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사순 제4주일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루가 15,1-3.11ㄴ-32)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against you;
I no longer deserve to be called your son.’
But his father ordered his servants,
‘Quickly bring the finest robe and put it on him;
put a ring on his finger and sandals on his feet.
Take the fattened calf and slaughter it.
Then let us celebrate with a feast,
because this son of mine was dead, and has come to life again;
he was lost, and has been fou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리코 벌판에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고 그 땅의 소출을 먹는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이라며, 하느님과 화해하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고 돌아온 아들을 따뜻이 맞아 주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복음).
이기적인 아들과 메마른 영혼의 아들
-키엣 대주교-
이기적인 아들
아들은 부모님께 재산을 요구했습니다. 더구나 살아계신 부모님께 재산을 나눠달라는 엄청난 불효를 저지른 아들은 눈물과 땀이 어린 그 돈을 갖고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며 모두 탕진해버렸습니다. 돈이 떨어지자 주변사람들은 모두 외면했고 비참한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되자 그제서야 안락한 집과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사랑을 품은 아버지
그러나 아버지는 자식의 행복을 위해 자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아들이 떠난 후 아버지는 매일 밤 아들을 그리워하며 어두운 골목에 나가 기다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들이 당신의 돈만 바랄 때 아버지는 자신의 돈보다도 아들의 행복만을 바라고, 아버지가 기다림에 지쳐가는 동안 아들은 오직 쾌락만을 즐겼습니다. 자식은 부모를 생각지도 않는 데 부모는 왜 이토록 자식만을 생각하고 그리워할까요?
이 복음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벅찬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은 아버지와 아들의 짧은 만남의 순간입니다.
“아들이 아무리 멀리 있더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은 미처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는데 아버지는 한눈에 아들을 알아봤습니다. 연로한 아버지보다 더 밝은 눈을 가진 아들이 알아보기도 전에, 아들을 그리워했던 아버지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멀리오는 아들을 한 눈에 알아봤습니다. 자식을 눈이 아니라 가슴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담고 있는 눈은 소중한 사람의 그림자조차도 알아볼 수 있다고 합니다. 젊고 밝은 눈이지만 사랑이 결여된 눈은 마치 장님과도 같이 타인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은 아버지
인자한 사랑의 아버지는 아들의 지난 잘못을 잊은 지 벌써 오래 전입니다. 방탕했던 아들이 아니라 눈 앞에 있는 남루하고 야윈 아들만 보일뿐이기에 아들을 만난 기쁨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들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진 못한 아버지는 달려가 덥석 껴 안았습니다. 넘치는 기쁨과 사랑이 아버지를 마치 어린아이처럼 달려가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보다 작은 아들은 비록 젊지만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음은 병든 몸과 같습니다. 연로한 아버지는 체력이 아니라 사랑의 힘과 사랑의 날개로 한숨에 달려갔습니다.
어떤 표현으로도 잃었던 아들을 만난 아버지의 기쁨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넘치는 사랑은 입맞춤으로도 부족하였기에 아들이 다시는 더 이상 멀리 가지 못하도록 꼭 껴 안았습니다. 아들이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보고, 넘치는 사랑을 느끼고, 달려가서, 포옹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방탕한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너무 많은 것을 허비했습니다. 너무 쉽게 재산을 주었고 돌아온 탕자를 위해 좋은 옷과 신발을 주고, 반지를 끼워주고 잔치를 열어주는 등 많은 것을 소비했습니다.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의 이목은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이치에 맞지 않는 과분한 사랑을 준 그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랑은 이론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황폐한 영혼을 지닌 큰 아들
형은 동생이 떠난 후에도 계속 아버지를 모시며, 아버지의 뜻을 따르며 아버지 곁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집에 있었던 것은 육체일 뿐이었습니다. 동생이 재산을 갖고 떠난 후부터 그의 영혼은 황폐해졌습니다. 몸은 비록 가족과 함께 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떠났고,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하인처럼 돈을 받기 위해 일했습니다. 비록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멀어진 마음은 슬픔과 사랑을 지닌 아버지 마음을 볼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큰 아들에게도 똑 같은 사랑을 주었지만 아들은 그저 동생에게 재산을 나눠 준 아버지가 원망스러웠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여전히 포용하고 사랑하고 있었으나 아들의 편협한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넓고 열린 영혼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마음을 꼭 걸어잠가 황폐한 영혼이 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불만과 비판만을 할 때, 아버지는 단지 용서만을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큰아들을 찾아나선 아버지
아버지는 다시 한번 마음이 아픈 큰 아들을 찾아 집을 나서야 했습니다. 아들을 만난 아버지는 전과 다름없는 인자하고 온화한 말, 따뜻한 눈길로 아들을 보듬으며 집에 돌아오도록 설득하였습니다. 돈을 탕진한 작은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물질적인 안락함을 주는 집이었다면, 큰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아버지와 동생을 이해하고 다시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상처와 치유는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면 어떠한 상처도 치유될 것입니다. 단, 인자한 아버지와 함께하는 치유만이 영원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자신이 두 아들 중 어떤 쪽에 속하더라도 ‘모든 사람은 반드시 아버지께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나의 삶이 황폐하지 않을지라도 나의 영혼은, 수 없이 여러 번 아버지를 곁을 떠나 방황하였을 것입니다. 때로는 아픔과 고통을 주시는 아버지를 원망하며, 때로는 나의 성공이 내가 노력한 결과라는 착각으로, 나의 행동과 생각이 아버지이신 주님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언제라도 편안히 아버지 곁으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인자한 아버지는 벌써 골목 밖까지 나와 기다리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부터 나를 사랑하신 분이시고, 내가 그분을 찾기 전부터 이미 나를 찾으시고, 내가 그분에게 용서를 구하기 전에 이미 나를 용서해 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자한 아버지이신 주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아멘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2.jpg)
1. 나는 이기적인 아들입니까. 황폐한 영혼을 가진 아들입니까?
2. 어두운 골목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신 인자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고 있습니까?
3. 아버지이신 주님께 돌아가기 위해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2.jpg)
1. 기쁨의 주님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 아버지께 한발 더 다가가기 위한 작은 회개를 실천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내가 지금 이렇게 여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언제나 사랑을 주는 가족과 친구, 이웃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나의 사랑도 표현해 보기 바랍니다.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날 때부터 유전자에 새겨지기 때문에 성격은 바뀌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바뀌지 않을까요? 성격이 타고난다고 하지만, 성격의 상당 부분은 태아기와 유아기에 각인된 경험으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을 하루도 빠짐없이 해서 튼튼한 몸을 만들 수가 있듯이, 자신이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노력하면 분명히 성격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바뀌어 갑니다. 성격, 자아, 행동양식, 습관 모두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근육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근육질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자신이 변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분명히 바꿀 수 있습니다. 단지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쉽게 포기해서 문제입니다.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죄의 유혹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다면서,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직 열정을 가지고 변화의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선함으로 변하고자 하는 노력이 바로 하느님께로 향하는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입니다. 율법의 유산법은 장자가 아버지 재산의 3분의 2를 가지고 동생은 그 나머지 3분의 1을 갖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유산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상속받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 생전에 유산분배가 있어도, 분배받은 아들들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있어도 처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은아들은 유산을 분배받았고 처분까지 한 것입니다.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죄를 마음껏 범하라는 이유가 아닙니다. 또 자기 혼자만 잘 살면 그만도 아닙니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사랑하며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상의 삶을 지키지 않고, 자기 멋대로의 비정상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정상적이지 않은 작은아들을 용서하고 받아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처럼, 하느님께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를 매번 용서하시고 받아주십니다. 물론 복음에 등장하는 큰아들처럼, 세상은 이런 용서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면서, 끊임없이 단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이 먼저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향하면 당신의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십니다.
이를 위해 작은아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처럼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변하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노력입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모든 인간은 자기감정의 원인을 움직이는 수레바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OWFyOy4ztN4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07gNB3BQc
1.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우리가 사순시기에 듣고 있는 복음은 주님 세례 축일에 들었던 대로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느님 백성의 새로운 역사의 도정에서 겪어야 하는 일들에 관한 것들이었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며 대결하셨고(제1주일),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에게는 거룩한 변모를 보여주시며 부활의 확신을 심어주셨으며(제2주일),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처럼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모두가 회개해야 한다는 말씀도 들려주셨습니다(제3주일). 그리고 오늘 사순 제4주일에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 말씀을 예수님께서 들려주십니다. 이 말씀은 세리와 죄인들이 몰려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자, 이를 지켜본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학자들이 투덜거리며 그분과 그분의 생활양식을 비난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사회적으로 낙인찍고 종교적으로 소외시켰던 세리와 죄인들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는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2. 예수님의 생활양식
예수님의 생활양식에 대해 생각해 보는 오늘, 전례의 성격은 이미 입당송에 잘 나와 있었습니다. “즐거워하여라, 예루살렘아, 그를 사랑하는 이들아, 모두 모여라. 슬퍼하던 이들아,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위로의 젖을 먹고 기뻐 뛰리라”(이사 66,10-11). 즉, 슬퍼하던 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아 주시려던 삶이 예수님의 생활양식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가르치신 진복팔단의 말씀은 예수님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그 행복을 우선적으로 차지해야 할 사람들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이 살거나 일하는 현장에 가야 그들을 위로할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을 전해 줄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되찾아줄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현장성과 공동체성 그리고 가치지향성이 예수님의 뚜렷한 생활양식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먹보요 술꾼”(루카 7,34) 이라는 모욕적인 언사로 비아냥거렸습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엘리트로 대접받던 이들의 이런 반응은 성전이나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도 가식적인 처신을 하던 자신들의 생활양식과 예수님의 생활양식이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가 만들어놓은 유다교 제도의 혜택을 입은 엘리트였고, 자신들이 주석해 놓은 율법 규정 체계를 앞세워 세상을 해석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윤리적으로 가식적이었으되 경제적으로 부유해서 살아가는 데 아무 걱정이 없던 중산층이었습니다.
3. “내가 오늘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
오늘 제1독서인 여호수아기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청산하고 드디어 약속된 땅에 들어가서 첫 수확을 거둔 이야기입니다. 수치스러운 노예살이를 하며 지내던 이집트를 탈출하여 시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살았던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어 거둔 소출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서 이집트의 수치를 치워 버렸다”(여호 5,9ㄴ). 이는 더 이상 하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과, 또 이 자립생활이 지속가능한 생활양식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척박한 땅 투성이였던 광야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었지만, 호수와 강이 있는 가나안 땅에서는 농사가 가능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새로운 하느님 백성의 역사도 지난 과거의 삶의 양식을 발판으로 삼아 도약하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 이어 이제는 로마의 힘에 의해 자기네 땅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또 다시 백성을 정신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억누르고 있던 기존의 체제는 청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새로운 생활양식의 가치가 지닌 역사도약적 의미였습니다; 현장성과 공동체성과 가치지향성.
4. 의로움으로 대동세상을
오늘 제2독서인 코린토 후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새로운 역사의 특징을 의로움 안에서의 화해로 설명합니다. 그가 옳게 설명한 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 사람입니다”(2코린 5,17).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은 모두 과거의 행적과 상관없이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메시아적 백성에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이므로, 다 같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의로움을 기준으로 화해해야 한다고 사도 바오로는 역설하였습니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 백성 안에서는 유다인이건 그리스인이건 아무 차별이 없게 되었습니다. 의로움을 기준으로 작은 차이를 넘어서 커다란 일치를 지향하는 대동세상이 된 것입니다.
5. 거룩함으로 복음화를
새 역사를 창조하는 하느님 백성에게 있어서 의로움이 필요조건이라면 거룩함은 충분조건입니다.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처신함이 예수님의 의로움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비를 다른 이들에게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조건 없이 다른 이들에게 실천하자면 우리 자신이 의로운 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손해를 보고 희생을 감수할 정도로 거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거룩함의 실체였습니다. 누구든지 이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고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말씀이 그래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세속적인 의로움을 넘어서는 거룩함을 지향하는 의로움에로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복음화의 도구로 쓰십니다. 기껏 죄를 짓지 않는 정도의 생활양식을 보고 감탄하거나 존경할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현장과 공동체와 가치 지향이라는 거룩한 생활양식이 요청되는 것입니다.
6. 실사구시의 신앙
이 땅에 복음 진리가 들어올 때, 한 가지 기저(基底) 요인과 또 다른 한 가지 촉진(促進) 요인이 도움이 되어 주었습니다. 기저 요인은 한민족 전통으로 내려오던 하느님 신앙이었고, 촉진 요인은 서양 선교사들이 전해준 과학과 철학에서 비롯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이었습니다.
역사 초기부터 3천 년 동안 한민족을 하나로 일치시켜 주었던 하느님 신앙은 불교와 유교 등 외래 종교들이 들어오면서 민족 생활의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러기를 2천 년, 민중의 종교심성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이 하느님 신앙이 이벽과 천주실의에 의해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동료 선비들과 중인, 상민, 천민 할 것 없이 모두가 종교심성으로 하느님을 알고 또 믿고 있던 이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였고, 백 년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인권을 모르고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모르던 왕조와 유림들에게 저항하여 새로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 만민평등과 남녀동등의 가치를 심어 주었습니다.
또 다른 촉진 요인은 실사구시의 학문이라 하여 실학(實學)이라 부르던 합리적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민족의 종교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던 하느님 신앙은 이 실학에 의해서 자극받아 민족 사회의 최고선과 공동선을 구현하는 데 커다란 도약대가 되어 주었습니다. 다분히 이 명칭은 공리공론(空理空論)을 일삼던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던 정신적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교리 또한 이 실학적 사고방식으로 보유론(補儒論)적 노선을 취하여 우리 민족의 종교심성에 자연스럽게 젖어들어 올 수 있었습니다.
7. 박해가 초래한 그늘
오늘날 우리 교회에는 성리학 세력이 가했던 백년 박해가 초래한 그늘이 아직도 짙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5백만 명을 넘는다는 세례자 통계가 무색하게 예수님의 생활양식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버린 듯하고, 마치 심리적으로 박해시대를 사는 듯 위축되고 소극적이고 인습적이며 타성적인 신앙생활이 만연되어 있습니다. 가치 지향적이지도 않고, 공동체적이지도 않으며, 현장적이지도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의 눈으로는, 집 나간 둘째 아들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우리 교회의 신자들을 보고 계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첫째 아들에 빗대셨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보여준 처신이 어느 새 우리 교회에 짙게 침투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전해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서 우리 교회를 실사구시적으로 쇄신해야 할 요청이 절박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8. “다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오늘 복음의 내용으로 보거나, 스스로 신앙 진리를 찾았던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거나 우리는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기의 말씀대로 심리적 박해시대의 수치를 치워 버리고 자발적인 실사구시의 정신 전통을 회복해야 하고, 코린토 후서의 말씀대로 이전까지 어떠했든지 간에 복음 안에서 화해한 새 백성의 신선함을 되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오늘 복음에 나오는 비유말씀대로 복음적 가치를 찾고, 공동체로 모여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은 물론 믿음을 잃어버린 이들까지 돌아오도록 기다리면서, 모두가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조재형신부-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의욕은 넘치는데 함께 하는 신자들이 적었습니다. 평일미사에는 5명 나온 적이 있습니다. 많이 나오면 10명 남짓이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난 후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유는 있었습니다. 집중 호우로 피해가 컸습니다. 성당에서 피해자들을 위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실수로 보상에서 제외된 분들이 있었습니다. 실수와 오해는 큰 상처가 되었고, 그런 분들은 성당과 멀어졌습니다.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었고, 새로 온 신부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삼계탕과 칼국수를 하는 유 가브리엘 형제를 만났었습니다. 지난 일들은 잊어버리고 함께 하자고 부탁하였습니다. 다음 주에 성당에 나왔고, 남아 있는 분들이 기쁘게 맞이하였습니다. 오해를 풀고 화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교포사목 본당에서도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본당 이전이나, 증축과 같은 결정에서 의견이 나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신자들 간의 반목과 불신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의 사목방침과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포사목 본당에서 새로 부임한 사제는 가정방문을 통해서 성당에 나오지 않는 분들의 마음을 여는 것도 중요한 사목입니다. 마음이 열린 신자들이 성당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나가는 것이 사목자의 보람이기도 합니다. 사순시기에 성당에서 멀어진 분들, 하느님을 떠나 있는 분들을 성당으로 모시고 오는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비유입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고 싶어 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청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똑같이 유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탕진하였습니다. 방탕한 생활로 건강도 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 중에 ‘희망’은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빈털터리 거지가 된 둘째 아들은 아버지 집에 대한 희망을 품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둘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던 아버지는 멀리서 오는 둘째 아들을 보았고, 마당으로 나가서 둘째 아들을 받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벌이기로 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았지만 세상으로 나가지 않았던 큰 아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큰 아들은 동생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서 잔치를 벌인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처럼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불평하였습니다. 불평의 이유는 ‘잔치’였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 주었지만, 아버지의 집에서 열심히 일한 큰 아들을 위해서는 잔치를 벌여주지 않았다고 불평하였습니다. 큰 아들에게 동생이 무사히 돌아온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큰 아들은 몸은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는지 모릅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면서 하느님의 집에 있지만 교만과 허영에 빠져서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이들을 차별하고 무시했던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어머니를 생각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방황하면서 집을 나갔던 둘째 형을 걱정하였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늘 따뜻한 밥을 한 공기 준비하였습니다. 어느 날, 둘째 형이 바람처럼 집으로 돌아오면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머니는 둘째 형을 위해서 따뜻한 밥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앞가림을 잘 하는 형제들의 자리도 있었지만, 방황하던 둘째 형을 위한 자리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둘째 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늘 마음 아팠습니다. 그래서 둘째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의 그늘이 모처럼 활짝 갠 하늘같았습니다. 돌아보면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지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어머니의 마음보다는 무시하고, 비난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집에 있었지만 마음은 세상의 것들에 있었던 큰 아들과 같았습니다.
사순시기입니다. 어디에 있는지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을 가지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둘째 아들처럼 ‘희망’을 간직하고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한다면, 방향을 돌려서 아버지께 돌아올 수 있다면 자비하신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받아 주십니다. 큰 아들처럼 ‘비난과 불평’을 간직하고 있다면 아버지의 집에 있을지라도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희망의 배를 타고 아버지께 돌아오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으면서도 불평과 불만이 있다면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자비를 배우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를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당신과 화해하게 하시면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따지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해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양승국신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의 슬픔을 안고 끼고 애써 보듬으면서 살아가는 형제자매님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감내하고 있는 그 큰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그저 눈빛만 봐도 즉시 알수 있습니다.
어린 두 자녀를 두고 먼저 떠난 아내, 참으로 혹독한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두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한 젊은 아빠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눈빛이 놓아버리고 싶은 삶의 의지를 계속 붙들게 한답니다. 이제는 순전히 자신의 몫이 되어버린 산더미 같은 빨래며, 싱크대 설겆이 거리에서 아내의 얼굴을 본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그들이 지금 겪고 있는 극도의 슬픔과 고통을 말끔히 치유해주시고 위로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따라 복음 구절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따뜻한 얼굴이요, 한없이 포근한 그분의 품입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 탕자의 귀향에 대한 헨리 나웬식 묵상의 결론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우리 안에는 둘째 아들, 그리고 첫째 아들, 최종적으로 아버지, 세 인물이 공존합니다. 탕자의 귀향 스토리는 둘째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첫째 아들로 넘어가고, 마침내 아버지에게서 끝납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자비하신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의 분위기는 참으로 따뜻합니다. 돌아온 아들을 맞이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이 존재합니다. 죽을죄를 짓고 불안해하는 둘째 아들을 다독여주며 안심시켜주는 모습에서 너그럽고 지혜로운 한 노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손입니다. 두 손의 크기가 우선 다릅니다. 아들의 어깨에 닿은 왼손은 강하고 억셉니다. 마디마디에 꽤 힘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저 만지는 데 그치지 않고 힘을 주고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반면 오른손은 어떻습니까? 부여잡거나 움켜쥐지 않습니다. 귀부인의 손가락처럼 세련되고 부드러우며, 우아하고 다정한 분위기입니다. 손을 사뿐히 올려놓은 듯합니다. 어루만지고 토닥이며 위로와 위안을 주고 있는 어머니의 손입니다. 아버지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면서도 어머니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한편으로는 붙잡아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어루만져주십니다.
아버지가 걸치고 계시는 큼지막한 외투 역시 우리의 눈길을 끄는데, 큰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색상이 따뜻하고 고운데다 큼지막합니다. 모양도 아치를 닮아서 깃들이기 좋은 환영의 공간입니다.
세상에 지친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는 장막처럼 보입니다. 헨리 나웬은 특별한 표현을 합니다. “새끼를 품고 지키는 어머 새의 날개를 연상시킵니다.” 결국 아버지의 커다란 망토는 보살핌과 보호 속에 안전하게 쉴 수 있는 아버지의 품을 의미합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고 우리 공동체는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을 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한 존재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극진히 환대하고 있습니까?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정히 등을 두드려주고 있습니까? 이제 더 이상 너를 놓지 않겠다는 각오로 그를 꽉 움켜쥐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탕자의 귀향을 감상하고 묵상하며, 나는 과연 돌아온 탕자인가? 아니면 첫째 아들인가? 파악하기 위해 고민합니다. 그러나 렘브란트와 헨리 나웬은 그게 아니라고 외칩니다.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 모두 다 자비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진다는 것은 나이에 상관없이 부단히 둘째 아들에서 첫째 아들로, 첫째 아들에서 아버지로 옮겨가고 변환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이를 꽤 먹은 헨리 나웬의 고백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노년기를 살아가는 분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갈 것입니다.
“나이 들어 쪼글쪼글해진 내 두 손을 바라봅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는 모든 이들에게 내밀라고, 집을 찾아온 모든 이들의 어깨에 내려놓으라고, 하느님의 그 어마어마한 사랑에서 비롯된 축복을 베풀라고 주님이 주신 손입니다.”(헨리 나웬, 탕자의 귀향, 포이에마 참조)
「사랑받는 죄인」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은 늘 행복의 원천이 됩니다.”우리는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그분의 자비와 사랑을 기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중성’을 지닐 때가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닌 것처럼 지내다가도, 이해득실이 주어지면 속을 환히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집 나간 아들과 아버지 곁에 있던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집 나간 아들을 ‘못된 놈’으로 볼 수 있고, 아버지 곁에 있는 아들을 ‘효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그들의 속이 드러납니다.
작은아들은 자기의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겨 방탕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챙길 수 있다는 것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유산으로 받은 재산 모두를 잃기까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습니다. 큰아들은 늘 아버지 곁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효자 중의 효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효자의 속을 들여 다 볼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왔습니다.
집을 나갔던 동생이 빈털터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그야말로 집을 나간 놈인데 신경 쓸 것이 뭐 있겠습니까? 자기가 선택한 운명을 자기가 책임을 져야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아버지 품은 한없이 넓고 깊었습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한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아버지가 베푸는 잔치를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15,29-30).하며 속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아니, 언제 아버지가 아들을 종으로 여겼습니까? 자기 스스로 종이 되었지요. 부자관계를 종과 주인의 관계로 만든 것은 큰 아들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설득합니다.“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1-32). 큰 아들은 몸둥이만 아바지와 함께 있고 마음은 콩밭에 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큰아들이 잔치에 참여하였을까요?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큰아들 입장이라면 그 잔치에 기꺼이 참여하였을까요? 결국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여려 있으나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는 바로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크고, 넓고, 깊으신 우리의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잃어버렸던 아들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면 얼마나 그분의 자비가 그리웠을까요? 불만이 많은 큰아들을 보고 “동생 하나 못 받아 주느냐? 속이 좁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의 속은 얼마나 넓은지 살펴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나를 챙기는 속을 보아야겠습니다.
작은아들이 밑바닥으로 한없이 떨어졌을 때 그 안에서 사랑의 아버지를 새롭게 발견하였고, 결국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므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반드시 실패 일 수는 없습니다. 또한 큰아들이 아버지 곁에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고 살았다고 해서 꼭 성공한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 있든 저기에 있든 ‘아버지의 마음을 얼마나 헤아리고 그분과 하나 되느냐’가 문제입니다. 작은 아들이 거지꼴로 집에 왔을 때 아버지는 먼저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다른 질책이 없습니다. 아들의 회개는 바로 여기서 이루어집니다. 그분의 사랑 앞에서!
우리 중에는 고해성사를 통해 작은아들의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큰아들처럼 늘 아버지 곁에 있으니 나는 효자라고 생각하며 교만의 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를 인정할 때 주님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허물과 현주소를 알고 아버지의 품으로 간다면,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이것을 더없이 큰 기쁨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시는 주님이 계시다는 것이 늘 행복의 원천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
-송영진신부-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읽을 때, ‘작은아들의 입장’에서 읽을 수도 있고,
‘큰아들의 입장’에서 읽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 말씀은 ‘살아 계시는 주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언제나 항상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입니다.
‘세리들과 죄인들(작은아들)’이 바로 ‘나’일 수도 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큰아들)’이 바로 ‘나’일 수도 있습니다.
작은아들도 아니고 큰아들도 아닌, 제삼자의 입장에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들’이라고 말하는 ‘오만한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들’이 아니라 ‘나’입니다.
1) 작은아들이라면, 아버지에게 돌아가지 않고 아직도 ‘밖에서’ 방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아버지에게 돌아가려고 애쓰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미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보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2) 큰아들이라면, 자기 자신은 ‘기쁨 없이’ 살면서, 남의 회개를 인정하지 않고,
아버지의 슬픔과 기쁨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의 슬픔과 기쁨에,
또 다른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에 동참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8-19)”
자기의 죄를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이야기에서는 작은아들이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고 나서 정신을 차리고
죄를 뉘우친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항상 그렇게 비참해져야만 회개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상태까지 가기 전이라도, 세속이 주는 즐거움과 재미가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깨닫고 회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비참한 상태입니다.
(건강을 잃은 다음에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는 경우가 많지만,
잃기 전에 건강의 소중함을 알고 지키려고 노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는 비참해지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은총을 잃기 전에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최상의 지혜’입니다.
어쩌다가 잃었지만 정신을 차려서 회개하고,
되찾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혜’입니다.
잃었는데도 모르고 살거나, 알더라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루카 15,20).”
여기에 묘사되어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큰 슬픔’과 ‘큰 기쁨’을 동시에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작은아들이 돌아온 것을 크게 기뻐하는 것은,
그가 떠나 있을 때 크게 슬퍼했다는 뜻입니다.
<“나는 지금 아버지께 기쁨을 드리고 있는가? 슬픔만 드리고 있는가?”>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루카 15,22-24).”
‘회개’는 모든 것을 원상 복구하려는 노력입니다.
여기서 ‘옷, 반지, 신발’은 아들의 지위가 회복되었음을 상징합니다.
(떠나 있는 동안에는 아들의 지위를 잃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작은아들’은 ‘죄의 종’으로 살다가 그 상태에서 벗어나서
‘아들’의 지위를 회복하고 ‘참된 자유’을 얻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 자신의 회개와 아버지의 자비가 합해져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회개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것인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권한이고, 우리는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우리를 받아주시기를
겸손하게 간청할 뿐입니다.
그렇게 할 때, 아버지께서는 언제든지 너그럽게 우리를 받아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8-32)”
큰아들은 아버지의 ‘큰 기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작은아들이 떠나 있는 동안 아버지가 크게 슬퍼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큰아들의 ‘화’는 우리가 흔히 ‘정의감’으로 착각하는 감정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면서,
자기가 화를 내는 것은 ‘정의의 실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큰아들이 감히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아버지를 비난한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이해하지 못하고 ‘정의’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끔찍한 종교전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무자비한 정의는 폭력이 될 뿐입니다.>
작은아들은 돌아와서 집의 ‘안’에 있는데, 큰아들은 ‘밖’에 있습니다.
집과 아버지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도 ‘잃은 아들, 죽은 아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을 타일러서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이 이야기는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이고,
바로 우리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기뻐하겠는가? 밖에서 화만 내겠느냐?”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루카 15, 32)
-한상우신부-
참 많이도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
그럼에도
지극하신
하느님 사랑을
아직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우리들이다.
아파하신
하느님께서
아들을 다시
살리신다.
같이
아파하시고
같이
기뻐하신다.
회개의 체험에서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회개의 길은
언제나
열려있다.
진정한 회개는
새롭게 태어나는
가장 아름다운
사람의 길이다.
하느님 사랑이
곧 우리 삶의
의미이며
목적임을
깨닫는 회개이다.
다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다.
아버지
하느님을
기억하는 것이
회개의 진정한
첫걸음이다.
모든 사랑은
회개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음과
하느님을 떠나감을
아프게 회개한다.
마침내 일어나
하느님께로
발길을 옮긴다.
참된 회개로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된다.
회개하는
사람만이
사랑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작은 아들
큰 아들
모두 기쁘게
아버지
사랑을 만난다.
언제나
더 많은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잃어보아야
더 소중한 것을
다시
보게된다.
자기를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께로
돌아설 수 없다.
망설임은
회개가
아니다.
가장 빛나는
선택의 실천인
회개로
우리는 다시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되었다.
가장 소중한
하느님 사랑으로
다시 돌아가는
사순이다.
우리에게는
돌아갈
아버지 집이
있다.
오염된 사랑을
치유하시듯
가장 좋은 옷을
다시금
손에는 반지를
발에는 신발을
다시 주시는
아버지시다.
이 사랑을
만나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자신이다.
회개해야 할
작은 아들과
큰 아들은
우리자신을
대변한다.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이
다시 열리는
회개의 삶이다.
먼저
회개의 문을
활짝 열어 주시는
하느님께서
기쁜 회개를
보여주신다.
하느님께서
잃었던
우리자신을
도로 찾으셨다.
가장 좋은
잔치가
시작되었다.
하느님과
노래하며
춤추는
회개의
기쁨이다.
다시 아파하신
하느님께서
진실로
기뻐하신다.
기뻐하시는
이것이 참된
회개이다.
말씀 나누기 - 사순 제4주일-화해의 사절인 우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3월 29일 사순 제4주간 화요일 (0) | 2022.03.29 |
---|---|
2022년 3월 28일 사순 제4주간 월요일 (0) | 2022.03.28 |
2022년 3월 26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0) | 2022.03.26 |
2022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0) | 2022.03.25 |
2022년 3월 24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0) | 2022.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