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3일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가장 작은 계명 중에
하나라도 스스로 어기거나,
어기도록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다.
(마태 5,17-19)
Whoever breaks one of the least of these commandments
and teaches others to do so
will be called least in the Kingdom of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규정과 법규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기 삶이 평범하길 바라십니까? 아니면 특별하길 바라십니까?
어렸을 때, 제 삶이 아주 특별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했었습니다. 사제품을 준비하면서도 특별한 사제가 되기를 희망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음에 오히려 감사의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우리의 시간 대부분은 아주 특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매일 반복되는 삶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품는 마음도 그렇게 특별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마음을 품는데, 이 역시 모두가 품는 평범한 마음입니다.
사실 특별함이란 없는 것이 아닐까요? 단지 특별하기를 바라는 막연한 마음 때문에, 내 안에 욕심과 이기심이 더 커졌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 특별함에 신경 쓰지 않았을 때, 비로소 자유로울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지금 이 순간에 열심히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는 이 순간에 우리가 하는 그 모든 것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별함만을 바라보면 ‘지금’이라는 진짜 우리의 삶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인간 생활의 기틀이 될 수 있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신명 4,6)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이 율법을 기초로 율법학자들이 613개의 규율로 만들어서 온 백성이 지키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오랫동안 시행되면서 율법의 기본 정신을 떠나 자질구레한 외부 사항에만 집착하는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실천보다 자기들이 만든 세부 규정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기본 정신을 되살리고 이것을 보안하고 완성하러 오셨음을 천명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학자들은 율법서에서 중대한 계명과 가벼운 계명을 구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작은 계명 하나라도 지키는 것이 하느님 나라의 요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이렇게 작은 계명을 지키고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계명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일상 안에서 지켜야 할 작은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특별한 사랑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평범한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먼 훗날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지킬 수 있으며 또 지켜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은 계명의 실천이 우리를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 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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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마음 속 아주 작은 죄까지도 짓지 않을 수 있을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ViFy_jVuXC4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율법의 차이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의로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마음’까지도 통제할 수 있는 율법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 바로 당신 자신이십니다. 그래야 아주 작은 율법 조항까지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일단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나약함은 그것을 누를 수 있는 ‘법’으로만 통제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인권침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곳곳의 CCTV는 범죄율을 낮추는 데 큰 몫을 한다는 것은 수치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를 지켜보는 ‘눈’으로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2010)에서 어머니의 꼭두각시로 어머니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불쌍한 여자 주인공이 나옵니다. 그녀는 외적으로는 항상 어머니라는 CCTV 때문에 통제되어 살지만, 내적으로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잠을 잘 때 엄마가 절대 보아서는 안 되는 음란한 행위를 합니다. 그러다 눈을 뜨니 엄마가 지켜보고 있는 것에 깜짝 놀랍니다.
다행히 이것은 꿈이었습니다. 엄마가 꿈에서까지 자신을 지켜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아주 작은 계명입니다. 자신의 속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아주 작은 계명이 더 중요합니다. 작은 것으로부터 댐이 무너집니다. 사탄은 우리의 아주 작은 욕구나 생각에 침투하여 결국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안 좋은 의미로 나오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모셔서 우리 생각과 감정, 욕구까지 지켜보시는 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어긋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결국 ‘욕구’ 이야기를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결국 화만 내어도 살인하는 것이고, 음탕한 마음만 품어도 간음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작은 것이라도 흘려버리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욕구까지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몸과 생각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욕구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에 CCTV를 달면 됩니다.
그런데 그 CCTV가 남을 훔쳐보는 사람의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나의 마음에서 그러한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더 좋아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법’을 주신 그리스도께서 보실 수 있도록 그분께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내 마음을 보도록 마음을 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내 마음을 주고 상대의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준다는 말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준다는 말과 같습니다.
컴퓨터 게임 스토리 중 ‘거짓말쟁이 공주와 눈먼 왕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늑대는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달을 보며 아름다운 노래를 할 때 그 노랫소리에 끌려 왕자가 다가왔습니다. 늑대는 왕자를 잡아먹을 수 있었지만 자신에게 손뼉을 쳐 주는 바람에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늑대가 자기를 보기 위해 언덕을 기어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놀라고 당황한 늑대는 팔을 휘둘렀고 왕자는 그만 눈에 큰 상처를 입고 굴러떨어졌습니다. 왕자는 눈이 보이지 않아 왕권을 이어받을 수 없었고 탑에 갇혀 살게 됩니다.
자신의 노랫소리에 유일하게 박수를 보낸 왕자가 그렇게 있는 것을 알게 된 늑대는 왕자의 눈을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숲속의 마녀를 찾아갑니다. 자신을 공주로 만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왕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녀는 그 대가로 늑대의 노랫소리를 원했습니다. 늑대는 노래를 잃고 공주가 됩니다. 그러나 달빛을 받으면 다시 늑대가 되어야 했습니다.
공주는 몰래 탑에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왕자에게 눈을 다시 뜨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왕자는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 주던 공주임을 알고 그녀를 따라나섭니다. 공주는 슬퍼하는 왕자를 위해 가는 길에 꽃을 꺾어줍니다. 몇 번 달빛을 받아 늑대로 변했지만, 왕자는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왕자는 노래를 불러달라 했습니다. 공주는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목이 쉬었다며 핑계를 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벽에서 왕자가 미끄러져 떨어지려 할 때 공주가 손을 내밀어 잡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달빛이 비쳐 공주의 손이 늑대의 손으로 바뀌었습니다. 왕자는 공주가 자기 눈을 잃게 만든 장본인임을 알고 공주에게 거짓말쟁이 괴물이라고 소리치고 손을 놓았습니다. 왕자는 굴러떨어졌고 왕자가 가지고 있던 불 때문에 숲에 불길이 일었습니다. 늑대는 불이 무서웠고 또 괴물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래도 왕자를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불을 헤치고 내려가 왕자를 구합니다.
드디어 마녀에게 도착한 공주는 마녀에게 왕자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마녀는 그 대가로 왕자에 대한 기억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다시 늑대로 돌아가야 하고 노랫소리도 들려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왕자는 말렸지만, 공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왕궁에 돌아온 왕자는 밤마다 늑대의 못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늑대의 노랫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올라갔습니다. 늑대는 손을 휘둘러 인간을 치려 했습니다. 그런데 왕자는 꽃을 한 다발 내밀었습니다. 무언가 가슴 저 밑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 같았습니다. 늑대는 들었던 손으로 꽃을 받았습니다. 한없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늑대는 달을 향해 노래해 왔지만 이제 이 노래를 옆에 앚아 있는 인간을 위해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친구를 만든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상대의 심장에 자신의 CCTV를 설치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자는 자기 눈을 잃어 늑대의 가슴에 들어갔습니다. 늑대가 자신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늑대도 자기 피 흘림으로 왕자의 가슴에 들어갔습니다. 그에게 CCTV가 되어 그도 왕궁에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으로 들어가 그 사람을 사랑의 뜻대로 변하게 만드는 것은 ‘피’입니다. 마음은 마치 심장처럼 피로 움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못 박히시고 살과 피가 되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왕자와 늑대의 관계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면 이제 내가 그분을 위해 피를 흘릴 차례입니다. 그분을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것은 그분이 나의 마음에 CCTV를 달아준 것처럼 나도 이웃의 마음에 CCTV를 달아주는 것으로 성취됩니다.
김희아 씨가 자기 얼굴에 대해 자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예수님께서 더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는 이제 자신을 버린 어머니의 마음마저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주님의 마음을 보면 주님께서 내 마음을 보고 계심을 알고, 또 내가 마음을 볼 수 있게 되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보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을 때 마음으로 짓는 작은 죄도 짓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말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할수록 그 사람의 마음 안으로 들어갑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 이 모든 게 가능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아주 작은 죄까지도 없애시는 방법입니다.
하늘 나라의 큰 민족이 되는 길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j6lE1N-Vw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정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완성된 율법을 지키면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과 큰 민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본시 이 율법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계약의 조건으로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시고 보호해 주시는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율법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지켜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빛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만민에게로 퍼져나가기를 기대하셨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은 배타적이고 편협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하느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율법의 본 정신인 사랑을 가르치고 솔선수범하심으로써 율법을 완성하여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하늘 나라의 큰 민족이 되게끔 이끄시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이러한 뜻을 몰라보고 그분을 배척했기에 그분은 죽음을 당하실지언정, 이스라엘 민족 안에서 골라 뽑으신 열두 제자라도 하늘 나라의 큰 사람이 되게끔 양성하셨습니다. 그들이 주춧돌이 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서방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온 세상에 교회를 세웠고, 교회는 유다교의 바리사이즘을 배격하는 대신에 그리스적 사유를 받아들여 신앙을 뿌리로 하는 인간 이성을 꽃피우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일어난 서양 문명은 엉뚱하게도 무신론적인 경향을 다분히 띠고 말았습니다. 이에 대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현대 서양문명을 이렇게 평가하였습니다: “현대에 있어서 인류는 자신의 발명과 자신의 능력을 경탄하면서도 세계 발전의 현상, 우주 안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 개인 노력과 집단 노력의 의의, 사물과 인간의 궁극 목적 등에 관한 안타까운 문제들로 자주 번민하게 된다”(사목헌장, 3항).
실제로, 주로 논리-분석적 사고에 입각하여 형성된 서구 사상과 자연과학은 경이적인 현대의 과학 기술 문명을 창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만, 서구 세계에서 비롯된 과학 기술이 현대 물질문명을 급속하게 발달시켰지만, 백인들의 서구 문화권을 선진그룹으로 만들었을 뿐 인류를 정의롭고 평화롭게 건설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대희년을 맞이했을 때 그토록 간절하게 평화의 시대를 염원해 놓고도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강대국 간의 무도한 패권주의적 작태는,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 질서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심화와 분쟁 등 국제사회에서 엄청난 부조리와 불의 현상이 감소하기는커녕 날로 확산되기 때문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그리스도교의 본산이 되어 온 세계에 복음을 전해준 서구 세계에서 과거 이스라엘 민족이 지녔던 배타적이고 편협한 선민의식과 마찬가지로, 백인우월주의에 젖은 서구 중심적 선교방식으로 인하여 광범위한 세속화 현상, 무신론 사조, 신앙의 사사화 풍조 등을 야기시켜 자신들의 문화권조차도 복음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처럼 논리-분석적이라기보다는 직관-종합적으로 생각합니다. 합리적이기보다 직관적이고, 냉철하기보다 즉흥적이며, 활동적이기보다 수동적이고, 진취적이기보다 보수적이어서 서구 세계보다는 정적인 사회를 형성하는 대신에, 현실을 포괄적이고 신비적으로 관조하는 종교와 문화, 예술을 전개하는 동력이 되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공감과 매력을 불러일으키며 대유행하고 있는 한류의 바탕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깨닫고 발전시켜온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 즉, 제천의식과 경천사상 그리고 천손의식 덕분입니다. 제천의식(祭天儀式)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전례였고, 경천사상(敬天思想)은 그 전례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으며, 천손의식(天孫意識)이란 경천을 해야 하는 주체는 온 인류라는 자각이었습니다. 그러니 인류는 모두가 다 하느님의 자손이니 인간을 귀하고 존엄하게 여겨서 모두를 이롭게 해야 한다는 홍익인간 사상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 전통 신앙이 지난 시기에 불교와 유교 그리고 식민통치로 억압받으면서 전례도 사상도 의식도 발전시키지 못하여 주술과 역술 등의 무속으로 전락했으며 개개인의 길흉화복을 기원하는 상업적인 미신행사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여러 정치인들이나 기업인들도 주술과 역술에 의존하는가 하면, 이에 대한 반발로 서구적 사고방식에 젖은 지식인들은 전통 신앙을 무조건 백안시하는 경향이 다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통적인 하느님 신앙을 알고 또 토착화시키며 복음화시켜야 한다는 요청은 주술이나 역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천의식과 경천사상 그리고 천손의식으로 직관적이고 종합적으로 사유해 온 우리 민족의 종교적 심성 그 자체입니다. 그리하여 이 종교적 심성에 담긴 진리성을 깨닫게 해 주는 일, 이것이 우리 민족을 하늘 나라의 큰 민족이 되게 하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안전 불감증’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작은 것들을 무시하고, 작은 규정들을 어기면 당장은 편하지만 그것들이 쌓이면 큰 사고가 될 수 있고,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있었습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무리하게 구조변경을 했고, 그 결과 백화점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다쳤습니다. 건물이 무너질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침몰’이 있었습니다. 배와 함께 끝까지 남아서 아이들을 구조해야 할 선장은 도망치듯이 나오면서 배를 버렸습니다. 아이들을 구조해야할 해경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을 대피시킬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3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차가운 바다에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그때는 2014년 4월 16일 성주간 수요일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아파트의 신축현장에서 아파트가 붕괴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콘크리트가 단단히 굳은 다음 공사를 해야 하는데 굳지도 않은 상태에서 건물을 올렸고,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아파트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안전 불감증으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피해는 감당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처음 느끼는 것은 상당히 ‘느리다.’라는 것입니다. 한국은 상대적으로 모든 것이 상당히 ‘빠름’이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그것에 익숙해지면 여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접촉 사고로 수리를 할 때입니다. 한국에서는 1주일이면 모든 것이 해결 됩니다. 미국은 보험회사에서 검사하러 오는 것만 1주일이 걸리고, 자동차 수리를 마치면 1달 정도 걸립니다. 동네 공원에 있는 호수가 아름다웠습니다. 산보를 하면서 호수를 보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작년 초에 보수공사를 한다고 호수 둘레에 울타리를 설치했습니다. 보수공사의 내용은 호수의 분수를 옮기는 것이고, 둘레에 있는 무너진 석축을 보강하는 것입니다. 호수 안에 버려진 물건을 꺼내는 것입니다. 2달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1년이 지난 지금도 큰 진척이 없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영향도 있겠지만 올해는 예전의 아름다운 호수를 보면 좋겠습니다. 느린 것이 아쉬움은 있지만 느린 만큼 여유도 있고, 무엇보다 안전 불감증 때문에 낭패를 보는 경우는 적습니다.
운전에는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정해진 속도를 준수하고, 신호를 잘 따르고, 운전하면서 화를 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실 준법운전만 해도 운전을 잘 하는 것입니다. 과속 때문에, 신호를 지키지 않아서 사고를 내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면서 나의 안전과 타인의 안전을 고려하는 운전입니다. 운전하기 전날에는 가급적이면 술을 자제합니다. 장거리 운전을 하면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갖습니다. 과속하는 차가 있으면 먼저 가도록 자리를 비켜줍니다. 안전운전하는 사람은 앞에 가는 차와 뒤에 오는 차의 운전 상태까지도 살피면서 운전합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장애인을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는 분을 보았습니다. 봉성체를 위해서 차량 봉사하는 분도 보았습니다. 고장 난 차가 있으면 내려서 도와주는 분도 보았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운전은 누군가를 도와주고 먼 길 함께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이 가야할 겸손의 3단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운전의 3가지 모습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겸손의 3단계를 깊이 묵상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주일미사를 지키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율법 학자들이 연구하고, 지키려 했던 계명입니다. 이렇게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세상에서 큰 어려움 없이 살 수 있습니다. 다만 율법에 얽매여서 타인의 고통과 아픔을 보지 못한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서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입니다. 본당에서 실시하는 피정과 교육은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시간과 재물의 십일조를 충실하게 봉헌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자신을 자유롭게 하고, 신앙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이웃을 위한 사랑 때문에 가진 것을 모두 내주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유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 불릴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기도, 희생, 나눔, 봉사’를 충실하게 실천하여서 하느님 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작고 가난한 한 인간의 작은 외침, 절박한 부르짖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주님!
-양승국신부-
요즘 와서 더 많이 갖게 되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공동체나 기업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 큰 일, 큰 것도 중요하지만, 작은 직무, 작은 일도 정말 중요하고 소중하다는 생각 말입니다.
회사나 공동체 대표의 리더십도 중요하지요. 멀리 내다보는 안목과 경영 마인드도 필요합니다. 큰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척시키기 위한 임원이나 간부들의 고무와 격려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낮은 자리에서 세부적인 일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일선 직원들, 말단 사원들의 노고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조리사나 청소원, 시설관리자들의 조용하고 묵묵한 헌신도 필수적입니다.
저희집만 해도 그렇습니다. 피정객들이 찾아오시면, 잘 준비된 강의나 미사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맛갈진 식사와 깔끔히 정돈된 잠자리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렇듯 작은 것의 소중함을 잘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아주 강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오 복음 5장 19절)
크기로 따지면 이 세상 그 어떤 인물보다 크신 예수님이시지만 작은 것들, 작은 사람들, 작은 사건들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시며 지극한 관심과 사랑을 기울이시니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한 가난한 인간의 작은 외침, 절박한 부르짖음에도 귀 기울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상처 입은 한 영혼의 작은 상처에도 큰 연민과 측은지심을 지니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찮아 보이는 것들, 정말 작은 것들도 그분께는 아주 중요하고 가치 있다는 것 너무나 은혜롭지 않습니까? 나같이 보잘 것 없는 한 인간의 작은 고통도 그분께는 아픔이고 상처라는 사실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작은 계명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스쳐지나가는 작은 인연 하나라도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매일 되풀이되는 작은 일들, 작은 봉사, 작은 만남에 큰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결국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큰 것, 대단한 것도 중요시 여기지만 지극히 일상적인 것, 반복적인 것, 구체적인 것, 작은 것들에 대해서도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해나가야겠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 큰 사람, 대단한 사람들도 잘 대우하고 환대하지만 내 가장 가까운 가족, 형제, 이웃,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나누는 작고 소소한 일상들에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면 좋겠습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이 일어나도록 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셨습니다.
곧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습니다.
진정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
(마태 5,19)
이는 ‘먼저’ 계명을 ‘지키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안 것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렇게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말한 바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말합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계명을 안 이는 먼저 계명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가르치는 이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이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
(1요한 2,5)
그래서 그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소서.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반영억신부-
시골 본당 신부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성당으로 가고 있는데 앞에 트럭이 길을 막고 있었습니다. 왕복 1차선 길에서 얼마나 천천히 가던지,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추월해서는 안 되는 곳이지만 속도를 내어, 추월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경찰에 잡히고 말았습니다. 면허증을 주면서 “죄송합니다.” 하였더니 그분이 “신부님이시네요! 바쁘신가 보죠?” 하였습니다. 속이 상해서 “제가 잘못하였으니 딱지나 끊으시지요!” 말했더니 “그냥 가십시오. 다음부터는 천천히 다니십시오.” 하며 친절하게 보내주었습니다.
다음날이었습니다. 지역 관할 경찰간부 소양교육에 제가 강사로 초빙된 날입니다. 경찰서장을 비롯하여 70여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는 전날의 일을 서두로 꺼냈습니다. “제가 잘못을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냥 보내주셔서 부끄러움이 더 컸습니다. 정말 좋은 말을 하기는 쉽지만, 말한 대로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제가 잘못을 범하거든 꼭 벌점을 주십시오!”한바탕 웃고 나서야 강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가르치는 대로 행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부터 챙기는 모범을 보여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비록 작은 사람으로라도 하늘나라에 있게 됨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나는 과연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계명,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아는 것을 실천하고, 실천해야 하는 것을 이웃에 전해야 합니다. 진실로 사랑하면 의무이기에 앞서 자발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그리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실천의 완성』
-송영진신부-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이 미완성 상태여서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실천하는 일이 미완성 상태여서
그 ‘실천’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로마서에 나옵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여기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라는 말은, “사랑은 항상 빚으로 남아 있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무한한 사랑’에 끊임없이 사랑으로
응답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사랑 실천에 관해서 아무도 자기 마음대로
“이만큼 했으면 다 했다.” 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많이 해도 늘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라는 말은,
“사랑 실천은 율법 실천의 완성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또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들으면서 예수님께서 ‘율법과 예언서들’을(‘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폐지하시려는 것으로 오해했을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정결 예식을 지키지 않으신 일,
세리들과 어울려서 식사를 하신 일 등)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사랑’이었고,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본래의 정신대로 ‘완전하게’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신 일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완전하게 실천하라는 가르침들이었습니다.
1)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겉으로만 율법을 잘 지키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마음속으로는 형제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더라도
실제로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 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미워하는 것과 그 증오심을
겉으로 드러내는 분노와 모욕도 살인죄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21-22).
2) 위선자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을 하고,
기도를 하고, 단식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위선자들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사람의 속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위선자들이 하는 신심 행위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6,1.5.16).
그 경우에, 위선자들의 신심 행위는 ‘율법 실천의 미완성’이 아니라,
율법 실천을 아예 안 한 것입니다.
3)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또 이웃의 사정에는 관심도 없이,
자기가 복을 받는 것만 생각하는 신앙생활은 대단히 부족한 신앙생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1코린 13,1-3).
4) ‘말로만’ 사랑하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야고 2,15-16).
야고보서 저자는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합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만 하고 실천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즉 사랑이 아닙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이 말씀은, “하느님의 뜻은 영원히 변함없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의 구원, 그리고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마태 25,31-46).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 말씀은, 인간들 마음대로 하느님의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계명들은 전부 다 똑같이 중요하고, 전부 다 똑같이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나누어서,
‘작은 것’은 무시하고 안 지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큰 것’이라고 생각하는 계명들을 잘 지키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과(마태 22,37-40)
모순된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데, 모순이 아니고,
사실은 같은 가르침입니다.
(22장에 있는 ‘가장 큰 계명’이라는 표현은,
모든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큰 계명이라는 뜻이 아니라,
‘계명들의 근본정신’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계명들과 율법들의 ‘근본정신’입니다.)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무시하고 안 지킨 일의
대표적인 예가 ‘코르반 관행’입니다(마르 7,9-13).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계명들을 전부 다 ‘온 삶’으로 충실하게 실천한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 19)
-한상우신부-
문제의식을
던지게 된다.
스스로 지키고
가르치는 삶이
보편적인
진리로
드러나는 것이다.
실천의 중요성을
다시 깨닫게 되는
예수님의 사랑이다.
진리는
실천이다.
생활을
중심으로
펼쳐져야 한다.
우리 시대를
이끌 해법은
다름아닌
진실한 삶의
실천이다.
큰사람은
다름아닌
분열이 아닌
일치에
자신의 존재
전부를 바치는
사람이다.
큰사람이
절실히 필요한
우리 시대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모순과
이중성을
멈출 수 있는
길을 보여주시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생활방식은
절제와
사랑의
실천이다.
보다 나은
세상은
그냥 오지
않는다.
믿는 것을
실천함으로써
오는 것이며
완성되는
것이다.
우리 삶의
기준은
십자가를 지는
사랑에 있다.
십자가를 지는
생활의 현장이
곧 역사의
현장이 된다.
역사는
흐르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한 것은
없었다.
역사적
교훈에서
오히려
가치를
완성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들 마음
한가운데를
지나가시는
주님의 간절한
십자가이다.
우리 십자가의
사랑또한
분열과 상처가 아닌
배려의 참된
치유이길
간절히
기도드린다.
폐지는 쉬워도
완성은 어렵다.
어렵기에
빛나는
가치가 있다.
십자가는
어두울수록
별처럼 빛난다.
십자가에
큰사람이
있다.
말씀 나누기 - 사순 3주 수요일-무법천지여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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