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7일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가16,19-31)
If they will not listen to Moses and the prophets,
neither will they be persuaded
if someone should rise from the dea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하시며,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는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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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종종 도와달라고 찾아오는 분이 계십니다. 많지는 않지만 얼마를 도와 드립니다. 대부분 감사의 인사를 하시며 나가십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받은 돈을 들고 화를 냅니다.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서 마치 돈을 맡긴 것처럼 외치는 것입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교회가 어려운 자신을 반드시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도와드리지 않았습니다. 화를 내면서 성지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좋은 차를 몰고 어디를 가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들다고 하시는 분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예레 17,5.7)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가 바로 사람에게 의지하고 모든 것을 제힘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겸손을 보이지 않았고 불쌍한 이웃을 돕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의 힘에 의한 것으로만 착각하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에 반해 라자로는 오로지 주님을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 뜻이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는’이라는 점을 보면,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했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기에 이런 이름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친 후에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게 되고,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서 하늘나라의 기쁨을 누리고 있게 됩니다.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당시에는 식사가 끝나면 손을 씻는데 빵으로 손을 문질러 씻었습니다. 그리고 씻은 부스러기를 식탁 밑으로 던집니다. 원래 이것은 개들의 몫이었습니다. 하지만 라자로는 이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아주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어떠했을까요? 저승의 고통에서 곧바로 아브라함에게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라자로를 종 부리듯이 물을 찍어 자기 혀를 식히게 해달라고 하지요.
부자와 라자로의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입니다. 이 모습을 보며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됩니다. 우리는 과연 불평불만 없이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잘한 것은 자기 탓이고, 못한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면서 늘 불평불만 속에서 사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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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는 '라자로'랄 이름으로 살겠다는 일생일대의 결단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LhvKUp9DtyU
오늘 복음은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받아 지옥에 갔고 거지 라자로는 나쁜 것을 받아 천국에 갔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나쁜 것만 받아야 한다는 말일까요?
오늘 복음의 핵심은 ‘라자로’란 이름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이름이 나오는 것은 여기에서 라자로가 유일합니다. 그러니 라자로란 이름이 분명히 이 비유를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자로는 히브리어 이름 ‘엘아자르’의 그리스식 이름, ‘라자로스’입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뜻입니다. 돈이 많고 적음을 떠나서 ‘하느님께서 도우심을 믿고 사느냐, 자기 힘으로 사느냐’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고 있을 때의 상황이 부자의 상황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생존을 책임지려는 상태입니다. 생존을 위해 고생해야만 한다는 파라오에 속으며 사는 인생입니다. 이런 상태라면 믿음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신데 어떻게 내일 걱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내일 걱정을 하는 사람이 약탈자가 됩니다.
자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모세에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 순종하기로 결심하는 순간이 홍해를 건너는 순간입니다. 홍해를 건넘은 곧 세례입니다. 세례는 새로 태어남인데 그때 받는 이름이 ‘라자로’입니다.
세례를 받았으면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해야 합니다. 그 신앙고백을 우리는 ‘십일조’ 봉헌으로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라자로’란 이름을 지녔다면 선악과를 주님께 봉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심을 믿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 했습니다. 결과는 우리가 잘 압니다.
이름은 본성을 의미합니다. 라자로는 천국으로, 부자는 지옥으로 가는데 그사이는 절대 건널 수 없는 구렁이 있습니다. 그 구렁텅이가 본성입니다. 우리가 어떤 믿음으로 나아가느냐에 따라 조금씩 하느님 자녀의 본성과 사탄 자녀의 본성으로 나뉘는 것입니다.
‘라자로’란 이름은 표징을 보고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 선택입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부활시켜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달라고 청합니다. 그래야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죽은 이가 부활하는 기적을 보아서가 아니라, 믿음은 말씀을 듣고 내리는 ‘결단’이란 뜻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대만 영화 ‘네 아이는 네 아이가 아니다 – 필수 ADHD’는 성적이 떨어지면 아이들이 소각되는 이상한 미래를 상상한 영화입니다. 이 시대는 자녀의 공부로 부모의 지위가 결정됩니다. 엄마는 첫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인공수정으로 딸을 얻습니다. 그리고 좋은 집에 삽니다. 하지만 딸은 머리가 안 좋아 공부를 못 합니다. 만약 딸이 성적이 떨어지면 딸은 소각되고 엄마는 하층민으로 내려앉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딸을 ADHD로 믿게 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딸은 그나마 이런 연기도 제대로 못 합니다. 그래서 소각당한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때 딸에게 어떤 하층민 아주머니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처럼 거지로 사는 것이라 말합니다. 경쟁의 사회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워낙 어렸을 때부터 부자로 살아서 가난한 생활은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갔고 그렇게 노력하다가 결국엔 소각되고 어머니는 또 다른 아이를 인공수정으로 임신하여 자신이 원하는 대로 키웁니다.
여기서 엄마는 자아를 나타냅니다. 자아는 생존하기 위해 편안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하지만 공부를 잘하고 성적이 좋아져 봐야 엄마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렇게 본인 스스로 인간의 존엄성을 잃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 부자의 삶입니다. 선택하면 됩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자아의 종으로는 살지 않겠다는.
반면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 나오는 어머니는 다릅니다. 포레스트는 불편한 다리와 아이큐 75밖에 안 되는 머리를 지닌 외톨이 소년입니다. 그의 헌신적이고 강인한 어머니는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다’라고 가르칩니다. 어떤 초콜릿을 꺼낼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입니다.
포레스트는 따돌림을 당해 도망치다가 자신이 잘 달릴 줄 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풋볼선수가 됩니다. 그리고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군대에서도 많은 사람을 구하는 영웅이 됩니다. 동료를 위로하겠다고 탁구를 치다가 훌륭한 탁구선수가 됩니다. 이어 군 동료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새우를 잡다가 큰 사업가가 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자녀를 낳아 잘 기르는 누구보다 훌륭한 가장이 됩니다.
포레스트는 아무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인생은 알 수 없으니 가는 대로 맡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잘됩니다. 사실 포레스트가 오늘 복음의 ‘라자로’일 수 있습니다. 거지로 살더라도 먹을 것이 있으니 그냥 오늘 해야 하는 것,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뛰어야 한다면 뛰고 탁구를 쳐야 한다면 치며 군대에 가야 한다면 가고 일해야 한다면 합니다. 그는 돈에 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지는 매일매일의 초콜릿 맛은 다를지라도 항상 달콤한 초콜릿이라는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믿음으로 살았기에 그는 ‘하느님께서 도와주신다’라는 믿음을 가진 라자로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꿈에서 낯선 곳에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소방서와 같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무작정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소방대원이 “당신을 어떻게 믿어요?”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아무개 성당으로 전화 걸어 보세요. 제 이름과 세례명을 대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비록 꿈속이지만 자신이 하느님의 자녀로, 한 성당에 이름이 올라가 있다는 것에 매우 자랑스러웠고 자신감이 생겼다고 합니다. 깨어나서도 그 뿌듯한 마음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당시 이런저런 걱정과 근심이 있는데 왠지 그런 것들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으면 하느님께서 ‘라자로’란 이름으로 사는 우리를 보증해 주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 돈이 없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그냥 빌리기만 해도 주님께서 보증해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어떤 마음으로 사는 게 편하겠습니까? 이렇게 살던, 저렇게 살던 한 인생 살다 갑니다.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 힘으로 생존을 책임지려 하다가는 히틀러나 카다피, 혹은 푸틴처럼 이 세상 것을 다 가져도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으면 거지로 살더라도 개에게 자기 종기까지 핥게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내어줄 것이 있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주시는데 못 줄 게 무엇이겠습니까? 이 평화는 믿음에서 나오는데 그 믿음은 그저 나의 ‘선택’인 것입니다. 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할 때 그때가 비로소 참 ‘세례성사’를 받은 것이 됩니다.
재물의 소유와 사용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하느님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G9AP2VtCWGg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매우 대조적인 두 인간형을 제시하면서 우리에게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악인과 의인, 부자와 가난한 자입니다.
먼저,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람마다 제 선택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서 인생길이 이렇게 달라지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주님을 신뢰하는 이도 있는데,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고,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치유될 가망이 없을 정도로 교활한 자는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며, 마음을 주님께 두는 이는 좋은 열매를 줄곧 맺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살아생전에 온갖 호사를 누리면서도 부자는 자선을 베풀지 않았지만,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고자 간절히 바랐던 가난한 라자로는 허기를 면하기는커녕 개들이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할 정도로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살아서 고통받던 라자로는 죽어서 천국에 올라가 아브라함 곁에서 평안한 삶을 누리게 되었으나, 살아서 호강하던 부자는 불타는 지옥에 떨어져 목이 타는 듯한 고통을 맛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예수님께서 예레미야의 예언을 상기시키시는 듯 기본 구도는 비슷하지만, 메시지가 훨씬 더 강함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레미야의 경고는 현세에서 자기 행실에 따른 심판만을 제시한 데 비해서, 예수님의 경고는 현세에서만이 아니라 내세에까지 관철되고야 말 심판을 제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정도가 훨씬 더 엄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자와 거지, 현세와 내세, 천국과 지옥 등 대조적인 일들이 날카롭게 대비되면서, 부자의 사치스러운 모습을 짧게, 가난한 라자로의 고통은 길고 상세하게 소개됩니다. 그런가 하면 부자의 죽음은 길고 자세히, 라자로의 죽음은 짧게 소개됩니다. 정작 죽은 후 부자가 겪는 고통은 길고 처절하게 묘사되지만, 라자로의 행복은 아브라함 곁에 있다는 간단한 표현으로도 충분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렇듯 대조적이면서도 구체적인 묘사 방식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매우 인상적으로 과연 어떻게 재물을 소유하고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즉, 라자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재물을 그릇되게 소유하고 사용한 인색한 죄인의 전형으로 등장하는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떨어진 뒤에 자신의 말로 자신을 심판합니다. 그는 자신이 죽었다가 부활한 사람이 찾아가서 경고해야 할 정도로 아무런 성찰 없이 위험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며,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거절한 대가로 가게 된 지옥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절대로 가서는 안 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심판적인 부자의 언도는 아브라함에 의해서 더 엄중하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을 망설이는 부자들에게는 이미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 즉 성경의 가르침이 주어져 있으니, 죽은 사람이 다시 찾아가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옥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고통을 덜어주러 가기에는 천국과 지옥 사이의 수렁이 너무 깊어서 도저히 건너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전에 회개하여 가난한 이들과 가진 재물을 나누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강조하고자 하시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내세의 천국과 지옥 사이의 간극처럼이나 현세의 경제 질서에서 생겨나고 있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받아야 하는 고통을 지금 여기서 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는 물론 하느님의 힘으로도 좁힐 수 없지만, 현세의 간극은 인간의 힘으로도 얼마든지 좁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경고대로 우리가 하느님께 믿음을 두기만 하면 그렇습니다.
재물의 소유와 나눔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이렇듯 철저했기 때문에, 초대교회 신자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소유라 내세우지 않고 공동의 소유로 내어 놓을 줄 알았으며 그들 안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적인 실천이 사회적 매력을 발산시켜서 로마 제국의 박해도 물리치고 공인되고 국교가 되었으며 오늘날 전 세계에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6세 교황도 이 비유의 핵심에 대해서 회칙 「민족들의 발전」에서 이렇게 가르친 바 있습니다: “인종이나 종교나 국적의 차별 없이 누구나 다 타인과 자연의 예속 상태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 명실상부한 자유세계, 가난한 라자로도 부자와 같은 식탁에 앉을 수 있는 인간 공동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인 것이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47항).
교우 여러분!
오늘 입당송의 기도처럼, 우리가 걸어온 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걸어갈 길도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조재형신부-
조선에 선교사로 파견 왔던 프랑스 외방 선교회 사제들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말이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선교사들은 조선 신자들의 뜨거운 신앙을 보았습니다. 교우촌으로 가면 모든 신자들이 나와서 고백성사를 보았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하며 성체를 받아 모셨습니다. 선교사가 다른 곳으로 가면 마을 어귀까지 모두 따라 나와서 배웅하였습니다. 차마 발걸음을 때지 못하고 뒤돌아서면 신자들은 마치 주님께서 다시 오신 것처럼 기뻐하였습니다. 선교사들도, 신자들도 함께 울면서 아쉬움의 작별을 하였습니다. 비록 가난했고, 배우지 못했고, 깊은 산중에 숨어 지냈지만 주님을 신뢰하였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았기에 조선의 신자들은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고난이 닥쳐와도, 박해의 순간에도 두려움 없이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사제를 그리워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선교사들은 힘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해의 칼끝이 눈앞에 왔어도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고 합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가난은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언어가 다른 것도 큰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 성당은 사제가 한국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사이동에 따라서 전임 사제가 떠나고 후임 사제가 오면 되지만 코로나도 비자 업무가 늦어지면서 몇 달씩 사제가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후임 사제가 오지 못해서 걱정하는 공동체를 보았습니다. 제게 찾아왔지만 저는 이미 다른 공동체의 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기 때문에 직접 도와 드리기가 어려웠습니다. 다행히 수도회 신부님들과 연락이 되었고, 공동체는 주일 미사를 지낼 수 있었습니다. 수도회 신부님들도 매 주일 시간 내기가 쉽지 않았고, 거리도 멀어서 어려워하였습니다. 다행히도 근처 대학에서 유학 중인 사제가 있었습니다. 유학 중인 신부님과 공동체가 만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였고 공동체의 사정을 알게 된 신부님은 기꺼이 미사를 도와 드리겠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유학 중인 사제가 시간을 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차가 없는 신부님이 성당으로 이동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보니 모든 것이 원활하게 해결 되었습니다. 신부님의 논문을 도와 드릴 전문가가 있었습니다. 전임 신부님이 이용하던 차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잘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한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서 푸른 열매를 맺고,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것을 따르고, 욕심을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신앙인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외로운 이들, 굶주린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는 가난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는 필요한 요소이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 형제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함께 할 때,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구원을 받을 필요하고도 충분한 조건을 다 채우는 것입니다. 자유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양승국신부-
불붙는 지옥에서 쌩고생하고 있는 부자의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데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가로막힌 높은 장벽을 허무는 노력을 조금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살아생전 높이 높이 쌓아올린 천문학적인 재산의 원천이자 주인이 주님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었습니다.
의료수준이나 위생관념을 기대할 수 없었던 예수님 시대, 가난한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난히 피부병이 창궐했습니다. 더구나 피부병이 지닌 신속한 전염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피부병에 노출되어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당국자들도 피부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세부적인 법조항까지 만들어 강하게 적용시켰습니다.
예수님의 표현에 따르면 라자로가 앓던 피부병은 심각했습니다. 온몸이 ‘종기투성이’였습니다. 종기가 심해지다 보니 제대로 운신조차 할 수 없어 부자집 대문 앞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런 라자로였기에 집주인인 부자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지나갈 때 마다 재수 옴 붙었다는 눈길로 침 한번 ‘퇘!’하고 뱉고 지나갔습니다. 놀러온 개들은 누워있는 라자로를 보고 꼬리를 흔들었고 그의 종기를 혀로 핥았습니다.
가장 괴로운 일 중에 하나는 굶주림이었습니다. 몸이 성치 못하다보니 적극적인 구걸도 하지 못했습니다. 가끔씩 식탁에 앉은 부자가 먹다먹다 지쳐 바닥으로 닭다리 하나를 던지면, 라자로는 ‘이게 웬 떡이냐’며 기어가 감지덕지하며 주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드믄 일이어서 라자로는 항상 배가 고팠습니다.
라자로의 불행도 불행이지만 부자의 매정함은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분노하시며 질타하시는 것은 바로 부자의 무자비함입니다. 어떻게 한 인간이 다른 동료 인간의 불행 앞에 눈 한번 깜짝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너의 아픔이 곧 내 아픔, 그의 비참함이 곧 나의 비참함’이 모토였던 예수님이셨습니다. 당대 벌어지던 부자들의 매정함과 무자비함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예수님이셨기에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를 드시면서 당대 부자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신 것입니다.
부(富)는 사실 좋은 것입니다. 어느 정도 재물이 있어야 인간적인 품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돈이 있어야 궁핍한 이웃과 나눌 수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돈이 필요합니다.
열심히 일해서 모은 돈, 그리고 건전한 방법으로 축척한 재물은 주님의 축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건전한 재물로 인생을 즐기는 것도 참 좋은 것입니다. 내가 매일 땀 흘려 모든 돈으로 여행도 다니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하고 삶을 만끽하는 것은 주님께서 바라시는 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시는 것은 재물에 대한 과도한 집착입니다. 돈이면 다, 돈이 최고라며 돈에 모든 것을 거는 그릇된 신조입니다. 재물을 주님이나 신앙보다 더 위쪽에 두는 황금만능주의를 질타하시는 것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해서 없는 사람 업신여기는 부자들, 가까운 동료 인간들이 저리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 저리도 힘겨워하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는 부자들,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측은지심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부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경고는 강력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주님께서 오늘 부자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한 가지 있습니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것입니다. 부자들의 세상과 가난한 사람들의 세상을 갈라놓은 구렁 그 위에 다리는 하나 놓은 일입니다. 사랑의 다리, 관심의 다리, 나눔의 다리, 측은지심의 다리...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
-반영억신부-
천국에 대한 희망은 어떠한 시련의 십자가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루에 한 번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살지만 아버지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하신 천국본향을 그리워해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부활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을 때 세상과 타협하게 됩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희망은 온갖 환난을 이겨내는 힘이며 능력입니다. 현세의 이익과 행복을 뛰어넘는 고달픔을 차지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이 세상을 소중히 여기지만 결국은 관리를 하다가 하느님 앞에 서야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매순간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뻐합니다. 천국본향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는 그만큼 우리의 삶은 풍성해 집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부와 가난을 견주어 ‘복이 있는 사람’, 복이 없는 사람, 혹은 ‘팔자가 좋은 사람, 팔자가 사나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복음은 그 생각을 바꾸도록 안내합니다. 부자는 잠시 동안 호화로운 삶을 즐기다가 영원한 고통을 안게 되었고, 반면 라자로는 잠시 동안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특별히 어떤 잘못을 범했다거나 선행을 하여서 그런 결과를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렇게 살다 보니까 한 사람은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 한 사람은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부라는 것이 좋은 것이기도 하지만 하느님을 멀리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르10,25). 잠언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분명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보고,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봅니다.
혹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에 겨워 이웃에게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지금 너무 힘들어 절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나만 생각하고 살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무관심이 죄입니다. 무관심한 사람에게는 누구의 가르침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그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져야 합니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25,46).
지금 힘든 이들도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렇게 시험을 통과하면, 그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야고1,12). 그리고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한12,24).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마태10,22). 그러므로 시련을 만나게 될 때 하늘을 바라보며 신뢰를 다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여정 안에서 시련도 유혹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유익한 것입니다.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됩니다”(집회2,5). 예기치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깨어서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늘 우리를 기다리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한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고 천국을 장담할 수 없는 만큼 지금 여기서 주님의 마음에 들게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보다 세상을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천국은 이 세상에서 열리게 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앵무새를 키우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습니다. 앵무새도 날마다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고 따라했습니다.
젊은이는 살기가 너무 힘들어 신부님을 찾아 상담하기로 작정하고 앵무새를 안고 사제관으로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사제관에도 앵무새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앵무새가 “아이고 힘들다. 아이고 죽겠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사제관의 앵무새가 답례를 하였습니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될 것이다!”
지치고 힘들 때 “내 힘들다!”고 낙심하지 말고,
거꾸로 “다들힘내!”라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
-송영진신부-
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다음 말씀에 대한 설명입니다.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긴 사람입니다.
‘라자로’는 하느님만 섬긴 사람입니다.
<우리는 라자로의 가난에 대해서,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은 그렇게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는 “가난했기 때문에 하느님만 섬길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해도 안 됩니다.
사실 가난해서 재물에 더 많이 집착하고, 재물을 섬기는 사람도 많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라자로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들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2)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나오는 다음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5-46).”
라자로는 ‘가장 작은 이’이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면,
라자로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께 사랑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라자로는 무엇을 했는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하루 종일 누워 있으면서(루카 16,20) 배를 채우기만을 간절히
바랐던(루카 16,21) 라자로가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어떻게 실천했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한 일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아무것도 못하는 상황이라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라자로가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최선을 다해서 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3)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가장 큰 계명’에 관한 말씀에도 연결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마태 22,37-39).”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라자로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부자는 라자로를 자신의 식탁에, 즉 자신의 옆자리에 앉혀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먹는 음식을 라자로와 함께 먹어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은
흔히 말하는 ‘나눔’과는 다릅니다.
이 계명은 ‘나눔’이 아니라 ‘하나 되기’를 강조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면 라자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했는가?
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기도’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도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이 됩니다.>
4)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다음 말씀들에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2-1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들을 만들어라. 그래서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거처로 맞아들이게 하여라(루카 16,9).”
이 말씀들은,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특히 더 잘 새겨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들이지만, 부자가 아닌 사람들도 실천해야 하는 말씀들입니다.
즉 ‘모든 사람’이 실천해야 할 말씀들입니다.
사랑은 ‘편 가르기’를 하지 않습니다.
인간 세상에서, 부자 같은 사람들과 라자로 같은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세상의 사람들인 것처럼 갈라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승에 있는 ‘큰 구렁’에 관해서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다음 말은,
이승의 상황에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6).”
원래 이 말은, 천국과 지옥은 완전히 갈라져 있고,
한 번 내려진 하느님의 선고는 번복되지도 않고, 취소되지도 않는다는 뜻인데,
이승의 상황에 적용하면, 인간 세상에서 부자와 라자로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을 나타내는 말이 됩니다.
그 장벽은(큰 구렁은) 부자가 만든 것입니다.
부자는 라자로 쪽으로 건너가려 하지도 않고, 라자로가 부자 쪽으로
건너가는 것도 막고 있습니다.
이승에서 그 장벽을(큰 구렁을) 없애는 일은 부자 자신이 해야 합니다.
5) 예수님께서는 ‘선행’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르 9,41).”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는,
라자로에게 ‘마실 물 한 잔’도 주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있는, “그는(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루카 16,21).”
라는 말은, 부자가 라자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음을 나타냅니다.
(오며가며 라자로에게 빵 부스러기를 조금씩 던져 주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더라도 그것은 마치 개에게 던져 주는 것과 같았을 것입니다.)
6) 비유에서 부자가 자기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을(루카 16,27-28)
겉으로만 보면 ‘좋은 일’로 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그것은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이기심’입니다.
부자는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면서도(루카 16,23)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고,
라자로 같은 이들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7)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31).” 라는 아브라함의 말은,
부활 신앙과 기본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로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기본적인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실천 없는 믿음’, 즉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루카 16, 31)
-한상우신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우리들
시간이다.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실상이다.
가장 단순한
진리로
돌아가는
은총의
사순이다.
어느 것 하나
내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우리들 생명이다.
죽음 너머
또 다른 삶이
있다.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죽음은
위선의 가면을
벗게한다.
지치고
쓰러진
라자로를 향해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시는
주님이시다.
생명을
위로하시고
삶을
위로하신다.
눈에 보이는
세상만이
전부는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우러져 사는
삶을 보여 주셨다.
가난한 라자로와
부자는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이다.
미움과 멸시
반목과 대립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가
잘못을
고백하고
허물을
고치는 것이
삶과
죽음에 관한
참된 회개이다.
죄가
있는 곳에
회개가 있고
회개가
있는 곳에
위로의
하느님 나라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며
우리보다
먼저 살다
떠난 이들의
값진 유언이다.
용기내어
다시 시작하는
회개의 삶이다.
무관심에 대하여
-김찬선신부-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오늘 복음의 얘기는 제 생각에 어떤 부자가 주인공입니다.
주님께서 비유를 드시며 얘기를 시작하시는데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로 시작하는 것을 보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인공이 아니거나 부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라자로는 이름이 있는데
주인공인 부자는 이름이 없고 그저 어떤 부자라고만 합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은 그 반대로 라자로는 이름이 없고 그저 거지로 불리고,
부자는 오히려 그 지역에서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하느님 나라에서는 이름이 등록되지 않아 이름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일 겁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왜 하느님 나라에 이름이 등록되지 않았을까요?
라자로에게 못할 짓을 하고 못살게 했기 때문일까요?
그런데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잖아요?
그러므로 라자로와의 관계 때문에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갔다면
그것은 그에게 한 나쁜 짓 때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는 악행을 한 것이 아니라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고,
미워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지 않은 것일 뿐이며
악한 사람이 아니라 관심이 없는 사람 곧 무심한 사람일 뿐입니다.
성찰을 이렇게 하면 우리도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도 남에게 나쁜 짓 하지 않은 것으로 천당 갈 거라고 생각하고,
적어도 지옥 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랑 없음과 관심 없음으로 인한 이 세상에서의 관계 단절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이어져 모든 관계가 단절된 고립을 살 수밖에 없게 하지요.
비유에서 부자는 하느님은 아예 보지도 못하고 라자로와의 접촉만 시도합니다.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를 돕게 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청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큰 구렁 때문에 불가능하다며 청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성찰을 합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것과
관계를 맺지 않고 고립을 사는 것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부자는 자기의 집, 자기의 성 안에서 살았습니다.
자기의 성 안에는 부족한 것이 없이 다 있고,
그 안에서 자기와 가족들은 안전하고 평화로웠습니다.
문 밖의 라자로를 보면서도 마음은 전혀 불편하지 않았거나
마음이 불편할까 봐 아예 관심을 끄고 외면했을 겁니다.
자기의 성 안에서 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는
오늘 독서 예레미야서 말씀처럼 하느님도 필요치 않았을 겁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빠져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는 주님 말씀의 뜻이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무관심에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 뿐 아니라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는 하느님 나라 무관심도 있고,
어쩌면 이것이 더 끔찍한 무관심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도
나자로에 대한 무관심보다 하느님 나라 무관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비유의 끝에 자기 형제들만은 회개하여
지옥에 오지 않도록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다시 청하는데
이때 형제들이 해야 할 회개란 어떤 회개일까요?
그것은 무관심이고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 무관심이겠지요.
무관심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F8nA/btqQ0PG6aOz/UDuWeXSP91LjxbotLRQ6l0/img.jp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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