전이었습니다. 유산은 했지만, 사냥꾼은 아내를 지극정성으로 돌봐서 살려냅니다.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내를 놓아줍니다. 원하지 않으면 내려가라고 합니다. 사냥꾼은 아내가 자신에게 독을 먹였다는 것을 알았고 쓰러진 후 혹독한 겨울을 납니다.
환경이 사람을 만듭니다. 두 딸의 아버지는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으로 딸을 팔아도 딸이 잘살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아내를 사는 사람에게서 딸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물건으로 취급될 뿐입니다. 사냥꾼도 지극정성으로 두 자매인 아내들을 돌보는 것 같지만, 만약 아내들을 위한다면 병원이 가까운 동네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는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두 딸은 돈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는 죽었고 하나는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살인자는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운명은 아버지를 버리지 않으면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상하고 사랑스러우면 아기는 세상을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악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악하면 자녀도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므로 악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번 정해진 아버지를 바꿀까요? 잔인하게 말하면 아버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아기는 아빠가 일란성 쌍둥이일 때 잘 알아보지 못합니다.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아기는 그저 자신에게 밥을 주는 대상을 아버지, 어머니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선택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유다인들은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실제로는 이 세상에 속하고 싶어서 세상 아버지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를 선택했으면 아기들처럼 그 아버지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는 다섯 명의 범죄자 집단에서 길러진 화이란 아이의 이야기입니다. 그런 범죄자 집단에서만 머문다면 당연히 범죄자가 됩니다. 인간은 아버지의 세상에 갇힙니다.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화이에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들이 다 괴물인데…. 너도 괴물이 돼야지…. 안 그래? 그래야 같이 살지.” 나쁜 아버지들은 화이가 자신들의 편이 되게 하려고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합니다.
화이는 그 아버지들과 살면서 괴물을 봅니다. 괴물 아버지들과 함께 머물면 괴물들의 세상에 사는 것입니다. 화이는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죽이게 한 다섯 명의 아버지를 죽입니다.
우리는 괴물처럼 되어서 세상에서 적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참 아버지 하느님을 죽인 그 아버지를 죽여서 없애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삼키면 그분은 빛이 되어 우리가 지금까지 섬겨왔던 대상이 괴물이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돌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아에 조종당하여 죽인 분이 나의 진짜 아버지이심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1)
천국으로 가려면 새로운 아버지가 지금 나의 아버지를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절대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벗어나려면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아버지를 죽여야 합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지옥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만 일어납니다. 이는 상황이 아닌 아버지를 잘못 선택한 탓입니다. 그 지옥이 지금까지 내가 섬겨온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부모를 버려야 합니다. 부모를 버리지 않으면 모기로 머뭅니다. 모기는 사랑하려 해도 피를 빨고 있을 것입니다. 부모를 버리고 하느님을 부모로 섬길 때 하느님의 자녀로 지금까지 키워주신 부모님을 사랑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Ba3C1mHIJY
선을 향한 길에는 언제나 악에서 나온 장애물이 길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길에서도 사탄의 사주를 받은 죄인들이 방해 공작을 폅니다. 모세는 파라오와 대결하면서 열 가지에 이르는 재앙의 기적으로 물리치고 겨우 이집트를 빠져 나왔지만, 정작 해방되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파라오 대결 못지않은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바로 양식도 없고 물도 없다고 불평하는 백성에다가 금송아지까지 만들어 경배하는 우상숭배 풍조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옭아매어 죄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피곤한 논쟁에 휘말리셨습니다. 아무리 기적을 보여주고 당신의 신원을 밝히셔도 막무가내로 당신의 신성을 부인하는 속물들이요 사탄의 사주를 받은 듯한 죄인들이었습니다.
모세의 경우에는 백성의 불평과 우상숭배에 대한 대책이 중재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직접 상대하신 분은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해 불평하는 백성들에게 불뱀을 보내시어 물려 죽는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또 다시 모세에게 몰려와 하느님께 불뱀을 치워 달라고 중재 기도를 요청했고,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세우라는 응답을 들었습니다. 구리는 붉은 색을 띠는 금속이어서 불뱀과 색깔이 비슷했습니다. 그래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 처방이 그 천 년도 훨씬 지난 후 예수님 당시에는 십자가 처방의 예형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 유다인들의 피곤한 유혹과 막무가내식 논쟁에 대한 예수님의 처방은 그들의 기대와 음모에 휘말려 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현실적인 권력과 영향력은 그들에게 있었기에 예수님은 기어코 그들의 음모에 따라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의 혐의를 뒤집어쓰시게 되었고, 곧 이어 유다인들의 왕이 되려 했다는 반역 혐의까지 뒤집어쓰시고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의 운명을 예감하신 듯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과연 그분은 십자가에 못 박혀 높이 달리셨고 죽음을 당하신 후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도 바리사이 유다인들은 그분의 부활을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높이 달리신 이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분이 자신들의 음모를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신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처방, 즉 십자가를 받아들이시는 믿음은 사탄의 사주를 받는 줄도 모르고 죄를 저지르는 그들이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으로 예수님의 이 처방에 담긴 의미를 깨닫고 믿는 이들에게서 효험을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깨달은 이 처방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자기비허의 삶이 세상의 죄를 없앨 수 있다는 십자가의 신비였습니다. 또 십자가를 짊어지는 삶이야말로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듭 나는 부활의 신비라는 것도 동시에 얻게 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모세 시대에 구리 뱀이 불뱀에게 물린 상처를 낫게 해 주었듯이, 십자가를 쳐다보는 신약 시대의 처방이 예수님의 신성을 몰라 보고 죄를 저지르는 죄악의 벌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이렇게 되면 악은 더 이상 선의 방해물이 아니라 디딤돌로 작용합니다. 마치 십자가가 천국으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되듯이 그렇습니다.
-조재형신부-
어릴 때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습니다. 세계명작 동화라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인 마크 트웨인은 가난한 이, 흑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았음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1905년 미국은 일본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명한 ‘가쓰라 태프트’조약입니다. 이 조약을 통해서 일본은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통치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미국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 젊은이들을 필리핀으로 보냈습니다. 젊은이들을 보내기 전에 교회는 ‘전쟁을 위한 기도’를 바쳤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모두가 안전하게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필리핀에는 많은 전쟁고아와 과부들이 생겼습니다. 미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필리핀의 젊은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대한제국은 1905년 일본과의 을사늑약을 통해서 외교권이 박탈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또 다른 의미의 전쟁의 기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오, 우리 주 신이시여! 주님을 경모하는 우리를 위해 저들의 소망을 산산이 날려 버리시고 저들의 생명을 시들게 하시고 저들의 비참한 순례가 끝나지 않게 하시고 저들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시고 저들의 눈물로 저들의 길을 젖게 하시고 저들의 상처투성이 발에서 흐르는 피로 흰 눈을 얼룩지게 하소서. 우리는 그것을 바라나이다. 사랑의 정신으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께. 곤고한 처지에 놓여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허히 당신의 도움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항상 믿음직한 피난처요 친구이신 주님께. 아멘.” 마크 트웨인 사후에야 출간될 수 있었던 이 도전적인 이야기는 ‘거대한 흥분이 들끓어 오는 시대’가 묘사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진정 전쟁의 기도는 ‘적들이 갈기갈기 찢기고, 부상병들은 고통 속에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며, 죽은 아들을 부여잡은 어머니의 울부짖음’이며, 또한 ‘적군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며 생명이 시들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후각은 개보다 못합니다. 표범보다 빨리 달리지 못합니다. 시력은 독수리보다 못합니다. 지구별에 살아온 시간도 인간은 다른 종보다 훨씬 짧습니다. 생각하고, 도구를 사용하여 문명을 만들었다는 것이 만물의 영장이 된다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우월주의는 다른 종들을 무참하게 죽이고 말았습니다. 같은 종인 인간끼리도 폭력과 전쟁으로 서로 죽이고, 죽었습니다. 인간은 혼인 잔치에 가장 늦게 초대된 손님일 뿐입니다. 같이 초대된 다른 종들을 죽이고, 혼인 잔치의 상을 엎어버리는 것은 손님으로서 할 행동이 아닙니다. 진화는 인간이라는 고등 동물을 향한 과정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다 소중하며,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진화의 방향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모든 생명을 형제요 자매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시기’을 보내면서, 우리의 신앙에는 반드시 양면, 즉 고통과 기쁨, 빛과 어둠,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기쁨을 알 수 없고, 어둠이 없다면 빛을 분간할 수 없으며,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의 생활을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편안한 삶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광야를 건너지 않고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구리 뱀을 나무에 매달아 그 뱀을 바라본 사람들은 치유를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의 삶을 인정하고 약속의 땅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요르단의 끝에 가면 바로 앞에 요르단 계곡이 있으며 그 계곡을 넘으면 약속의 땅이 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불평과 원망을 하였던 것입니다. 요르단 계곡이 바라보이는 언덕에 구리 뱀을 두른 십자가가 있으며, 기념성당도 있습니다. 이제 사순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성을 다해, 주님 수난의 길에 함께 동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제 기도를 들으소서. 제 부르짖음이 당신께 이르게 하소서.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광야에서 고통도 겪겠지만, 동시에 더 강렬한 주님 현존 체험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성경 가운데 쉽게 읽히는 흥미로운 책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책이 있습니다. 민수기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주로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지루하고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파별 야영 위치와 행진 순서, 사제와 레위인들의 임무와 규정, 재물에 대한 규정 등이 끝도 없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비록 흥미진진한 책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민수기에는 두 번에 걸친 인구조사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인구조사는 시나이산에 머물면서 광야 여정을 준비하던 시기에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인구조사는 광야 여정을 끝낸 후 약속의 땅 입구에서 이루어집니다.
이 두 번의 인구조사는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후손에 대한 약속이 실현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이 모세에 의해 하나의 민족 공동체로 형성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제2차 인구조사는 모압 들판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601,730명이라는 수가 헤아려지는데, 1차 인구조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숫자인데, 이 숫자는 꽤나 상징적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죄를 지은 이들이나 재난으로 인해 죽은 이들로 인해 인구수가 감소한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 여정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는 중심 주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입니다. 백성들은 이집트 탈출을 통해 체험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합니다. 모세의 권위에 대해 대놓고 불평합니다. 이집트로 되돌아가려는 욕망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약속의 땅에 대한 주님의 성취 능력이 인간의 불평불만에 부딪혀 위기를 맞이하게 되지만,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불충실과 배신과 적반하장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땅으로 당신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광야 여정 중에 발생한 구리 뱀, 불 뱀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불만과 불신앙을 단적으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끝도 없는 백성들의 불평불만 앞에 마침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주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십니다.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중재기도를 요청합니다. 진노에는 더디시고 용서에는 재빠르신 주님께서 응답하십니다. 불 뱀에 물린 자들이 살아날 방도를 모세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결정적인 시험대 앞에 서게 됩니다. 모세가 만들어 기둥 위에 매단 구리뱀을 쳐다보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따라 백성들의 생사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 대한 순종의 시험이자, 동시에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는 광야에서도 주님의 현존과 권능이 드러나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광야에 대한 큰 의미가 부여됩니다. 광야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주님의 심판이 이루어지는 전형적인 장소로 부각된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주님의 현존과 역사하심을 가장 강하게 체험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사순절이라는 긴 광야 여정을 걸어온 우리입니다. 남아있는 여정 동안 우리는 이 광야에서 고통도 겪겠지만, 동시에 더 강렬한 주님 현존 체험과 은총 체험을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의 신원을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 8,25)
사실 예수님께서는 앞 문장에서 이미 당신의 신원을 밝히셨습니다.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요한 8,23)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원을 두 가지로 밝히십니다.
첫째는 ‘위에서 온 분’으로, 곧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아는 길은 그가 어디서 왔고,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고 위에 계신 분께 속하시니, 분명 위에서 오신 하느님이시고, 위에 계신 분의 아들이신 성자이십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그리스도를 머리 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니 그분께 속한 이요, 올리베따노 수도회에 속해 있으니 분명 올리베따노회 수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요한 3,3)
둘째는 ‘내가 나’라고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는 야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을 계시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곧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나는 나다.”(탈출 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당신 스스로를 일곱 번에 걸쳐 이렇게 계시하셨습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요한 6,35.48)
“나는 세상의 빛이다.”
(요한 8,12)
“나는 양들의 문이다.”
(요한 10,7)
“나는 착한 목자다.”
(요한 10,11.14)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나는 참 포도나무다.”
(요한 15,1).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릴 때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것이다.”
(요한 8,28)
그렇습니다.
진정 십자가와 부활은 우리 주님께서 '내가 나'이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입은 이 빛 안에서 사순의 길을 따라 갑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내가 우리를 통하여 곳곳에 퍼지게 하십니다. ~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2코린 2,14-15)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요한 8,23)
주님!
제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하소서
제 머리 위에 항상 당신을 모시고 당신께 속하게 하소서.
당신 품이 제가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당신 사랑의 손길로 저를 바꾸소서.
당신 빛으로 제 안에 새겨진 당신 형상을 드러내소서.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전부이오니 당신께만 속하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 마음과 하나 되길」
-반영억신부-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으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갖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났다면 큰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 기왕이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일과를 보내되 사람에게 기대지 말고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 마음에 드는 삶을 엮어갔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아래에서 왔다고 아래 것만 생각하고 아랫것에 갇혀서는 안 됩니다. 갇히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을 활짝 열어 위로부터 오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에 순응해야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물들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삽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길은 누가 뭐라고 해도 예수님께서 가신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 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어떤 아가씨가 길에서 요술 램프를 주웠답니다.
램프를 쓱쓱 문지르니 요정이 나타나서 말했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단, 한 가지만입니다.” 그 아가씨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돈도 가지고 싶고, 남자도 만나고 싶고, 결혼도 하고 싶었습니다. 무엇을 선택할까 한참을 망설이고 있는데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한 번에 다 말하면 되겠다!” 그래서 램프의 요정에게 말했습니다. “돈남자결혼!”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아가씨는 ‘정신이 돈 남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 감사하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나는 간다.』
-송영진신부-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요한 8,21).”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나는 간다.” 라는 말씀은,
표현으로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활동이 곧 끝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뒤에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생각하면, “나는 간다.” 라는 말씀은,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끝끝내 거부하면,
‘심판관’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이라는 말씀은,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때서야
두려워하고 후회하면서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애원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 오시는 재림의 날은,
믿고 회개할 기회는 없고, 심판을 받아야 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언제인지 모르니 믿고 회개하는 일은 ‘지금’ 해야 합니다.
<믿고 회개하는 일을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후회할 틈도 없이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요한 8,23-24).”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3장에 있습니다.
“위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데,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신다(요한 3,31).”
“아드님을 믿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러나 아드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무르게 된다(요한 3,36).”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위에서(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땅에 속한 것만(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만 가지려고 애쓰면서 산다면,
그것들이 먼지처럼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질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허무한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요한 8,26).”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라는 말씀은,
“만일에 너희의 죄와 그 죄에 대한 심판에 관해서 말해야 한다면,
할 말이 아주 많다. 너희의 죄가 그만큼 크고,
또 많기 때문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지금 죄 속에서 살고 있다.”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처음부터 심판관으로 오셨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는 “나를 보내신 분은 하느님이신데”입니다.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는
“인간들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구원을 선포할 뿐이고,
구원하려고 애쓸 뿐이다.”입니다.
이 말씀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믿고 회개해서 구원을 받아라.” 라고
촉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심판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요한 3,17).
<복음서에 있는, 심판과 멸망에 관한 말씀들은,
그런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라는 ‘사랑의 호소’입니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8-29).”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는 표현으로는 십자가 수난을 가리키는데,
뜻으로는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뜻합니다.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는 “내가 구세주라는 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입니다.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는
당신의 말씀들이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한 가르침이었음을
깨달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날의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내가 구세주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닫고, 나를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아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심판의 날이 닥치면, 그때서야 깨닫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라는 말씀은,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부활로 이어진다는 것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29절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면서 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런데 사실 하느님(예수님)은 언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고,
우리를 돌보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쪽에서 한눈을 팔고, 딴 생각을 하면서
하느님(예수님)에게서 멀어져 있을 때가 많고, 하느님(예수님)의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도움을 청하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것은,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조급증
-김찬선신부-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오늘은 여러분께 양해를 구하고
오늘 전례에서 좀 벗어나는 주제로 나눔을 하겠습니다.
벗어나는 주제란 <조급증>인데 이것을 주제로 삼은 것은
지금까지 한 번도 이 주제로 나눔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급증을 먼저 사전에서 찾아봤더니 '참을성이 없이 매우
급하게 구는 증세'라고 나와 있었는데 그러나 왜 급하게 구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아서 제 나름대로 그 이유에서부터 종류까지 생각해봤습니다.
첫 번째로 떠오른 것은 미리미리 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기찻시간이 11시이고 그래서 10시부터 천천히 준비해 나가도 되는데
괜히 9시부터 마음이 분주하고 불안하여 미리 떠나야지만 안심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런 조급증은 그 사람의 심리적인 문제일 뿐
그리 나쁜 것은 아니고 죄라고까지 할 수는 없는 것인데
저의 경우 이런 면에서는 아주 느긋합니다.
그리고 일의 경우도 원하는 결과를 빨리 얻지 못해도 느긋한 편입니다.
언젠가 될 거라는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이고,
설사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조급증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지금은 조금 나아졌지만 옛날에 양성 책임자로 있을 때는
제가 양성하는 형제들이 빨리 원하는대로 성장하기를 바랐습니다.
이는 마치 씨를 뿌리고는 언제 싹이 돋나 매일 살피고,
싹이 나면 빨리 쑥쑥 크기를 바라며 물을 자주 주는데
생각만큼 빨리 크지 않으면 억지로 키를 늘리기라도 할듯이
물을 너무 많이 줘 오히려 뿌리를 썩게 만드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까 저는 사람 욕심이 있는 것이고,
좋게 얘기하면 돈 욕심이나 일 욕심보다 사람 욕심이 있는 것이며,
저의 보람이 부나 일의 성취보다 훌륭한 사람을 만드는 거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사람은 욕심의 대상이 되면 안 되고
심할 경우 이것은 돈 욕심이나 일 욕심보다 더 나쁩니다.
욕심으로 사람을 소유하려고 드는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봤듯이 욕심이 조급증을 유발하고
조급증은 사람마다 자기 성장의 때가 있는데
내가 그 성장의 때를 억지로 앞당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나쁜 조급증은, 이런 표현이 적합한지 모르지만,
영적인 조급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겸손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하느님의 때를 참고 기다리지 못하고
오늘 민수기의 사람들처럼 자기의 때를 하느님께 들이대며
그렇게 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불만하는 것입니다.
일에 대해서건 사람에 대해서건 다 하느님의 때가 있는 것입니다.
봄이 되면 싹이 트고 여름이 돼야 자라며 가을이 돼야 열매 맺듯
다 그 때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하느님의 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봄이라고 모든 나무가 똑같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지 않고,
각기 자기의 봄 곧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자기의 때가 있듯이
일이나 사람도 다 그것의 때가 있고 그것의 때가 하느님의 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의 때를 하느님께 들이댑니까?
하느님의 때를 공순히 기다립니까?
우리 각자 조급증과 관하여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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