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8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21,33-43.45-46)
The stone that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ornerstone;
by the Lord has this been done,
and it is wonderful in ou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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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야곱이 요셉을 더 사랑하자,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다 이스마엘인들에게 팔아넘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악한 소작인의 비유를 드시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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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형제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는 중에, 앞의 차가 불안했습니다. 차선을 잘 바꾸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또 급브레이크를 자주 밟았습니다. 이 차의 뒤에 ‘초보운전’이라는 글자가 크게 보였습니다. 아직 운전이 미숙한 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운전하고 있던 형제님께서 “저렇게 운전하는 것을 보니 여자가 분명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차를 추월하면서 보니 젊은 형제님께서 운전대를 잡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운전에 미숙하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고정관념을 가지면, 여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여성이라 능력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남성 운전자가 실수하면 단순한 집중력 부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고정관념이 과연 맞는 것일까요? 솔직히 운전을 잘하지 못하는 남성도 많습니다. 또 반대로 엄청나게 운전을 잘하는 여성도 많습니다.
고정관념은 우리의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 역시 고정관념으로 인해 죄로 기울어지는 유다인들을 꾸짖는 말씀이었습니다. 이해를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그 뜻은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자연의 모든 것을 인간이 경작하도록 맡기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할 일은 하지 않고 죄에 빠져들어 하느님과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하느님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되돌리기 위해 예언자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를 학대합니다. 하느님의 인내심은 사랑으로 표현되어 끝내는 외아들을 구세주로 보내십니다. 그러나 못된 백성은 그 아들마저 죽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소작인의 비유’ 말씀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라고 하시지요. 사람들이 업신여긴 것, 쓸모없다고 버린 것을 하느님은 쓸모 있게 보시고 귀하게 여기시어 긴요한 자리에 놓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못된 소작인과 같이 많은 은총과 사랑을 받았음에도 잘못된 판단으로 주인에게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아니라, 올바른 판단으로 언제나 주인이신 하느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올바른 판단으로 주님께 충실한 우리가 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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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CHgrer4Oyao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들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분명 ‘십일조’ 봉헌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는 감사한 분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게 첫 조상들은 ‘생명 나무’를 먹지 못하게 되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는 말은 사실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은 곳이 지옥인데, 하느님께서 사시는 곳이 에덴동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그래도 인간을 지옥에 보내실 수가 있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이유는 모든 것을 주시는 사랑 자체이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어떤 사람은 누구에게 조금 주다가 상대가 그것을 줘봐야 고마워할 줄 모르면 바로 주는 것을 그만둡니다. 그러나 사랑 자체이신 분은 그래도 다 준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소출을 바치지 않고 하인들까지 죽이는 그들에게 아드님까지 주십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화 ‘해바라기’(2006)는 그냥 단순히 한 명의 깡패 영화 같은데 지금까지 남는 여운이 있습니다. 무언가 묵직하게 가슴을 누릅니다. 어쩌면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는 우리의 결말을 미리 보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미친개로 이름 날렸던 오태식이 주인공입니다. 조폭과 시비가 붙어 싸우다 한 명을 죽이고 교도소에 갇힙니다. 그런 오태식에게 죽임당한 남자의 어머니 양덕자가 면회를 오고 오태식은 그녀에게 감화돼 개과천선을 결심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기 새어머니로 삼습니다.
오태식은 10년 수감생활 동안 자신의 목표를 수첩에 적으면서 출소 후 지키겠다 다짐합니다. 특별히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 다시는 싸우지 않겠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이상 세 가지는 새엄마 양덕자가 꼭 지켜달라고 한 것입니다.
한편 오태식이 수감된 중에 마을을 차지하려던 병진이 시의원 조판수와 마을을 접수하고 오태식의 똘마니 양기와 창무도 조판수 밑에 들어갑니다. 오태식이 출소하자 그들은 모두 긴장합니다. 시의원인 조판수는 마을 일대를 재개발하려고 하지만 그곳에 양덕자가 해바라기라는 식당을 하고 있었고 오태식이 그 집에서 살게 되는데 개과천선하려는 그의 마음과 달리 주변 사람들은 그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태식은 새엄마의 말대로 절대 싸움을 하지 않고 맞아주기만 합니다.
조판수 패거리가 양덕자의 해바라기 식당을 부수며 모녀를 위협하고 오태식이 일하는 카센터까지 가서 집단 폭행해서 사장의 팔을 부러뜨립니다. 이에 양덕자가 조판수를 찾아가 자신이 아들이 쓴 일기장 복사본을 보여주며 엄포를 놓습니다. 그 일기장에는 조판수가 양덕자 아들에게 시킨 안 좋은 일들이 다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조판수는 멈추지 않습니다. 양덕자의 딸 희주가 벽돌에 맞아 얼굴을 다칩니다. 그러자 결국 양덕자는 식당을 포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오태식은 조판수를 찾아가서 함께 떠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더는 건들지 말아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조판수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가 아니던가?”라고 하며 그 대가로 태식 오른손의 힘줄을 끊으라고 시킵니다. 병진이라는 형이 그의 힘줄을 끊는 시늉만 합니다.
집도 내어주어 쇼핑몰을 짓게 하고 가장 싸움 잘하는 아들의 손목의 힘줄도 자르고 딸의 얼굴도 망가뜨렸습니다. 그러나 조판수에게 여전히 양덕자는 위험인물이었습니다. 자기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기를 시켜 양덕자를 죽입니다.
조판수는 나이트클럽에서 자축 파티를 하고 있었고 오태식은 자신의 다짐을 깨고 조판수를 찾아갑니다. 술도 마시고 새엄마의 영정 앞에서 울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싸우지 않겠다던 약속도 지키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10년 동안 울면서 후회하고 다짐했는데,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더군. 그래서 지금부터 내가 너희들에게 벌을 주겠다.”
희주를 급습한 놈을 찾고 오태식은 병진에게 나가 있으라 말합니다. 병진은 태식의 힘줄을 끊지 않고 상처만 내 준 사람입니다. 그후 그곳은 쑥대밭이 됩니다.
이야기의 개연성도 부족하고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태식이 그렇게 하는 것이 시원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태수는 자기 손목과 어머니 집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까지 죽였으니 더는 그 집에 살 수 없게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저희 어머니가 제가 어렸을 때 길거리 아이를 데려와 씻겨주고 재워주신 적이 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아이를 계속 키우실까 봐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우리 삼 형제가 학교 간 사이에 돼지 저금통을 다 털어 도망가버렸습니다.
이것만 해도 함께 살 수 없을 텐데, 만약 저희까지 해를 끼쳤다면 어떨까요? 아들 중 하나를 죽였다면 그래도 어머니는 그 아이를 집에 데려다 놓고 살아야 할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면 괜찮겠지만, 다 주고도 생명과 같은 존재까지 빼앗는 벌을 받으면서 자기 집에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강도에게 집을 빼앗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소출을 봉헌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태수는 자신을 받아 준 새어머니에게 신발을 사드렸습니다.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그렇게 그곳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살려고 하면서 어머니까지 죽인다면 그건 아닙니다.
인도에서 부부가 20원 때문에 싸우다가 남편이 아내를 죽인 사건이 있습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것이 결국 하느님까지 죽이는 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감사의 십일조를 하지 못하면 이런 형국까지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못된 소작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가 되면 소출 일부를 주님께 감사히 봉헌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럴 일은 없지만, 태아가 엄마 배를 갉아 먹는다면 그 태아는 더는 그 배에서 살 수 없습니다. 에일리언 영화에서 에일리언은 인간을 숙주로 새끼를 사람 몸에서 키웁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에일리언 새끼를 몸속에서 빼내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은 하느님 몸속에서 그분의 생명을 갉아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곳에 살려면 최소한의 감사의 표시를 해야만 합니다. 성경은 이를 가지게 된 것의 십분의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꿈, 우리의 꿈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Uc_hAFJaR3o
야뽁 나루에서 하느님의 천사와 꿈에 씨름을 하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던 야곱은 젊은 시절에 모두 네 여인으로부터 많은 자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두 아내는 자매지간이었는데, 야곱은 언니인 레아보다 동생인 라헬을 더 사랑했습니다. 원래 야곱이 마음에 두었던 첫 사랑의 여인은 라헬이었고 그래서 7년 동안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일을 해주었는데, 기간이 찬 다음에 혼인하던 날 밤에 과년했던 맏딸 레아를 장인이 된 라반이 들여보내는 속임수로 억지 혼인을 한 처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라반의 제안대로 7년을 더 일해주고 나서 라헬과도 혼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레아는 자식을 잘 낳을 수 있었지만 라헬은 그렇지 못해서 자신의 여종을 통해 아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랬더니 레아도 자신의 여종을 씨받이로 들여보내는 바람에 야곱은 모두 네 여인으로부터 아들 열둘에 딸 하나를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라헬이 낳아준 첫 아들인 요셉이 비록 전체 서열상으로는 열한 번째였지만 야곱에게는 사실상 맏아들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진실을 알 길 없는 나머지 아들들은 아버지 야곱의 지독한 편애 때문에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살아야 했고, 그 상처가 얼마나 컸든지 마침내 동생 요셉을 죽여버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맏형 루우벤과 넷째 형 유다의 선의로 요셉은 미디안 상인에게 팔려 이집트로 가서 죽을 고생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라반의 속물형 인간성과 속임수, 그리고 야곱의 편애와 이로 인한 형제들의 질투 같이 도저히 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죄까지도 디딤돌로 삼아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많은 후손은 손자인 야곱의 대에서 장인의 사기에 걸리는 바람에 가능해졌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가뭄이 심했던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갔다가 다시 탈출하는 과정에서 겪은 체험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즉,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 덕분에 이집트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 고센에서 무려 60만 명이 넘은 무리로 번성했다가 이들이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살이에서 풀려나는 기적을 체험하고 다시 원래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야 아브라함 후손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체험과 믿음이 생겨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선이 악에 이용당하고 다시 그 악을 발판삼아 선이 일어서는 등 선행과 악행이 뒤섞여 나타난 이 모든 일을 미리 예상하신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을 보여주셨습니다. 형들의 곡식단 열 묶음이 요셉의 곡식단에 절을 한다든지,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요셉에게 절을 한다든지 하는 꿈이 그것입니다(창세 37,5-10). 형제들은 이 꿈 이야기를 듣고 알아듣지 못해 ‘꿈장이’라 놀리며 비웃었지만, 이미 베델에서 하늘에 오르는 층계 꿈을 꾼 적이 있었던 야곱은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창세 37,11).
교회가 이런 요셉의 꿈 이야기를 오늘 독서로 배치한 뜻은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또 다른 꿈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해석한 포도밭의 비유였습니다. 예수님의 꿈은 소작인들이 주인이 보낸 종들이나 아들을 매질하거나 죽이지 않고 제 때에 소출을 내어 그들을 통해 주인에게 바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이 만민에게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꿈은 예수님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새로운 하느님 백성으로 부르심 받은 교회의 역사에로 넘겨졌습니다. 지난 2천 년 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 꿈의 실현 과정이었습니다.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서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지 1천 8백 년이나 지나서야 예수님의 꿈은 이 땅에도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기묘한 섭리로 진행이 되어서, 그 이전의 교회사에서는 전례 없이 선교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자생적으로 교회가 생겨났는데, 이는 ‘천주실의’에 담긴 예수님의 꿈을 알아본 이벽 덕분이었습니다. 이벽의 꿈은 성교요지와 천주공경가에 담겨 있습니다. 그에게서 신앙은 배운 정약전은 임금 없이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의 꿈을 꾸어 십계명가와 자산어보에 담았습니다. 정약종은 천민 출신 백정 황일광 알렉시오로부터 서민들의 언어를 배울 수 있었던 덕분에 순한글로 주교요지를 지어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우촌 신자들이 그 무서운 고문과 형벌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무기를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정약용은 유가적 그리스도인으로서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를 비롯한 책들을 세상에 펴내어 후세에서라도 이 민족이 하느님의 천손이 되기를 꿈꾸었습니다. 품격 높은 윤리와 고귀한 신앙이 어우러지는 조선을 향한 꿈이었습니다.
이 정씨 삼형제가 조상제사금지령 때문에 박해를 받고 혹은 참수당해 죽고 혹은 유배를 당했지만, 그들 삼형제의 꿈 덕분에 교우촌에서 한국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과 최양업이 배출될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야곱의 꿈은 예수님의 꿈이 되고, 다시 선각자들의 꿈이 되어서 오늘 우리가 속한 한국교회가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며, 동아시아에서도 독보적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선이 악과 뒤섞이는 현실 속에서도 악행의 결과를 발판으로 삼으시어 더욱 놀랍고 커다란 선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조재형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3년에 ‘람페두사’를 방문하였습니다. 람페두사는 이탈리아 남단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섬은 아름다운 자연과 바다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관광지입니다. 그러나 섬은 아프리카와 가까이 있기에 난민들이 찾는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난민들은 뗏목을 타고 오기도 하고, 정원을 초과해서 배를 타고 오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섬에 오기도 전에 바다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황님은 이웃의 고통에 익숙해진 현대인의 모습을 지적하며, “무관심의 세계화는 우리 모두를 무책임한 ‘익명의 사람들’로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교황님은 인간 역사의 여명기에 하느님께서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네 아우는 어디 있느냐?” 하신 질문을 상기시키고 “이 질문은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님은 “누가 이들을 위해 울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였습니다. “여기 형제, 자매들의 죽음에 누가 애통해하고 있습니까? 이 (죽음의) 배를 탄 사람들을 위해 누가 울고 있습니까? 어린 것들을 안고 있는 이 젊은 엄마들을 위해, 가족을 위해 일자리를 찾아 나선 이 남자들을 위해서 누가? 우리는 어떻게 울어야 할지를, 어떻게 연민을 경험해야 할지를 잊었습니다. 이웃과 함께하는 ‘고통’ 말입니다. 무관심의 세계화가 우리에게서 슬퍼하는 능력을 제거해버렸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교황님은 회칙 ‘찬미 받으소서.’를 통해서 우리 이웃의 범위를 확대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겨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 주신 이 세상을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내 몰고 있습니다. 교황님은 지구를 보호할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면서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지구를 위한 기도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온 세계에 계시며 가장 작은 피조물 안에 계시나이다. 하느님께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온유로 감싸 안으시며 저희에게 사랑의 힘을 부어 주시어 저희가 생명과 아름다움을 보살피게 하소서. 또한 저희가 평화로 넘쳐 한 형제자매로 살아가며 그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하소서. 오, 가난한 이들의 하느님, 저희를 도와주시어 저희가 하느님 보시기에 참으로 소중한 이들, 이 지구의 버림받고 잊힌 이들을 구하게 하소서. 저희 삶을 치유해 주시어 저희가 이 세상을 훼손하지 않고 보호하게 하시며 오염과 파괴가 아닌 아름다움의 씨앗을 뿌리게 하소서. 가난한 이들과 지구를 희생시키면서 이득만을 추구하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소서. 저희가 하느님의 영원한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모든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경외로 가득 차 바라보며 모든 피조물과 깊은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깨닫도록 저희를 가르쳐 주소서. 하느님, 날마다 저희와 함께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비오니, 정의와 사랑과 평화를 위한 투쟁에서 저희에게 힘을 주소서.”
오늘 독서에서 형제들은 아버지가 보낸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듯이, 형제들은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동생 요셉을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소작인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쫓아내고, 죽였습니다.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팔아넘긴 형제들은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나쁜 포도원 소작인들은 자연을 파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시기와 질투, 욕심과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요셉이 보여주었던 ‘인내와 용서’를 채워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었지만 비천한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의 ‘겸손과 희생’을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양승국신부-
집단적 악과 개인적 양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이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창세기를 통해 잘 그려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동생 요셉의 모습에 형들은 질투심으로 똘똘 뭉치게 되었고, 요셉은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도 불구하고, 형들은 아버지로부터 총애를 받는 동생의 모습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집단적 악이 결정적으로 발동됩니다. 평소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악의가 동시에 표출된 것입니다.
“저기 저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넣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 그리고 저 녀석의 꿈이 어떻게 되나 보자.”(창세기 37장 19~29절)
형들이 그런 악의를 품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으니, 아버지 야곱의 편애와 요셉이 꾼 특별한 꿈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요셉을 늘그막에 얻었으므로, 다른 어느 아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긴 저고리를 지어 입혔다.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어느 형제보다 그를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정답게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창세기 37장 3~4절)
“내가 꾼 꿈 이야기를 들어보셔요.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기 37장 7절)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들은 형들은 분기탱천하기 시작하였고, 큰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들끓었고, 마침내 집단적인 광기와 폭력성으로 연결되고 만 것입니다. 결국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요셉은 가족들과 생이별을 하고, 이집트로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세옹지마’라고, 남의 나라 땅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지혜롭게 극복한 요셉은 대제국의 제2인자로 우뚝 서게 되고, 후에 대기근으로 굶어죽게 생긴 가족들을 살리게 되는 드라마틱한 대반전 스토리를 엮어갑니다.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돌아봐도 집단적인 악, 집단적인 광기가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왔습니다. 600만 명이 넘는 유다인 대학살, 수많은 청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대전쟁들은 집단적 악의 결과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백성은 아직도 집단적 악의 난동으로 인해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아직도 하이에나 떼처럼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량한 국민의 삶을 힘겹게 하는 검찰 집단, 기레기 집단, 국민 민폐당, 사이비 종교 단체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행히 요셉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하고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이 남아있는 개인의 양심 때문이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남아있던 르우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숨만은 해치지 말자. 피만은 흘리지 마라. 그 아이를 여기 광야에 있는 이 구덩이에 던져버리고,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는 마라.”(창세기 37장 21~22절)
집단적 악의 세력이 휘둘러대는 광기 앞에 필요한 것은, 바로 우리들의 양심입니다. 악이 더 큰 악으로 확산되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보려는 일말의 양심입니다. 거대 악을 목격하고서도, 그 악으로 인해 드러나는 참혹한 현실을 직면하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것은 또 다른 악입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은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고,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쳐진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곧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며,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서 걸으신 길」
-반영억신부-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선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시며 당신의 죽음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러자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속을 들켜버린 것을 알고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발 저린다.”는 옛 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보면(마르6,14-29), 홀로 정의를 외치다가 장엄하게 죽어가는 예언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왕의 모습이 대조적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을 하는 바람에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요한의 목을 베어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의인은 당당하고 불의한 사람은 늘 불안합니다. 주님 앞에서 항상 떳떳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죽음을 통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여정도 희생을 통해 다른 이를 이롭게 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를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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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양과 악한 양이 싸우면 어떤 양이 이길까요?
선한 양?
아니면 악한 양?
힘센 놈이 이깁니다.
그런데 어떤 놈이 힘센 놈이 되느냐?
내가 밥을 잘 챙겨 주는 놈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밥을 주어야 할까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3-36).”
이 말씀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비유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인 몫의 소출’은, 즉 소작인들이 주인에게 내야 할 소작료는
‘회개’와 ‘충실한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회개하라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또는 ‘회개하기가 싫어서’였습니다.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것은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이스라엘을 ‘소작인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소작인들처럼 살고 있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자녀라면 자녀답게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만일에 신앙생활을 사랑으로 하지 않고 억지로(의무감으로) 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소작인으로 전락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루카 15,29).
아버지가 큰아들을 노예로 부린 것이 아니라, 큰아들 자신이
‘사랑 없이’ 의무감으로만 일하면서 스스로 노예의 위치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마음속에는 ‘불평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사랑으로’ 일하는 자녀의 마음속에는 ‘기쁨’이 가득한 법입니다.
혹시 지금, 기쁨은 없고 불평과 불만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7-3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아들을 알아보고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지 못했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지도 않았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또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재산을 차지하려고(빼앗으려고)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요한 16,2).
그러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아드님을(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하고(믿지 않고)
죽인 것은 사실상 하느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자기들 마음대로 판단해서 거부한 것 자체가 죄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메시아께서 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는
것과 같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마태 21,40-41)”
여기서 유대인들의 대답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들의 죄에 대한 처벌을 선고한 셈이 되었습니다.
이 말에서 예수님의 재판 때에 유대인들이 했던 말이 연상됩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 하고 대답하였다(마태 27,25).”
이 말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자기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만심에서
한 말이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내리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쩌면 최후의 심판은 그렇게 진행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유죄선고를 내리시기 전에 죄인들 자신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죄선고를 하고, 합당한 처벌을 선고하는 것이 최후의 심판일 것입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2-43).”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은 “집을 짓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서
그냥 버린 돌”인데,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으로 생각해서 죽였지만,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라는
말씀을 설명한 것과 같은 말이 사도행전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온 집안은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님을 주님과 메시아로 삼으셨습니다(사도 2,36).”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일이겠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라는 말씀에는
“너희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만 하시는 경고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합니다.
‘소출을 내는 민족’은 제대로 회개하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일에는 특권도 없고, 특혜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아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대원칙’입니다.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 39)
-한상우신부-
포도밭은
욕망의
산물이 아니라
가장 좋으신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다.
우리의 삶이란
결코 욕망을
채우기 위한
포도밭이
아니다.
사실은
삶의 어두운
욕망의 근원이
하느님과
우리를
분리시키는 데
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은총의
사순이다.
삶의
포도밭에서
우리를
살게하시는
생명의
하느님이시다.
모든 것을
부정해도
부정할 수 없는
단 하나
그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존재이다.
세상은 그걸
참 모른다.
하느님을
죽이기에
우리의 관계도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엄연한
이 사실이다.
그래서 신앙은
거래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의
욕심이
너무 크다.
욕심에는
길이 없다.
욕심으로
참으로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포도밭에서
다시금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삶의 질서와
욕심의 절제를
다시 배운다.
하느님께서는
서로를
죽이고 또 죽이는
욕망의
포도밭이 아닌
함께 행복한
포도밭이길
간절히 원하신다.
이 사순시기
우리 삶의
포도밭을
다시 보게된다.
하느님께서
잠시 맡기신
생명의
포도밭을
잘 가꾸어
하느님께
돌려드릴
일이다.
하느님께
지나친
우리의
욕심과
파괴하는
무질서를
봉헌한다.
관계가
새로워져야
포도밭도
새롭다.
모든
관계와
포도밭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가장 좋은
흠숭을 올린다.
두려워하면서 사랑하는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또다시 비유를 드시는데
오늘은 주인과 소작인 관계에 대한 얘기입니다.
말하자면 이 비유에서 주인은 하느님이고 우리는 소작인이라는 건데
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이러하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고작 소작인이라니 말입니다.
아들과 상속자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그래서일까 오늘 소작인들 마음이 이해가 되고,
소작인들이 일으킨 반란도 이해가 됩니다.
소작인들도 저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반란을 일으켰을 겁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우리가 하느님의 상속자라고 하잖아요?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 17)
"그대는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그리고 자녀라면 하느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갈라 4, 7)
주님은 우리가 하느님의 소작인이라고 하고,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상속자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고 어떤 말이 맛습니까?
주님 말씀이 맞겠지요.
소작인이라는 것은 우리의 근본 정체성이고,
상속자라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승격된 정체성이지요.
이것을 달리 얘기하면 그리스도를 벗어나면 소작인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상속자라는 말이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그리스도 신비체론을 얘기하잖아요?
그러나 관건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는 것입니다.
지체에서 떨어져나가거나 지체로서 살지 않으면
상속권은 얻을 수 없고 소작인도 되지 못합니다.
반대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처럼 살면 아들로서 공동 상속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처럼 산다는 것은 아들로서의 사랑을 아버지께 드리는 것이고,
아버지께 드리는 사랑은 지극한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자비와 용서라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사랑은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거역하면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이고,
불순종하며 어떻게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소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 순종할 수도 있지만
진정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랑하여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두 가지 곧 두려움과 사랑을 합친 것이 경외라고 저는 생각하는데
소작인의 비유로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받는 오늘
경외하올 하느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F8nA/btqQ0PG6aOz/UDuWeXSP91LjxbotLRQ6l0/img.jp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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