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24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2. 3. 24. 06:22

 2022년 3월 24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서 싸우면 쓰러지게 마련이고

한 집안도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망하는 법이다.

너희는 내가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하는데

만일 사탄이 갈라져서 서로 싸우면

그 나라가 어떻게 유지 되겠느냐?”

(루가 11,14-23)


“Every kingdom divided against itself will be laid waste
and house will fall against house.
And if Satan is divided against himself, 
how will his kingdom stand?
For you say that it is by Beelzebul that I drive out demons.
If I, then, drive out demons by Beelzebul,
by whom do your own people drive them ou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백성에게, 주님께서 명령하신 길만 온전히 걸으면 잘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당신을 반대하는 자고, 당신과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요즘에는 고속도로 요금소를 지날 때, 거의 모든 차가 하이패스 차선으로 지나갑니다. 하이패스 차선으로 지나가면 자동으로 정산되기에, 훨씬 빨리 통과할 수가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분의 차를 탔는데, 하이패스 카드가 없다면서 고속도로 요금 징수원이 있는 차선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요금과 함께 차에 있던 귤 두 개를 건네면서 “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이패스 구간이 없어서 무조건 요구 징수원을 만났는데, 요즘에는 하이패스 구간으로 다니다 보니 징수원을 만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나누던 정도 사라지고 세상이 삭막해졌다는 생각에, 하이패스 구간을 피해 징수원에게 조그마한 것을 건네며 옛날의 좋은 점을 느끼려고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전의 것이 무조건 다 나쁜 것일까요? 새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좋은 것도 많고, 지금을 사는 커다란 힘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좋은 것은 계속 지키고, 나쁜 것은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의 사랑을 떠올려 봅니다.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지금을 사는 데 커다란 힘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치 어리석음의 표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에서 이렇게 남들에게 주기만 해서는 어떻게 현명하게 살 수 있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행복을 느끼며 잘 사는 사람은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예수님의 모습에 백성들은 경탄합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설득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행위가 이방인들 사이에서 성행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를 배격했었기 때문입니다.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내쫓는다는 논리는 억지 이론입니다. 만일 반대자의 말대로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는 것이 자기들의 나라인 악의 나라를 멸망시킨다는 것인데 자기가 자기 나라를 멸망시키겠습니까? 사탄의 적대자는 하느님입니다. 사탄은 절대로 악과 싸우지 않습니다.

또한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말이냐?”라고 말씀하시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도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 행위를 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도 마귀를 쫓아내니,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탄과 예수님 사이에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악과 선 사이에 중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싸움에서 예수님의 편에 들지 않는 사람은 사탄의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 편에 서는 것, 즉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장 큰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속도를 줄이고 인생을 즐겨라. 너무 빨리 가다 보면 놓치는 것은 주위 경관뿐이 아니다. 어디로 왜 가는지도 모르게 된다(에디 캔터).

 악령의 힘으로도 병을 고칠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5sTUoagLPrE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자 유대 지도자들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마귀의 힘을 빌려 병이 치유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진화론을 믿으면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게 됩니다. 만약 저절로 생명이 생겨나고 저절로 진화하여 고등동물이 된다면 그렇게 하시기 위해 당신이 사용하신 손가락, 곧 성령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있으나 마나 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없었던 뼈가 생겨나고 순식간에 암이 사라지고 고사한 부분에 새살이 돋아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힘일 뿐입니다. 세상에 창조자는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인간은 시간이 지나며 늙고 병들고 썩어갑니다. 인간도 이런 상황인데 어떻게 인간보다 더 수준이 낮은 사탄이나 마귀가 창조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악마를 섬기는 행위가 됩니다. 사실 유대인들이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하며 마귀에게도 힘이 있다고 말할 때 이미 이들은 사탄을 숭배하는 자들임을 스스로 고백한 것입니다. 

  

    얼마 전 JTBC 뉴스에 뇌성마비 장애인인 20대 여성 A씨가 허경영 대표에게 성추행과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인터뷰가 보도되었습니다. A씨는 “허 대표에게 치료받으면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허 대표가 운영하는 경기도 양주 ‘하늘궁’을 찾았습니다. 

     

    A씨는 이곳에서 허 대표가 ‘에너지 치료’를 이유로 폭행과 성추행을 저질렀다고 폭로했습니다. 그녀는 “뇌성마비라서 머리 쪽에 혈관을 누른다는 목적으로 제 뺨과 코 등 얼굴 전체를 내리쳤다”라면서 “무섭고 고통스러워 눈물을 흘렸는데 독소를 다 빼내야 한다고 했다”라고 당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이어 A씨는 “어깨·허리·골반·허벅지 안·종아리 등 제 몸 중에서 안 만진 곳이 없을 정도로 온몸을 다 만졌다”라고 주장했습니다. A씨는 불쾌감을 느꼈지만, 치료 전 나중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미리 썼기 때문에 항의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고통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A씨는 사건 열흘 뒤 인터넷 동아리에 피해 내용이 담긴 글을 올렸고, 다음날 허 대표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밝혔습니다. 전화 녹취록에 따르면, 당시 허 대표는 “빨리 고쳐보려고 했는데 너무한 것 같다. 진짜 미안하다”라며 “손가락 끝으로 혈을 자극해서 뇌 사상 하부를 좀 이렇게 고치는 건데, 효과를 본 사람은 금방 고쳐진다”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 동아리에 올린) 글을 우선 좀 내려줘야 해. 선거 때라서”라고 요구했습니다.

  

    이후에도 A씨가 해당 글을 내리지 않자, 하늘궁 관계자이자 허 대표의 지지자 B씨가 피해 여성 A씨를 찾아와 “좀 봐달라”며 회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녹취록에 따르면, B씨는 A씨에게 “이 분이 대통령이 되셔야 국민을 살린다. 1억 원씩을 받아야 대한민국 개인들이 빚진 것을 다 갚는다”라면서 “매달 150만 원씩 받아야 어려운 사람들이 산다”라고 말했습니다.

    이후 A씨는 허 대표를 고소하기 위해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각서를 작성했기 때문에 수사가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고 어려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그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다고도 말합니다. 

     

    여기에서 더 문제는 A씨와 그의 어머니입니다.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피조물의 병을 고칠 수는 없습니다. 영화 같은 곳에서 보면 자기 영혼을 팔아 성공을 얻거나 병이 고쳐지고, 힘을 얻거나 외모가 변하는 등의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악령은 이미 피조물 중에서도 최하위로 떨어진 존재입니다. 그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습니다. 만약 그것들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 자체로 하느님의 손가락인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가끔은 신기한 일을 일으키는 것 같은 경우를 봅니다. 분명히 속이는 것 같은데 그것이 성령의 힘인 것도 같습니다. 이럴 때 구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아주 단순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단편영화가 있습니다. 조금 각색해서 말씀드립니다. 이미 오염으로 지구가 멸망한 뒤의 미래입니다. 어떤 사이보그가 잠에서 깨어납니다. 자신이 왜 사이보그가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분명 그는 인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지워져 있습니다. 자기 손과 얼굴을 보고 혼란스러워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인간들의 명령에 따라 일해야 합니다. 그러다 주인공 로봇은 지쳐 쓰러집니다. 

 

     다시 눈을 뜨니 어디엔가 묶여있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와 여자가 자신 앞에 있습니다. 남자는 우주복을 입은 여자에게 이 로봇을 돌로 치라고 합니다. 공기가 오염되었기에 여자는 우주복을 입고 있지만 남자는 입지 않았습니다. 여자는 그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여자는 남자에게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남자는 치유도 해 주고 자신들이 사는 땅에서 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제야 로봇은 기억해냅니다. 그 돌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자기 여동생이었음을. 로봇은 여동생을 불러보지만, 여동생은 잠깐 멈칫할 뿐 자신의 오빠를 사정없이 내려칩니다. 사이보그가 된 오빠는 그렇게 폐기됩니다. 

    여자는 이제 완전히 그 교주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주는 여자가 숨을 쉴 수 있게 해 줍니다. 숨이 쉬어집니다. 맑은 공기를 마십니다. 교주는 또 여자의 상처 난 얼굴을 치유해 줍니다. 기적처럼 치유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그곳에서 공기를 마시며 농사를 짓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다 마치고 교주는 자신만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곳에는 엄청난 기계가 있고 그는 인간의 껍데기를 벗고 기계를 흠숭합니다. 그는 인간이 아니고 완전한 기계였습니다.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인데, 기계가 인간 모습을 하고 오히려 인간을 기계처럼 만들어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기계가 된 인간은 그렇게 종살이하고 또 형제들에 의해 폐기됩니다. 

  

    어떤 인간도, 더군다나 마귀들도 기적을 할 수 없습니다. 기적을 일으킨다면 하느님입니다. 그렇게 보인다면 다 속임수입니다. 인간이 진화할 수도 있다는 잘못된 믿음이, 인간이나 마귀가 치유 기적을 할 수 있고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다는 헛된 상상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이 인간을 그것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그래도 그럴듯하게 속여서 기적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떻게 보면 될까요? 위 허경영 씨의 경우는 어떤가요? 성령한테서 오는 것이라면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 않습니다. 위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를 죽여가며 받는 성령은 없습니다. 다 속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나는 너희 하느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_h-uc_gqpas

 -조재형신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러시아에게는 우크라이나 침공의 명분이 없었습니다. 비록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에 비해서 군사력이 약하지만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미국을 비롯해서 많은 나라들이 러시아에 대한 경제 재제를 결의하였습니다. 한국도 러시아에 대한 경제 재제에 동참하기로 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이 부당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침공이 용인될 경우 강대국들에 의한 약소국에 대한 침략이 계속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럽의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비록 러시아에게 군사적으로는 열세이지만 우크라이나는 국제사회의 지원과 자국민들의 애국심으로 지금의 어려움을 잘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러시아도 부당한 침공을 중단하고, 협상을 통해서 새로운 평화와 질서를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국제사회의 지원도 분명 한계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이 오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국가 지도자의 역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지구별에 잠시 머물다가는 나그네인데 왜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기심, 이기심, 욕심, 교만이 만들어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모습입니다. 성서를 읽어보면 인간이 가지는 ‘아픈 상처’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지만 마치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것입니다. 더 채우려고 하는 욕심이며, 남의 성공을 부러워하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카인은 사랑하는 동생을 죽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느님께서 동생의 제물을 좋아했는지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동생만 없어지면 하느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받아 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살인은 ‘시기와 질투’가 원인이었습니다. 사울은 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졌다면 다윗은 더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을 것입니다. 사울의 시기는 본인은 물론 본인의 가족들까지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았습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왕이었고, 많은 포도밭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욕심 때문에 나봇의 포도밭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결국 아합 왕은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전부를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권위를 알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그동안 누렸던 권위를 빼앗길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 역시 시기와 질투가 초래한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하늘나라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서 불평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섬기는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제자가 되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떡고물’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괴로웠던 그러나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내려놓으라고 하셨던 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던 분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이 진리하고 하였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자연, 신화, 이성’의 옷을 굳이 입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면 ‘진리’는 언제나 느낄 수 있고,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하느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했던 말씀과 표징 그리고 죽었지만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습관은 습관을 통해서만 고쳐집니다.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면, 나쁜 습관은 ‘저절로’ 물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좋은 습관을 통해서 악의 세력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므리바에서처럼, 마싸의 그날 광야에서처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거기에서 너희 조상들은 나를 시험하였고, 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떠보았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길만 온전히 걸읍시다!

 -양승국신부-

 

주님께서 총애하셨던 이스라엘 백성과 당신 사이의 관계를 묵상하다 보면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둘 사이의 관계가 때로 자상한 아버지와 막 나가는 막내아들 사이 같습니다. 또 어쩌다 보면 착하고 충실한 남편과 지속적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리는 불충실하고 부도덕한 아내 사이 같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라보시는 그 눈길, 그 마음은 그야말로 절절합니다. 사랑을 넘어섭니다. 결국 애증(愛憎), 사랑하기에 미워하고 증오합니다. 주님 당신만 바라봐줬으면 좋겠는데,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다른 곳으로 눈길을 돌립니다. 가지 말아야 할 엉뚱한 길로 샙니다. 아무리 돌아오라 외쳐도 귀를 막습니다. 그렇게 멀리멀리 떠나갑니다. 주님의 마음은 하염없이 무너져버립니다. 그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져 너덜거립니다. 그러나 너무도 사랑하기에 마냥 인내하십니다. 

 

그러다 도저히 참다 참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을 때, 즉 참을성의 임계점에 도달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이번 한 번만 더 참아주자, 또다시 기회를 주지만, 끝끝내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윤리·도덕적 타락을 거듭하고 돌아올 줄 모릅니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인내의 달인이시죠. 진노하시고 대폭발하시기 전 또 다른 기회를 주십니다. 당신을 대신한 전령, 예언자들을 보냅니다. 이스라엘의 악행을 낱낱이 고백하며 죽음의 길에서 돌아서라는 강경한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그런 주님의 무한한 인내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막습니다. 이미 익숙해져 버린 악한 길, 우상숭배의 길, 타락의 길, 죽음의 길,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그저 직진할 따름입니다.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해 걸어갑니다. 

 

이윽고 주님의 거룩한 진노가 시작됩니다. 배신과 불충실에 따른 응분의 조치가 내려집니다. 철저하게 파괴되고 도륙됩니다. 낯설고 머나먼 땅으로 유배를 끌려가고, 길고 긴 종살이가 계속됩니다. 

 

그런 가련한 이스라엘의 모습 앞에 또다시 주님의 마음이 찢어집니다. 다시 한번 새롭게 관계를 시작하자며 새 삶의 기회를 주십니다. 다시금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복원시켜주십니다.

  

이것이 태초부터 지금까지 반복되어온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역사입니다.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 더 나아가 주님과 우리 사이에 되풀이되어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는 엄청나거나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길만 온전히 걷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입니다. 사악하고 완고한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뻣뻣해진 목을 부드럽게 한 후 주님께, 그리고 이웃들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완고한 마음에 경종을 울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목을 뻣뻣이 세우고 고약하게 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전해주며,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신적 권능에 오히려 적대하며 악담을 퍼붓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두 개의 중심이 되는 동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말을 들어라” 라고 할 때 '들어라'라는 동사와 “너희에게 명령하는 길을 온전히 걸어라”라고 할 때 '걸어라'라는 동사입니다.

이 두 동사의 표본, 곧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걷는 것의 표본은 오늘 화답송에 나오는 '양 떼'입니다.

곧 양은 목자의 말을 알아듣고 그의 말을 따라 걷는 이의 표상입니다.

 

한편 그 반대의 표상에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벙어리 마귀'가 있습니다.

벙어리 마귀는 말씀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여 말하지 못하게 하는 마귀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따라 걷지 못하게 하고 말씀의 실현을 훼방하는 방해꾼입니다.

 

이 방해꾼은 제1독서에서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 그리고 화답송에서의 '무딘 마음'의 표상입니다.

곧 이들은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말, 곧 자신의 생각이라는 우상을 따라 걷는 이들의 표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쫒아내심으로써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놀라워하면서도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예수님께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고 악담으로 대적하면서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모순을 반박하시면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이는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낸 사실이 단지 하나의 기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가락, 곧 하느님 권능의 임재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임재를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그 뜻이 이루어지는 하늘나라의 실현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말씀이신 예수님과 더불어 우리 안에서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만약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안에 말씀을 듣고도 따라 걷지 못하게 하는 완고한 무딘 마음이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고집스런 마음, 목을 뻣뻣이 세우는 고약한 마음이 있어 주님의 말씀이 아닌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따라 걷고 있지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는 '양 떼'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화답송에서 시편 작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그분 목장의 백성, 그분 손이 이끄시는 양 떼이로세”

(시편 95,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

(루카 11,20)

 

주님!

제 안에는 당신 형상의 빈자리가 있습니다.

오로지 임자이신 당신만이 채울 수 있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제 안에 계시오니 당신의 나라를 드러내소서!

제 영혼이 당신의 성전이오니 당신의 거룩함을 드러내소서!

아멘.

「어중간은 없다」

 -반영억신부-


‘두개의 깃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깃발이고, 하나는 마귀두목 베엘제불의 깃발입니다. 둘 중에 선택하라면 어느 쪽을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선택하면 부귀영화나 명예, 매혹적이고 달콤한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가난, 업신여김과 모욕, 때로는 박해와 순교까지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도 주님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매순간 선택의 삶입니다.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 어중간은 없습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세상에서 안전한 처세술이 될 수 있지만, 주님의 자녀로서 자세는 아닙니다.

 

묵시록을 보면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버리겠다”(묵시4,15-16).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결단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귀를 선택해야 하는가? 아니면 주님을 선택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한 답이지만 삶의 모습은 여전히 이해타산에 휘둘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 편에 서는, 그리고 모아들이는 노력을 하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11,17). 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가정도, 공동체도 어떤 모임도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도록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다면 고쳐야 하고 내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는 열린 마음의 눈을 떠야 하고, 시기와 질투의 마음이 있다면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의 넉넉함과 포용할 수 있는 큰 품을 키워야 합니다. 말 한마디라도 위로가 되고 기쁨과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그러나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실천이 없다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고 주님의 편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집을 지키기 위해서 사실을 바꾸고, 때로는 거짓된 소문을 퍼뜨리고, 진실에 눈을 감아버립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을 마귀의 패거리로 몰아붙이던 사람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목이 뻣뻣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완고함이 쌓이면 마음속에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거짓 속에 묻힌 마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어느 신부님께서 마음을 고쳐먹은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하시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나름대로 혼자서 열심히 지냈답니다. 주교님의 사목방침에 구애받지 않고 이런저런 사람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독불 장군식으로 지내다가 성경말씀이 가슴깊이 다가왔는데 루카복음 7장3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신부님은 어느 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마음을 바꾸었으며 비로소 자유와 해방을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십시오’(시편95,1-2).

 

가끔 세상의 정치적 이야기를 꺼내면 사람들이 말합니다. “신부님께서는 여당이십니까? 야당이십니까?” 그러면 말합니다. 저는 ‘천주당’입니다. 하느님 앞에 서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송영진신부-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이 말씀은 ‘편 가르기’를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 구원과 생명은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1티모 2,5).”

구원과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만’ 믿어야 하고,

‘예수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입니다.

(그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 자입니다.)

“나를 반대하는 자, 흩어 버리는 자”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받기를 거부하는 자입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은, 또는 받으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것은,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받으려고 하지 않으면 못 받게 됩니다.>

또 이 말씀은, 구원과 생명을 얻는 일에는 중간 지대도 없고,

중립도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안’이 아니면 ‘밖’입니다.

구원이 아니면 멸망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영원한 죽음에 빠집니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 있는 것도 아닌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이 말은 ‘선’과 ‘악’의 싸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 싸움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선의 편’에 서지 않으면 ‘악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중립을 지키는 것은 ‘악의 ’편‘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악의 세력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압하는데도 중립을 지킨다면서

그것을 보고만 있으면, 그것은 악의 세력을 도와주는 일이 될 뿐입니다.>

마귀들을 상대로 한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자기의 추종자가 되기를 바라지만,

추종자가 되지 않더라도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는 것도 좋아합니다.

예수님과 사탄 사이의 싸움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은

사탄이 바라는 대로 하는 것이고, 사실상 사탄 편에 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은, 사탄과 싸우는 예수님을 반대함으로써

사실상 사탄 편에 선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은 절대로 사탄 편이 아니라고 주장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그 일은 인간을 ‘죄와 악’의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일에

직접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란 군중 속에서

몇 명이나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겠지만, 놀라기만 하고,

즉 신기하게 생각하기만 하고, 예수님을 안 믿은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은 사람들입니다(마르 3,29).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했다는 말은,

정말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마귀들을 쫓아냈다면 그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했다는 뜻입니다.

베엘제불의 힘으로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방한 자들이나 표징을 요구한 자들은

사탄을 숭배한 자들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사탄 편에 선 자들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반대편에 섬으로써, 사탄이 바라는 대로 행동을 했고,

결과적으로 사탄 편에 선 자들이 되었습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루카 11,21-22).”

 

여기서 ‘힘센 자’는 인간들보다 더 힘센 자, 즉 사탄입니다.

‘더 힘센 자’는 힘센 자보다(사탄보다) 더 힘센 자, 즉 예수님입니다.

사람의 힘만으로는 마귀들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들은 예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탄과 그 부하 마귀들을 물리치려면

예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마르 9,29).

<그것들은 무조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합니다.

만일에 복종하지 않으면? 그러면 지옥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원래 지옥은 사탄과 마귀들을 가두어 놓는 감옥입니다(묵시 20,7).

마귀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무서워합니다(루카 8,31).>

신앙인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기도하면서, ‘악의 세력’에 맞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 ‘악의 세력’에는 ‘마귀들의 세력’도 있고,

‘악한 인간들의 세력’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서면 망하고 집들도 무너진다."(루카 11, 17)

-한상우신부-

갈림길에
서 있는
우리의 신앙을
반성한다.

단 한번도
예수님 편에
서지 않았다.

단 한번도
일치에
속한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내 뜻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벗어나지 못한
의심의
연속이다.

필요할 때만
주님을 찾았다.

거듭되는
분열의 삶이다.

믿음과 무관한
삶이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
주님께
돌아서야 한다.

주님께서
만들어가시는
온전한 일치의
평화이다.

제정신으로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다.

믿음이 잘린
마음은
너무 쉽게
무너진다.

마음을
살리는 삶은
주님과 함께
마음을
모아들이는
삶이다.

마음을 모아
흩어진
이마음을
봉헌한다.

이렇듯 신앙은
허비할
시간이 아니다.

모욕과 배척의
마음까지
정화하여 주시는
주님이시다.

헛되이
살아야 할
삶이 결코
아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가
제정신으로
살지 않으면

한 순간에
망하고
한 순간에
무너지는
어리석은
집들같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오는
봄처럼
희망은
있다.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
사순이다.

정신이 썩으면
모든 것은
다 썩는다.

온전한 정신으로
다시 살게하시는
주님의 진정한
치유를 우리는
참으로 믿는다.

치유의 힘은
오늘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모아들임의
은총이다.

모래같이
흩어 버리는
악순환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간절히 주님께
기도드린다.

온전한 정신의
우리들이 되기를
애절하게 기도한다.

 하느님을 등지지만 않으면

 -김찬선신부-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오늘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마침 그제부터 클라라 수녀님들 특강을 위해 이곳 제주에 와 있는 저는

수녀원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다미아노 십자가 앞에서 이런 묵상이 되었습니다.

 

내 앞에 무엇이 있나?

걱정이 있나? 기도가 있나?

 

내 앞에 무엇이 있나“

염려가 있나? 사랑이 있나?

 

내 앞에 누가 있나?

사람이 있나? 하느님이 있나?

 

내 앞에 걱정이 있어도 좋다.

기도가 그 너머에 있으면 걱정도 기도가 된다.

 

내 앞에 염려가 있어도 좋다.

사랑이 그 너머에 있으면 염려도 사랑이 된다.

 

내 앞에 사람이 있어도 좋다.

하느님이 그 너머에 계시면 사람도 하느님의 현현이다.

 

하느님을 등지지만 않으면 된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3월 11일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