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1일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너희는 성서 속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을 알고 파고들거니와
그 성서는 바로 나를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요한 5,31-47)
You search the Scriptures,
because you think you have eternal life through them;
even they testify on my behalf.
But you do not want to come to me to have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모세의 애원을 들으시고,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희망을 걸어 온 모세가 그들을 고소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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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유명 강사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고등학교 때, 그렇게 뛰어난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특히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이 어느 날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머리가 나빠서 졸업이나 할지 모르겠다.”
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계속 머릿속에 간직할수록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이 말을 마음에 새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답니다. 그러자 더 열심히 생활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판단이 자신의 미래에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아주 유명한 강사가 되었습니다.
종종 어렸을 때의 말을 마음에 담고 사는 사람을 봅니다. 그 말로 인해 자신이 성장할 수 없었다면서 분노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새기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늘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말이면 담고, 필요하지 않으면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나’였습니다. 다른 이의 판단이 100% 옳을 수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 안에서도 그런 일은 비일비재합니다.
다른 이의 판단에 무조건 동의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의 미래를 바라보면서 자기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뛰어난 학식이 있었고,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100% 틀렸습니다.
율법서에는 어떤 사람을 죄인으로 고발하려면 적어도 한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하고,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일 경우에는 두세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조항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고발할 때 적용될 조항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죄인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위 증언은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는데 요구되는 사항이 아니며,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굳이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따라 당신의 신성을 증명하십니다. 그리고 그 증명을 세례자 요한, 예수님께서 행한 여러 가지 기적, 하늘에 계신 아버지 자신, 마지막으로 성경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 자기들 생각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하는 모습, 자신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서 죄인으로 만들어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만큼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못된 판단은 멈춰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이의 판단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또 주님 뜻에 맞게 사는 것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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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뱀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사랑의 시작인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Rt1zzhynBZw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대한 ‘증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신이 자신을 증언하는 것은 유효하지 않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자기주장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세례자 요한’을 내세우십니다. 그는 빛 자체는 아니지만, 빛을 증언하는 인물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자기 일을 하지 않고 아버지의 일을 하기에 아버지로부터 파견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도 여러 기적과 목소리를 통해 아드님을 증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성경’도 예로 드십니다. 모세의 성경이 다 당신에 대한 증언이라 하십니다.
이렇게 여러 증언을 내세우시는 이유는 그런 것들로 믿으라는 말씀이 아니십니다. 그런 많은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를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섬기기로 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러 오시는 그분을 믿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4)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 겪게 되는 현상이 있는데 ‘인지부조화’입니다. 그냥 ‘고집’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중국의 그 많은 무술 고수들이 쉬샤오둥이라는 격투사에게 깨졌습니다. 쉬샤오둥은 중국 무술이 실전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픈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고 나서도 바닥이 미끄러웠다느니, 쉬샤오둥이 다칠까 봐 일부로 봐주었다느니, 아침을 잘못 먹어 설사해서 그렇다는 이유로 패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분명 모든 증거가 중국 전통무술의 실전성 부재를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자신들도 느끼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전성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입니다.
누군가를 믿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믿는 고집을 버려야 합니다. 자신에게 영광을 주려는 사람은 아무리 많은 증거를 가져다 놓아도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행복이라 가르쳐줘 굳게 믿고 따라왔는데 알고 보니 그 반대였음을 깨달으려면 열심히 자아를 믿고 달리다 넘어져 봐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 안에서 ‘유혹자’를 찾아내게 됩니다.
김미경 강사가 4년 만에 ‘어쩌다 어른’에 출연하여 강연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논문표절로 9시 뉴스에 나오기 전까지는 돈도 많이 벌고 자신의 이름을 딴 TV쇼를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습니다. 물론 그때도 정신병원에 가봐야 할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꿈을 좇으라고 젊은이들에게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망하고 나니까 자신을 속이고 있었던 자아가 자신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녀는 극단적인 생각을 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매일 걸었습니다. 그러다 자신이 자신의 꿈의 노예가 되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람 안에는 제1존재, 제2존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제1존재는 태어날 때의 본래 나이고 제2존재는 자라면서 생겨나 꿈을 좇으라는 새로운 나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제2존재가 바로 나인 줄 알고 착각하고 살아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자신은 제1존재였습니다. 성공하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냥 밥 먹고 잠자기만 해도 행복한 나가 꿈을 좇으라는 제2존재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의 마지막 말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제1존재로 살다가 또 기회가 오면 제2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한 것입니다. 제2존재, 곧 우리가 에고(ego)라고 부르는 이 존재의 본성을 아직은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보다는 아니겠지만 또 세속-육신-마귀에 집착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섬길 날이 오기 때문입니다.
자아에 집착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갤럭시가 좋냐, 아이폰이 좋냐의 문제와 같습니다. ‘확증편향’이 생깁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여, 결국에 틀렸어도 돌아서지 않습니다. ‘인지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느 것이 좋으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판단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법은 서로 근거를 놓고 싸우는 일이 아닌 이 분열의 근본 원인이 ‘자존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곧 모든 싸움의 원인이 ‘자아’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모든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압데라는 어리석고 고루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슈트루치온이라는 치과의사는 이웃 마을 게라니아에 왕진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간밤에 암당나귀가 새끼를 낳아서 자기 당나귀를 포기하고, 당나귀 몰이꾼인 안트락스의 당나귀를 돈을 주어 빌리고 같이 옆 마을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황무지를 지나다가 날씨가 매우 무더워 잠시 당나귀를 세우고 당나귀 밑에 드리워진 그늘 속에 주저앉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당나귀 몰이꾼은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나귀를 빌린 것이지 그림자를 빌린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치과의사는 절대 줄 수 없다며 거절하고, 논쟁이 거듭되자 재판관에게 찾아갑니다.
재판관은 중재를 시도합니다. 몰이꾼에게는 나귀의 그림자에서 쉴 수 있도록 허락하고 치과의사는 감사의 성의 표시만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합니다. 둘은 동의합니다. 그러자 양쪽에 변호사가 붙습니다. 자신이 꼭 이기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합니다. 그러자 둘은 갈 데까지 가보자고 합니다.
치과의사는 자기편을 더 만들기 위해 수선공 조합의 조합장을 찾아갑니다. 조합장은 치과의사의 후원자가 되기로 합니다. 한편 비조합원인 몰이꾼은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대고자 합니다. 도시에는 개구리를 섬기는 신전과 염소를 섬기는 신전이 있었습니다. 당나귀 몰이꾼은 개구리를 모시는 신전의 사제에게 줄을 댑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치과의사는 염소를 섬기는 신전 쪽을 자신의 편으로 만듭니다.
둘은 서로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들려고 고군분투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시는 치과의사를 지지하는 ‘당나귀 그림자당’과 당나귀 몰이꾼을 지지하는 ‘당나귀당’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당나귀당은 개구리 신전에, 당나귀 그림자당은 염소 신전에 모여서 의지를 불살랐습니다. 이제 더는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된 것입니다.
재판은 합리적인 시선으로 볼 때 당나귀그림자당 쪽으로 전개되는 듯싶었습니다. 당나귀의 그림자까지 당나귀 몰이꾼의 소유라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렇게 재판을 내려버린다면 두 파간의 갈등은 돌이킬 수 없는 싸움이 될 것이 뻔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 모든 문제는 당나귀에게서 비롯되었으니 당나귀를 재판정에 증인으로 세웁시다”라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한 사람이 당나귀를 보더니, “이 모든 것이 저 당나귀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소리쳤고 사람들은 일제히 당나귀를 죽이고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참조: ‘인생의 방해꾼들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지혜’, 유튜브 채널, ‘지혜롭다’]
정말 이 마을에 전쟁이 일어날 뻔한 것은 당나귀 때문이었을까요? 당나귀는 그저 희생양일 뿐입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마음이 그 근본 원인입니다. 그들은 또 다른 당나귀를 찾아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할 것이고 다른 의견은 묵살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자아가 에덴동산의 뱀임을 명확히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우게 된 것은 선악과 때문이 아닙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뱀 때문이었습니다. 그 뱀을 모르면 그 싸움의 원인이 사라져도 다른 원인을 찾아 자기 영광을 추구할 것입니다.
자아를 뱀이라는 구체적인 상징으로 이해해야 더는 자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자아를 믿는 일이 없습니다. 누가 뱀에게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내 집에 더는 살지 못하도록 죽이려 할 것입니다.
세계 평화로부터 내 마음의 평화까지, 이 모든 평화가 깨지는 근본 이유는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자아를 뱀으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것만 알면 세상은 천국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려주지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7GtLtBhF2g
오늘은 부활 신앙의 영성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 연못에서 베푸신 중풍병자의 치유 기적 사건에 대해서 너무나 엉뚱하게도 예수님의 신원을 문제 삼는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의 황당한 소행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요한 5,37). 그러니 그들이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시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신 일들이 이해되지 못함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래 천 년도 넘게 신앙을 물려받은 그들에게는 유감스럽게도 하느님께서 역사상 처음으로 당신 백성으로 선택해 주신 정통성에 걸맞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 시절에도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고 제사 지내며 목이 뻣뻣한 백성으로 살다가 호되게 야단과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 후 천 년이 흐른 뒤에도 이런 사정은 별반 나아지지 못해서, 바른 신앙 자세를 가르치며 회개하기를 요청했던 세례자 요한이 그들에게는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요한 5,35)일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런 역사적 시행착오를 반면교사로 삼고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아 교회는 부활 신앙에 걸맞는 기도에 대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과 대화하는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기도함으로써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합니다. 이로써 영혼이 생기를 얻게 됩니다. 기도는 사람이 지닌 본능에서 나오는 행위가 아니라 하느님께 향하려는 신앙에서 나오는 인간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기도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영이 이끄시는 대로 사람의 혼이 성장합니다. 이것이 영혼 생명의 성장과정입니다. 따라서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신앙을 성숙시킬 수 없습니다.
기도는 내적인 충동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하게 되는 행위가 아니라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뚜렷한 원의를 가지고 신앙이 자라남에 따라서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수련 행위입니다.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종교양식이 하느님께서 발하시는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수용양식이듯이, 기도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대한 응답입니다. 모든 기도는 하느님 앞에서 사람이 살아있게 되는 부활의 목표를 위해 행해집니다.
부활을 목표로 하되 그 단계적 지향에 따라서 기도는 흠숭, 감사, 청원, 전구로 나뉘어집니다. 흠숭 기도는 찬미하고 찬양하는 기도로서, 무상으로 주어진 은총에 대해 바치는 기도를 찬미 기도라 하고, 은총 이전에 하느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 바치는 기도를 찬양 기도라 합니다. 찬미와 찬양에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자기비허의 삶, 즉 자신을 낮추고 비워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신 십자가의 삶이 으뜸가는 기준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찬양하는 흠숭 기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감사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성찬례는 그 자체가 감사의 기도입니다. 당신의 아들을 보내시고 수난을 당하게 하신 후 부활시키시어 인류를 부활케 하시려는 구원계획에 대해 총체적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감사 기도 다음에야 우리는 청원 기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청원에 있어서도 선결 조건은 죄가 있으면 속죄를 하고 나서 청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불가마에 던져진 다니엘도 자신의 곤경에서 구해달라는 청원을 하기에 앞서 동족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천사에 의해서 불가마 속에서 살아남았습니다. 청원을 함에 있어서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할 것과, 필요한 것들을 청하되 개별 지향 이전에 성령을 청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은 청원 기도의 공식인데, 많은 신자들이 이 공식을 지키지 않고 정성만으로 기도하면 될 줄로 여기다가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주어지지 않으니 지쳐서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기도의 마지막 지향은 전구(轉求)입니다. 전구는 전달 기도의 준말로서, 청원 기도의 한 형태처럼 보이지만 자기의 청원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청원을 대신 청원하는 기도이기 때문에 영적인 애덕을 발휘하는 행위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모든 성인의 통공’이 이 전구 단계의 기도에서 실현됩니다.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부터 탁월한 전구자로 활약하셨습니다(참조 요한 2,5). 이를 근거로 교회는 성모송에서 마리아의 전구를 필수적으로 청하는 기도를 바치도록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습니다. 전구는 영적 나눔의 행위로서, 물적 나눔으로 이어지기 마련이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가난한 이들을 돕는 사랑을 실천하거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사회적 연대 활동으로 발전하여 공동선을 증진시킵니다.
교우 여러분!
이러한 기도의 지혜가 기도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하고 하느님 모습도 보게 하여 부활 신앙을 살아있게 합니다.
-조재형신부-
미사 경본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 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 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리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소서.”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모님과 성요셉,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며 자비를 청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살아있는 이들만의 신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로 천국으로 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성인들의 전구로 죄 중에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자비가 함께 할 수 있기를 청합니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은 희망을 버리는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마치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다고 합니다. 연옥은 그릇된 희망을 품은 사람이 가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우정을 배신한 사람이 가는 곳이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황금으로 소를 만들어서 숭배했습니다. 그릇된 희망을 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연옥에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유다는 별이 없는 밤하늘과 같은 지옥을 체험했습니다. 바빌론으로 유배 가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빌론이 지옥이 아니라, 희망이 사라진 현실이 지옥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희망을 걸었던 모세는 비록 광야에서 방황하였지만, 형 아론이 동족을 선동해서 황금 소를 만들어 경배하였지만, 지옥에 있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희망에 응답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고 하신 재앙을 거두셨다.” 바빌론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침묵을 체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하느님의 부재(不在)를 탓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않았던 자신들의 불신(不信)을 처절하게 반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빌론은 이제 지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희망은 새로운 공동체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성전과 땅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에서 말씀과 실천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생명과 함께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구원은 단순히 생명 활동을 이어가는 문제가 아닙니다. 구원은 가치와 의미의 문제이며, 구원은 존재의 변화를 뜻합니다. 구원은 새로운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구원은 깨달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순간을 살았어도 가능한 것입니다. 구원은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했어도 주어지는 신앙의 문제인 것입니다. 구원은 유전적인 형질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 정신, 의미, 영혼의 문제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생명의 활동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따름으로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나의 기도가 죽은 이들에게 희망이 되면 좋겠습니다. 성인들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충실히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주님 참기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양승국신부-
탈출기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모세의 처지가 무척이나 안스러워 보입니다. 많은 경우 그의 처지는 주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서 있는 샌드백이나 동네북 같은 존재였습니다.
주님과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 사이의 대화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보신 주님께서는 백성의 대표 격인 모세를 불러 호통을 치십니다.
“내가 이 백성을 보니, 참으로 목이 뻣뻣한 백성이다. 이제 너는 나를 말리지 마라.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트려 그들을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기 32장 9~10절)
주님만 모세에게 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틈만 나면 모세에게 화를 내고, 그를 괴롭혔습니다. 출애굽 이후 40년간의 광야 생활 내내, 여차하면 자신들의 리더인 모세에게 득달같이 달려가 따졌습니다.
“대체 우리를 왜 그 좋은 땅 이집트에서 끌어낸 것이요? 그 잘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대체 언제 구경하게 되는 것이오? 대체 언제까지 이 밋밋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식으로 먹어야 하는거요? 당신이 섬기고 받드는 주님이라는 자가 과연 있기는 한거요?”
이렇듯 모세는 주님과 백성 사이에 끼어 평생토록 마음고생, 몸고생 많이 한사람입니다. 하루하루가 스트레스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차라리 차고 있던 완장 벗어 던지고 멀리 도망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무던한 사람,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늘 한결같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끝도 없는 불평불만을 잘 인내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약속의 땅까지 그들을 잘 인도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그들을 잘 다독였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신과 우상숭배, 타락과 방황 앞에 주님께서도 가끔씩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 인간을 닮으신 분이시니, 우리와 똑같은 인격체로서의 감정을 지니셨고, 그런 배경과 함께 당신 백성과 소통하셨습니다.
폭발 직전까지 가신 주님 앞에 모세가 취한 태도는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눈물로 애걸복걸합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며 자비를 청합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의 대표 격인 모세와 주님 사이에는 끝도 없는 밀당이 계속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 어찌하여 당신께서는 큰 힘과 강한 손으로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신 당신의 백성에게 진노를 터뜨리십니까? 어찌하여 이집트인들이,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을 해치려고 이끌어 내서는, 산에서 죽여 땅에 하나도 남지 않게 해 버렸구나, 하고 말하게 하시렵니까? 타오르는 진노를 푸시고 당신 백성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어 주십시오.”
돌아보니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주님께 간절히 청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이 머리칼보다 많은 죄, 부족함, 미성숙을 고스란히 보고서도 호통치지 않고, 나를 대신해서 주님께 참아달라고,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라고 청했을 것을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웃들의 부족함, 동시대를 살아가는 동료 인간들의 악행이나 타락을 목격할 때, 우리 역시 모세처럼 주님 앞에서 간절히, 목숨 바친 눈물의 기도를 올려드려야겠습니다.
“주님 참기 힘드시겠지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주님 저들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조차 모릅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절)과 성부 하느님(30-32절)과 당신 자신의 활동(36절)과 성경(38-47절)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상 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상 숭배를 두고 예레미아서(5,7)에서는 하느님을 저버리는 것으로써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야훼 하느님 외에 것을 찾는 것은 영적 간음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한편으로는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요한 5,38)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
(요한 5,42)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
(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눈 먼 열심」
-반영억신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으로 쉽게 지치고 결과도 좋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일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꼭 해야 하는 일을 하는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많은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는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정성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죽이려는 이들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이들도 살리려고 무던히 애쓰셨습니다. 그러한 큰마음으로 갈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송영진신부-
3월 31일의 복음 말씀은 처음 복음을 선포할 때의 사도들의 입장에서
읽는 것이 좀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들이다. 그래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이다(요한 5,36).”
사도들은 복음을 선포할 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부터
선포했습니다(사도 2,32.36).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부활’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부터 믿어야 다른 교리를 믿을 수 있습니다.
‘부활 신앙’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시작이고 마지막입니다.
만일에 부활을 안 믿는다면,
다른 교리들을 믿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하신 일들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도 역시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들은 부활부터 증명하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도들과 신자들의 ‘증언’이 있을 뿐입니다(1코린 15,3-8).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도들의 증언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증언을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모두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생애 전체와 목숨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냈을 때에 그는 진리를 증언하였다. 나는 사람의
증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너희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은 타오르며 빛을 내는 등불이었다.
너희는 한때 그 빛 속에서 즐거움을 누리려고 하였다(요한 5,33-35).”
여기서 ‘진리’는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진리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믿는 사람들에게는
요한의 증언이 중요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메시아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있었는데(요한 1,35-37),
그 수는 별로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하느님의 예언자로 믿은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마태 11,18).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신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도
나를 위하여 증언해 주셨다. 너희는 그분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고 그분의 모습을 본 적도 없다.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않기 때문이다(요한 5,32.37-38).”
사도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증언하는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습니다(2베드 1,18).
그러나 부활 증언처럼 그 증언을 입증할 수 있는 물증은 없습니다.
사도들 자신들의 삶과 죽음이 증거가 될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믿으면 사도들의 증언도 믿게 될 것이고,
못 믿으면 안 믿을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9).”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 예언서를 읽고 있다가
필리포스의 도움을 받아서 믿음을 갖게 되고
세례를 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사도 8,26-38).
그 과정에서 성령의 인도가 있었는데, 그래도 에티오피아 내시 자신이
열린 마음으로 믿으려고 노력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어도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믿게 됩니다(사도 17,10-12).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0-44)”
겉으로만 보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성경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참 신앙’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의 바리사이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에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고,
자기를 과시하고 자랑하려는 욕망만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구원과 생명을 추구하지 않고 현세적인 복만 추구했습니다.
(기복신앙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기 있는 명강사들이나 유명한 설교가들을 보면,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하고,
복을 얻는 방법에 관한 말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하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45절의 모세가 고소를 할 것이라는 말씀은, ‘모세 율법’이, 즉 ‘성경’이
고소를 할 것이라는 뜻인데, “너희가 성경 말씀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너희 자신들이 더 잘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씀은, “너희는 성경을 잘 알고 있다고 큰소리치면서도
왜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옛날 유대인들에게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들입니다.
믿는다면 믿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이 곧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 5, 40)
-한상우신부-
봄꽃도
아름다운
꽃으로
가장 좋은
생명을
드러낸다.
진실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사랑과 생명은
하나이다.
참된 생명을
증언하시는
우리의
예수님이시다.
진실로
믿지 않으며
진실로
사랑하지도 않는
우리들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우리들을 향해
안타까운
마음을
토해내신다.
하느님을
떠난 이들은
생명의 삶과
점점 멀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이신
당신의 삶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드러내신다.
삶의 마지막은
모두 하느님을
증언한다.
세상
모든 것들은
다 하느님께로
귀결된다.
마지막
우리들 삶에
필요한 것은
빛이며
구원뿐이다.
하느님 말씀을
밟고 지나가는
우리들
여정이다.
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분은 오직
주님뿐이시다.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을 향한
참된 증언이며
참된 진리이며
참된 빛이며
참된 말씀이며
영원한 생명이며
참된 영광이며
참된 희망이다.
참된 믿음
참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주님을 따르는
희망의 새날이다.
믿음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모든 여정이다.
믿음의 힘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알게된다.
진실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은총의
사순이다.
이 희망의
이름을
주고받는다.
말씀 나누기 - 사순 4주 목요일-살리는 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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