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20일 사순 제3주일

Margaret K 2022. 3. 20. 06:28

2022 3 20일 사순 제3주일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루가 13,1~9) 


‘Sir, leave it for this year also, 
and I shall cultivate the ground around it and fertilize it; 
it may bear fruit in the future.
If not you can cut it dow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나는 있는 나다.” 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겠다고 하신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모세와 함께한 백성의 광야 생활은 우리를 위한 본보기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고 하시며, 열매를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를 드신다(복음).

나를 바꾸는 작은 실천

-키엣 대주교-


사순절은 참회와 회개의 계절입니다. 회개를 통해 참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영혼, 새로운 삶은 자기 내면을 직시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나를 바꾸고 타인에 대한 시각도 바꿔야 합니다.

누구나 환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회를 개혁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이루는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환상, 실현될 수 있다면 왜 환상이라고 하겠습니까? 어렵기 때문에,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기에 환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환상이 아닌 현실을 직시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허황된 계획을 버려야 합니다. 환상에서 벗어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것, 가장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삶의 틀을 바꾸고 변화시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집에 아름다운 꽃을 가꾼다면 세상은 꽃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이 될 것이다”

포도밭에 무화과 나무를 심고 열심히 가꾸었으나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를 잘라버리라고 지시하는 주인에게 포도 재배인은 좀 더 시간을 주자고 합니다. 이러한 비유는 우리 주변에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밤낮으로 열심히 일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자식이 잘 될거라는 희망이 없다면 고통을 참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은 그 돈의 무게를 알지 못하기에 부모님의 노고와 희망이 묻은 돈을 마치 바다의 소금 알갱이처럼 허무하게 낭비하여 버립니다. 자식은 실망한 정원주인이 잘라버리고 싶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귀한 포도밭, 당신의 교회에 초대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삶의 지표를 주기 위해 말씀을 주시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당신의 생명과 피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 이제 남은 것은 우리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 분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삶을 바꾸고 주님 자녀의 품격에 맞는 인성과 믿음을 갖출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주님의 은총을 불의에 사용하고 품격을 떨어뜨리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만일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다면, 바뀌지 않는다면, 잘못된 삶이 계속된다면, 잘 가꾸었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처럼 고통 속에서 목숨이 끊어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주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기 위해 주님께서 주신 시간을 회개하는 데 써야 합니다. 죄는 악성 종양입니다. 회개란 고통스럽지만 병든 몸을 구하기 위해 그 종양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죽을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탈선한 열차처럼 주님의 길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 가는 길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죄에 구속된 사람은 아름다운 집이 화염에 휩싸이는 것을 방관하고 그 안에서 같이 죽어간다는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회개는 타고 있는 집을 구하기 위해 불을 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을 초월하여 초자연적인 세계에 이를 수 있는 빛을 주셨습니다. 포장되고 왜곡된 외형을 투과하여 마음속 깊은 곳까지 비춰 볼 수 있는 눈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과 사건을 판단하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판단해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실체를 알고 부족한 자신부터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바꾸는 것이 바로 세계를 바꾸는 시작입니다. 나를 바꾸지 않은 채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탓하지 마십시요.

주님, 주님께서는 자애로운 정원사와 같이 우리에게 좀 더 시간을 주시고자 아버지 하느님께 간청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열매도 없이 가시만 무성한 나무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소서. 주님께서 주신 시간을 더 충실히 살아가고 믿음을 쌓아 물질의 열매, 영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더 아름다운 삶, 더 품격있는 삶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 저희가 진실한 회개와 참회를 통해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세상에 벌어지는 일,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주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까?

2. 주님께서는 사회와 가정을 바꾸기 전에 나 자신부터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눈은 밖을 향해 있기에 나 보다 먼저 세상을 보고 세상의 잘못을 먼저 비판하게 됩니다. 세상의 변화의 시작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입으로가 아닌, 말이 아닌,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자기 반성을 통한 회개와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적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습니다.


“의인은 사람의 잘못을 비난할 때 고통을 느끼지만, 악한 사람은 그것을 즐긴다.”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생각해보십시오.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악한 사람인가?’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뒷담화는 주로 사람의 잘못이 그 내용을 차지합니다. 따라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행동은 결코 의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는 점점 그 무게를 더해 간다는 말이 있듯이, 뒷담화가 습관처럼 내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즉, 뒷담화를 즐기는 악한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심심풀이로 판단하고, 때로는 그냥 지고 싶지 않아서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죄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질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판단에서 나오는 뒷담화는 어제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뒷담화로 죄를 더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엄청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해서 제단이 피로 물든 끔찍한 사건이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실로암 탑을 공사하는데 탑이 무너져서 18명이 깔려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안타까운 죽음에 함께하면서,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위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 죽음에 대해 이상한 생각을 했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안 되었다고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 때문에 생긴 불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이 죄의 값으로 받는 하느님의 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어 나오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전해주십니다.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베어버릴 의사를 표명했지만, 포도 재배원은 일 년의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지요.

이처럼 예수님 덕분에 우리는 회개의 시간 여유를 부여받았습니다. 내가 의로워서 시간을 부여받은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남의 죄를 탓하기보다는 먼저 자기 죄에 대한 참회를 통해 회개의 길로 들어서야 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루카 6,41)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며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곧바로 회개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 이상의 것을 할 수 있습니다(헨리포드).

 너무 빨리 꿈을 확정해버리면 안 되는 이유

-전삼용샌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Ipsyt2rRrqg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빌라도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성전에서 제물을 봉헌할 때 그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게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드렸더니 예수님은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분명 회개하지 않은 이는 ‘제물에 봉헌하는 이의 피가 섞이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제물에 피를 섞는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또 실로암 탑이 무너져 ‘열여덟’ 명이 깔려 죽었는데 이에 대해서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고 하십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자’란 뜻이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에게 파견되었는데 그 뜻을 이루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파견한 자의 뜻이 아닌 다른 뜻입니다. 지금 그 뜻이 죽는 것입니다. 그 뜻이란 분명 돈에 대한 욕심, 육체에 대한 즐거움, 힘에 대한 욕망일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파견되어 일을 수행할 때, 이 세 가지가 아니면 그 일을 완수하는 데 장애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열여덟을 ‘세속(6)+육신(6)+마귀(6)’의 합으로 봅니다. 

  

    그러며 말씀하시는 것이 포도밭에 자라나는 한 그루의 무화과나무 비유입니다. 포도밭에 웬 무화과나무일까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무화과나무 잎입니다. 반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가 되어야 하는 나무를 말할 때 사용했던 상징이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참 포도나무에 접붙여진 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회개한 자는 자기가 되고 싶어 하는 무화과나무의 삶을 버리고 주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포도나무의 삶으로 전환하는 일이란 뜻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 내가 추구하고 싶어 하는 것을 버려 나의 주인이 내가 아닌 하느님임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 예배가 제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제물에는 내 피가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를 섬기는 것이 아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그분의 뜻을 들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이를 위해 세속-육신-마귀와 싸워 이기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어쨌건 그것이 살아있다면 주님의 뜻을 내 안에서 이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는 주인이 맺기를 원하는 열매를 맺어줍니다. 반면 무화과나무는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지 않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포도밭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주인의 계획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국 잘립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꿈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피가 섞인 제물도 봉헌해야 하고 삼구도 죽여야 합니다. 

  

    일본 애니매이션 ‘베르세르크 – 황금시대’의 내용입니다. 여기저기 전쟁터에서 돈을 받고 싸워주는 가츠란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가츠는 뛰어난 실력으로 적의 장수를 죽이고 두둑한 상금을 챙기고는 그를 붙잡아두려는 나라를 등지고 정처 없이 떠도는 삶을 삽니다. 그러다 ‘매의 단’이란 용병부대를 만나고 그 대장 ‘그리피스’와 한 판 붙습니다. 그런데 가츠도 그리피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약속대로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합니다. 결투에서 지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리피스의 오른팔이 되기로 했던 그리피스를 좋아하는 캐스커라는 여자 군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느닷없이 나타난 가츠가 밉기만 합니다. 

  

    그런데 그리피스는 큰 야망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자기만의 왕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천민 출신이지만 왕국을 갖는 게 꿈이었습니다. 매의 단의 인기는 점점 치솟고 그리피스는 한 왕국의 공주의 마음까지도 빼앗습니다. 

    이 와중에 가츠는 그리피스가 자신을 친구가 아닌 자기 야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느끼고는 그리피스를 떠나기로 합니다. 막아서는 그리피스와 대결을 하는데 이제 그리피스가 가츠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피스는 자기 오른팔이 자신을 떠난 아픔을 달래기 위해 공주를 찾았으나 군사들에게 발각되어 갇히고 고문당합니다. 그리고 매의 단도 쑥대밭이 됩니다. 

  

    이 사실을 멀리 있는 가츠가 듣게 됩니다. 가츠는 그리피스와의 옛정을 위해 특공대를 조직하여 그리피스를 구출해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걸을 수도 없고 칼을 들 수도 없는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매의 단은 이제 가츠를 우두머리로 캐스커를 그의 오른팔로 삼고자 합니다. 가츠는 그 책임이 무거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캐스커도 사랑하게 됩니다. 반면 더 이상 남은 게 없는 그리피스는 자살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마왕들이 나타납니다. 그리피스를 마왕으로 만들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리피스의 야망을 보았고 그게 바로 그리피스라고 합니다. 마왕이 되려면 야망을 위해 친구들을 바쳐야 하는데 그 친구들이 매의 단입니다. 그리피스는 마왕이 되어 자기 왕국을 가져보기 전에는 죽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청대로 매의 단을 악마들에게 바칩니다. 이 와중에 매의 단은 전멸했고 가츠만이 어떤 힘의 도움으로 왼팔만 잃고 그곳을 탈출합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자신의 소명은 마왕이 되기 위해 동료들을 제물로 바친 그리피스와 마왕들과 싸우는 것임을.

  

    그리피스는 태어나서 그냥 산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무언가 이뤄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이 욕망 속에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은 그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결국엔 악의 힘까지 빌려 엄청난 힘을 지닌 마왕이 되었지만, 친구가 없습니다. 

  

    반면 가츠는 자신의 꿈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를 도와주고 구해 주고 또 진정한 사랑도 하게 됩니다. 자신을 이용한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또 배신당합니다. 그리고 점점 자신의 꿈에 흐릿하게 보였던 미래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피스가 마왕들이 원한 자신들의 후계자였다면 자신은 천사들이 뽑은 마왕과 대적하는 군사였음을. 

  

    우리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구약의 요셉도 짚단과 별들이 자신들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가족들에게도 존경받는 인물이 될 것이란 꿈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어떻게 실현될지는 몰랐습니다. 다만 자신을 그 꿈을 위해 봉헌하였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위해 하느님께 자신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우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나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열여덟에 대항하는 욕망을 죽였습니다. 이것이 상징적으로 보티파르의 아내의 유혹을 이기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하느님의 뜻을 성취해 드렸습니다. 그러니 요셉은 다른 형제들보다 먼저 하느님의 꿈을 찾을 수 있었던 회개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녀들에게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네 꿈은 뭐야?”라고 묻는다면 이는 아이들에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살도록 종용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께서 너에게 바라시는 꿈이 무엇일까?”를 찾게 만들어야 회개한 사람입니다. 죽을 때까지 이 꿈을 찾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내가 너무 명확한 꿈을 가지면 그 꿈이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꾸게 하시는 꿈은 처음엔 명확히 깨닫기 어렵습니다. 다만 포도나무로 자라기 위해 그분의 뜻에 접붙여져야 합니다. 분명 우리는 어떤 목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내 꿈이 아니라 주님의 꿈을 찾기 위해 자신을 제물로 봉헌하고 삼구를 이기는 노력을 한다면 분명 포도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는지는 지금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흐릿하게 보일 뿐입니다. 다만 “내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은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꿈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요셉에게 먼저 명확한 꿈을 알려주었다면 그는 분명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신약의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능력으로 성장했다면 그만큼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주십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게 좋습니다. 

    꿈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께 접 붙어 있는 나를 통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만들어진 것은 만드신 분께 자신을 맡길 때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제가 포도나무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x4tfcNkHA

1. 사순시기 들어서 세 번째 주일인 오늘 전례에서 말씀의 초점은 실천에 있습니다. 제1독서는 모세가 부르심 받은 이야기와 함께 그가 이 소명에 따라 응답함으로써 달라질 새로운 운명을 예고합니다. 또한 제2독서는 모세의 소명과 그 응답을 통해 하느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이제 믿음의 목표와 대상이 그리스로로 선명하게 계시되었음을 깨우쳐주는 바오로의 편지인데, 이러한 깨우침 안에는 바오로 자신도 자신의 삶을 완전히 전환시켜 로마 제국 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했던 새로운 운명의 사연이 깔려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복음은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을 죽이자, 빌라도는 요한을 위해 제사를 드리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였으며, 또 예루살렘 성전 경내에 세워져 있던 실로암 탑이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나 죽어야 했을 지경으로, 총체적으로 난국을 맞이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황을 두고, 예수님께서 포도밭에 포도나무 대신 무화과나무가 심겨져 있다는 비유로 비판하신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그리고 여러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히브 1,1). 이 말씀으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포도밭에 포도나무를 심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 열매를 맺게끔 농사를 지어서 소출을 포도밭 주인이신 하느님께 바쳐드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짓 목자로 우상숭배를 일삼았던 임금들과 대신들, 궁정 예언자들과 성전 사제들이 농사를 짓지 않았고, 대신 우상숭배에서 나오는 불공정과 불의라는 나쁜 열매만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로마 제국이라는 나라가 넘보고 쳐들어 온 것이고, 이두메아 출신 헤로데는 그 권세에 빌붙어서 유다인들을 억눌렀던 것이며, 이에 항의하는 예언자 요한을 목베어 죽여버린 것입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성전을 관리하던 사두가이들은 성전세 수입과 제사용 제물에 눈이 팔려서 성전 경내에 있던 실로암 탑도 관리를 소홀히하는 바람에 애꿎게도 성전을 순례하던 유다인들이 무너진 탑에 깔려 죽는 안전사고까지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포도밭에 세워진 이 몹쓸 나무를 잘라버리려고 하십니다. 그 나무는 포도열매를 낼 수 있는 포도나무가 아니었던 것이고, 제 때에 열매를 내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와도 같이 쓸모없는 나무였습니다. 이 나무는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당시 유다교였고, 신정일치 체제로 연명하던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빌라도와 헤로데의 팔레스티나 사회이기도 했습니다. 

 

3. 사도 바오로는 이 같은 예수님의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전제로 코린토에서 만난 이방인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의 역사에 나타났던 하느님의 계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받은 그리스도의 세례는 사회적 불의가 만연한 이집트를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온 이스라엘 백성처럼, 죄악이 가득 찬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에로 해방된 처지를 말해준다는 것입니다. 세례 때에 그들의 죄를 씻어준 물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에 건너온 바다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또 세례를 비롯한 여러 성사들은 신자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는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성체성사에서 받아 모시는 성체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나이 광야에서 먹고 살았던 하늘의 만나와도 같은 것이며, 성혈은 므리바와 맛싸의 바위에서 터져 나온 샘물과도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만나를 내려준 하늘, 물이 터져 나온 바위, 그 하늘과 바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역사적 풀이를 사도 바오로는 구약성경의 내용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모르던 이방인 신자들에게 자세하게 들려준 것입니다. 

 

4. 사도 바오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된 역사적 계시, 즉 이집트 탈출 사건의 의미를 코린토인들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코린토인들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인들은 다신교를 신봉하고 있었고, 그 신들은 참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을 투영한 인간 신들이었으며, 진리나 자비 같은 하느님의 계시를 전혀 모르는 채로 다툼과 갈등, 승리와 패배의 신화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니 무신론이나 다름없이 다신교를 신봉했던 이방인들 앞에서 사도 바오로는 인류에게 당신을 드러내신 하느님의 계시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셈입니다. 

 

5.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을 창조하신 주님이십니다. 창조주로서 하느님께서는 인류 역사의 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민족들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하느님 말씀을 처음으로 알아 듣고 응답한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는 노아의 후손이었고 막연하지만 하느님을 알고 있었지만, 애초에 그가 살던 칼데아 우르는 바빌론 문명의 우상숭배가 창궐하던 땅이어서 그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죄악에 대해 염증을 심하게 느끼고 있던 차에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희미한 신앙의 빛으로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그가 노아의 직계 10대손이어서 10대조 노아가 남겨준 신앙의 유산 덕분에 그나마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었고,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떠날 수 있는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6.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아브라함의 후손 모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이집트 왕실에서 왕자로 자라나던 40년 세월을 뒤로 하고 호렙 산이 서 있는 미디안 광야에서 평범한 양치기로 40년째 살아가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양 떼를 몰고 하느님의 산으로 알려진 호렙 산 어귀에 다다랐을 때, 불타는 떨기나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떨기는 불에 휩싸여 있었을 뿐 타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의 표지였습니다, 불타지 않는 떨기. 가혹한 이집트 파라오의 배은망덕한 노예살이 정책과, 감독관들의 채찍질과, 쉬는 날도 없이 부려먹는 강제노역, 이런 가열찬 삶의 조건에서도 언젠가 하느님께서 해방자를 보내주시리라고 희망하던 히브리 동족들의 가녀린 신앙과도 같이, 그 떨기는 불 속에서도 타지 않았고, 오히려 그 불을 이용해서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7. 이 거룩한 표지가 모세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리고 깨어난 양심으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이집트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너의 동족에게로 가서 파라오의 손에서 해방시켜라!” 이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세는 남은 40년 여생을 바쳤고, 히브리 노예들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거듭 날 수 있었습니다. 

 

8. 아이작 뉴튼이 17세기에 열역학 법칙을 발견해서 보이지 않아도 늘 우리 자연형상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창세기의 창조설화는 보이지 않아도 늘 우리의 인간현상에 작용하고 있는 법칙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창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그런데 언제나 뱀이 모습을 한 악마가 훼방을 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느님의 창조와 악마의 훼방 사이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자유로 인간은 모든 피조물을 돌보라는 맡은 바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알아들었을 때, 그 누구도 옆에서 조언해 주지 않았고 오직 홀로 알아들었습니다. 모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누구도 옆에서 그 불타지 않는 떨기야말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표지라고 귀띰해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분연히 우상숭배가 판치는 고향을 떠났고, 모세는 여든 살의 나이에 다시 이집트로 들어가 파라오와 맞대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도착한 가나안 땅은 아직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라 가뭄이 기다리고 있는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비옥한 이집트로 가야 했는데, 다행히 야곱의 편애와 아들들의 질투가 요셉을 이집트로 보내서 재상이 되는 바람에 집안을 살게 할 수 있는 고센 땅을 마련해 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맞대결하러 갔을 때 완고한 파라오 이상으로 모세의 속을 썩인 자들은 동족의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간신히 이집트를 빠져 나와 시나이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동안에도 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불신앙도 모자라다는 듯이 백성들의 비겁한 믿음과 노예근성을 부추겨서 모세를 힘들게 했습니다. 

 

10. 아브라함과 모세처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실존적인 차원에서는 우리 모두도 아브라함과 모세의 처지에서 하느님과 단독으로 마주섭니다. 칼데아 우르의 우상숭배나, 이집트의 가혹한 노예살이를 단호하게 떠나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떠날 수 있는 안목과 결심과 용기는 온전히 우리에게 달린 일입니다. 이는 개인만이 아니라 개별 민족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되는 이치로서, 한국교회가 보편교회 안에서 독특하게 지니고 있는 정체성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사 없이 자생적으로 생겨난 교회라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때 어떠한 선교사도 우리 민족이 하느님을 믿도록 도와주지 않았지만 우리 교회의 창립 주역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하느님 신앙으로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 교리서들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하느님을 믿는 삶, 하느님을 믿는 백성을 이루었습니다. 조선 왕조와 노론이 악랄하게 가한 백 년 박해에도 살아남았고, 일제가 부려먹은 반 세기 식민통치도 견디어 냈으며,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도 이겨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라 안에는 많이 어지럽습니다.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지 못하고 여전히 흔들립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이 중심을 잡아야 합니다. 포도나무의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재형신부-


우리의 지구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생명이 넘쳐나는 우리의 지구는 아름다운 별입니다극지방열대지방사막깊은 바다얕은 바다물이 있는 지구를 보여주었습니다다큐멘터리는 지구는 살아있는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우리 몸의 한 지체가 아프면 몸이 아픈 것처럼 지구도 어느 한 곳에 문제가 생기면 지구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기후의 변화는 생태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아마존의 밀림을 무분별하게 개발하면 그 영향이 아프리카의 사막에도 있다고 합니다지구 환경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인간이라고 합니다인간이 오염시킨 강에는 생물이 살기 어려워진다고 합니다인간이 남획한 동물은 멸종 위기에 있다고 합니다특히 지나친 탄소배출은 지구온난화를 가져오고 이는 극심한 가뭄강력한 태풍커다란 산불로 이어진다고 합니다그러나 다큐멘터리는 희망을 보여주었습니다인간이 보존하려는 의지가 있으면 생명의 다양성이 지켜진다고 합니다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도 늘어난다고 합니다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그 아름다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필요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는 고난을 보았고이스라엘 백성의 울부짖음을 들었고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알고 계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이끌겠다고 하셨습니다그리고 그 일을 모세에게 맡겨 주셨습니다모세는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 주었습니다하느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이셨습니다바위에 샘을 열어주셔서 이스라엘 백성이 마시도록 하셨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갔습니다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구원의 역사입니다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기억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역사와 예수님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느님께서 열어주신 샘에서 물을 마셨듯이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구원의 샘물을 마신다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셨고복음을 전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하느님나라입니다하느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자비를 베푸는 사람온유한 사람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복음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표징입니다예수님께서 열려라라고 말씀하시니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었고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였고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았습니다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예수님께서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시니 죽은 소녀가 일어났습니다죽은 나라자로 무덤에서 나왔습니다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복음은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하게 되고죽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이것이 초대교회가 기억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이것이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의 신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모두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던 사람교만했던 사람우상을 섬겼던 사람은 광야에서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예수님이 전하셨던 복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합니다겸손해야 한다고 합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그것은 회개입니다우리가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회개한 것을 삶으로 실천하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희가 단식과 기도와 자선으로 죄를 씻게 하셨으니 진심으로 뉘우치는 저희를 굽어보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저희를 언제나 자비로이 일으켜 주소서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듣기에 참으로 섬뜩한 말씀,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강한 경고성 말씀을 우리에게 전하고 계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복음 13장 4~5절)

  

이어서 더 강경한 어조로 우리에게 신속한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예수님 경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도대체 왜 자비 충만한 예수님께서 이토록 무서운 경고 말씀을 건네시는가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묵상 결론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던지시는 강한 경고성 발언조차도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경고 이면에는 우리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극진한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 어떤 부모가 자기 자녀의 타락과 방황을 보고 수수방관만 하고 있겠습니까?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타이르기도 하고, 사정도 해보고, 때로 파격적으로 감싸 안아 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 모든 노력이 먹혀들지 않을경우 어떻게 합니까? 너무도 안타까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말도 하게 됩니다. ‘너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가면 자식 하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겠다. 호적에서 빼버리겠다.’ 등등.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아이가 고층 아파트 베란다 근처에 어른거리지 못하도록 혼을 낼 것입니다. 아이가 뜨거운 국 냄비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회초리도 들 것입니다. 아이가 빨간 신호등인데도 길을 건너간다면 호되게 야단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한 경고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이 마음이 담겨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배신과 타락을 안타까워하시는 하느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우리에게 발걸음을 되돌리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하느님께서 오늘 다시 한번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계십니다.

  

결국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분이 어떠한 시련을 주시든, 어떠한 고통과 십자가를 주시든 그 모든 행위 그 이면에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 강력한 구원 의지가 자리 잡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사랑은 천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그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그를 지지하고 격려하고 칭찬도 해줍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탈선이나 그릇된 삶 앞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안고 있는 부족함이나 취약점들을 용기 있게 지적해주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히려 더 큰 사랑이고 이웃을 성장시키는 노력입니다. 우리가 서로 남남이라면 상처나 고통을 주고받을 하등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하기에 상처도 고통도 주고받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곧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이 받아보지 못한 주님의 총애를 받아왔습니다. 율법을 받았고, 예언자를 받았습니다. 계약을 받았고 성전을 받았습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이 민족에게 결정적인 선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가장 결정적인 선물마저도 거부하고 발로 차버렸습니다. 결국 이 민족의 운명은 끝이 날 판국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교회와 성사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계약의 복음을 받았으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주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누구도 하느님께서 자신을 외면하신다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면서,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서 불러주신 각자의 처지에 합당한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것,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과제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사순 제3 주일입니다.

이번 주일의 말씀전례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취하신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러 예루살렘으로 가시겠다고 마음을 정하신 다음, 그러니까 ‘출애굽’의 시간을 다 채우시기로 마음을 정하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히브리 역사 가운데 일어난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들을 상기시키면서 가르침을 주고 계십니다.

 

사실 탈출과 해방의 목적은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 그분께 도달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완수하시며, 제1독서의 ‘출애굽’의 사건은 아버지께로 건너가시는 빠스카의 예표가 되며, 제2독서의 그리스도란 바위에서 그 구원의 물을 마셨으니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답송에서는 이를 베푸신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축복의 찬양을 노래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제1독서에서 하느님 이름의 계시를 통해 알아들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소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어떤 임무를 부여받음이 아니라 그 이전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은 대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이며, 그러기에 하느님의 신비에 대한 무엇인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신비는 다름 아닌 우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고 우리와 함께 계시며 당신 백성에게 호의와 자비를 보이시는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마치 하느님의 신비를 간직하게 된 모세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도록 자신의 몸을 맡겼듯이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알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3.4.)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멸망하는 것은 지은 죄 때문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 향하여 나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회개'란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곧 내면적, 정신적 뉘우침과 행위의 실천적 돌아옴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를 깨닫고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단순한 죄의 인식이나 자기 성찰 혹은 자기 반성, 또는 단지 죄가 없는 죄의 공백 상태나 죄의 진공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이는 뉘우쳤기에 용서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풀어진 용서를 깨닫고 뉘우치는 것이요, 그리하여 용서하신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옴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단순히 죄의 어둠을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감이요, 하느님의 사랑에로 돌아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됨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옴'이라는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 1,15)

 

그러니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 나라가 왔다’는 복음을 믿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것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인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의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다.”(루카 13,3)라는 말씀은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자신의 완고함과 고집으로 이미 온 하느님 나라를 믿지 않고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멸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6-8절)는 시급히 회개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곧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는 회개한 자에 합당한 행동과 생활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과수원 주인이 열매 맺지 않는 나무를 잘라내라고 하자 과수원 재배인은 말합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루카 13,8)

 

그렇습니다.

범한 죄로 본다면 저는 이미 뽑혀도 수백 번 뽑혀지고 말았을 열매 맺지 않는 쓸모없는 나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여기 주님의 정원에 심겨져 있다는 것은 이미 용서받았다는 표시요, 자비를 입고 있다는 표시요, 또한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고 희망하고 기다려주고 믿고 계신다는 표시입니다.

 

참으로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 둘레를 파고 축복과 말씀의 거름을 주시며 열매 맺도록 기다리시고 돌보시고 희망하시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제가 뉘우치고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루카 13,8)

 

주님!

당신께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손수 저의 둘레를 파고 축복의 거름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당신께서는 여전히 말씀의 거름을 주시고, 믿고 사랑하고 돌보아 주시고, 기다리고 희망하고 계십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의 향기 담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심보를 바꾸는 것」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예.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 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마르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송영진신부-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1-5).”

 

이 말씀은,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회개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일은 ‘살인 사건’이고,

실로암 탑이 무너진 일은 ‘불의의 사고’입니다.

그런 사건과 사고는 인간 세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인데,

유대인들은 그런 일을 ‘죄인들에게 내리는 하느님의 벌’로 생각했고,

그런 일로 죽은 사람들을 ‘천벌을 받은 죄인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라는

말씀은, “그런 사건과 사고는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이 아니고,

죽은 사람들은 천벌을 받은 죄인들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죽은 사람들이 죄인이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건과 사고가 천벌이 아니라는 것뿐입니다.)

아주 가끔 예외적으로 천벌이 내리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정해진 날에 헤로데는 화려한 임금 복장을 하고 연단에 앉아 그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때에 군중이 ‘저것은 신의 목소리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다.’

하고 외쳤다. 그러자 즉시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다.

그가 그 영광을 하느님께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벌레들에게 먹혀 숨을 거두었다(사도 12,21-23).”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건들과 사고들은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불행한 현실일 뿐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로 죽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으로 판단하면 안 됩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 일이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아니지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닥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서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 경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루카 17,26-30).”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사고팔고 심고 짓는 일은,

죄는 아니고, 인간들의 ‘일상적인 삶’인데,

여기서는 방심한 상태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모습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언젠가 종말과 심판이 오더라도 오늘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

또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만 오늘은 아니겠지.” 라는 생각,

그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면서 회개를 나중으로 미루기만 하는 모습,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경고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이 말씀도 지금 바로 회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삼년 째 와서 열매를 찾아보지만 찾지 못한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신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9).”

그런데 하느님께서 언제까지 기다리실지,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지금’이

회개와 구원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올해’와 ‘내년’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뜻으로는 ‘오늘’과 ‘내일’일 수도 있고, ‘지금’과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루카 12,20)”

여기서 ‘오늘 밤에’ 라는 말은 ‘몇 시간 뒤’로 생각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몇 시간’은 회개하라고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몇 분’이 될 수도 있고, ‘며칠’이 될 수도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2-6).”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9).”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날’은 ‘갑자기 닥치는’ 무서운 심판 날입니다.

그러나 늘 깨어 있는(회개하는) 사람에게 ‘그날’은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구원의 기쁜 날’입니다.

나에게 ‘그날’이 어떤 날이 될지는 지금 내가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3)

-한상우신부-

하느님께서는
불완전한
우리들에게
회개를 선물로
주셨다.

회개로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정신을
차려야 할
회개의
때이다.

참된 회개가
신앙이라는
행동의
나침반이다.

삶의
나침반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들 참된
신앙이다.

회개는
멸망을
치유하듯
우리 삶을
치유한다.

삶의 신비는
회개의
신비이다.

회개가
가장 놀라운
하느님의
기적이다.

회개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회개로
연결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이다.

회개로
세상과
접촉하고
회개로
우리 내면과
새롭게
만난다.

낡은 삶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워지는 것이
회개의 삶이다.

삶이 새로워지지
않으면 그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다.

새로워지는
삶의
우선순위는
우리자신의
회개이다.

하느님께서는
멸망의 혼돈이
아니라 회개의
축제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회개로 이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참된 사랑이다.

삶의 열매는
우리의 회개로
맺어지는
회개의 열매이다.

회개는
십자가와
함께하고

열매는
십자가에서
익어간다.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을
담는 것이
회개이다.

가장 좋은
회개의
주일이다.

 말씀 나누기 - 사순 제3주일-천벌을 받지 않으려면 바꾸실 때 바뀌어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3월 24일 사순 제3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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