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8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예수께서 “집에 돌아가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하시니
그는 예수의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요한 4,43-54)
Jesus said to him,
"You may go; your son will live."
The man believed
what Jesus said to him and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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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니,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에 있는 앓아누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자 고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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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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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형제님이 오랜만에 애인과 함께 극장에 갔습니다. 서로 회사 일이 바빠서 공동의 취미활동인 영화관람을 오랫동안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영화가 상영한다고 해서, 회사 일을 모두 마치고 밤에 극장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볼 수 없었습니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10시까지만 극장 이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오랜만에 데이트를 하는 것인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간에는 식당이나 카페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정부의 방침을 비판하면서 불만을 이야기하는데, 여자친구가 공원에 산책하자고 제안합니다. 이 둘은 함께 산책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영화관람이 더 큰 기쁨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부정적 감정으로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긍정적 방향을 찾는 것이 본인들에게 더 유익했습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외부에서 벌어진 사건이 좋다 나쁘다 하는 문제보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처리하느냐가 진짜 중요하다.”
왕실 관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고쳐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이에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라고 말씀하십니다. 표징과 이적을 봐야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 표징과 이적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아무튼 거절처럼 보이기도 하는 예수님 말씀이었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조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을 들은 왕실 관리는 어떠했을까요? 기뻤을까요? 화가 났을까요? 왕실 관리인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화를 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꿉니다. 화가 나는 부정적인 상황이 아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긍정적인 상황을 바라봤던 것입니다.
말씀만으로도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집으로 떠나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믿지 않았다면, 떠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의 생사가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왕실 관리였기에 공권력을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끌고 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었기에 떠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보고 체험해야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자신에게 필요한 은총과 사랑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상상을 늘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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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dp9zkTU-I
오늘은 부활 신앙의 창조적 국면에 대해 묵상한 바를 강론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카나 마을에서 헤로데 왕실의 관리를 만나셨는데, 그의 아들이 거기서 제법 떨어진 카파르나움에서 죽을 병을 앓고 있으니 가서 살려주십사 하는 청원을 받으셨습니다. 당시 헤로데는 에사우의 후손인 에돔족의 후예로서 이두메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 헤로데 대왕의 사후에 그 권력을 여러 형제들과 함께 나누어 받아 갈릴래아 지방을 다스리던 영주였습니다. 헤로데 영주는 로마 제국의 위임 통치를 하고 있었으므로 백성을 위하는 대신 그 반발을 막아주는 방패막이에 불과했습니다. 악정을 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해 바른 소리로 비판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벤 것도 그 헤로데 영주였으므로, 그의 관리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께는 원수와 다름없는 사이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망설임 없이 그것도 말씀 한 마디로 그의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카파르나움까지 가실 것도 없이 원격으로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바를 몸소 실천하셨다는 것뿐만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살려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소생 기적이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만이 아니라 이미 죽어 버린 사람을 살려주신 적도 있었습니다. 야이로 회당장의 딸이라든가(루카 8,55), 과부의 외아들(루카 7,14), 심지어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친구 라자로를 살려내신 일이(요한 11,43)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소생 기적 사건들을 통해서 깨우쳐야 할 것은 소생은 부활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소생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지만 수명이 다하면 죽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은 육신의 상태와 상관없이 거듭 태어나는 일이고 다시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번 소생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당신이 지닌 신적 권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소생 기적 사건 중에서 라자로의 소생 기적 사건에 대해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별히 절친했던 벗 라자로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그의 누이들이 죽기 전에 일찌감치 전해왔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미적거리시다가 죽은 다음에야 가서 살리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시기가 파스카 축제가 임박한 때였고, 그 장소 또한 베타니아로서 예루살렘과 매우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만일 예수님께서 죽었던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다면 그 소문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모여든 군중에게로 순식간에 퍼져나갈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명성은 높아질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민중봉기를 염려하는 로마 군대가 계엄령을 내려서 학살을 저지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를 눈치챈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러 가실 때, “우리는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비장한 각오를 표명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을 각오를 하고 일으키시는 라자로 소생 사건을 통해서,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믿게 될 이들이 부활 신앙을 지니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일깨우고자 교회의 전례에서도 창조에 관한 이사야 예언을 독서로 배치해 놓았습니다. 소생은 육신에 붙어 있던 생명의 기운이 다시 돌아오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부활은 육신과 정신과 영혼이 다 함께 생기를 되찾는 것이고 이 기운은 순식간에 다른 이들에게로 널리 퍼질 뿐만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이야말로 새 창조에 해당됩니다. 창조의 국면을 생각해 보면 이러합니다.
첫째, 우리의 혼은 하느님의 영과 소통을 해야 살아있는 영혼이 됩니다. 종교의 본령입니다. 개인이든 겨레든 사람의 혼이 하느님의 영과 소통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야 제대로 된 종교입니다. 미신적인 종교는 악령이나 귀신과 소통하게 해서 영적 질서를 더 어지럽힙니다.
둘째, 영혼의 생기가 정신과 마음을 움직입니다. 문화의 영역입니다. 개인의 마음도 평안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지상정이지만, 민족의 문화도 자기만 평안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특히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져주어야 보편적으로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전에 유행했던 강대국의 문화 즉 로마나 프랑스, 영국, 미국, 중국이나 일본 등의 문화와 최근의 한류 문화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이것입니다.
셋째, 정신과 마음이 몸도 움직입니다. 경제의 자리입니다. 흔히 민생경제라 말합니다. 정치적 관심사는 사람들이 고르게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는 평등의 가치를 구현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창조하시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소생 사건들을 통해서 부활 신앙을 예비시키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공생활을 다 마치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은 이 부활을 위한 수난을 묵상하는 사순시기입니다. 머지않아 곧 예수 부활 대축일이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우리 겨레에게 부활 신앙을 불어 넣어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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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신부-
집 축성을 다녀왔습니다. 95세 어머니와 함께 사는 자매님의 집입니다. 95세의 연세가 무색하리만큼 어머니는 정정하였고, 순수하였습니다. 손에는 작은 십자가를 쥐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부모님은 황해도 해주에서 사셨다고 합니다. 아버님은 성당에서 종을 쳤고, 신부님을 도와 드렸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수산나, 아버지는 요한이었다고 합니다. 제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해서 ‘신문사’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잘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생각에 사제는 모두 성당에서 오는 것이었나 봅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성당’에서 왔다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살아 돌아온 것보다 사제인 저를 본 것이 더 반갑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며 예수님을 만났던 ‘한나’라는 노인이 생각났습니다. 평생 성전에서 기도하던 한나는 예수님의 탄생을 보았고, 기뻐하며 축복하였습니다. 연세가 많아서 외출은 못하지만, 매일 기도하던 95세의 어머니에게 사제는 특별한 의미였습니다. 집 축성을 마치면서 사제로서 제가 걸어온 길과 앞으로 걸어야 길을 성찰하였습니다. 95세 어머니가 건강한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지내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더욱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왕실 관리의 병든 아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이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누군가가 나의 빈자리를 채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내가 누군가에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이를 위한 모든 것’이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고, 그분의 삶과 가르침은 역사가 되었고, 신앙이 되었고, 희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체험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자신들의 삶으로 재해석하였고, 편곡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재해석된 예수님의 삶은 오늘 나에게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마르꼬, 루까, 마태오 복음 사가는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삶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되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선포자가 되셨고, 표징을 보여주시는 새로운 권위가 되셨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해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이셨고, 말씀은 태초부터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선포하였습니다. 암부로시오, 아우구스티노, 안셀모, 토마스아퀴나스, 칼라너, 한스큉과 같은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학과 철학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베네딕토, 프란치스코, 대 데레사, 십자가의 요한과 같은 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깊은 영성의 옷을 입혀드렸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폐허가 된 도시의 성당에 팔이 부서진 예수님상이 있었습니다. 그 앞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의 팔이 되어주십시오.” 군인은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팔, 예수님의 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묵상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의 손과 발이 되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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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하늘 새 땅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양승국신부-
지루하고 답답한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향해 건네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르겠습니다. 꼭 그렇게 되리라 굳게 믿으며 희망을 잃지 말아야겠습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이사야서 65장 17~18절)
참 은혜로운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새 하늘 새 땅’ 하니 즉시 떠오르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사이비 종교 집단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군요. 특히 신천지! 한번 크게 타격을 입어 더 이상 웃기는 꼴을 안 봐도 되나 싶었는데, 그들은 마치 불사조 같습니다. 거대악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가 봅니다. 또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개를 치기 시작합니다.
이 사탄의 무리는 팬데믹 시대, 발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답니다. 2021년부터 모든 예배나 세미나, 교육을 비대면 온라인 방식으로 바꾸어, 작년 한 해 동안 약 2만 명에 육박하는 신도수의 성장을 기록했답니다.
눈을 부릅뜨고 경계해야 할 대상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틈만 나면 토론석상에 모여 머리를 맞대고 단기전략, 중장기 전략을 수립합니다. 성공 사례담을 나누면서 격려하고 포상합니다.
그들의 세운 전략은 우리 젊은이들 입장에서 너무나 달콤하고 다양합니다. 그리고 또 집요합니다. 요즘 어깨가 축 쳐진 우리 젊은이들이 들으면 한방에 ‘훅’ 넘어갈 다양한 미끼들이 수두룩하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교묘한 방법으로 접근해오는 그들이 가르치는 바는 참으로 어이없습니다. 자기네 교회만이 유일한 구원의 방주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교회의 교주는 곧 재림 예수 그리스도이랍니다. 그러니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갖다 바치라고 외칩니다.
이제 지상천국 신천지가 도래했으니 부모 형제나 가족도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외칩니다. 이제 혈연을 모두 끊고 신천지에서 새로운 가족들과 함께 새 하늘 새 땅을 만끽하자고 초대합니다.
흔히 그들이 바라는 것은 순식간의 천지개벽입니다. 초스피드한 상황 전환을 기대합니다. 빠른 치유와 고통의 완화를 원합니다. 단 한 번에 인생의 대반전을 꿈꿉니다. 결국 고통과 십자가는 무시하고 만사형통과 승승장구만을 강조하는 값싼 신앙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을 어디 그렇습니까? 근본적으로 부족한 우리입니다. 다양한 결핍과 한계를 지닌 우리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는 죄와 결핍과 나약함은 지극히 당연하고 인간적인 일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새 하늘 새 땅, 결국 주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새 하늘 새 땅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우리는 모두 미완의 존재로서 완성의 땅, 새 하늘 새 땅인 주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상 완전하거나 완벽할 수가 없습니다. 살아있는 한 고통과 시련과 십자가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해방과 자유를 희망하지만 결핍되고 모자란 존재로서 매일의 눈물과 한숨을 감내해야 마땅합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기꺼이 견뎌내야 합니다. 때로 겪는 수모와 비참함과 굴욕감도 그러려니 마음 넓게 갖고 수용하며 살아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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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이영근신부-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들,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증거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춥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셨을 때,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 루카 7,7)라고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합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통하여 당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주님!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
(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믿음 없이 청하기만 하고 돌아서버리고만 마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 주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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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부른 고통」
-반영억신부-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사정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에 두말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주십니다’(야고5,15).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야 밤을 지새워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은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2-13).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이제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이라 할지라도 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메시지를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기적을 말하지 않고 표징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을 통해 보물 상자보다 보물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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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성 믿음은 아닌지.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왕실 관리의 아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치유를 청하러 온 왕실 관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일까요?
치유의 이적을 청한 것은 왕실 관리 하나인데
주님께서는 "너희는"이라고 하시니 여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그때 왕실 관리 가족이나 일행이 같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꼭 가족이나 일행이 아니더라도
그 자리에 다른 사람이 있었기에 그들을 포함하여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 말씀대로 우리 인간은 기적적이지 않으면 잘 믿기 어려워하고,
왕실 관리도 그런 우리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이고,
주님도 그런 것을 나무라듯이 말씀하시지만 인정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가증스럽게 굴지 말고,
그러한 나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하고 오늘 왕실 관리처럼
믿음의 과정을 계속 이어감으로써 믿음이 성장하게 해야겠지요.
왕실 관리의 이런 신앙 과정을 표현하는 단어가 '그래도'입니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면박조로 말씀하셨음에도 그는 꺾이지 않고
'그래도' 자신의 믿음이 좌절되거나 청을 거두지 않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믿음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그래 나는 믿음이 없어.'라고 하며 포기할 수도 있었는데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길을 가기로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같이 가달라는 청을 주님이 거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을 살아날 것이다."는 말씀을 믿고서 갑니다.
만일 꼭 같이 가달라고 보챘다면 그것은 한 말씀으로 치유하실 수 있는
주님을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잖습니까?
저는 저를 믿지 못합니다.
저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저의 사랑에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청할 때 가지 않고 집에서 기도할 수도 있지만
가능한 가서 기도해주려고 하는데 그것은 치유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하느님의 사랑만은 저의 부족한 사랑을 통해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과 사랑에 자신이 있으셨기에
주저함없이 믿고서 가라고 하신 것이고, 왕실 관리는 그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과연 그의 믿음대로, 아니 주님 말씀대로 아들이 나았습니다.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기술합니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 말은 믿지 않았던 그가 믿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지요.
앞에서 주님을 말씀을 믿고 떠났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게 되었다는 말은 본인은 더 확고히 믿게 되었고,
가족들까지 모두 믿게 되었다는 뜻이겠습니다.
믿음이 성장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사실 사람에 따라 믿음의 성장판이 닫힌 퇴행성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왕실 관리는 그렇지 않은데 이런 그를 보고
나의 믿음은 성장판이 닫힌 퇴행성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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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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