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22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2. 3. 22. 06:22

2022년 3월 22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마태 18,21-35)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자르야는 주님의 자비를 거두지 말아 달라고 불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기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의 비유를 드시며,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코로나로 인해 해외여행에 제한이 생기면서 국내 여행을 하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해외 성지순례가 어려워 국내 성지순례를 많이 다니십니다. 성지순례 책자에 167곳의 국내 성지가 나오는데, 완주하고 나면 강복장과 묵주를 받을 수 있어서인지 더 순례하시는 분이 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이 순례자를 향한 시선이 좋지 않을 때를 종종 봅니다.

이들이 ‘찍기 순례’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스탬프를 책자에 찍어야 완주 표시를 할 수 있는데, 성지에서 전혀 기도하지 않고 스탬프만 찍고 다음 성지로 급하게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들처럼 ‘찍기 순례’를 해보았습니다. 스탬프만 찍고 휙 둘러보고 다음 성지로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모든 순례지를 열흘 만에 끝냈습니다(새벽 4시부터 저녁 8시까지 순례했습니다).

제대로 순례하지 않았다고 그래서 쓸모없는 시간 낭비만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온종일 주님과 성모님, 순교 성인·성녀들을 생각하며 살았기에 굳이 성당에 들어가지 않아도 행복한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에 모든 성지를 완주했을 때의 기쁨은 덤이었습니다. 이렇게 순례하는 것도 괜찮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을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특히 남의 신앙에 대해서는 절대로 ‘옳다, 틀리다’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 나름의 신앙을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감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남에 대한 모든 판단이 그렇습니다. 이 판단으로 남을 미워하고 단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기는 할까요?

구약시대의 율법에는 ‘눈은 눈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아라.’라는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수하지 말고 그 대신 용서하라는 새 윤리를 가르치십니다.

유다인들도 하느님의 자비를 생각하면서 남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까지 용서했지만 네 번 이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새 나라의 새 법에서는 몇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할지를 정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힘껏 잡아서 일곱 번을 생각했습니다. 일곱이라는 숫자는 성경에서 완전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일곱이라는 숫자가 완전수라면, 예수님께서 제시한 용서의 횟수는 베드로가 제시한 수를 강조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용서하는 데는 몇 번이라고 딱 끊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용서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은 그만큼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표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판단의 오류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새 나라의 새로운 법이었습니다. 판단과 단죄라는 세상의 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도 없는 용서를 통한 하느님 나라의 법을 따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유혹을 받아 쓰러진 곳이면 당신도 그 자리에서 쓰러질 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라(오스왈드 챔버스). 

 백 데나리온을 일만 탈렌트에 포함하느냐의 문제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SFIXKVW4Hps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무슨 연유에서인지 하루에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하느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참다가 못 참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용서는 끝이 없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만 탈렌트(하루 일당이 10만 원일 때 약 6조 원) 탕감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약 천만 원)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사실 6조 원의 빚을 탕감받았더라도 천만 원이 더 있어서 나쁜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이 종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자기의 것을 꾸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종의 것은 다 주인의 것입니다. 종이 꾸어준 천만 원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았던 6조 원 안에서 꾸어준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해 주시고 아드님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지워버리고 살 때 그 마음에는 다른 것이 새겨집니다. 바로 ‘불안’입니다. 나의 것을 빼앗길 것 같은 불안입니다. 그 불안함에 남이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용서할 수 없게 됩니다. 
  
    영화 ‘익스팅션-종의 구원자’(2018)에서 주인공 피터는 밤마다 악몽을 꿉니다. 자꾸 누군가가 자신들을 공격하는 꿈입니다. 피해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내 앨리스는 신경정신과에 가서 상담받아보라고 합니다. 그러나 피터는 그러면 직장에서 해고당할까 봐 선뜻 병원에 나서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일하다 쓰러져 가족 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으면서 병원을 찾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만난 어떤 사람은 피터가 수면장애가 있고 하늘에서 빛이 보이고 그것들이 사람을 공격하여 죽게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아맞힙니다. 이런 증상이 여러 명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실현됩니다. 하늘에 불빛들이 나타나고 세상을 초토화합니다. 외계인들의 침공입니다. 살아남은 몇몇은 지하로 대피합니다. 이 과정에서 아내 앨리스가 총에 맞아 상처를 입습니다. 이때 외계인 한 명이 생포되어 오는데 그 외계인이 수트를 벗자 그 안에는 한 젊은 사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계인이 아니라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여자를 살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전력이 부족하니 남편인 피터가 칼로 가슴의 전력을 나누면 여자가 살 수 있다는 이상한 말을 합니다. 피터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지만 어차피 아내가 죽어가기에 자신들을 침공한 그의 손에 맡겨보기로 합니다. 그가 아내의 상처 부위를 칼로 열었을 때 아내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였습니다. 그리고 피터도 가슴을 열어보니 기계입니다. 
  
    사실 지구에 살고 있던 모든 인간은 사이보그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만든 인간들을 몰아내고 기억을 삭제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을 몰아냈으며 그들의 땅에서 살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피터의 꿈에 자주 나타났던 것은 인간들을 몰아낼 때의 전쟁 기억입니다. 일부 사이보그들 안에서 그 기억이 완벽히 제거되지 못하여 그런 수면장애에 시달렸던 것입니다. 피터만이 그 기억이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 여겼고 덕분에 아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사이보그에게 지구를 빼앗겨 화성에 이주하여 살다가 다시 준비하여 지구를 찾으러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사람은 믿고 싶은 대로 믿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우리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창조주에게서 받은 모든 것을 잊고 삽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보니 그것들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저절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절로 수건에서 꽃이 나오거나 토끼가 나오게 하는 것은 마술이고 속임수입니다.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믿어버리면 이제 받은 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잃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을 미워하게까지 만들고 심지어 공격하게 합니다. 
  
    이 영화에서 사이보그 합성물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이 자신들을 만들었다는 기억을 지웠습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신들이 어디서 생겨났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불안함에 떨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피터와 그 가족들은 압니다. 끊임없이 우리가 창조되었음을 자유를 얻는다는 명목으로 지우며 살았기에 그렇게 불안해야만 했던 것을.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고 저절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 곧 부모의 피 흘림 없이는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이제 백 데나리온은 만 탈렌트 안에 들어갑니다. 어차피 우리가 잃는 모든 것은 받은 것 중의 극히 일부입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음을 믿는지 안 믿는지의 차이입니다. 내가 받은 만 탈렌트를 잊으면 내가 빼앗긴 백 데나리온은 온전히 나의 것이 되기에 용서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는 나에게 달렸습니다. 
  
    영화 ‘그레비티’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이혼 후 어린 딸까지 교통사고로 잃은 삶의 의욕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고로 우주공간으로 한없이 빨려 들어가는 라이언을 맷 코왈스키 박사는 목숨을 걸고 찾아서 데려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목숨을 잃고 맙니다. 결국 갖은 고생 끝에 라이언은 지구의 땅을 밟게 되고 새로운 희망으로 일어섭니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음을 기억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이제 자신이 잃은 결혼생활이나 딸은 자신이 받은 것의 일부가 됩니다. 그래서 견뎌낼 수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이언 하나 구하자고 수많은 베테랑 군인들이 희생했습니다. 그리고 라이언에게 부탁했습니다. 자신들의 몫까지 잘 살아달라고. 라이언은 그들의 몫까지 잘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죽기 직전에 많은 군인의 희생으로 살아난 라이언은 잘 살지 못할 수가 없었습니다. 덤으로 주어진 인생이었기에 잃는 걱정보다는 감사가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억이 잃는 두려움과 그로 인해 생기는 고통을 견디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들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 기억을 지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이제 백 데나리온으로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이 됩니다. 
  
    정신분석 전문의인 이무석 박사가 군대에서 군의관으로 근무할 때 한 자해하는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지 못하고 칼로 배를 그어 배에 수십 개의 칼자국이 있었습니다. 박사가 왜 자꾸 자해하느냐고 물으니 청년은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그냥 우주에 붕 떠 있는 느낌인데 이렇게 자해하고 피가 나고 쓰라린 아픔이 오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게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바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았음을 잊고 사는 사람의 상태입니다. 적어도 부모에게 사랑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해 살아야 할 의미를 잃은 것입니다. 자신의 것을 지켜야 하지만 그것은 너무 힘이 듭니다. 그냥 없애버리는 게 마음이 편합니다. 그래서 자해하며 아예 가진 것이 없게 만들고 싶습니다. 가진 것이 있으면 빼앗길까 봐 두렵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일만 탈렌트 안에 포함해야 합니다. 그래야 두려움 없이, 미움 없이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사 때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말씀은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너희는 내가 탕감해 준 일만 탈렌트를 기억하며 모든 것을 잃어도 감사할 줄 아는 삶을 살아라.”

 미움의 불가마 속에서 용서로 살아남기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kG5pqRp--A

오늘 독서에서는 아자르야가 하느님께 바친 기도 내용을 전해줍니다. 그는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임금의 눈에 들어 궁정 관리로 봉직하게 된 유다인 젊은이들 중의 하나로서 유다식 이름은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는 임금의 상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가마형에 처해지게 되자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리듯 청원하였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비단 우상숭배를 거절하기 위하여 바빌론 임금의 상에 절하지 않았다는 자기 변호의 말은 온데 간데 없고, 동족들이 지은 죄를 나열하고 있으며, 그것도 바빌론 유배 당시만이 아니라 그 이전에 그것도 남북에서 모두 지은 죄를 총괄하여 통회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개인의 청원기도가 아니라 동족의 죄를 고백하며 속죄를 청하는 중재기도의 성격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기도 내용이 담겨 있는 다니엘 예언서가 유배 이후에 쓰여진 성서임을 감안하면 절규에 가까운 아자르야의 중재기도와 불가마형에서도 살아남았다는 믿기 어려운 결과 등은 유배 당시의 실화를 기록했다기보다는 유배에서 돌아온 동족들에게 다시는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절실히 요청되는 민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신앙의 교훈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교훈적 성격은 오늘 복음에서 언급되는 용서라는 주제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음은 물론입니다. 

 

  먼저 이 주제를 꺼낸 베드로의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아마도 베드로는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한 것 같고, 그가 질문하면서 스스로 제시한 답변 즉 일곱 번이라는 횟수는 아마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베드로의 고민은 진정성을 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흔히 접하게 되는 이 문제에서 자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곱 번까지 갈 것도 없이 삼세 번에서 인내의 한계를 드러낼 사람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제간에 저질러지는 그 잘못이 중대한 행위일 경우에는 단 한 번의 잘못이라도 그 관계를 파탄낼 수도 있을 만큼 용납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입니다. 

 

  용서의 문제는 행위 이전에 마음의 문제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시대와 사회, 시간과 공간이라는 환경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누구나 자기의 마음이라는 또 다른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용서의 문제는 마음 다스리기의 문제입니다. 베드로는 질문을 잘못했습니다. 행위의 횟수를 여쭈어볼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에 대해 질문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도 마음 다스리기의 맥락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 마음 다스리기의 지혜에 있어서는 상호간의 상대적인 잘잘못을 따지는 판단이 중요하지 않고 그보다 먼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상정해 놓고 그 위에서 상호간의 관계를 살피는 일이 필요하다는 뜻에서 임금과 종의 비유를 말씀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 간에 백 데나리온씩의 빚을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넉 달치의 임금이 백 데나리온이니까 그 빚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 대해서는 저마다 만 탈렌트를 빚진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 차이가 무려 6천만 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저질러지는 잘못을 없던 것으로 하자고 무조건 참으라든가 잘못을 저질러도 좋다는 식으로 무분별하게 상호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역발상입니다. 우리가 백 데나리온 어치의 빚을 누군가에게 탕감해 주면 그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만 탈렌트 어치의 빚을 탕감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고 말입니다. 

 

  발상하기에 따라서 우리네 마음은 아자르야와 그 동료들이 던져진 불가마일 수도 있고 하느님께 받아들여진 처지로 인하여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형제가 잘못을 저질러서 내 마음이 증오와 미움으로 불타는 불가마가 되었다 해도 이 역발상을 통해서 마음을 다스리자면 그 불가마 속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로운 임금과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도 그 답변의 결론으로 마음을 거론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그래서 미움의 불이 타오르는 그 한가운데 우뚝 서서 우리도 아자르야처럼 우라 자신이 저지른 죄뿐만 아니라 동족이 저지른 죄들까지도 용서해 달라고, 그 속죄 청원의 표시로 서로 간에 더 너그럽고 자비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겠노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단 용서할 줄 아는 사람들로 거듭 날 뿐 아니라 우리를 세상에 지어내신 하느님을 믿고 섬길 줄 아는 세상으로 거룩하게 변화시키겠노라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불신의 불가마 속에서 빠져나와 믿음의 세상으로 나아갑시다. 

 -조재형신부-


러시아는 영토가 가장 큰 나라입니다지하자원도 많이 있습니다그럼에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마치 아합 왕이 자신의 포도원이 많이 있음에도 하나 밖에 없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 같습니다나봇은 힘이 없었습니다아합 왕은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나봇을 죽였습니다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서 아합 왕의 부당함을 이야기하게 하였습니다아합 왕에게 벌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국제사회는 러시아의 부당한 침공을 비난하고 있습니다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는 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입니다국제사회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 재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침공을 멈추고 평화와 질서를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물속에서 살아야 하는 장구벌레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물속에서 보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고영롱한 것 같았습니다그러나 물속에 있는 장구벌레들은 물 밖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잠자리가 되어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선배들은 물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그래서 물 밖의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하늘을 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알려 줄 수 없었습니다잠자리가 되면 반드시 물속으로 돌아와서 알려주리라고 결심한 장구벌레가 있었습니다하지만 잠자리가 되어서 물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물속의 장구벌레들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절대 포기하지 말고반드시 허물을 벗어버리고 하늘을 높이 나는 잠자리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늘의 세상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용서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처벌과 제재는 법과 규칙의 문제입니다사회는 이와 같은 법과 규칙이 있어야지 질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용서는 양심과 내적인 자유의 문제입니다처벌과 제재는 질서를 유지할 수는 있지만그것이 마음의 평화를 주거나상처를 치유해 주지는 못합니다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주기 때문에내적인 상처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용서는 물속의 장구벌레가 하늘을 나는 잠자리가 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용서 안에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양승국신부-

 

제자단의 대표로 살아가던 베드로 사도의 하루하루는 여간 팍팍한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스승님과 다른 제자들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수행하랴, 부족한 동료 제자들과 함께 보폭을 맞추랴, 상당히 힘겨웠을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 가운데 미운 사람도 생겼을 것입니다. 그 형제는 혹시 나중에 배반자가 된 유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자신을 ‘애제자’로 여기면서 수제자 베드로와 늘 경쟁, 대립 관계로 서 있던 요한 사도였을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는 뒤처지는 동료들,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던 경쟁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밉고 괘씸하던지 여러 번 다투기도 하고 감정이 폭발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도저히 홀로 해결이 안 되다 보니 예수님께 면담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개인 생각에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라고 생각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오 복음 18장 21절)

  

왜 베드로는 하필 7이라는 숫자를 내세웠을까요? 일곱 번이면 베드로 자신에게 있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큰 양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과 완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숫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을 요구하십니다. 일곱 번으로 부족하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보다 큰 마음을 지닐 것을 요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는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임을 강조하십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 큰 악성 종양을 하나 달고 산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그 종양은 우리의 육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적 건강까지 훼손시킵니다. 우리는 그 종양으로 인해 이웃도 괴롭고 자신도 괴로운 일종의 ‘지옥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실상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조금은 무리가 되는 것 같은 강한 요구를 우리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삼시 세끼 밥 먹듯이, 매 순간 숨을 쉬듯이, 그렇게 우리 이웃에 대한 용서를 통해, 나도 살고 그도 살며 하느님께는 영광을 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용서 안에 자비하신 하느님의 얼굴이 깃들어 있습니다. 용서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십니다. 형제끼리 일상적으로 주고받는 용서 안에 하느님 나라가 건설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용서라는 하느님의 초대, 혹은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용서를 통해 깊은 내면의 평화와 기쁨 속에 천국 같은 하루를 살 것인가? 아니면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글거리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불붙는 지옥 속에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의 결단에 달려있습니다.

  

용서가 힘겨울 때마다 그 숱한 우리의 죄와 배반을 끝까지 인내하시고 용서해 주신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분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장 바라시는 바는 우리에게 잘못을 저지른 이웃에 대한 쿨한 용서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이영근신부-


‘사순시기’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그 한편에는 '회개'가 있고, 또 다른 한편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제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는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마태 18,22)

 

이는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한 번 혹은 몇 번 해보고 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받아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무한히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그렇게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단지 ‘끝까지’ 용서하라고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를 깨우쳐주시고 그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그 답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줍니다.

곧 비유 속의 ‘악한 종’이 왜 자신에게 빚진 이를 용서하지 못했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비유 속의 임금은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의 빛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너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마태 18,32-33)

 

그렇습니다.

그 ‘악한 종’이 동료를 용서하지 못함은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한 데 있었습니다.

곧 ‘자신의 빚이 먼저 다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망각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용서를 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용서와 자비를 입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루에도 일흔 일곱 번까지 용서해야 하기에 앞서, 오히려 하루에도 일곱 번씩 일흔 번 용서받았음을 ‘먼저’ 감사드려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도 전에, 우리가 잘못을 고백하고 인정하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받았으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또한 이는 당신께서 하신 것처럼 용서하되, ‘먼저’ 용서하라고 그 방법도 가르쳐주십니다.

 

곧 형제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용서를 청하지 않는다고 해도 미루지도 말고, 용서를 청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며, ‘먼저’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마치신 다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 18,35)

 

이는 사랑과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야만 ‘먼저’ 용서하고, 일흔 일곱 번까지, 곧 끝까지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금만 참아 달라’는 형제의 간청에 어떻게 하는지요?

당연히 참아 줄뿐 아니라 청하지도 않은 용서까지도 하는지요?

혹 오히려 잘못을 들추며 질타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는 ‘진정한 마음’으로 용서하되 ‘끝까지’ 용서하고, 끝까지 용서하되 ‘먼저’ 용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먼저’ ‘끝까지’ ‘진정으로’ 용서받았음에 감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주님!

용서할 수 있게 하소서.

아니, 용서하기에 앞서 용서받았음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여 더 큰 사랑으로 용서하게 하소서.

일곱 번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끝까지 용서하게 하소서.

무한히 용서할 뿐만 아니라 더 큰 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아가 그가 잘 되도록 기도하고 도와주고 돌보게 하소서.

아무리 꺾이어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주님처럼, 저 역시 당신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먼저 용서하고 용서에 사랑을 더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가능한 행복하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어느 한 순간 걸려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야!’ 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도 아무의 도움도 필요 없을 만큼 완벽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넘어지는 이유를 보면 욕심에서 비롯됩니다.

야고보사도는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4,1-2).하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도 탐욕과 어리석음과 성냄이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독이라고 가르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화를 내고 다투는 일이 없을 텐데 욕심 때문에 남과는 물론 심지어 형제와도 등지게 되기도 합니다. 기대가 크면 클수록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자유를 억압하며 담을 높이 쌓게 됩니다.

얼마 전 한 어르신이 자녀들에게 유언으로 유산을 분배하고 세상을 뜨셨는데 자녀들에게 큰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자녀들은 모두 내로라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그야말로 살만한 사람들이었는데 서로 서운함을 가지고 등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재산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재산은 분명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데 재산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 담을 허물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합니다.

담을 허문다는 것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용서라는 것이 말같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랑할 수 있듯이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한 사람은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을 성찰해 볼 때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삶을 살아온 날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마음을 다잡으려 하지만 인간의 연약함에 넘어지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왔고 앞으로도 분명 용서를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용서를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 용서 덕분에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에 이르기까지 고통을 수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당신을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에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하며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사도7,60). 하고 애원하였던 스테파노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만약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담고 있게 되면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고립되게 되고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건강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18,22). 용서는 결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은 만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해야 합니다. 설령 전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나쁜 사람이라도! 어느 날, 내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가슴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주님 안에서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용서받았으니』

 -송영진신부-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22)”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라는 베드로 사도의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일곱 번까지는’ 용서하실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말입니다.

(성경에서 보통 ‘일곱’은 하느님과 관련된 숫자로 사용됩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일곱 번으로 한정하지 말고,

무한정 용서해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용서는 무제한이고 무한정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너를 무한정 용서하시니, 너도 형제를 무한정 용서해야 한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용서의 은총’을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나의 것을 형제에게 주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형제에게 전해 주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용서하지 않을 권한’은 없고,

‘용서할 의무’만 있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라고 말씀하셨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용서하지 않을 권한’을 주신 말씀이 아니라,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그가 용서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일이 없게 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앞의 17절에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 사람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마태 18,17).”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영원히 교회에서 추방(파문)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 추방(파문)하는 일은 ‘회개와 용서’를 완전히 차단하는 일이 아니라,

회개시키기 위한 일이고, 용서하기 위한 일입니다.

파문당한 사람도 진심으로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18절에 있는 ‘매고 푸는 일’에 관한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8,18).”

땅이 하늘에 종속됩니다. 하늘이 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은 모든 사람의 용서와 구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는 회개하는 죄인을 무조건 용서해야 하고,

회개하지 않는 죄인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용서하는 입장’에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용서받는 입장’에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계속 죄를 지어도 하느님께서는 나를 무한정 용서하실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죄를 짓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일이고,

‘하느님 모독죄’ 라는 더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무한정 용서하신다는 말씀은 무한정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용서받는 입장’에서는

언제나 항상 진심으로 회개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용서를 청하는 것은 죄를 더욱 키우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실제 상황을 보면,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용서를 청하지도 않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노력 없이 용서를 청할 수는 없습니다.

 

산상설교에 있는,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라는 말씀은

‘용서’에도 적용됩니다.

누구든지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하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회개하지도 않고, 용서를 청하지도 않으면,

주시는 용서를 안 받겠다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마태 18,32-35).”

 

‘매정한 종의 비유’는 “너희가 용서받았으니, 너희도 용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용서를 취소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형제를 용서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신 일에 응답하는 일이고,

그 응답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용서를 자기 안에서 완성하는 일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완전한 용서’를 주시는데,

그 용서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은, 내가 형제를 용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용서가 내 안에서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무효화되어 버립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너무나도 끔찍한 피해를 입어서)

도저히 가해자를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면 하느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악인의 심판과 처벌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고,

우리는 악인의 회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 악인이 끝까지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우리의 ‘용서할 의무’가 해제되는가?

의무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악인이 용서받지 못한 상태로

끝나버린 것에 대한 책임을, 즉 그가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책임은 그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도 내리용서다.

 -김찬선신ㄴ부-


어찌보면 제가 용서할 것은 별로 없었고,

청해야 할 용서가 더 많았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때는 청해야 할 용서가 많고 또 크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한 짓이 용서받아야 할 짓인데

그런 짓을 하고서도 그런 줄 모르고 살거나

심지어는 용서받아야 할 짓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저는 사랑하려고 무척 노력했고 실제로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한 것인데

그에게 맞는 사랑이 아니거나 심지어 사랑의 폭력일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옷을 사랑으로 지었지만 그에게 맞지 않는 옷이거나

그가 싫어하는 스타일인데도 입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았지요.

 

아무튼, 저는 제가 용서해야 할 것보다 용서청해야 할 것이 더 많았는데

더 큰 문제랄까 죄는 제가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었던 점입니다.

 

물론 제가 잘못도 많이 하고 죄도 많이 지었지만

그것에 대해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저 스스로 저를 단죄하고 자책하는 것으로 그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윗이 간음하고 우리야를 죽였을 때

우리야가 아니라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한 다윗처럼

저도 주님께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청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그래서 하느님의 용서 체험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내리사랑인 것처럼 용서도 내리용서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으로부터 크고 많은 죄를 용서받은 체험이 있을 때

작고 적은 이웃의 죄를 몇 번인지 따지지 않고 용서할 수 있겠지요.

 

오늘 몇 번을 용서해야 하는지 물은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횟수를 따지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든 비유의 뜻이

바로 이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3월 9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