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1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가 4,24ㄴ-30)
No prophet is accepted
in his own native pla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아람 장수 나아만은 나병 환자였다. 엘리사 예언자가 그의 병을 고쳐 주자, 나아만은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고향 사람들이 예언자를 거부하기 때문에 복음은 오히려 이방인들에게 전해진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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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형제님이 가보로 오랫동안 내려온 점토로 만들어진 조각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매우 귀하다는 말을 들었고, 자기 역시 이 조각상이 마음에 들어 매일 깨끗이 닦고 또 닦았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 점토 조각상을 금으로 덮으면 더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는 대로 금을 사서 이 조각상에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진흙에 잘 붙지 않는 금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형제님은 모든 자원과 시간을 금 붙이는데 쏟아부었습니다.
이 형제님의 할아버지께서 방문하셨습니다. 형제님은 할아버지에게 자신이 금을 붙여서 만든 황금 조각상을 보여드렸습니다. 그런데 황금 사이로 보이는 진흙에 할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이 조각상이 진흙 속에 빠진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진흙을 벗기지 않았구나. 아직도 진흙이 묻어있는 것을 보니 말이다. 원래 이 조각상은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단다.”
주님께서는 이 황금보다도 다 귀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위에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붙이고 있습니다. 욕심, 이기심, 미움, 질투, 거짓 등을 계속 붙이면서 가장 좋으신 주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님을 배척하는 모습에, 지금의 우리 모습 역시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 방문하셨지만, 환영받지 못하십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과 지혜로운 말씀을 보고 들었지만,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으니,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사기이고 사람들을 향한 기만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런 반대 기운을 알아차리신 예수님께서는 악의에 찬 불신자들은 구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믿는 이방인들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을 버려두고 엘리야가 이방인의 땅에서 고생하는 사렙타의 과부를 찾아가 기적으로 도와준 일과, 예언자 엘리사도 나병 환자 나아만을 고쳐 준 사실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말에 고향 사람들은 화가 치밀었습니다. 자기들의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자기들의 바람을 채워주지 않는다고 해서 제거하려는 못된 마음입니다. 자기들을 구원할 주님의 모습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하는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우리의 잘못된 것들을 걷어내야 합니다. 욕심, 이기심, 미움, 잘못된 판단, 폭력, 불의…. 그 모든 것을 다 걷어냈을 때, 사랑이신 주님을 믿게 되고 가장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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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새 창조, 이를 통한 사랑의 심판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eesvUPe-zUc
오늘 독서와 복음은 새로이 이룩되고자 하는 새 창조와 심판의 기준과 목표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조주로서 생명을 지어주신 하느님께서는 또한 심판주로서 생명을 완성하실 분이십니다. 이 창조 신앙이 기준이며 심판 신앙이 목표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기준에 따라 믿음을 가르쳐주셨고 그 목표에 따라 사랑을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셨으며, 몸소 그 기준에 따라 목표를 성취하시는 삶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창조자로서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 역사로 창조되는 과정이었고 이에 대한 믿음을 요청하셨으며, 심판자로서 예수님께서 부르시어 모인 교회는 그 과정 자체가 인류 역사에 대한 심판이었고 따라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을 요청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실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루카 22,30)이라고 하신 말씀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창조자로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면모는 이미 세례 사건에서 나타났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내려오셨으며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 바로 그 사건입니다. 또한 심판자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결정적인 심판의 기준은 최후의 심판 기사에서 나타났습니다. 이 같은 창조와 심판의 기준으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의 역사를 믿음으로 새로이 창조하고 계시고 또한 그 창조의 응답인 사랑에 따라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엘리야 시대에 가뭄이 심하게 들어 모두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을 때 시돈의 과부 사렙타에게 엘리야를 보내시어 음식이 떨어지지 않고 죽은 아들이 살아나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고, 엘리사 시대에는 나병에 걸린 시리아 장군 나아만을 이스라엘에 보내시어 엘리사로 하여금 요르단 강물로 그를 낫게 해 주시는 기적을 보여주심으로써 또한 그 시대 사람들에게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두 표징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자비와 말씀에 의탁하면, 굶주림이든 나병이든 나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습니다. 그런데 엘리야 시대의 시돈 사람들이나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았고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카파르나움을 비롯한 갈릴래아 지방 여러 고을에서 기적을 일으키시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당신께서 자라나신 고향 나자렛에서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선포하셨는데 고향 사람들은 카파르나움에서 보여준 기적을 또 다시 자신들의 눈앞에서 보여 달라고 억지를 부리며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회개하거나 믿기는커녕 예수님을 벼랑에까지 끌고 가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하는 적개심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예수님께서는 엘리야 시대와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옛 일을 상기시키며 복음선포를 포기하고 물러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 어떠한 기적도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었고, 설사 그네들의 요구대로 기적을 그들 눈앞에서 일으킨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듯 사납고 살벌해진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무사히 빠져나오셨습니다. 그들의 적개심에 굴복하는 것은 결코 짊어질만한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자락에도 손을 대지 못했습니다. 이 기적 같은 탈출이 그분의 공생활 내내 사람들의 불신과 냉소 그리고 무관심에 부딪치실 때마다 일어났습니다(요한 7,30.44; 8,59; 10,31). 하지만 진정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실 수 있는 그분의 신적인 권능으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을 때 목이 말라 물을 청하신 그분은, 정작 그 여인의 믿음에 목마르신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 영적인 갈증을 해소하시려고 믿음의 물을 청하신 것이었고(요한 4,7), 그 믿음이야말로 그분이 배고프지 않을 수 있는 ‘양식’(요한 4,32)이었는데, 제자들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상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목마르다”(요한 19,28) 하고 말씀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은 스스로 심판을 자초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같은 잣대로 새 이스라엘인 교회도, 또 우리 민족도 역사를 창조한 만큼 심판받을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도 우리 민족도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룩하시려는 새 역사의 창조에 동참하여 새 복음화를 이룩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자면 먼저 믿는 이들부터 자신들이 믿음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던 목표와 기준에 합당한 믿음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 그 사랑을 예수님께 드렸는지도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실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믿음이 우리의 역사를 창조하고 이 사랑이 우리를 심판에서 구원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앙생활에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복음삼덕으로는 정결, 청빈, 순명이 있습니다. 향주삼덕으로는 믿음, 희망, 사랑이 있습니다. 깊은 지하에 있는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마중물’이 있어야 합니다. 펌프에 마중물을 넣고 손잡이를 움직이면 마중물은 지하의 물을 불러오게 됩니다. 복음삼덕과 향주삼덕이 내 삶을 통해서 드러나기 위해서 필요한 ‘마중물’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갈망’이라고 생각합니다. 하혈하던 여인은 병을 고치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갈망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죄인으로 비난받던 자캐오는 새롭게 살고 싶은 갈망이 있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갈망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1999년 처음으로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매 주일 약수터에서 물을 떠오고, 화장실 청소도 하고, 성당에서 주보도 정리하고, 신자들과 알콩달콩 재미있게 지냈습니다. 마르타처럼 외적인 활동은 많이 하였지만 연극이 끝나고 텅 빈 객석에 남아있는 배우처럼 신자들이 떠난 성당에 있으면 허전했습니다. 모임을 만들어서 술도 마셨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메마름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신학교에서 매 주일 기도모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본당에서 신학교까지는 왕복 200킬로가 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한 시간 기도하고, 교재를 읽고 나누는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그 모임은 ‘영신수련 지도자 모임’이었습니다. 하혈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것처럼, 자캐오가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던 것처럼 저는 기도 모임에서 저의 영적인 메마름을 풀 수 있었습니다. ‘기도하고 일하라.’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말처럼 기도모임은 저의 사제생활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계명을 잘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풍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율법과 계명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기에 더 높은 영적인 갈망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교만과 자만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정한 하느님의 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는 교만과 자만 때문에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21세기의 교회도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교회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유럽교회와 재정적으로 넉넉한 북미교회의 사정이 그렇게 밝은 것이 아닙니다. 성직자가 부족해서 성당을 폐쇄하기도 합니다. 성소자가 줄어서 사제들의 고령화가 심각합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여유도, 교회의 유산도 ‘갈망’이 없으면 영적인 메마름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시리아 장군 ‘나아만’은 평생 괴롭혀 오던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갔기 때문입니다. 나아만도 알고 있었습니다. 요르단 강의 물은 시리아에 있던 다마스쿠스 강보다 수질이 더 좋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그지 않았습니다. 물론 나병은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믿음을 가졌고 요르단 강에 몸을 담갔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이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강물이 나아만을 치유한 것이 아닙니다. 나병을 고치려는 갈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치유된 것입니다.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희망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 보다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양승국신부-
아람 임금의 장수 나아만은 참으로 특별한 인물입니다. 그가 보인 특별한 처신으로 인해 열왕기는 물론 복음서 안에도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세세대대로 남게 됩니다. 그는 장수로서의 지혜와 용맹함 뿐만 아니라 따뜻한 마음과 인성까지 겸비했던 사람이었기에,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심한 나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나아만은 이방인이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를 눈여겨보셨습니다. 그의 넘치는 인간미, 그가 지니고 있었던 측은지심과 따뜻한 마음,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미덕을 보신 주님께서는 그의 고통에 적극 개입하셨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는 가련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침공했다가 홀로 남겨져 있던 어린 소녀를 발견했는데, 나아만은 세상 불쌍한 아이를 외면하지 않고 거두었습니다.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아내에게 돌보도록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나아만은 주변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병으로 인해 쌩고생하고 있는 자신을 구해준 아저씨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던 소녀였습니다. 용기를 내서 엘리사 예언자에게 치유를 청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합니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제가 나아만이었다면, 아직 머리 꼭대기 피도 안 마른 것이, 쥐뿔도 모르는 것이, 지가 알면 뭘 안다고 나대냐며 호통을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태도를 보십시오. 즉각적으로 수용합니다. 나아만이 임금에게 소녀의 제안에 대해 말을 건네자 그는 이스라엘 왕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친서까지 써서 그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러나 스토리는 여기서 꽤나 꼬이기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임금은 아람 임금의 편지를 읽고 나자 그 자리에서 갈기갈기 찢어버립니다. 괜한 시비를 거는 것으로 여기고 길길이 뛰며 대노한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나아만이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도착했는데, 또다시 반전이 거듭됩니다. 엘리사 예언자가 당장 뛰어나와 엄청난 치유 의식이 벌어질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문밖으로 얼굴도 내밀지 않았습니다. 심부름꾼을 시켜 이런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요르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열왕기 하권 5장 10절)
엘리사 예언자가 보여준 행동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나아만은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투덜거리며 발길을 돌렸니다. 그때 지혜로운 부하들이 나아만을 달래며 제안합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상황에서 제가 나아만이었다면 한번 빈정이 크게 상했고, 자존심에 크게 상처를 입었으니, 벼락같이 화를 내며, 죽었으면 죽었지, 그럴 수는 없다며 외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나아만은 마음의 불길을 차분히 가라앉힙니다. 부하들이 한 말을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성질대로 확 저질러버리지 않고 이성적으로 행동합니다. 보다 중요한 것, 보다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자신의 의지를 굽힙니다.
엘리사 예언자의 제안에 따라 요르단강으로 내려가 한 번, 두 번...일곱 번이나 몸을 담갔습니다. 결국 아랫사람들의 목소리라 할지라도 주의 깊게 경청하고 고민하는 나아만의 열린 마음이 그를 구원합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열왕기 하권 5장 15절)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
(루카 4,30)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1사무 15,23)
그러기에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의견이나 주장을 고집할 때,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첫발이 중요하다」
-반영억신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은 나자렛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보기보다는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청하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기원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 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하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그야말로 정면 돌파를 하신 것입니다.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그런 확신으로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룩하신 위대한 업적의 증인들은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예언자도 예수님께서도 미움과 배척을 받으셨으나 그분의 말씀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은혜를 청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참 사랑은 이랫다 저랫다 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확신을 가지고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특권의식과 자만심』
-송영진신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ㄷ).”
이 말씀은, “하느님을 안 믿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믿지 않느냐?” 라고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받아들일 것이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한 분이신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은 추구하지 않으니,
너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요한 5,41-44)”
“나는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환영이나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주는 영광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믿고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실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라는 말씀은,
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구원’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고, 구원에는 관심도 없고,
세속 일만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오늘날의 안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루카 4,25-27).”
이 말씀은, 유대인들의 특권의식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기들만 구원받는다는 특권의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방인들을 ‘구원받지 못할 죄인들’이라고 멸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언급하신 것은,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간에 ‘하느님의 은혜’는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받게 된다.”는 것과 “하느님은 유대인들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하느님이시다.” 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 예언자가 박해를 받을 때
‘사렙타의 과부’만 엘리야 예언자를 접대했습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의 나병 환자들 가운데에서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엘리사 예언자를 찾아갔고 치유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똑같이 내려 주시는 분이지만,
받기를 원하고, 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도 ‘모든 사람’에게 선포된 은혜인데,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구원의 복음’이 됩니다.
구약시대는 이스라엘이라는 특정 민족이 주인공이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신약시대는 ‘모든 사람’을 위한 시대이고,
‘모든 사람’이 주인공인 시대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지위를 잃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우리 교회의 이름인 ‘가톨릭교회’는 ‘보편적인 교회’ 라는 뜻입니다.
‘보편적인 교회’라는 말은 ‘온 세상 모든 사람을 위한 교회’ 라는 뜻입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28-30).”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화를 낸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특권의식과 자존심을 건드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선택받은 민족’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인데,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부정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한 것과 같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나자렛 사람들의 시도가 실패한 것은,
아직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요한 7,30; 요한 8,20).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에페 2,14).”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에페 2,18-19).”
또 바오로 사도는 자만심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대는 잘려 나간 그 가지들을 얕보며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로마 11,18ㄱ).”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21-22).”
하느님의 구원사업에는 ‘특권’이나 ‘특혜’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도 자신의 구원을 장담하면 안 됩니다.
자만하지 않고, 방심하지 않고,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모두를 구원해주시지만 모두를 치유해주시지는 않는
-김찬선신부-
하느님은 모두를 구원하시만, 모두를 치유해주시지는 않습니다.
더 정확이 말하면 하느님은 모두를 구원하실 생각이시지만
모두를 치유해주실 생각은 없으십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실제로 복음의 주님께서도 수많은 사람의 병을 치유해주셨지만
모든 사람의 병을 치유해주신 것은 아니었지요
이것을 보고 우리는 공평하지 않으시다고 할 수 있지만
주님의 공평은 구원의 공평이지 치유의 공평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고
하느님의 사랑은 이스라엘 사람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똑같아서
모두를 구원하시고자 하시지만, 치유만은 모두에게 똑같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누구는 치유해주시고, 누구는 치유해주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없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이며
우리의 공로나 정성에 따라서가 아니라 순전히 은총입니다.
구약의 나아만이 치유된 것은 나아만이 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고,
나아만이 공로를 많이 세워서도 아닙니다.
실제로 나아만 치유받으러 엘리사에게 가면서
많은 예물을 뇌물처럼 가지고 갔지만 엘리사는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나아만은 더 좋은 강물에서 더 정성껏 치성을 드려야만 치유될 거라 생각했지만
엘리사는 쫄쫄 흐르는 그 작은 요르단강물에 일곱 번 몸을 담그라고만 하였지요.
엘리사는 심지어 나아만 앞에 나와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 말만 전하게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치유는 하느님 뜻에 맡기고 그저 구원만 바라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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