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5일 사순 제2주간 화요일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마태오 23,1-12)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have taken their seat on the chair of Moses.
Therefore, do and observe all things whatsoever they tell you,
but do not follow their example.
For they preach but they do not pract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소돔과 고모라를 향하여, 그들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리고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제 방에 공기청정기가 있습니다. 공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책상 옆에 두고 작동시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제 주위의 공기가 제일 깨끗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공기청정기가 있는 방에서 공기 오염도가 가장 높은 곳은 공기청정기 옆이라는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공기청정기는 오염된 공기를 정화하여 신선한 공기로 바꾸는 장치이지요. 따라서 오염된 공기가 어디로 모일까요? 공기청정기 옆으로 모이고, 그래서 가장 오염도가 높은 장소가 되기에 공기청정기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유익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재물이 많으면 좋을 것 같지만, 이 재물 때문에 가족이 갈라져서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불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모으겠다고 애를 쓰다가 결국 법적 처벌을 받는 경우도 봅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하지만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스트레스로 힘들어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공기청정기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작용할 수 있는 것에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분명 좋습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도록 하는 계도권을 가지고 열심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가르치는 것을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말로만 가르치고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행실을 따라 하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들의 행실은 모두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구갑을 이마나 팔에 달고 다니는 것, 옷단에 술을 길게 달고 다니는 것, 높은 자리에 앉는 것,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하는 것 등은 열성의 표시가 아니라 인간적인 허영의 표일 뿐이었습니다. 자기들의 경건성을 보이고, 사람들의 신뢰심을 얻기 위할 뿐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이기심이 하느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 한 형제이며, 하느님의 아버지의 똑같은 자녀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우리를 가르쳐 인도해 주시는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래서 늘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따라야 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나는 이웃을 대하는 본성으로 하느님께 나아간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P9ALKjXd3fI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무거운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사람들에게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불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으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아버지나 스승, 선생으로 대하라는 뜻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결론지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결론적으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문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깔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도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이웃에게 영광을 추구하는 이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하느님 공경이 위선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저도 봉사자들을 어쩔 수 없이 평가해야 할 때 저에게 대하는 모습을 보지 않고 더 아래 봉사자에게 하는 모습을 봅니다. 저에게는 사제이기에 모두 잘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본심이라기보다는 저를 이용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하는 모습을 보면 ‘아, 저 사람은 자아가 강하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사람이 저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면 믿지 않습니다. 물론 싫어하는 것은 아니고 아랫사람을 더 공경하고 높여줄 수 있는 봉사자가 되도록 인도하려고 합니다.
제일 겁나는 것은 저 자신입니다. 저도 제가 신자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하느님을 대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신자들에게 아버지라 불리고 스승이라 불리려는 모습을 보면 바리사이나 율법학자와 다를 게 없음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본성과 윗사람을 대하는 본성이 다를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남편을 대하는 모습을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남편을 대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자신의 불만족을 채우기 위해 자녀를 이용하는 아내라면 남편에게 다르게 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따르는 본성은 하나입니다.
동물원 우리 속의 곰은 매우 유순해 보이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곰을 본인이 키워보려 하다가 뼈만 남게 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러시아의 한 사냥꾼이 자신의 마당에 있는 케이지에서 애완용으로 키우고 있던 불곰에게 잡아먹힌 일이 있습니다. 4년 전 사냥 중이던 세르게이는 새끼 곰 두 마리 중 한 마리를 자신이 키웠습니다. 그 곰은 자신의 마당에서 개들과 함께 자랐습니다.작은 곰은 빠르게 성장을 하고 야생성을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르게이는 곰을 자신이 키워준 덕분에 자신에게 해를 가하지는 않을 것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곰은 성장하면서 세르게이를 공격하기도 하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곰을 보호소로 보내라고 하였지만, 세르게이는 충고를 무시하고 곰을 계속 데리고 다녔습니다. 곰을 길들이며 산다는 일종의 과시욕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세르게이는 보이지 않았고 곰의 우리가 열려 있었습니다. 세르게이와 세 마리의 개 모두 잡아먹혔습니다. 그중 한 마리의 개는 뼈도 남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맛을 본 곰은 또 인간을 노릴 것이기에 경찰들은 흔적을 쫓아 곰을 찾아 사살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배은망덕한 불곰의 탓일까요, 아니면 곰의 본성을 무시하고 자신 뜻대로 커 주리라 여긴 주인의 잘못일까요? 본성은 본인이 인간이라고 믿기 전까지, 그러니까 두 발로 걸으려고 시도하기 전까지는 변한 게 아닙니다.
2003년 곰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야생에 들어갔다가 곰에게 잡아먹힌 티모시 그레드웰은 그의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맨’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만약 겁먹으면 나는 아마 죽거나 다칠 겁니다. 이 땅에 있으려면 정신을 꽉 잡고 있어야 해요.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들은 날 갈기갈기 찢을 거예요. 그러면 전 죽습니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보호하며 그들을 위해 죽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죽을 거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날카로운 야생에서 싸우며 강해질 것이고 나는 그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마스터(스승)가 될 것입니다.”
그의 이 말에는 상대는 내가 하기 나름이라는 자만심이 들어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도 상대를 내 의지에 따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상대는 언제나 자기 본성에 따라 움직입니다. 속으면 큰일입니다. 왜 다른 것을 잡아먹는 곰이 자신은 안 잡아먹을 것이라 여기는 것일까요? 아무리 개가 아기들을 잘 돌봐준다고 하더라도 절대 개와 아기 둘만 남겨두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개가 고기의 맛을 안다면 다시 늑대처럼 언제 돌변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본성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본성으로 본다면 그 사람은 그 하나의 본성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볼 것이고 그 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방식으로 자신도 대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앙이 있는 어머니가 자녀와 온전한 관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인간이라 믿으면 난 언제나 곰과 같은 모습입니다. 언제든 나를 키워준 주님을 먹을 수 있는 상태입니다.
나의 본성은 내가 하느님이라 믿을 때, 그래서 하느님처럼 할 수 있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도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본성으로 보시기 때문에 그 전에 당신을 보여주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믿지 않으면 관상기도로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는 단계에서도 내가 자녀에게 이 믿음을 주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나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준비가 되지 못했습니다.
내가 자녀에게 하느님과 같은 본성임을 알려주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걱정, 근심하고 또 경쟁하며 살도록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께 맡기면 다 잘 될 것이라 믿을 것입니다. 자녀 때문에 걱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하느님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상대를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내가 하느님을 어떤 본성으로 대하느냐가 결정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에게 키워졌습니다. 그리고 개 우리에서 5년동안 키워졌지만 20년이 지나도 본인은 개라고 믿습니다. 끝까지 본인이 개라고 믿으면 사람과 관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요? 아닙니다. 사람에게 “너는 사람이야!”라고 보아주고 말해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아직 사람의 본성을 가진 게 아닙니다. 이웃을 대하는 본성이 나의 본성입니다.
예능 프로그램인 ‘꽃보다 누나’ 촬영 때 4년간의 암 투병을 숨기고 활동하던 김자옥 씨가 자그레브 대성당을 들어가자마자 신자도 아닌데 눈물을 철철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당은 그저 그녀에겐 돌과 유리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김자옥 씨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무언가 기도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종교와 상관없이 이 돌로 지어진 건물 안에 나보다 더 위대한 누군가의 존재가 함께하고 있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이웃이 그저 돌집처럼 보여도 주님의 존재를 품고 있습니다. 그래야 내가 주님과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따라서 겸손은 모든 사람을 하느님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할 때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느님을 대하는 것처럼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사람을 하느님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나도 하느님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내가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녀에게 대하는 모습이 남편에게 대하는 모습이고, 아랫사람을 대하는 모습이 윗사람을 대하는 모습이고, 이웃을 대하는 모습이 주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대하는 본성을 알고 싶거든 내가 이웃을 어떤 본성으로 여기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지키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fjKsbJHdu0
진리이신 하느님께서는 진실로써 인간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악마는 그 진실을 거짓으로 가리거나 덮어서 방해를 합니다. 역사에서도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진실과 거짓이 치열하게 다투는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 일러주시는 빛으로 거짓을 들추어내어 진실을 드러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으로 전체를 보되 본질을 꿰뚫어볼 줄 아는 안목을 발휘한 것이지요.
이집트에서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거나 스핑크스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을 거대한 신상으로 만들어 섬기던 이집트의 우상숭배를 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 들어와서도 뱀이나 물고기 같은 짐승의 상을 거대한 나무나 돌로 만들어서 숭배하는 또 다른 우상숭배에 직면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서 비롯된 이들 주변 민족들의 문화는 이런 우상숭배 종교를 위해 화려하고 눈부시게 발달되었습니다. 그 반면에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선택하신 하느님의 종교는 역사상 징표를 드러내실 뿐 우상숭배 종교들의 화려한 문화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화려한 우상숭배 종교와 그 문화에 빠져 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간파한 이사야는 동족을 향해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그 유명한 두 도시의 이름을 소환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소돔의 지도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앙에 따른 윤리를 가르쳤는데, 그 윤리는 무미건조한 듯하지만 올바르고 깨끗한 길이었습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이사 1,16).
이러한 예언자들의 정통 노선 위에서 예수님께서도 그 당시에 지배층과 민중을 다 함께 지배하고 있던 정신 풍조인 바리사이즘을 정면으로 비판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다”(마태 23,2)는 말이 그 서론입니다. 모세가 받들었던 하느님 신앙도 없이, 그 신앙 덕분에 백성으로부터 받았던 권위만 취하고, 신앙 없는 윤리만 공허하게 가르치고 있었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내세운 형식논리를 신랄하게 비판하시면서 그 핵심을 찔러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형식논리는 율법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 그 자구(字句)대로 지키라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 내놓으신 핵심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섬기듯이 사람들을 섬기라는 매우 단순하고 명쾌한 말씀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자신들도 6백 가지도 넘은 규정들을 다 알지도 못해서 규정과 규정이 충돌할 경우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놓고 허구헌 날 입씨름을 하기 바빴으며, 그러한 공리공론의 와중에 “어느 율법이 가장 중요한가?”를 예수님께 질문했던 것이었습니다. 설사 그들이 가장 중요한 율법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해도 자신들은 손해를 볼까 두려워 제대로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사소한 규정을 지키느라고 사람들 앞에서 생색내기 일쑤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들의 재산을 등쳐 먹으면서 형식적인 십일조를 헌금한다고 자랑했고, 기도를 해도 성전이나 저자 거리에서 보란 듯이 길게 빈 말을 늘어놓으며 기도 바쳤으며, 기도 중에도 겸손하게 자신이 저지른 죄를 뉘우치거나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신을 자랑삼아 늘어놓으며 축복을 구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과 청중들에게도,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 입으로 가르치는 말을 따라서 지키도록 힘쓰되, 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행실은 따라하지 말라고 인간관계에 필요한 지혜를 나누어주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고 진정성입니다. 말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윤리에서도 사랑의 최대한과 최소한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것을 먼저 그에게 내가 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연이나, 우리가 자유로이 선택해서 맺은 인간관계에서라면 우리가 하는 말은 더 없이 진실해야 하고 행동에 진정성이 담겨야 할 것이며, 이 진실한 말로 한 약속이라면 행동으로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는 최대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목표가 아니라 최소한의 진실과 진정성이 흠나지 않도록 하면 됩니다. 거짓말은 그 누구에게도 해서는 안 될 것이며, 가능한 한 얼마든지 선하고 의로운 이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예의를 갖추어 대함으로써 그 관계의 발전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겪다 보면 분명하게 하느님의 편에 서지 않는 사람임이 드러날 경우가 있습니다. 하는 말이 진실하지 않고 행동에 진정성이 없는 속물형 인간임이 드러날 때입니다. 그럴 때에는 발에 묻은 먼지까지 털어버리는 심정으로 분명한 선을 그어 처신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엮여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기 십상입니다.
-조재형신부-
교구청에 있을 때입니다. 직원이 출산을 앞두고 육아휴직을 신청했습니다. 다행히 임시로 일할 수 있는 직원을 구할 수 있었고, 직원은 출산과 육아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여자 직원의 육아휴직은 들어보았지만 남편의 육아휴직은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좋은생각 2월호에서 남편의 육아휴직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신청했을 때, 회사의 동료들은 모두 말렸다고 합니다. 복직해서 일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육아휴직을 신청했고, 아내와 아들과 1년을 함께 보냈습니다. 함께 여행을 다녀왔고, 몸이 불편하신 아버지를 위해서 기꺼이 시간을 내서 병간호도 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인터넷 블러그에 틈틈이 글을 썼습니다. 남편이 아이와 함께 읽은 동화책이 281권이었다고 합니다. 아이와 함께 지낸 이야기를 기록한 육아일기가 516편, 조용한 새벽을 틈타서 혼자 읽은 책 383권의 독서일기까지 1,180개의 추억을 글로 남겼다고 합니다. 가정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게임에 몰두하고, 기도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물질적인 뒷받침은 하지만, 아이와 함께 정서적으로 지내지 못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1년간 육아휴직을 낸 남편의 결단을 존경합니다. 그 시간 온전히 가족을 위해서 헌신한 남편의 행동을 존경합니다.
저도 사제생활 27년을 지내면서 1년간 안식년을 신청했습니다. 3개월은 제주도에서 중견사제 연수를 했습니다. 2개월은 미국에 있는 동창 신부 성당에서 미사를 도와주었습니다. 틈틈이 강의를 하였습니다. 이탈리아 돌로미테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북유럽으로 여행도 다녀왔습니다. 그렇게 1년간의 안식년이 물 흐르듯이 지나갔습니다. 가족을 위해서 육아휴직을 신청했던 남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부끄러웠습니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을 했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지는 못 했습니다. 매일 강론을 준비했지만 책 읽는 시간이 적었습니다. 27년 사제생활을 돌아볼 성찰의 시간도 적었습니다. 피정과 기도의 시간도 갖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본 받을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따라하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우리가 악행을 버리고 선행을 배울 수 있다면,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핀다면 비록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목자, 온유하고 참을성 있으며 자비로운 사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꽤나 거친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마음속이 뜨끔했습니다. 왜냐하면 한 말씀 한 말씀의 지향점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저희 사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은 더욱 신랄하고 강경합니다.
“신분으로 사제인 자는 많으나 행동으로 사제인 자는 적습니다. 자리가 사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제가 자리를 만듭니다. 장소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장소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모든 사제가 다 거룩한 것은 아니지만 거룩한 이는 모두 사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악한 사제는 자신의 사제직에 의해 유죄를 선고받을 것이며, 사제직에서 오는 영예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거짓 사제들은 철저하게 이중적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는 그 어떤 관용도 베풀지 않고 극도로 엄격한 삶의 규율을 지키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는 그다지 엄격하게 굴지 않습니다. 착한 목자는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엄격하고 준엄한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온화하고 관용을 베풀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눈과 심기를 거슬렀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인 눈꼴 사나운 모습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입고 다니던 요란한 옷에 성구갑을 넓게 만들어 매단 것, 그리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어트린 것입니다. 그렇게 웃기는 짬뽕 같은 옷차림을 하고는, 어딜 가던지 거들먹거리면서 상석에 앉고 싶어 혈안이 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참 제자들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요란스러운 의상이나 장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스승님의 가르침에 따라 내용과 본질에 충실했기에, 외적인 것, 부차적인 대상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손에 묶은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가르침을 묵상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영혼의 눈으로 볼 때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예수님의 덕행이었습니다.
“사목자들! 우리에게는 진정한 사목자들이 필요합니다!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목자, 온유하고 참을성 있으며 자비로운 사목자를 원합니다. 내적으로는 물론 외적으로도 가난하며,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즐기는 사목자를 찾습니다. 만일 한 사목자가 군주의 사고방식을 지니고 행동한다면, 우리 교회에 그보다 더 큰 악몽은 없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자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죄상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 그는 가르치되 언행불일치하는 이가 아니며, 남에게 짐 지우지 않는 이입니다.
곧 언행일치, 실천궁행하는 이, 곧 말씀을 성취하는 이요,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타인의 짐마저 짊어지는 이입니다.
둘째, 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이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아닌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일을 하시는 이입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이입니다.
셋째, 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이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이요, 섬김을 받으려하기보다 섬기는 이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진정으로 스승을 찾고 있는 것일까를 물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자기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지만 스승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인생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모시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스승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니, 그들에게 머리 굽히지를 못하기 때문에 오늘도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을 뿐일 것입니다.
혹은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무지가 들추어지면 감사하기보다 상처를 받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참된 스승이 있는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인가?"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이제 다시 ‘자리’의 문제로 돌아와 봅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를 차지하고 ‘스승’으로 대우받고자 하였는데, 나는 지금 누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섬김의 종이신 예수님의 자리인가?
그리고 섬김을 배우는 제자의 자리인가?
아니면 섬김을 받고자 하며 가르치며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마태 23,11)
<오늘의 말 · 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실행함으로써 행복하라」
-반영억신부-
살아가면서 더 나은 것을 추구하고 더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입니다. 그런데 높아지려고 하다가 하루아침에 낭패를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욕심은 끝이 없어서 만족시켜 주면 줄수록 그 요구가 더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높아지려다가 오히려 푹 떨어지게 됩니다. 그들이 ‘높’ 자를 거꾸로 하면 ‘푹’ 자가 된다는 것을 생각했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공자께서도 “남의 선생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탈”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망친다고 합니다. 그러니 높아지려고 애쓰며 남을 가르치려 하기보다는 삶으로 말해야 하겠습니다. 요즘 정치인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자기만 잘났다고 하며 상대의 소리는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당시 사회에서 스승이요, 지도자로 행세하고 남들이 그렇게 인정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사실 권위는 자기가 내세우기보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억지로 강요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삶이 뒷받침될 때 자연히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2-3). 고 하셨습니다.
높이 오르면 더 멀리, 더 많이 볼 수 있고 그렇다면 더 많은 사람의 요구를 채워줄 수 있으련만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넉넉해지고 자상한 어른이 되어야 하거늘 몸이 말을 듣지 않으니 부끄러움만 더해갑니다.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지만 나와는 무관한 말씀으로 듣고 살아갑니다.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 길을 서슴없이 가는지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8). 고 말씀하신 대로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삶으로 사랑을 증거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해야 합니다. 누가 먼저 인사하기를 바라지 말고 먼저 인사할 수 있는 날, 누구에게 무엇을 시키기보다는 솔선수범하는 날, 무엇을 기대하기보다 먼저 베푸는 은총의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는데 오늘만큼은 행동함으로써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송영진신부-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 같은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고,
‘어린이 같은 사람들’만 살고 있는 나라입니다(마태 18,3; 19,14ㄹ).
“왜?” 라고 물으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전의 순수했던 상태가
원상 복구된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말씀은,
우리에게는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라는 훈계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위선자들’을 뜻합니다.
그런 ‘위선자들’은 ‘어린이들’의 반대쪽에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만, ‘위선자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묵시록을 보면, “부정한 것은 그 무엇도, 역겨운 짓과 거짓을 일삼는 자는
그 누구도 도성에 들어가지 못합니다(묵시 21,27ㄱ).” 라는 말이 나옵니다.
‘위선자들’은 ‘거짓을 일삼는 자들’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 23,2-3).”
‘모세의 자리’는 회당에서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칠 때 앉는 자리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학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설교를 하거나 율법을 가르치는 권한을
누구에게서, 또는 어디에서 받았을까?
원래 ‘사제직’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직무이고,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임명하신
사람들이지만(탈출 28,1-5), 율법학자라는 직무는 하느님께서 정하신
직무도 아니고, 그들은 하느님의 임명을 받은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냥 인간의 전통과 관례에 따른 직무일 뿐입니다.
따라서 율법학자가 하는 일을 ‘합법적인’ 권한과 역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의 권한과 직무를 인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모세의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는 ‘강한 비판’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그들의 말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만’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누가, 어디에서 말하든지 간에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은
그 자체로 진리이고, 누구나 지켜야 하는 ‘하느님의 법’입니다.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처럼 살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따라 하면 안 되는 행실을 하는 자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으면 안 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라는 말씀은,
“율법학자들은 위선자들이다.” 라는 뜻입니다.
실행하지 않는 말은 ‘빈말’이고, ‘죽은 말’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 자체가 ‘빈말’이나 ‘죽은 말’이 되는 것은 아니고,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들 자신들에게만 ‘빈말’과 ‘죽은 말’이 됩니다.
(위선자들의 행실을 따라 하는 사람들에게도 ‘빈말’과 ‘죽은 말’이 됩니다.)
그런 자들에게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어떻든 위선자들이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을 ‘빈말’과 ‘죽은 말’로 만드는 것은 대단히 ‘큰 죄’입니다.
<‘빈말’과 ‘죽은 말’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위선자들은 자신들의 위선 때문에
하느님의 계명들과 율법들에 들어 있는 생명력을 받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말씀들은 위선자들의 위선을 구체적으로 예를 든 말씀들입니다.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마태 23,4-7).”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위선, 교만, 허영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위선자들은 ‘말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실제로는 하지 않는 자들이고,
하느님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만 신경 쓰는 자들이고,
잘난 체 하고, 우쭐거리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마태 23,8-10).”
이 말씀은,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번역하고, 정확하게 해석하고 실천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만, 해석은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말씀’ 자체의 힘과 권위는 주님의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말씀’ 자체를 비판하면서 주님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은
신앙인으로 살지 않겠다는 뜻이 될 뿐입니다.
(오늘날의 일부 성서학자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볼 때가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우리는 이 말씀의 표현이 아니라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높아지기 위해서 낮추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남을 섬기는’ 종이 되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남을 섬기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섬김을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위치에서 똑같은 사랑을 나누는 나라입니다.
‘높이다. 낮추다. 높아지다. 낮아지다.’ 라는 말은,
‘같아지는’ 과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말씀 나누기 - 사순 2주 화요일-얼마나 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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