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16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주민들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구덩이를 파 놓았다고 주님께 하소연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예루살렘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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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생 때 성당에 갔다가 후배 여학생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오빠는 기타 못 쳐요? 저는 기타 치는 남자가 너무 멋져 보여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여학생들도 “나도 그런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부가 되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였지만, 여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남학생이 되고픈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름방학 내내 기타만 쳤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기타 코드도, 힘든 주법도 상관없었습니다. 여학생들이 기타 잘 치는 남자가 멋지다고 하니까…. 힘들지 않게 기타를 스스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모든 게 쉬워진다고 합니다. 그 대상이 좋아하는 것이면 뭐든 따라 좋아하게 되고, 그 덕에 능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렵다고들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로 쉽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운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니 저 역시 원하는 것이 되고 그만큼 신앙생활도 쉬워질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힘든 것은 사랑의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이 아닌, 세상의 눈으로만 보면 큰 걸림돌로만 생각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이미 두 번에 걸쳐 말씀하셨고, 이번에 세 번째의 마지막 예고로 그만큼 시간이 임박했습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들을 하느님 나라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하지요. 아직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일의 성과를 욕심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 모든 영광은 고통과 시련을 받아내지 못하면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이 이 말을 듣고서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깁니다. 이들 역시 그 영광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아직 세속에 잠겨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주님 사랑에 집중하며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쉬워지며,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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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자녀를 경쟁시키지 않는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yjFTduf_KwY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VT5nZ7TEpnw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을 가시면서 당신께 임박한 운명을 알려 주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고 있지만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이었는데, 벌써 세 번째 예고였습니다.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에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사탄이라고 부르시며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마태 16,21-23). 모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신앙을 고백하는 말까지 들은 참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신 참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반박까지 했던 까닭이야 한껏 들떠 있던 제자들이 십자가 예고 말씀으로 벼락을 맞은 기분이었던 탓이겠지만, 예수님으로서도 제자들을 3년 동안이나 가르쳤는데도 알아듣지 못하고 전혀 기대 밖의 반응을 보시자 너무나 실망하신 나머지 호통을 치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시고 타볼산에 올라 기도하시며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모습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이 세 제자가 얻은 확신이 나머지 제자들에게도 전해졌으리라고 기대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십자가와 부활 예고를 하셨지만, 제자들은 몹시 슬퍼했을 뿐 도무지 알아듣는 눈치가 아니었습니다(마태 17,22-23).
그리고 나서 세 번째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신 말씀이 오늘 복음입니다. 이번에는 제자의 어머니가 슬그머니 끼어 들었습니다. 아마도 당신의 두 아들을 출가시키고 나서 줄곧 따라 다녔던 모앙이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무언가 좋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엎드려 절하기까지 하면서 간청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스승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태 20,21). 이러고 보면 그 어머니나 제자들이 알아들은 하느님의 나라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실현되리라고 기대한 현세의 왕국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왕정국가로 치면 우의정과 좌의정 자리를 청탁한 셈입니다. 그런데 이를 바로 옆에서 지켜본 나머지 제자들의 반응 또한 비슷한 수준이었습니다. 제자가 열두 명이나 되는데, 이 결정적인 기회라고 보여지는 때에 어머니까지 내세워서 자리 청탁을 한 야고보와 요한에게 불쾌하게 여긴 것입니다. 현세적 영광을 노린 어머니의 치맛바람이요, 제자들도 누가 더 나을 것도 없는 한심한 처지 그 자체입니다.
분위기가 이처럼 한심하게 돌아가자 예수님께서 비장한 각오로 그들을 가까이 불러 타이르셨습니다: “나는 왕좌에 오르러 가는 길이 아니라 죽으러 간다. 너희도 내 제자가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나와 함께 있으려면 죽든지 섬기든지 해야 한다.”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 유언 같은 말씀 다음에 눈을 뜬 예리코의 소경 이야기를 삽입해 넣었습니다. 마치 부활 신앙에로 눈을 떠야 한다는 메시지로 들립니다.
시대를 5백 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예레미야도 예언자로 한창 활동하던 상황에서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로부터 사악한 음모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께 항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가 이 부당한 대우를 받기를 바라신 것은 아니었겠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에게 닥친 운명은 이렇게 비정하였습니다. 선이 악에 의해 버림받는 지경이 그것입니다. 십자가 운명을 앞두신 예수님의 예형입니다.
세상의 죄를 없애시려 세상에 오신 예수님께서 이런 상황에서 보여주시고 또 제자들에게도 요구하신 처신은 선에 대한 악의 음모가 가하는 십자가의 운명을 피하지 말고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받아들이되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악이 짊어지워준 십자가는 끝이 아니고, 끝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예고는 부활 예고와 한 묶음입니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부당한 십자가지만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당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야말로 이미 하느님 나라의 처신이요 따라서 벌써 그 나라에서 부활해 살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골고타 언덕에서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이전에도 공생활 내내 차원이 다른 현실적인 여러 십자가들을 짊어지셨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참아가며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분을 버틸 수 있게 해 준 힘은 부활이요 성령의 기운이었습니다.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은 엘리트 계층으로부터는 노골적인 박해를 받으셔야 했고, 군중들에게는 무관심을, 제자들에게마저도 몰이해의 십자가를 받으신 모습 자체가 그분이 현실 안에서 부활하시는 모습이었으며, 우리의 현실적인 부활 교과서입니다.
단지 결정적이고 대단히 중요한 차이가 있다면 그분은 하느님을 가장 닮으신 아드님으로서 성령의 기운을 받아 그토록 당당하게 십자가를 짊어지실 수 있었지만,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라서 종종 이 십자가를 너무도 힘겹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그분이 믿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현존양식 안에서라면 우리도 그분처럼 성령의 기운으로 능히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분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 그분이 장담하셨습니다(요한 14,12).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양식의 중요성, 이것이 십자가와 부활 예고가 주는 신앙의 교훈입니다.
-조재형신부-
우리 속담에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무원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발 계획을 미리 알고 땅을 사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보를 넘겨주면서 이익을 챙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당에서도 가끔 그런 경우를 봅니다. 봉사하고, 기도하고, 나누는 일에는 소홀하면서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친교와 잔치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친교와 잔치 이전에 봉사와 기도가 먼저 있어야 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신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출된 공직자에게는 이런 저런 이유로 이권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자리는 공정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앞서서 자리를 마련하면 조직은 힘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런 조직은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신문에 나오는 비리와 부정은 대부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들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염불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없는데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거든 내 아들들에게 예수님의 오른편 자리와 왼편 자리를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묻습니다. ‘너희도 그런 자리를 원하느냐?’ 제자들은 ‘예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른 10제자의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영광의 자리를 원하였습니다. 잿밥에 먼저 마음을 두는 것은, 김칫국 먼저 마시려는 태도는 제게도 있었습니다. 인사이동 명단을 보면서 부임지의 성당을 살펴보게 됩니다. 주로 외적인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본당의 크기를 보았습니다. 신자의 숫자를 보았습니다. 본당의 재정 상태를 보았습니다. 보좌 신부님이 있는지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었습니다. 지역에 어려운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봉성체를 원하는 분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쉬는 교우들은 얼마나 되는지 보는 것입니다. 지난 5년간의 사목계획을 보는 것입니다. 주일학교와 청년들의 현황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뜻과 세상의 기준으로 가려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을 알려주십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합니다. 사람은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가야 합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 길은 섬김의 길입니다. 그 길은 겸손의 길입니다.
교회는 누군가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켜주는 장소가 절대 아닙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도 ‘서열’은 꽤 중요했던가 봅니다. 당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있어 하늘같은 존재였습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해야 했습니다.
장남과 차남 사이의 격차 역시 하늘과 땅 차이였습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어느 자리에 앉느냐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목숨을 걸 정도로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그런 가식적인 행동들이 참으로 한심스러웠습니다. 예수님께서 더욱 실망하신 것은 그토록 오랜 기간 계속 반복해서 특별 교육까지 시킨 제자들마저도 아직 자리다툼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측근 제자들끼리, 그것도 길을 걸어가는 도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싸웠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한때 야망과 출세욕으로 가득했던 야고보와 요한 사도,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의 미성숙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에브라임에서 예리코로 내려가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어머니가 나타났습니다. 두 아들을 옆에 세워둔 채 그녀는 예수님께 절을 하면서 일종의 인사청탁을 하였습니다.“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오 복음 20장 21절)
인사청탁을 하러 온 어머니가 설마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분명 한 손에는 품질 좋은 토종꿀 한 병을, 다른 손에는 잘 키운 씨암탉 한 마리를 보자기에 싸서 들고 오셨을 것입니다.
사실 그녀가 보인 행동은 꽤나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용서해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두 아들이 잘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로서, 예수님께 좋은 자리를 청탁하는 것은 야망이라기보다 강한 모성애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큰 문제를 지닌 사람들은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 사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건설하실 새로운 왕국에 대한 헛된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지상적 통치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고, 그 나라가 서게 되면 물좋은 자리, 총리 자리와 당대표 자리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사도가 보여준 모습 중에 꽤나 치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24시간 동고동락하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조금 한가한 시간에 스승님께 면담을 신청하고 자신들의 속마음을 직접, 솔직히 표현하고 청했으면 차라리 나았습니다. 그런데 두 제자는 비겁하게도 어머니를 앞세워 간접적인 인사청탁을 시도한 것입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미성숙한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자괴감은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시 예수님께서는 자상하고 친절하게 당신 사명의 핵심을 상기시켜주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복음 20장 26~28절)
우리 교회는 지상적인 영예와 세속적인 자리를 탐내고 추구하는 출세 제일주의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체가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누군가가 교회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인 야심과 출세욕을 충족시키고자 애를 쓰다면,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가련한 존재로 추락하게 될 것입니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장면과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섬김과 출세에 대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있기를 청합니다.
곧 높은 자리를 청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결코 그들의 열망을 나무라시지는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를 보고 불쾌하게 여기는 다른 제자들을 함께 불러 당부하십니다.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 20,26-27)
이는 높은 사람, 으뜸인 사람이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어떤 사람이 ‘진정한 높은 사람’인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동시에 높은 사람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란 남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하면 먼저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곧 왕이 되고 싶으면 ‘먼저’ 아내를 왕비로 대해야 하고, 왕비처럼 살고 싶으면 ‘먼저’ 남편을 왕으로 받들어야 하고, 성인이 되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을 성인으로 떠받들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불신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자신도 그렇게 신뢰받지 못하고 불신 받는 사람이 될 것이요, 남에게 자비로우면 자신도 그렇게 자비를 입게 될 것입니다.
결국 섬기는 사람이 섬김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아버지를 섬기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며 배신하고 도망쳐 버릴 제자들을 섬기셨기에 섬김 받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작고 낮은 자라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은 아닙니다.
혹은 희생과 헌신으로 봉사한다고 해서 섬기는 자인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섬긴다는 것은 자신이 낮아지는 것을 넘어서, 상대방을 높이고 떠받들며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낮춘다 하더라도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는 ‘존경’이 없다면 진정한 섬김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섬김은 내가 낮은 자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형제를 높은 자 되게 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기 위해서 섬기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섬기는 사람은 섬기는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섬기면 예수님을 닮아가고, 진리를 섬기면 진리가 되어갈 것입니다.
돈을 섬기면 탐욕스런 사람이 되어가고, 세상을 섬기면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갈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주님을 섬기는 학원'(<베네딕도 규칙서> 머리말 45)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형제 섬기기’를 통하여 ‘주님 섬기기’를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마태 20,23)
주님!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주소서.
깨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제 몸에 당신 생명이 담겨 있음을 잊지 말게 하소서.
오늘도 제 몸이 으깨지고 부서져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언제나 당신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당신과 함께 죽음으로써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무엇을 원하느냐?」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여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물론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 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보다는 ‘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 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위를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하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은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내어 바칠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기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송영진신부-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사람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그를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나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마태 20,18-19).”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인데(요한 10,11.18ㄱㄴ), 그 일은 곧 ‘사랑’입니다(요한 15,13). 예수님의 사랑은 죽는 것으로(희생하는 것으로) 끝나는 사랑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이어집니다(요한 10,17).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부활 예고 말씀’을 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우리가 받으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여서, 사랑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주셨으니, 사랑으로 받아야 한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에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과 함께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절하고 무엇인가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무엇을 원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이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마태 20,20-21).”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입니다. 두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요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두 사도가 직접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마르 10,35).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요청은, 앞의 19장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ㄷ).”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열두 옥좌’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요청을 한 것은, ‘예수님의 나라’를 세속의 나라들과 같은 나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도가 남들보다 더 권력욕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높은 두 자리를 달라는 요청은, 다른 열 사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게 해 달라는, 또는 다른 열 사도를 자기들보다 더 낮은 자리에 앉혀 달라는 요청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청은 ‘사랑’과도 거리가 멀고, 공동체 정신과도 거리가 먼 요청입니다. <다른 열 사도가 두 사도의 말을 듣고 불쾌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24절).>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마태 20,22-23)”
예수님의 답변은 거절도 아니고, 승낙도 아닙니다. 두 사도의 ‘오해’를 바로잡아 주시는 말씀이고,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 속에 포함될 수 있도록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그들의 요청 자체를 부정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메시아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잘 모르고 있음을 지적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왕정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우선 먼저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메시아 왕국’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신 ‘사랑으로’ 세우신 나라이고, ‘사랑으로’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하려면, 사랑을 거스르는 이기적인 욕망은 모두 버려야 합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가리키는데, “친구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사랑”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또는 당신의 사랑에 참여하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할 수 있습니다.” 라는 두 사도의 대답은, 아직도 잘 모르면서 하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나중에는 모든 것을 깨달았고, 믿었고, 순교했습니다.) “너희는 내 잔을 마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이 지금은 잘 모르고 있지만, 나중에는 모든 것을 잘 알게 될 것이고,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는 것은 아버지께서 정하신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 20,25-28).”
이 말씀은, “나의 나라는 세속의 나라들과는 다르다. 권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스리는 나라이고, 모두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나라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과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낮춤’과 ‘섬김’만 생각하고 ‘사랑’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사랑 없는 낮춤과 섬김은 ‘비굴함’입니다. (겸손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낮춤과 섬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위선’입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모두 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으로’ 서로 낮추고 서로 섬기는 나라입니다. 모두가 함께, 동시에 서로 낮추고 섬기기 때문에, 실제로는 낮은 사람이 하나도 없는 나라이고, 그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높은 사람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기심이나 소유욕의 반대쪽에 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주는’ 헌신과 희생입니다 |
말씀 나누기 - 사순 2주 수요일-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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