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요한 7,40-53)
"Never before has anyone
spoken like this ma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아 악인들의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이들에게 니코데모는, 율법대로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하는 일을 알아본 뒤에 심판하자고 한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부부가 오랜만에 단둘이 데이트했습니다. 장소는 경관이 너무나 멋진 레스토랑이었습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 자리에 앉는데, 아내가 남편에게 창가 의자에 앉으라고 합니다. 남편은 창밖의 야경이 멋지다면서 아내에게 창가 의자에 앉으라고 권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창을 바라보는 쪽에 앉으면 나를 보지 않을 거 아니야. 당신이 나만 쳐다봤으면 좋겠어.”
자기만을 바라봐주고 있는데,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다면 어떨까요? 기분이 영 좋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이 자기만을 바라봐주길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것에 너무나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 지금 바라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당신을 바라봐주길 원하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와 대화하길 원하십니다. 문제는 계속해서 자기 혼자 말하고, 다른 것 보는 것에 더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습니까?
“네가 날 좀 쳐다봤으면 좋겠어.”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의 기적을 보고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내리게 한 모세를 생각했고, 또 생명의 물을 말씀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즈카리야 예언서에 언급한 승리의 왕 메시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갈릴래아 출신이어서 아니라는 주장도 지배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는 무지의 편견에서 나오는 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도 아니었고, 또 실제로 베들레헴 태생이었던 예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중에 믿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예수님을 적대시합니다. 니코데모가 율법에 나온 대로 예수님의 말을 들어 보고 또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고 판단하자고 했으나 이 역시 거부합니다. 자기 아집에만 사로잡혀서 어떤 말도 듣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것만을 바라본다면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길은 전혀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과연 누가 큰 손해를 볼까요? 다름 아닌 바로 나입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사람은 걱정이 없을 때만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eN1p7EkcU1s
박해시대의 성모신심에 대하여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f1WtGec5YQ
사순시기에 맞이하는 4월의 성모신심미사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시던 성모 마리아의 고통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전통적으로는 성모칠고(聖母七苦), 즉 성모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하신 일생 중에 겪으셔야 했던 일곱 가지 고통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어머니로서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짊어지셔야 했던 십자가였습니다.
첫째는 노예언자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축복하면서도 훗날 어머니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수난 때문에 함께 고통을 겪게 될 것을 예언한 일입니다(루카 2,34-35). 시메온은,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둘째는 포악한 헤로데 대왕이 아기를 죽이려 하자, 때마침 주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알려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려고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헤로데의 눈을 피하여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던 일입니다(마태 2,13-15).
셋째는 예수님께서 열두 살 나던 소년 시절에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아들을 잃어버리신 일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성전을 샅샅이 뒤져서 겨우 찾아냈더니, 소년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라는 당돌한 대답으로 요셉과 마리아 부부를 당황스럽게 하였습니다.
넷째는 예수님께서 장성하신 후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어찌된 일인지 유다교 지배층의 미움을 받아 십자가형을 받으시고는 참혹하게 매를 맞으신 후에 다시 또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시던 길에서 기진맥진한 채로 모자가 서로 만나신 일입니다(요한 19,17).
다섯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숨지시던 순간까지 십자가 아래에서 그 고통을 지켜보아야 했던 일입니다(요한 19,28-30).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은 다 달아나버렸고, 오직 막내 제자 요한만 남아 있었습니다.
여섯째는 숨지신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려 끌어안으신 일입니다(마르 15,42-45).
일곱째는 예수님의 시신을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의 돌무덤을 빌려 안치한 일입니다(마르 15,43-46; 요한 19,38).
일곱 가지에 이르는 고통을 성모 마리아께서 겪으시며 아드님과 지향을 함께 하신 덕택에, 초대교회 시절부터 신자들은 성모님께 전구하는 기도의 전통을 수립해 왔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확실하고 강력한 전구자로서 신자들의 기도를 도와주셨습니다. 이 땅에 천주교가 전래되던 초창기부터 한국신자들도 4대 핵심교리와 함께 이 같은 성모칠고에 대한 이해와 묵상을 깊이 해 왔습니다. 교리서뿐만 아니라 기도서, 신심서적과 묵주나 상본, 성상 등의 신심수단을 통해서 성모신심을 키워오다가 박해를 만나 치명을 하게 되면 “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기도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성모님의 수난을 본받는 일은 거의 한 가지로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성모신심이 널리 퍼지던 차에 한국교회에 대목구가 설정되어 외국인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신자들의 성모신심은 더욱 활발해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교구 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앵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를 주보성인으로 청하여 허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선교사들의 지도와 모범 덕에 한국교회의 성모신심은 박해 중에는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탱해 왔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성모신심의 열기가 계속 이어져서 성모신심단체들이 본당에 확산되었으며, 신자들은 성모 마리아께 조선의 자주독립을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해방과 건국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1945년 8월 15일에 맞이한 광복일과 1948년 8월 15일에 맞이한 정부수립일이 성모승천대축일과 겹치게 되면서, 신자들은 광복과 정부수립이 한국교회의 주보이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라고 굳게 믿게 되면서 성모신심이 활성화되기도 하였습니다.
교우 여러분!
수많은 순교 성인성녀와 복자복녀를 배출하면서 혹독한 백년 박해를 견디어내게 해 주시고, 또 가혹한 일제의 식민통치도 이겨내어 조국의 광복도 이루게 해 주신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으로, 민족의 숙원 사업인 통일을 향하여 남북한의 갈라진 겨레의 화해도 이루어 완전한 광복을 실현하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면 성모칠고를 묵상하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신앙적인 십자가를 봉헌하는 정성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비롯한 광복의 은총이 주어지기를 기원하는 지향과 함께, 민족 복음화를 위해 작은 희생이라도 바치는 정성까지 더해지면 좋겠습니다.
-조재형신부-
성경에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이야기가 나옵니다. 골리앗은 키가 크고 힘이 장사였습니다. 갑옷으로 무장한 골리앗의 무기는 칼과 방패였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키가 작은 앳된 소년이었습니다. 힘도 약했고, 갑옷도 없었습니다. 손에는 돌팔매가 있었습니다. 싸움은 거인인 골리앗의 패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싸움은 힘과 무기로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싸움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었습니다. 군사력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상대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1달이 지났지만 러시아는 아직도 우크라이나를 점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전쟁이 중단되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자고 하였습니다. 러시아에는 없지만 우크라이나에게는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국을 지키려는 국민들이 애국심입니다. 무력으로 약한 나라를 공격하면 안 된다는 국제사회의 연대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재제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싸울 수 있도록 무기를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마음을 돌려 침공을 중단하고, 우크라이나에 평화가 오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치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하느님께 청하는 기도와 같습니다. 72년 전 남한도 소련의 지원을 받은 북한의 침공을 받았습니다. 서울은 3일 만에 함락되었고, 부산까지 밀려 내려갔습니다. 북한에는 없지만 남한에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조국을 지키려는 국민이 있었습니다. 이념이 다르다고 약한 나라를 침공해서는 안 된다는 국제사회의 연대가 있었습니다. 유엔은 북한 침공의 부당함을 선포하였고, 유엔군 파병을 결정하였습니다. 남한은 유엔군의 도움으로 수도를 수복하였고, 전쟁은 3년이 지난 1953년 휴전협정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남한을 침공한 북한은 아직도 가난과 굶주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은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변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들은 겉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장소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신 분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혈연, 세대, 지역, 학연’이라는 틀에 갇혀서 진실을 보지 못하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그런 ‘틀’을 넘어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의 부끄러운 허물을 벗어버리는 시간입니다. 기도, 단식, 희생, 자선으로 주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간입니다. 봄과 함께 이곳 뉴욕에도 꽃이 피고 있습니다. 파란 새싹이 봄이 왔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저 풀과 꽃들도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이 이 땅에 드러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영근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6 개월쯤 전 초막절 마지막 날, 예루살렘에서 성령에 휩싸이어 급박하게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물이 흘러나오리라.”
(요한 7,37-38)
오늘 복음은 이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여러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러 나섰다가 그냥 돌아온 성전 경비병들은 그들을 보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게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라고 말합니다.
대체 그분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기에 그들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하는 것일까?
대체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들의 말과 어떻게 달랐을까?
그분의 말씀은 어째서 듣는 사람들을 감동시킨 것일까?
왜 오늘 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고 변화되는 것일까?
대체 그 신비로운 힘은 무엇일까?
성경에서는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왜 그분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복음의 앞부분인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의 하신 말씀, 곧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에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은 하느님에게서 왔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께서는 단지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의해서’ 보냄 받은 자들은 많았습니다.
예언자들이 그렇고, 세례자 요한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은 단 한 분, 오직 예수님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만이 온전히 하느님을 아시며, 그분의 가르침은 참되고 권위가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곧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도 믿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스스로를 여기지만, 바로 그 ‘안다’는 사실에 걸려 오히려 예수님을 거부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이는 ‘선입견’이나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도 오늘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자칫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처럼 우리의 편견과 선입감으로 말씀을 거부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일 것입니다.
단지 우리는 모르면서 쬐끔(조금)만 알 뿐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사실 지적 정보의 한 파편, 아니 한 파편의 한 부분, 그저 1미크론(1/1000 mm), 아니 1나노(10억분의 1)만큼일 뿐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인 양 믿어버리는 이 어리석음이 때로는 하느님의 계획까지도 거부하고 외면하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자칫 ‘안다’고 믿어버린 ‘선입견’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 오히려 걸림돌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앎으로 말씀을 알아듣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우리를 알아듣고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우리 자신을 말씀께 승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주님!
저는 말을 들어보기도 전에, 또 일을 알아보기도 전에, 미리 판단하고 심판하는 선입견과 편견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듣는 겸손한 마음과 애정으로 일을 알아보는 섬세함을 주소서.
주님!
제 마음에는 말을 듣고도 의심하고 일을 보고도 인정하지 않는 왜곡과 불신이 가득합니다.
제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지게 하소서.
들은 말을 신뢰하고 본 바를 인정하게 하소서.
저희의 말을 다 들어주시고 저희가 한 일을 다 아시는 주님!
저에게 억울하게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소서.
저의 곡해와 몰이해, 고집과 완고함, 왜곡과 비뚤어짐, 무관심과 불신으로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베푸소서.
아멘.
「근본으로 돌아가라」
-반영억신부-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는 교황 선출 이후 첫 미사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강하게 경계하며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야 하고 예수와 십자가라는 기본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시며 “우리는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세울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교회라기보다는 자비로운 비정부기구에 지나지 않게 된다.” 고 지적하셨습니다. 이어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라며 “세속적인 가치를 앞세워도 교황이 되고, 주교, 사제가 될 수는 있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아니게 된다.” “세속적인 가치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어린이가 쌓은 모래성처럼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교황님을 중심으로 교회가 근본에로 돌아가 거듭 태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해 왔습니다. 벌써 9년이 되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확신합니다.
오래전 도울 교수는 ‘구약성경은 한국의 선황당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필요 없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연구한다면서도 ‘신약은 구약 안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을 통해 밝게 그 의미가 드러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성경해석의 원칙을 외면한 채 자기가 아는 것이 다 인양 주장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신앙의 책인 성경을 알량한 지식으로 다 알 수 있고 또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하긴 마귀도 성경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으니 성경에 대해 아는 척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연구 한다 해도 그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살지 않는 한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간 경비병이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7,46) 하고 말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한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그가 다윗의 고향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거부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고 또 알게 됩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니고, 사심 없는 눈으로 보아야 볼 것을 볼 수 있거늘 자기 안에 갇혀 있으니 딱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 복음 요한7장 52절의 말씀에서 바리사이들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하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샅샅이 뒤져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만나려 애쓰는 대신 그를 가리켜 보이고자 기록된 언어의 숲에 들어갔다가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들에 견주면, 성경에 무식한 경비병의 눈이 오히려 밝았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체로 학자들이 무식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눈에 대들보 구실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현주). 그러니 섣불리 지식을 자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학사’는 ‘이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 같다’ 라고 깨달은 사람이고, ‘석사’는 ‘알고 보니 내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랍니다. ‘박사’는 ‘나만 모르는 줄 알았더니 남들도 아무것도 모르더라’를 깨달은 사람이고, ‘교수’는 ‘어차피 다들 모르니까 이거라도 우기자’ 라고 행동하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랍니다. 하느님 앞에 알면 얼마나 안다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앞에서 자기 것을 아무리 우겨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고 그분을 더 사랑하게 하는지를 살펴야 하겠습니다. 지식이 명예와 안락한 삶을 가져다주었을지는 모르지만, 진리를 알아보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리사이들, 율법학자들에게는 아는 게 병이었습니다. 아는 바를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입니다.
많이 안다고 자랑하지 말고, 헛된 바람을 지니지도 말며 기도와 성사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그분을 더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십자가 안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요한 7, 52)
-한상우신부-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들
완고한 마음에
다시금
흠칫 놀란다.
고정된
선입견에서는
아무 것도
탄생할 수 없고
아무 것도
머물 수 없음을
다시 깨닫는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리들
모순이다.
예언의 내용은
기억하진 못해도
예언자들의
출생지는
기억하는
우리들 모습이다.
하느님마저도
출신배경을
따지며 묻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되는 삶임을
다시 기억하는
사순이다.
모든 곳의
배경이
되어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시다.
십자가는
출신배경을
따지지 않으며
우리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
십자가가
편견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힌다.
우리 일상의
고정관념을
복음 앞에
내려놓는다.
모두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공통분모를
다시 찾게된다.
예언은
하느님을
잃어버린
인간 삶의
모순을 보여주고
예언자들은
출신배경의
덧없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건네야 할 것은
출신배경의
정보가 아니라
우리를
바꾸어놓는
복음(福音)이다.
출신배경을
뛰어넘는
복음이
시작된다.
십자가의
예수님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들어올리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복음의 인격은
학연 지연에
묶여 있는
인격이 아니라
기도와 사랑을
실천하는
인격이다.
말씀 나누기 - 사순 4주 토요일-복수와 기도 중 무엇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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