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0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요한 5,17-30)
Amen, amen, I say to you,
whoever hears my word
and believes in the on e who sent me
has eternal lif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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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책 제목에 끌려서 구매한 책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100세 노인”(에디 제이쿠, 동양북스)
보통 말년에는 후회할 일이 더 늘어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100세라는 노인임에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의 인생이 너무나 궁금해서 책을 샀습니다.
책의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죽음의 수용소라 불리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던 것입니다. 수용소에서 탈출해서 구조되었을 때의 몸무게가 28kg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끔찍한 생활을 했었는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에디 제이쿠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수용소를 전전하며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모님과 친척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었지요. 그래서 자신도 죽음의 유혹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희망을 발견하려고 했고, 이 책을 통해 희망을 사람들에게 지금도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인생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통이 최고의 무게만이 아님을 기억하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우리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어렵고 힘든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희망이 있음을 계속해서 강조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당신의 신원을 밝힐 필요가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을 무시하는 예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자기가 하느님과 같은 일을 한다고 하는 예수님을 신성모독 죄인으로 단정했습니다. 이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는 것은 하느님의 특권입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특권을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위임받았다고 선언하시며, 동시에 사람들을 심판할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자신 있게 선포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신원을 밝히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아버지 아들 관계에 있으며 꼭 같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받지 않게 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말씀에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나요? 혹시 과거의 유다인들처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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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平安)에 이르는 법: 평화와 안식의 차이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50FdZjuGSjE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어제는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38년 동안 병을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였습니다. 40에 이르렀을 때 하느님의 양이 되는 것입니다. 에덴에서 아담이 하는 하느님의 일이란 이렇게 동물을 새로 태어나게 하여 새로운 이름을 지어주는 것입니다.
이때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했다고 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요한은 안식일의 의미가 사실 주일에 일하지 않고 쉬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음을 오늘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안식은 아담의 일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은 이렇게 안식이 일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여섯째 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일곱째 날을 맞을 수 있게 됩니다.
안식을 우리말로 한다면 ‘평안’(平安)이 제일 합당하다 생각합니다. 평안은 평화와 안녕, 혹은 안식이 합쳐진 말입니다. 안식일에 도달하려면 먼저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평화를 찾았다고 안식에 든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처럼 일해야 합니다.
평화와 안식은 조금 다릅니다. ‘평화’는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깨닫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으셨음을 알고는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식’은 그렇게 하신 분처럼 나도 자녀로서 따라 함으로써 도달하게 되는 행복입니다.
예를 들자면 저에게 예수님께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셨을 때 가지게 된 것이 ‘평화’입니다. ‘아, 이렇게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구나!’라고 깨닫는 게 평화입니다. 제가 ‘내 어머니는 다리 밑에 계신 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해 주시는 사랑을 보고는 ‘아, 내 어머니가 저분이 맞는구나!’라고 느끼는 것이 평화입니다.
평화를 얻었다고 안식에 이른 게 아닙니다. 부모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해주셨다면 나도 자녀 된 도리로 그런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낳고 부모처럼 양식을 먹이며 일을 마치고 나서 느끼는 평화가 바로 안식입니다. 받은 것처럼 해줄 때 비로소 부모 앞에서 안식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세례 때 받은 성령과 말씀을 그에게 전해 주어 그도 당신처럼 다시 태어나게 해주신 후에 ‘안식’을 누리기 위함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것만으로는 안식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분처럼 일해서 그분의 자녀라는 안도감이 들 때 비로소 안식일을 누릴 수 있습니다.
‘나의 아저씨’는 아이유가 연기한 지안이란 한 상처투성이 젊은 청년의 성장기입니다. 이를 ‘지’(至), 편안할 ‘안’(安). 평화도 없던 한 사람이 안식에 이르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지안은 살인자입니다. 빚 독촉에 시달리며 구타당하는 할머니를 구하려다 사람을 살해한 21살 여자입니다. 이지안은 정당방위로 무죄입니다. 그러나 살인자란 꼬리표는 여전히 이지안을 따라다닙니다. 자신이 죽인 사람의 아들인 이광일로부터 여전히 빚 독촉에 시달립니다. 이광일은 빚이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 대한 복수로 무조건 지안이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죽고 싶은,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지안은 어떤 회사에 들어갑니다. 이력표에 달리기 잘한다는 것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지안이를 박동훈이란 만년 부장이 뽑아주고 인간적으로 대해줍니다. 힘든 처지에서도 노모를 모시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지안이는 그로 인해 점점 마음을 열고 세상에 사랑이 있다는 것도 믿어갑니다.
박동훈도 가족들을 위해 후배에게 밀려도 어쩔 수 없이 회사에 붙어살아야만 하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아내가 자신을 앞질러 대표이사가 된 도준영과 바람을 피우는 것을 알면서도 참아내야 합니다. 박동훈은 아내에게 자신에게 그렇게 하는 것은 집 밖에서나 집 안에서나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참아나가야 합니다.
처음에 지안이는 박동훈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유일하게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박동훈 부장을 인간적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도준영은 박동훈을 몰아내기 위해 이지안을 이용합니다. 이지안이 박동훈을 인간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려 하는 것입니다. 이지안은 많은 회사 중역들이 모인 곳에서 박동훈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박동훈도 그녀가 살인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회사에 받아주었다고 말합니다.
박동훈에게 안 좋은 일을 벌어지게 한 자신을 탓하며 이지안은 또 삶의 의욕을 잃습니다. 그러나 박동훈은 그래도 지안이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지안이는 그렇게 평안을 찾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런 희생을 실천해야 평안에 이르는 것입니다.
지안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원수인 이광일도 용서합니다. 광일은 어느 날 자신의 어렸을 때의 관계를 기억하는 지안이의 말을 듣습니다.
“착했던 애예요. 걔네 아버지가 나 때리면 말리다가 대신 맞고…. 걘 날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난 걔가 착했던 기억 때문에 괴롭고. 미안해, 광일아.”
광일은 지안이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서 자신에게 당해준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이 어둠임을 지안이를 통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모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섭니다. 지안이는 다른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고 박동훈은 회사를 나와 개인사업을 합니다. 우연히 카페에서 만난 둘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들만의 대화입니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네…. 네!”
사랑을 만났을 때 느끼는 감정이 평화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실천할 때 받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에 이르기 전까지 평안함은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피를 흘리며 나를 낳고 땀을 흘리며 키웠다면, 나도 그렇게 할 때 참 안식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평화는 은총에 의해 얻는 것이고 안식은 진리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얻은 것이 평화입니다. 그리고 저의 안식은 이렇게 복음 묵상을 나눔으로써 완성됩니다. 나도 이웃에게 그렇게 다 내어주기 전까지는 안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평화를 거저 받았기에 빚을 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갚아야 안식에 이릅니다.
먼저 하느님 사랑을 깨달아 평화를 누립시다. 그다음엔 그 평화가 안식이 되도록 키워가야 합니다. 그분이 일하시니 우리도 일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안식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법입니다.
나는 너를 잊지 않고"(이사 49,15ㄷ), "다시 살리리라"(요한 5,21)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qpG3D12QnIw
오늘은 부활 신앙의 사목적 국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38년 동안이나 중풍을 앓는 바람에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했던 병자를 벳자타 연못에서 만나신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또 치유된 그 병자가 자신이 깔고 앉아 있던 들것을 들고 걸어감으로써 그 어떠한 행위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 계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갑자가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안식일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시작된 이 비난은 급기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예수님의 신앙까지 트집을 잡음으로 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참에 본격적으로 하느님 아버지에 관해서 가르쳐주시는 계기로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모르던 하느님의 모습들에 대해서 이렇게 일러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고서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때가 되면,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이 신관 교육내용의 초점은 부활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살아가는데, 그 죽은 이들을 일으켜서 다시 살리시는 부활이야말로 하느님의 일이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순종하여 선을 행함으로써 부활한 이들은 생명을 얻어 그야말로 사는 것처럼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러한 일에 거부하여 악을 저지른 자들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죽음을 살게 되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느님께서나 예수님께서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없듯이, 인간을 지어내신 창조주이시기에 가엾이 여겨서 하시는 일일 따름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예수님께서도 그리고 성령께서도 하느님을 닮도록 지음받은 사람이 하느님을 닮기는커녕 죄악에 빠져 살아가는, 그런 죽은 모습을 모른 척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잊지 않고 찾아오시는 것이고, 그런 하느님의 일을 보고 예수님께서도 따라 하시는 것이며, 그런 예수님을 따라서 성령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하시는 가장 주요한 일은 사람들을 인간답게 부활시키시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로 살아가도록 일으켜 세우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일이 예수님을 추종하는 교회의 일이기도 합니다.
38년이면 거의 반평생인데, 벳자타 연못의 그 중풍병자는 반평생을 앉은뱅이로 살아가야 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에게는 그를 축하해 줄 마음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심하게 오그라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가 들것을 들고 걸어가자 하필 그날이 안식일이어서 안식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고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그를 고쳐주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고서는 왜 안식일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게서는 안식일에도 사람 살리는 일을 하고 계시고 당신은 아버지를 따라 할 따름이라고 대답하시니까, 어찌 감히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냐며 또 따졌습니다.
이런 언동을 한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은 살아 있어도 죽어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도무지 다른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없고 다른 이들의 기쁨에도 공감하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즉 괴물 같은 좀비였습니다. 반평생을 불구로 살아온 이를 연민으로 대하지 못하고, 안식일에 안식일다운 선행을 하시는 예수님을 거룩하게 보지 못하는 눈먼 장님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신들이 정해 놓은 율법 속의 신이라는 글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살아서 죽음을 살고 믿어도 지옥을 사는 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렇듯 사람들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 부활시키는 일에 동참할 당신 협조자들에게 이사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내어 백성을 위한 계약으로 삼았으니, 땅을 다시 일으키고, 황폐해진 재산을 다시 나누어 주기 위함이며, 갇힌 이들에게는 ‘나와라.’ 하고, 어둠 속에 있는 이들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어라.’ 하고 말하기 위함이다.”
이런 예언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잘못된 교리 교육을 받아서, 부활과 부활 신앙에 대해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독서와 복음의 말씀에서처럼, 부활은 지금 일어나야 하는 현재의 일이고, 하느님과 예수님의 최고 관심사입니다. 부활은 말 그대로 거듭 나는 삶이며, 사람이 본래 창조된 대로 하느님을 닮기 위하여 살아가는 진정한 삶입니다. 사순시기는 부활대축일로 시작되는 부활시기를 위해 준비하는 때이듯이, 주님 수난의 사십일 동안 우리는 부활이 과연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부활은 죽은 다음에 일어날 사건이며 실제 부활하는지 하지 않는지 검증할 방법도 없는 막연한 일로 치부하고 있고, 더욱이 죽었던 육신이 다시 숨을 쉬며 살아나는 그런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활은 상상 속에만 남아 있습니다.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이 간직했던 부활관이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말씀대로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부활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느님을 닮고자 하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우리의 부활은 그제서야 시작될 것입니다. 남은 사순시기에도 이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부활을 살기 위한 묵상과 기도가 여러분의 고신 극기와 절제 인내의 지향이기를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 있는 성 이윤일 요한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신부님의 배려로 홍보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성당에는 공소가 2개 있었습니다. 첫째, 셋째 주일에 가는 공소가 있고, 둘째, 넷째 토요일에 가는 공소가 있었습니다. 신부님께서 공소에도 같이 갈 수 있는지 제안을 하였고, 기쁜 마음으로 공소에 같이 갔습니다. 본당에서 공소까지는 2시간 정도 걸렸습니다. 한 달에 2번 본당 신부님을 만나는 공소 신자들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공소회장님은 신자들이 많이 못 나왔다고 미안해하였습니다. 그래도 해설, 독서, 복사는 다 있었습니다. 주일 본당 미사를 마치고 공소로 가는 신부님의 열정을 보았습니다. 한 달에 2번이나마 미사를 볼 수 있다는 신자들의 갈망을 보았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만나니 사랑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았습니다.
2년 전입니다.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사목회장이 전화를 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한국으로 갔는데 미사를 해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당시는 코로나 상황이었고, 홍보를 갈 일도 없었기에 도와드리겠다고 했습니다. 3개월만 도와 드리면 될 줄 알았습니다. 한국으로 갔던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쉽게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도 쉽게 끝나지 않아서 계속 도와드리기로 했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에서 한인성당을 도와주면 좋겠다는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신문사 운영과 홍보 때문에 쉽지는 않지만 아직까지는 미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더 좋은 방안을 찾을 때까지 저의 열정과 신자들의 갈망으로 좋은 열매를 맺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신자들의 갈망을 채워주시리라 믿습니다. 부족한 저를 통해서도 좋고, 새로운 사제를 보내 주셔도 좋습니다.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지만 교회에는 물질과 자본의 바벨탑이 쌓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턱이 높아서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앞서서 ‘열정’이 식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과 같은 열정이 필요합니다. 그런 열정이 잠들어 있는 신앙을 깨울 수 있습니다. 그런 열정이 굳게 닫힌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에 필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가졌던 갈망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소경의 갈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갈망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갈망을 아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태산이 높아도 하늘 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반드시 정상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사람이 오르지 않고 산만 높다고 탓한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산을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산을 보여주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산에 오르려는 갈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열정과 갈망으로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고 일어서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도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다시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이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갈 수 있습니다. 열정과 갈망이 있다면 영원한 생명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 희망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언서 중의 예언서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서는 꽤나 흥미롭고 특별한 예언서입니다. 작품의 역사적 상황, 사용되는 언어와 문체, 주요 신학 사상 등을 고려할 때 이사야서는 통상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가 세 명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1~39장을 제1이사야서, 40~55장을 제2이사야서, 56~66장을 제3이사야서라고 요즘 칭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2이사야 예언자의 말씀 선포 대상자들은 더 이상 유다나 이스라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은 이미 처절하게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유배를 당했습니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백성들은 비참하고도 굴욕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결국 제1이사야 예언자와 제2이사야 예언자의 활동 시기는 적어도 150년 정도의 차이가 나고 있는 것입니다.
제2이사야 예언서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이며 창조주이신 주님께서는 가련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남의 나라 땅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바빌론 제국이 난다 긴다 하지만 인간 존재의 힘이나 위대함은 풀처럼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 있다. 주님께서는 이방인 임금 키루스를 이스라엘의 해방과 재건을 위한 도구로 뽑으셨다. 그를 통해 주님께서는 바빌론을 멸망시키고 당신 백성을 유배에서 해방시켜 위로해주실 것이다. 제2의 출애굽, 새출애굽이 도래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시온의 재건이 이루어질 것인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구원에 도달할 것이다.
유다왕국이 멸망한 후에 바빌론으로 끌려와 살아가고 있던 유다인들의 하루하루는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머릿속은 참으로 복잡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도 참혹한 현실을 허락하시는지? 과연 주님께서 계시기나 한건지? 그분께서 계시다면 어찌 이리 오래도록 남의 나라 땅에서 수모를 당하게 하시는지? 혹시라도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완전히 저버리신 것은 아닌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한 예언자가 있었으니, 이사야의 사상을 이어받은 제2이사야 예언자였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절망에 빠져있던 백성들을 따뜻이 위로합니다. 첫 선포 말씀부터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너희의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에게 다정히 말하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나고 죗값이 치러졌으며 자기의 모든 죄악에 대하여 주님 손에서 갑절의 벌을 받았다고 외쳐라.”(이사야서 40장 1~2절)
특히 오늘 첫 번째 독서로 선포되는 말씀의 말미 부분은 하루하루 고통 속에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고통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위로로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야서 49장 14~15절)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키루스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는 페르시아 대제국을 건설한 왕으로서 당대 ‘핵인싸’로 유명했습니다. 그는 벌이는 전투마다 승승장구했습니다. 페르시아 백성들은 크게 환호하고 지지를 보냈습니다. 정복한 나라 백성들에게는 유화 정책을 써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서 당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강대국 바빌론에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빌론은 천 개의 성문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수많은 보화와 보물로 가득 찬 황금의 도시였습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는 성문과 성벽을 새로 세우고 튼튼하게 보수하고 증축했습니다. 성벽은 2층에다 높이는 6.5미터였습니다. 성벽은 일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두열로 되어 있었는데, 두 성벽 사이의 폭은 3.72미터였습니다.
키루스는 이토록 강력한 바빌론을 함락하고 멸망시킵니다. 엉겁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유배로부터 해방을 맞이합니다. 이를 통해 키루스는 주님 구원의 도구로 선포됩니다. 그는 주님의 구원 행위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키루스를 인도하시어 그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결국 키루스가 하는 모든 일들은 주님의 일이었고,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많은 경우 그분이 계획하시는 일을 우리의 좁은 안목과 머리로 알아차리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필요한 노력이 그저 그분 손길에 모든 것을 맡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그분께서 어련히 알아서 잘해주시리라 낙관하는 일입니다. 그 어떤 환난과 고통이 다가오더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희망하는 일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출발한다는 말씀입니다.
곧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마음 둘 자리」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마더 데레사).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성형수술 :
못난 얼굴 수술 하는 것보단 못난 마음 수술하는 것이 더 낫다.
못난 얼굴 수술하면 얼굴만 예뻐지지만 못난 마음 수술하면
얼굴은 따라 예뻐지기 때문이다. -이규경-
이 사순절에 마음을 수술하여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드님의 권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요한 5,17-18).”
창세기에는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창세 2,2).”
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하느님께서는 천지창조 후에도 쉬시지 않고,
인간들을 돌보는 일을 계속 하신다는 유대교 신학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사상은 하느님께서 단 한 순간이라도 인간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신다면
인간들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즉 하느님께서 끊임없이 인간들을 돌보시고
보살피시기 때문에 인간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심장이 한 순간이라도 멈추면 인간이 죽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래도 인간의 심장은 잠깐 멈추었더라도 다시 뛰게 할 수도 있고,
다시 뛰게 하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단 한 순간이라도 거두시면
우리가 살 수 없습니다.
천지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하느님의 사랑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기본 믿음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쉬셨다.’ 라는 말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쉬신다는 뜻이 아니라,
천지창조 작업을 마무리하신 다음에
이 세상을 가꾸고 돌보는 일을 인간에게 맡기셨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상을 바탕으로 해서,
당신도 당신의 일을 멈출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인간들을 돌보고 계시니” 라는 뜻입니다.
“나도 일하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안식일이라고 해도
하느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라는 뜻입니다.
안식일은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날이고,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는 날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르 3,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지만 인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요한 5,19-20ㄱ).”
이 말씀은, “내가 하는 일은 곧 하느님의 일이다.” 라는 선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곧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요한 5,20ㄴ-23).”
여기서 ‘그보다 더 큰 일들’은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보다 더 큰 일들’,
즉 죽은 사람들을 부활시켜서 영원한 생명을 주거나 심판하는 일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권능과 권한을 행사하는 것을 보게 되면
안 믿는 사람들은 놀라겠지만, 믿는 사람들은 당연한 일로 여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권능과 권한을 아버지와 함께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일과 예수님을 공경하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나를 공경하여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공경하라고 요구하신 것은 아니고,
이 말씀은 당신의 일이 곧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즉 ‘하느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고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4-26).”
종말의 하느님 나라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고,
지금 완성을 향해서 가는 중이고, 마지막 날이 되면 완성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의 시간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이미 시작된 영원한 생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라는 말씀은, 생명이 완성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죽음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서 중단하면,
그것은 생명에서 죽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라는 말씀은, 지금이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는 일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은
지금 해야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르고, 남아 있는 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바로 지금 해야 합니다.>
‘마지막 날’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심판관으로 오실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과 ‘안 믿는 이들’로 구분하시지 않고,
‘선을 행한 이들’과 ‘악을 저지른 자들’로 구분하십니다.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선을 실행해야 합니다.
만일에,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악을 저지른다면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루카 12,47).
믿는다고 무조건 구원과 생명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6-7).”
말씀 나누기 - 사순 4주 수요일-어떻게? 사랑으로.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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