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9일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1,16.18-21.24ㄱ)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When Joseph awoke,
he did as the angel of the Lord had commanded him
and took his wife into his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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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다윗이 조상들과 함께 잠들게 될 때, 뒤를 이을 후손을 일으켜 세우고 그의 나라를 튼튼하게 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다고 한다(제2독서). 요셉은 꿈에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인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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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중세 시대의 비극적인 역사를 꼽는다면 아마 ‘마녀재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에 마녀 판별법이 있어서, 많은 사람을 마녀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진짜 마녀는 과연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사실 진짜 마녀라면 인간이 어떻게 제거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무고한 사람이 마녀로 몰렸을 뿐이었습니다.
마녀 판별 중에 조금 어이없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녀로 지목된 자를 무거운 바위에 매달아 강이나 늪, 운하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 위에 떠 오르면 마녀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결백한 사람으로 간주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언제까지 떠오르지 않는지를 계산해서 살려준 것이 아니라, 익사할 때까지 그냥 놔뒀다는 것입니다. 무고한 죽음인데도 책임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그냥 결백한 사람이었다고 판정만 했습니다.
‘아니면 말고’라는 잘못된 판단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이 잘못된 역사를 우리 삶 안에서도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단보다는 이해를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단죄보다는 사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생명의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에 대한 보고는 복음서에서 그리 많은 내용을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오 복음서에서 마리아의 약혼상태 남편이며, 의로운 사람이었고, 마리아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남자였음을 전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죄를 범한 경우, 공개 재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누가 이 사실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공개 재판을 받게끔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꿈에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꿈’일 분이라고 간단히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꿈의 계시를 받아들이십니다. 그만큼 마리아를 믿었고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과 사랑이 하느님의 양부가 될 수 있었고, 이 땅에 구원의 빛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과 사랑의 힘은 큽니다.
우리 역시 믿음과 사랑의 힘을 키워야 합니다. 잘못된 판단으로 아픔과 상처를 이 땅에 남겨서는 안 됩니다. 대신 믿음과 사랑의 눈으로 다시금 바라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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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인간을 의롭게 만드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lSNMVq3-MAM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요셉은 항상 ‘의로움’의 대명사로 불립니다. ‘의롭다’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 앞에 나설 힘’을 말합니다. 돈을 꿔 가서 갚지 않으면 의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갚기 전까지는 그 사람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그분께서 아드님을 의로움의 옷으로 만들어 우리를 입혀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판단하면 어떻게 될까요? 의로움이 깨집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입었다면 다 구원받는 게 아닙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받아 주시려 해도 우리가 주님 앞에 설 힘을 잃습니다.
김희아 씨를 생각해봅시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를 키울 자신이 없어서 보육원에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부모님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잘못하는 다른 부모들을 평소에 심판하는 사람이었다면 자기 딸인 김희아 씨 앞에 나타날 수 있을까요? 다른 부모들을 심판한 것 때문에 더욱 자신들이 키우지 않은 딸을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돈 2억 갚아”란 마지막 말을 하고 떠난 어떤 분도 계시지 않습니까? 몇 년 전 유일한 혈육인 동생이 돈을 꿔 가서 자취를 감췄다가 형이 죽기 직전이라 죄를 용서받기 위해 왔던 것인데, 형은 마지막 힘을 주어 “내 돈 2억 갚아”란 말을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죗값으로 내어주셨습니다. 내가 형제에게 꾸어준 돈 때문에 끝까지 그것을 받아내려 한다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희생시켜 죄를 용서해 주신 분 앞에 나설 수 없습니다. 그만큼 내 양심이 나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분 앞에 나설 힘을 키워야 하는데, 그 힘이 의로움인 것입니다. 내가 거저 용서받았으니 거저 용서할 수 있는 사람만이 나를 위해 거저 아드님을 내어주신 하느님 앞에 설 힘을 가지게 됩니다.
구약에 대표적인 인물이 유다입니다. 유다는 막내아들 벤야민이 이스라엘 재상이 된 요셉의 은잔을 훔친 것이 발각되자 벤야민을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옥에 갇히겠다고 자청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청해서 이집트에 팔려 온 요셉이 자신을 형제들에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제야 그들이 요셉을 만날 힘을 가지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수준끼리 관계 맺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모기나 기생충과 관계 맺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들은 주는 만큼 내어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는 요셉은 어떻게 의로울 수 있었을까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유일한 길은 자신 안에 ‘사랑’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의로운 사람은 이웃의 죄까지도 나의 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이 짓는 죄들을 자신의 것이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세상 모든 죄를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죄는 모두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들입니다.
‘프리쳐’라는 미국 드라마에서 지옥이 재미있게 표현되었습니다. 지옥은 잊고 싶은 과거의 잘못들을 매일 똑같이 되새기며 사는 것입니다.
유진이라는 한 아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친구 트레이시의 집에 초대받습니다. 트레이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친구와 헤어져 그 충격으로 자살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유진은 하느님은 더 놀라운 기적을 준비해 놓으셨고 그것을 보려면 살아야 한다고 위로해줍니다. 트레이시도 그의 말에 감동하여 자신이 하려던 쓸데없는 짓을 그만둡니다.
이때 트레이시는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고 오랫동안 트레이시를 좋아했던 유진은 트레이시에게 키스합니다. 트레이시는 유진까지 자신에게 그러는 것을 보고는 실망하여 참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합니다. 죄책감을 느낀 유진도 그렇게 합니다. 둘 다 죽지는 않았지만, 트레이시는 식물인간이 되었고 유진도 얼굴이 많이 상했습니다.
여기에 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는 힘을 가진 한 목사가 있습니다. 그 목사에게 자신은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꾸 그러니까 참다못한 목사님이 “그럼 지옥에나 가버려라!” 하니 지옥에 오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이 일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옥에 오지 말았어야 하는 유진이 지옥에 오자 이 홀로그램 시스템에 문제가 생깁니다. 간수들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여기, 오지 말았어야 하는 사람 손들어봐”라고 말합니다. 지옥에 있는 대다수는 손을 번쩍 들며 자신들은 진짜 지옥에 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라 말합니다.
하지만 유진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들지 않습니다. 자신만큼 지옥에 합당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치고 결코 자신이 지옥에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 안에서 죄를 찾아낼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는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동과 생각과 욕구로 살아갑니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욕구입니다. 예수님은 간음해서 간음이 아니라 음탕한 욕구로 여인을 바라보아도 간음하는 것이라 하십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욕구가 ‘사랑’입니다. 사랑이 들어오기 전에는 우리 안에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만이 존재합니다. 이 욕구와 반대되는 사랑이 들어올 때, 내가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는 것, 내 욕망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 상대를 지배하려고 하는 것이 사랑과 반대가 되는 죄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죄들이 다 내 안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작든 크든 세상 모든 사람이 짓는 죄는 세속-육신-마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고, 사랑하려는 사람은 자신 안에서 절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그 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게 만듭니다. 바로 사랑도 욕구이고 모든 죄의 근원도 욕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라는 거울 앞에 서면 자신 안의 악의 근원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면, 다른 사람들의 죄에 대해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생각을 품게 됩니다. 만약 행위만 가지고 따지자면 분명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거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욕구로 보자면 다 오십보백보입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 모든 죄를 발견하면 나에게 짓는 죄에 대해서도 내가 미움까지 가지 않을 무기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비행기를 잡는 유도탄이 있다면 비행기는 그 유도탄을 교란하는 교란탄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판단이 될라치면, 그 미움은 마치 유도탄처럼 나에게 날아옵니다. 만약 “나라도 그랬을 거야.”란 교란탄을 내 안에서 찾지 못하면 나는 그 사람을 결국엔 심판하게 됩니다. 그러면 의로움을 잃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임신하고 온 마리아의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지려 했습니다. 요셉이 그냥 파혼하면 임신시켜 놓고 살기 싫어 파혼시키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남이 판단되면 유도탄이 날아온다고 생각하고 빨리 내 안에서 그와 같은 죄를 찾아내어 교란탄으로 떨어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의로움을 지켜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란탄은 내 안에서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려는 의지로 얻어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구세사에 빛나는 조역, 요셉들의 이야기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XhRD-dchvE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와 더불어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이신 성 요셉대축일입니다. 요셉 성인은 다윗 왕이 속한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서 마리아의 배필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 내신 빛나는 조역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언급된 바 하느님께서 다윗과 유다 왕실을 축복하신 이른바 ‘시온 계약’은, 솔로몬 이후 왕국의 분열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유감스럽게도 이스라엘 역사에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만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 의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새 이스라엘인 교회의 역사에서 실현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됩니다. 마리아를 구세주의 어머니로 점지하신 하느님께서 굳이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기를 기다리셨다가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신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다윗과 유다 왕실을 통해 당신 백성과 계약하신 하느님의 선택과 이에 대한 하느님의 충실성을 보증하는 인물이며, 그만큼 신심이 돈독한 아나빔으로서 요셉은 구약과 이스라엘 역사의 열매를 맺게 한 의인이요 그 자신이 열매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신앙과 성품을 구약의 역사에서 미리 보여준 또 다른 요셉이 있습니다. 창세기의 끝판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 요셉인데, 그는 자신의 잘못 없이 아버지 야곱의 편애로 말미암아 형들의 질투를 받았고 그 결과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려서 이집트로 끌려갔습니다. 이런 운명도 억울한 노릇인데, 끌려간 이집트에서도 또 다시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는 좌절한 나머지 비뚤게 나갈 수도 있었는데 타고난 성실함과 함께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물려받은 워낙 튼튼한 믿음 덕분에 파라오의 눈에 들게 되고 이집트의 재상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요셉의 이런 삶의 궤적 덕분에 야곱 가문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자라날 수 있는 요람이 되어 주었고, 파스카 과업이 하느님의 섭리로 이루어 질 수 있었던 못자리가 되어 주었습니다. 구약의 이런 섭리적인 요셉의 삶은 신약에 나오는 요셉의 예형으로서 손색이 없습니다.
요셉의 역할은 마리아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셨을 때 시작됩니다. 약혼은 하였지만 정식 혼인을 하고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요셉의 인간적인 고민은 컸습니다. 잉태 사실에 대한 놀라움이 그 첫 번째요,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이 그 두 번째이며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를 세상에 드러낼 경우 마리아에게 닥칠 위험에 대한 혼란스러움도 극도에 달했으나 차마 마리아를 위험에 빠뜨릴 수 없어서 고민 끝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할 정도로 그는 신중하고 의로웠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에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성령에 의한 잉태 사실을 알려주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는 계시를 받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는 데 있어 주도면밀하신 하느님의 손길과 더불어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사랑이 극진함을 봅니다. 요셉의 배려와 천사의 전갈이 아니었더라면 마리아는 율법 규정에 따라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나자렛 성가정은 생겨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것이 성령에 의한 것임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마리아를 혼전임신을 한 여자라고 의심에 찬 눈초리를 바라보았을 것은 뻔한 일입니다. 만삭의 몸으로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아무도 해산할 방을 내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후에도 그 의구심은 객관적으로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그 숨막히는 율법 사회 속에서 따돌림을 당했을 것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 어린 예수님을 보호하고 하느님의 뜻을 일러주며 기르신 분이 요셉입니다. 장성한 후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에게 보여주신 사랑으로 미루어보건대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 주위의 따돌림을 요셉과 마리아의 신앙과 사랑으로 극복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면 사랑을 줄 수 없습니다. 따돌림을 받아 소외되는 체험을 해 보지 못하면 소외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사랑은 인간 아버지가 보여준 믿음과 사랑으로 길러지는 법입니다. 만약 인간 아버지로부터 믿음을 배우지 못하고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믿기도 사랑하기도 어려워지기 마련인데,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대해 지니셨던 믿음과 사랑을 보면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기르셨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고 딸을 보면 그 어머니를 알 수 있다고 하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요셉 성인의 영성은 곤경에 빠진 약혼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사생아 취급을 받을 뻔한 예수님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사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요셉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으로서나,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서도 흔치 않은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비록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해 내는 빛나는 조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마치시고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쓴 채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때 요셉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기 때문에 보호해 드리지 못했음은 물론 아무런 도움도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또 다른 요셉, 즉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자신이 쓰려고 마련해 두었던 돌무덤을 예수님께 내어 드렸습니다.
그는 니코데모와 함께 유다 최고의회 의원이었고 니코데모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나서 드러나지 않게 믿었던 착하고 의로운 제자였으므로, 의회가 증인도 없이 또 한밤중에 협잡과 졸속으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겨 사형을 선고받게 하는 일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저마다 한통속이 되어 짜놓은 각본에 따라 일사천리로 이루어지는 바람에 그는 나서서 예수님을 위한 변호를 해 드리지 못하여 죄송스럽고도 안타까운 마음에 십자가 형장까지 동행하여 그분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시자 그는 동료 최고의회 의원들의 싸늘한 시선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빌라도 총독에게 가서 그분의 시신을 내어 달라고 청했습니다. 죽은 나자렛 예수의 추종자였음이 드러나게 되면 최고의회 의원의 지위와 특권이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감행한 용기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예수님의 첫 생애에 양부로서 보호해 드린 요셉에 이어 아리마태아의 요셉이 그분의 마지막 생애를 돌무덤에 모심으로써 의로운 두 요셉이 처음과 끝에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신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요셉들은 구세사의 빛나는 조역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야곱의 아들 요셉은 성실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또 아리마태아의 요셉은 의롭고 든든한 지지로 마리아의 정배 요셉을 미리 보여주었거나 나중에 대신한 조역의 조역들이었습니다.
-조재형신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신부님들과 캠핑을 가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해 주던 신부님이 임기가 다 되어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장비도 마련하고, 예약도 하던 신부님이었습니다. 신부님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신부님이 있었습니다. 그동안은 나서지 않았지만 예약도 하였고, 장도 보았고, 맛있는 음식도 만들어 주었습니다. 제게도 그런 역할이 주어지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은 되지만 막상 역할이 주어지면 저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옆에서 신부님들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동북부 엠이도 작년에 대표부부가 새로 선출되었습니다. 전임 대표부부는 오랜 경험과 연륜이 있어서 동북부 엠이를 잘 이끌어 왔습니다. 신임 대표부부는 젊지만 신선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으로 팬데믹 상황에서 동북부 엠이에 새로운 활력을 주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선택하였습니다. 국민으로부터 선택된 대통령이 주어진 역할과 본분을 충실하게 수행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역사는 혼자서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신앙의 역사는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을 축복하셨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정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권을 튼튼하게 하였고, 솔로몬은 하느님께 지혜를 청하였고, 이스라엘을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던 이스라엘은 강대국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낯선 땅으로 유배를 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배지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쳤고,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향 땅으로 돌아 올 수 있도록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신앙의 역사도 한 사람이 달리는 마라톤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분들 모두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자렛의 성가정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적이 있습니다. 제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셉 성인께서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던 제의였습니다. 어린 예수님께 요셉 성인은 어쩌면 높은 산과 같았을 것입니다. 사랑을 주셨고, 손을 잡아 주셨고, 많은 것을 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힘들고 어려울 때면 요셉 성인을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약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알았을 때, 화가 날 수도 있었지만, 조용히 파혼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받지 않도록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요셉은 충분히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셉의 행동에 대해서 비난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꿈에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법대로 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마리아를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이제 법대로 살기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살기로 하였습니다. 신앙은 혼자 달리는 마라톤이 아닙니다. 신앙은 함께 달리는 이어달리기입니다. 이제 우리들 또한 요셉 성인의 삶을 따라서 나의 뜻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의 90%는 하지 않아도 될 걱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2% 가능한 걱정 때문에 90%의 삶을 걱정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오늘 요셉 성인의 축일을 지내면서 모든 것을 마음에 품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을 생각합니다. 요셉 성인이 가졌던 ‘영성’을 배운다면 우리는 다가오는 도전을 이겨내고,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흠모했던 요셉 성인
-양승국신부-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더불어 하느님의 인류구원사업에 대단한 기여를 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 성인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복음서 안에서 요셉 성인은 거의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만큼 요셉 성인은 과묵하고 진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선천적으로 충직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의인이었습니다.
생각만 해도 든든한 동반자 요셉 성인이 있었기에 마리아도 짙은 안개 속 신앙여정을 충실히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잉태 이후 마리아가 넘어야 할 산은 끝도 없이 펼쳐졌습니다.
당혹해하는 부모에게 뭐라 제대로 설명할 수도 없었습니다. 불러오는 배를 부여잡고 따가운 이웃들의 시선과도 맞서야 했습니다. 만삭의 몸을 이끌고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굿간 탄생, 이집트로의 피신, 소년 예수님의 돌출 발언, 예수님의 출가, 그리고 들려오는 좋지 않은 소식들, 결국 십자가 죽음... 정녕 마리아의 한평생은 길고도 험난한 고행 길이었습니다.
때로 고독하고, 때로 시련의 가시밭길이었습니다. 때로 가야할 길이 너무나 아득해 그만 주저앉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마리아 곁에는 요셉 성인께서 언제나 든든한 보루요 언덕처럼 서 있었습니다. 다행히 마리아 옆에는 ‘나보다 더 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던 요셉 성인이 언제나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었습니다.
마리아와의 기이하고 특별한 '동거생활'을 해나가던 요셉 성인의 그녀를 향한 감정은 참으로 복잡 미묘했을 것입니다. 때로 사랑하는 약혼녀를 하느님께 ‘강탈당한’것에 대한 야속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무거운 십자가를 홀로 지고 가는 마리아에게서 깊은 연민의 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때로 ‘지금 대체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괴감에도 빠져들었을 것입니다. 때로 마리아를 향한 강한 부성애와 보호본능을 느끼기도 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마리아를 마음 깊이 사랑했고 흠모했던 분이 요셉 성인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누구나 다 하는 통속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유효기간이 그리 길지 않은 인간적인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지고지순한 영적인 사랑, 헌신적인 신적 사랑, 아가페적인 불멸의 사랑이었습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하는 대로 하였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신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모친이신 마리아께 대한 관심에 비하면 성 요셉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가 구속사에 있어서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일을 일찍이 다 이루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통해 태어날 아기가 구세주 메시아임을 알려줍니다.
첫째는 그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이요, 둘째는 그가 동정녀에게서 태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하느님의 계획과 예언이 요셉의 믿음의 결단과 행동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느님 구원계획의 온전한 조력자로 제시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성 요셉의 인품을 세 가지로 묵상해 봅니다.
첫째,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마태 1,19)
곧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 열심을 다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의로움으로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포기하였고, 마침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둘째, 그는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습니다.”(마태 1,19).
곧 타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자비심을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공적인 고소를 통해 마리아를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결국 그에게는 모욕이 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그러한 모욕을 감수하면서라도 마리아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했습니다.
참으로 그는 사려 깊은 처사를 할 줄 아는,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셋째, 그는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대로 하였습니다.”(마태 1,24)
곧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깊은 침묵으로 하느님의 음성에 마음의 귀를 열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뜻'에 행동하는 믿음으로 순명하였습니다.
사실 요셉은 오늘 복음에서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서 단 한마디의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행동하는 믿음과 순명'으로 구원받는 모든 이들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는 제2독서에서 아브라함이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듯이’(로마 4,18), 그도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음으로 순명하여 구세주의 양부가 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미 얻은 외아들을 포기했어야만 했다면, 요셉은 아들을 얻기도 전에 이미 외아들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에게는 그래도 아내가 있었지만 요셉은 아내마저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침묵하되 참으로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믿되 참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동하되 참으로 순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사려 깊되 참으로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는 우리 신앙의 모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깊은 침묵, 자신의 안락과 평안을 접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맡기고 행동하는 믿음, 타인의 처지를 배려하는 사려 깊은 자비심과 사랑,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참다운 순명이 바로 우리의 모델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 요셉께 전구하며 하느님 구원의 온전한 조력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태 1,20)
주님,
믿음으로 침묵할 줄을 알게 하소서.
행동으로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타인의 처지를 자비로 헤아리고, 희망이 보이지 않아도 희망하게 하소서.
선하신 당신의 뜻과 당신의 의로움을 따르며, 영으로 인도되는 다 헤아려지지 않은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믿음안에 의로운 사람」
-반영억신부-
산부인과 의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사람이랍니다. 그렇다면 변호사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랍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법대로 사는 사람”,“의로운 사람”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속성으로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구하시는 하느님의 의(로마3,5 2코린5,21), 인간의 죄를 위해 무죄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마5,17),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의 의(로마9,30. 필리3,9)를 일컫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란,‘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며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이 인간의 징벌이 아니라 구원을 위한 것이었듯이 요셉의 의로움은 바로 한 여인을 살리는 사람에 대한 애정과 생명의 존중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가끔 화가 났다. 또는 홧 병이 났다는 말을 합니다. 정말 화는 불입니다. 아주 뜨거운 불입니다. 그러나 그 불로는 방을 따뜻하게 덥힐 수도 없고 밥을 지을 수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나무를 태울 수도 쇠를 달굴 수도 없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속만 태울 뿐입니다. 그러니 병이 날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화를 다스리는 법을 터득하면 좋겠습니다. 화가 나도 무조건 참는다는 것은 용수철을 눌러놓는 것과 같습니다. 무조건 누르지 말고 하늘을 보면서 잘 풀어야 합니다.
오늘 기억하는 요셉은 정말 화를 다스릴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는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라보는 요셉의 모습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신명기22장을 보면 간음에 대한 규정을 말하고 있는데 “젊은 여자의 처녀성이 증명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제 아버지의 집 대문으로 끌어내어, 그 성읍의 남자들이 그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신명22,20-21).고 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사는 요셉이 이러한 규정을 알진대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1,19).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결혼을 준비하며 꿈에 부풀었을 텐데 너무도 황당한 사실에 접하게 된 것이니 실망과 좌절감 속에서 마리아에게 망신을 주고 서운함을 되갚아 주어도 시원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드러낼 생각을 갖지 않았다니 그러한 마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허물까지도 덮어줄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때문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마리아를 사랑했기에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배려입니다. 사실 사랑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요, 능력입니다.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화를 다스리는 방법은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까지 내가 하느님과 이웃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1,20).했을 때 곧바로 자기의 생각을 접고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군말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을 따른 겁니다. 깊은 신앙은 어려울 때 드러난다고 했는데 바로 이 순간이 그의 믿음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화를 다스리는 또 하나의 방법은 철저한 믿음을 간직하는 것입니다. 믿음위에 서 있는 사람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요셉 성인은 아주 사소한 일에도 마음 상하고 서운함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우리들의 모범이십니다. 의로운 사람이란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며 기쁘고 진실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셉이 그런 분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코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하거나 해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받아들이고 살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처지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의로움을 간직한 성인의 마음을 닮고 싶습니다. “믿는 이에게는 질문이 없고, 믿지 않는 이에게는 대답이 없다”고 합니다. 오늘은 사랑으로 그리고 믿음으로 화를 다스리시길 바랍니다.
“성 요셉의 침묵과 겸손, 절대적인 신앙이 있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당신의 뜻을 온전히 행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다면 그분은 우리 안에서 당신의 일을 충분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가경자 알베리오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요셉에게서 배우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
-김찬선신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는 약속은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얻은 의로움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이 축일에 복음은 요셉에 대해 의로운 사람이라고 얘기하고,
제2독서는 아브라함의 의로움을 얘기하면서 성 요셉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음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의로운 사람과 비교하며 설명을 합니다.
한자어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와 이행득의以行得義의 차이입니다.
이행득의란 인간의 행위 또는 공로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의로움을 얻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떡해서 의롭게 되었느냐 그 얘기를 하는 거지요.
그렇다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은 어떻게 의롭게 되었을까요?
그의 의로움은 어떤 것일까요?
요셉이 의롭다고 할 때 그때의 의로움은 율법의 의로움었습니다.
다윗 가문의 후손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혀
의로운 사람이 되었으며 그렇지만 점잖고 따듯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 파혼을 하지만
소문을 냄으로써 마리아를 궁지에 몰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의로움의 바탕이 되어 있는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로 인해 은총으로 의로운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은총의 짝이 바로 믿음이라는 점입니다.
은총으로 의로워진 것은 그가 은총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믿음이 합쳐져 의로워지는 겁니다.
도둑이나 강도에게는 문을 닫고 믿으면 문을 열 듯
믿을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의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적도 마찬가지잖아요?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곤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늘 말씀하시잖습니까?
의사를 믿지 못하면 의사가 아예 치유를 할 수 없듯이,
독초라고 의심하면 거부하고 약초라고 밀을 때만 허용하듯이
주님의 치유의 힘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아예 거부되고 믿는 이에게만 들어옵니다.
요셉도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 은총의 시기가 열리고,
그래서 율법의 의로움이 은총의 의로움으로 승화되고,
자기의 의로움이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자기의 의로움이 자기 힘으로 의로워진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의로움이란
그리스도로 인한 의로움이요 그리스도를 위한 의로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말씀을 믿음으로 이제 자기 자식은 낳을 수 없게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어 그리스도를 키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위대한 가난이고 요셉의 위대한 정결입니다.
물건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보다 자식을 소유하지 않는 가난이 더 큰 가난이고,
그저 여자를 소유하지 않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 더 위대한 정결인데
요셉이 바로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의 삶을 산 것입니다.
마리아를 자기 여자로 소유하지 않고 성령의 정배로 내 줌으로써
요셉은 그리스도를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었으며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불의는 소유와 욕망에서 비롯되는데
우리는 요셉의 이 위대한 가난과 정결에서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얻는 법을 배우는 오늘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F8nA/btqQ0PG6aOz/UDuWeXSP91LjxbotLRQ6l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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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19일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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