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Margaret K 2022. 3. 25. 05:52

2022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은 말 그대로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이다. 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는데, ‘영보’(領報)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천사에게서 들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처럼 성모님의 모태에서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대축일의 날짜는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아홉 달을 역산한 것이다

 

☆☆☆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
루카 1,26-38)

 

Behold, I am the handmaid of the Lord.
May it be done to me according to your wor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의 희생 제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다(제2독서).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를 찾아가 그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에서 대학 진학률 1위인 나라는 어디일까요? 우리나라 바로 한국입니다. 한때 83%까지 올라갔다가 지금은 69%의 진학률을 보인다고 합니다. 2등인 나라는 옆 나라 일본으로 55%의 진학률을 보이는데, 사실 이 55%도 엄청난 숫자입니다.


대학 진학의 학비가 적지 않습니다. 이 학비 지원을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부모가 합니다. 그런데 대학에 입학하기 전 사교육비 역시 부모의 몫인 경우가 많지요. 이것뿐입니까? 결혼할 때도 그 비용을 부모가 많은 부분을 도와준다고 합니다. 문제는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자녀가 자그마치 65%나 된다고 하네요.

전에 교육받으러 다닐 때, 대기업의 인사 담당자들과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부모의 도움을 받은 사람은 취업에 오히려 방해될 때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속지 말자, 학벌. 다시 보자, 스펙.”이라는 말을 기억하면서 면접을 본다고 합니다.

학벌과 스펙을 보고 뽑았는데, 대부분 부모가 만들어 준 학벌이고 스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이고 못하고 얼마 못 가 그만두는 경우가 많고, 오히려 학벌과 스펙이 부족한 사람은 씩씩하고 적극적이어서 회사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세상이지만,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본인의 의지를 내세울 수 있다면 세상의 기준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예수님 잉태 소식을 성모님께 전한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날에 성모님의 모습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보증하는 표식으로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방식을 취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처녀인 성모님을 선택하십니다. 당시에 처녀 잉태는 인간들 사이에서 불미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고 하지만 누가 믿겠습니까?

분명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 하느님의 표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당사자의 온전한 자기 포기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과 완전한 겸손이 요구됩니다. 이 점을 성모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분명하게 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9)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자그마한 일에도 쉽게 불평불만 하는 모습, 하느님을 첫 번째 자리에 모시기보다 나를 첫 번째 자리에 놓으려는 모습, 하느님의 창조목적에 맞게 살기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며 살려는 모습 등등. 하느님께서 다 해주시길 바라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의지를 내세워서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통해 창조된 피조물이며,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해야 할 선교의 대상입니다(성 프란치스코).

 겸손한 사람일수록 꿈도 소박할 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0iOmk5bI5rY 

 오늘은 ‘성모 영보 대축일’입니다. 현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에게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것을 허락하신 날입니다. 

     

    성모님의 ‘아멘!’, 곧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가 아니었으면 구세주께서 온전한 방법으로는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습니다. 성모 마리아 외에는 모두 원죄를 지니고 있어서 그 원죄에 물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원죄가 없으심은 곧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모님의 받아들임은 바로 가브라엘 천사의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란 말씀을 받아들임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임이 겸손함입니다. 

우리도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라고 믿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고철 쇳덩어리가 하나 주어졌다고 합시다. 능력이 없는 아이는 그것으로 엿을 바꿔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능력자라면 어떨까요? 그것으로 훌륭한 칼을 만들어 자기 능력을 뽐낼 것입니다. 하느님도 그러시지 않을까요? 

    성모 마리아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하느님의 어머니로 만들 수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꿈을 작게 갖는 것이 겸손하다고 착각합니다. 능력자들은 무엇을 주어도 다 쓸모 있는 작품으로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그들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히틀러와 같은 인물도 꿈을 크게 가져서 그렇게 되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자존감이 낮습니다. 그들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합니다. 그래서 인정받으려 꿈을 갖는 것입니다. 혹은 그 반대로 자존감이 약하여 무기력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다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목적으로 창조하였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크게 감명받았던 영화가 있습니다. ‘파워 오브 원’(1992)입니다. 

    피케이는 남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영국계 아프리카너입니다. 농장주인 아버지는 코끼리에 밟혀 죽었습니다. 혼자남은 어머니마저 쓰러지자 어린 나이에 독일인 기숙사 학교에 보내집니다. 당시 영국이 남아프리카를 지배하고 있어서 학교 내에서 유일한 영국인인 피케이는 독일계 아이의 호이포에게 학교폭력을 당합니다. 견디다 못해 오줌싸개가 되고 주눅들어 삽니다. 

  

    그런데 자신 가정부의 소개로 줄루족 주술사에게 용기를 배우는 예식을 받습니다. 여기에서 아버지를 밟았던 커다란 코끼리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장면이 압도적입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유일하게 남은 혈육인 할아버지께 돌아왔을 때, 피케이는 할아버지의 친구 독일인 박사님과 같이 지내면서 자연의 신비와 머리와 가슴을 쓰는 법을 배웁니다. 독일인 친구들에게 당했지만 그렇다고 독일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남아프리카에 있는 독일인들이 흑인들과 함께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할아버지의 친구도 독일인이기에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피케이는 박사님을 만나러 감옥을 드나들면서 흑인 기엘 피트로부터 권투를 배웁니다. 피케이는 그들의 말을 하면서 흑인들로부터 환영받습니다. 흑인들은 피케이를 전설에 나오는 레인 케이커, 곧 비를 내리게 하고 갈등을 풀어주는 사람으로 믿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 피트는 자신의 동족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수용소 안에서 음악회를 제안합니다. 그리고 백인들이 알아들을 수 없게 그들을 욕하는 가사를 모든 흑인이 부르게 합니다. 흑인들은 피케이의 도움으로 부족 간의 불화를 종식하고 한목소리를 노래합니다. 이에 그 가사 내용을 들은 백인 간수가 피트를 때려죽입니다. 죽어가던 피트는 피케이에게 당신이 레인메이커라 말합니다. 그리고 머리로 싸우다 가슴으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 말해줍니다. 

  

    그러나 피케이는 여전히 그들이 믿는 전설의 레인메이커가 자신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부하지도 않습니다. 18살이 된 피케이는 권투 시합에서 우승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리아도 만나고 흑인들의 자랑인 드마 기드온과 흑인거주지역에서 권투 시합을 벌입니다. 피케이는 흑인으로만 둘러싸인 지역에서 기드온을 케이오로 이깁니다. 기드온은 일어나 피케이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리고 레인메이커임을 사람들 앞에서 선포합니다. 

  

    피케이는 기드온의 설득에 따라 그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레인메이커가 됩니다. 배워야 평등도 가능하다고 생각한 피케이는 흑인을 위한 야학을 차리지만, 백인들에 의해 좌절당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리아도 죽임을 당합니다. 피케이를 잡기 위해 경찰과 광기에 사로잡힌 보타 상사가 흑인거주지역을 습격합니다. 피케이는 간신히 살아남아 아프리카의 미래를 위해 기드온과 함께 떠나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어린이는 대통령이 되고 싶고 달나라도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냥 무탈하게 사는 게 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그러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나에게 작은 꿈을 꾸지 않으십니다. 내게 닥치는 운명에 물러서지 맙시다. 그것이 코끼리처럼 나를 짓밟으려 해도 나를 만드시는 분은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성모 마리아를 닮는 길입니다. 

  

    피케이에게 권투를 알려준 기엘 피트나 사람들에게 자신이 레인메이커임을 선포한 드마 기드온은 성모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믿든지 믿지 않든지 자신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하실 모든 것에 열려 있었습니다. 겸손하게 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무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의 가장 귀한 작품으로 만들고 싶어하십니다. 다만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화장실 변기를 수백억 원의 작품으로 바꾼 인물이 있습니다. 예술가 바르셀 뒤샹입니다. 그는 변기를 뉘어놓고 ‘샘’이란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젠 그 변기를 수많은 사람이 박물관에서 보며 감탄합니다. 예술가가 변기를 보며 자신의 예술성을 증명하려 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인간을 보며 어떤 것을 증명하고 싶으실까요? 

    살아있는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믿기만 한다면 하느님은 우리를 가장 고귀한 존재로 만드실 것입니다. 신앙인인데 그러한 큰 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는 오히려 하느님을 믿지 않는 교만이 됩니다. 구약과 신약의 요셉처럼 하느님께서 나를 향해 꾸는 꿈을 이루어드립시다

 하느님의 떨림, 인간의 울림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KP2mckg63zo

성령께서 천사를 시켜 구세주의 탄생을 예고한 즉시 마리아는 잉태하였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동정의 몸으로 성령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은 천지 창조의 신비에 맞먹는 하느님의 창조 행위였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위대한 떨림이었습니다. 이 떨림이 말씀을 소리 내어 인간을 구원하는 울림으로 전해졌습니다. 

 

  하느님의 떨림이 인간의 울림으로 전해지기까지, 에덴 동산 시절 아담과 하와의 원죄가 저질러진 후에 하느님께서 악마에게 하신 말씀은 원복음으로서 첫 떨림이었습니다: “나는 너와 하와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창세 3,15).

 

  그리고 그 다음에는 여러 예언자들과 무수한 아나빔들 사이에 셀 수 없는 기도의 통공이 오고 간 후에 하느님께서 직접 보내시는 메시아가 오실 것이 알려졌고, 특히 이사야는 그 메시아께서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실 것까지 알려주었습니다. 이 탄생 예고를 하느님의 전갈을 받들어 모신다는 뜻에서 ‘성모 영보(領報)의 신비’라고 합니다. 성체를 받아 모심을 영성체(領聖體)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또 세례를 받는 일을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 즉 영적인 몸의 탄생을 받아입는다는 뜻에서 ‘영세(領洗)’라고 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드디어 구약 최후의 아나빔이시오 신약 최초의 그리스도인이신 마리아께서 그 은총을 가득히 입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성모 영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경위를 알려주는 일이면서 또한 성령 잉태와 동정녀 출산이라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죄악으로 가득 찬 인류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느님의 새로운 창조를 알려주는 일인가 하면, 이로써 탄생하신 구세주를 따라 하느님 백성이 인류 구원을 위해 살아갈 것을 예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세주 탄생은 하느님의 말씀의 떨림이 울려 퍼진 사건이고, 그 말씀에 대한 응답인 하느님 백성의 믿음과 헌신은 그 떨림과 같은 진동을 하는 울림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탄이 묶어 놓은 매듭은 이제 성모 마리아의 순명과 구세주께 대한 믿음으로 풀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기쁜 소식입니다.

 

  교우 여러분!

하느님의 떨림이 우리의 삶에서 울림으로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조재형신부-

 

아들과 함께 오미크론에 걸린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정부의 방침대로 1주일간 격리생활을 했다고 합니다자매님은 오랜 만에 아들과 하루 3끼를 함께 먹었다고 합니다아들이 어릴 때는 같이 밥을 먹었지만 아들이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같이 식사할 일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오미크론 덕분에 아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대화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외출을 하지 못하니 냉장고에 있는 음식도 모두 정리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일주일 동안 아들은 몸무게가 2킬로 늘었는데 자매님은 오히려 2킬로 줄었다고 합니다같이 격리를 했지만 엄마는 아들을 위해서 음식도 장만하고집안일을 하면서 지냈기 때문입니다고인이 되신 저의 어머니도 그러셨습니다제가 유행성 출혈열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입니다어머니는 제가 입원한 날부터 퇴원할 때까지 병원에서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대신 아플 수만 있다면 어머니는 기꺼이 저를 대신해서 아프셨을 겁니다처음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주방 자매님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어머니께 부탁을 드렸습니다어머니는 3년 동안 저를 위해서 저와 함께 지냈습니다아버님도 3년 동안 혼자 계시는 것을 기꺼이 감수하였습니다어머니의 뜻을 아셨기 때문입니다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예전에는 성모 영보 대축일이라고 하였습니다나자렛의 처녀 마리아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하느님의 뜻을 전해들은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가 잉태할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그 잉태는 성령으로 인한 것이라고 예고하였습니다아이의 이름은 예수라고 예고하였습니다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그리고 이렇게 응답하였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의 응답으로 시작되었습니다나자렛의 처녀 마리아는 구원자 예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교회는 마리아의 평생 동정마리아의 원죄없는 잉태마리아의 승천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믿음을 선포하였습니다그러나 마리아의 삶은 고난과 고통의 삶이기도 합니다시메온으로부터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어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습니다어린 예수를 성전에서 잃어버렸습니다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보아야 했습니다예수님을 시신을 가슴에 안아야 했습니다예수님을 무덤에 묻어야 했습니다이것이 우리가 공경하는 성모 마리아이 삶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계획은 궁궐에 살던 헤로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율법과 지식에 정통한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로마의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100살에 이르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습니다시골의 목동인 다윗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습니다나이 많아서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엘리사벳이 하느님의 자비를 얻었습니다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나자렛의 마리아에게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났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려는 우리의 삶을 통해서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이것이 신앙의 신비입니다하느님의 자비하심은 이름 없는 날에 봄이 오듯이이름 없는 꽃에 향기가 나듯이 우리의 삶을 통해서 드러날 것입니다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면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 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 숨어서 피고 싶어라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이 ‘기쁨’은 단순히 던져진 인사말인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져 실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이미 실현되어 있는 실재인 까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기쁨’이 실현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곧 선포된 말씀이 실현되는 기도의 과정, 곧 렉시오 디비나의 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첫째는 기쁨이 선포되고, 선포된 말씀이 마리아에게서 경청됩니다.

 

이는 “보십시오.”(루카 1,38)라고 하는 하느님과의 대면에서 시작됩니다.

곧 그분 면전에서 신원을 깨달아 알아듣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이 일을 벌이시는 분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분 앞에 대면하고 있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입니다.

곧 “주님의 종이노니”(루카 1,38)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이신 분 면전에 주님의 종으로 다소곳하게 나섭니다.

 

둘째는 경청된 말씀을 영접하여 묵상합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인사말을 듣고 그 뜻을 곰곰이 새겨봅니다.

곧 “저는 남자를 모르는데, 어떻게 그런 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카 1,34)하고 그 일이 무슨 뜻인지를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듣습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이 이루어집니다.

 

마리아는 그분의 사랑에 자신을 수락합니다.

곧 그분의 뜻에 승복하고,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자신 안에서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께 바쳐드립니다.

 

그것은 약혼자 요셉과의 단란한 미래를 포기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율법의 위반자로서 목숨까지도 내놓는 일이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는 일입니다.

그분의 은총이 자신 안에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수락하는 일이요, 그분께서 원하신 바를 이루시도록 자신을 그분의 뜻에 맡기는 일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피앗'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것은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루카 1,38) 믿는 일이요, 사랑을 드리는 봉헌이요,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입니다.

 

이를 제1독서의 응송 시편에서는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하고, 제2독서에서는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합니다.

 

넷째는 단지 그렇게 응답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정 이루어지기를 희망합니다.

 

마리아는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고 흔연히 자발적으로 그것을 원합니다.

실상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오직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이요, 임의 사랑에 자신을 승복하는 일이요, 임이 사랑하시도록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요,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일 것입니다.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 곧 임으로 임을 사랑하는 일이 벌어지는 일, 바로 그 한 가지뿐이게 됩니다.

오로지 그분만이 자신의 전부가 되고, 그분의 힘에 덮이게 되는 일입니다.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니다.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이제 우리는 마리아와 함께 이 크고 큰 은총을 입었음에 기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아드님을 구세주로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사랑하는 분이 있다는 이 사실 말입니다.

우리에게 우리의 사랑을 받아주는 사랑하는 임이 있다는 이 사실에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그래서 마리아처럼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뜁니다.”(루카 1,4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지기를」

 -반영억신부-

 

성경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고 믿을 수 없는 이 말씀에 결국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마리아의 이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사실 순종 없는 믿음은 그림의 떡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1,37).고 하셨지만, 인간의 협력을 바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이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이 있다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마리아는 자신을 ‘주님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종’은 그야말로 노예를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말에는 그 고통을 미리 알고 그것을 참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 종에게 견디어 내는 희망을 주는 것은 바로 ‘말씀’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라는 선언이 우리에게도 희망을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함께야). “종은 자신의 의지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의지를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존재라는 기쁨을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에게 은총을 쏟아 부어주십니다. 그러나 은총을 알아채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가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마리아는 모든 것을 희생하고 감수하면서 단테의 표현대로 "처녀인 어머니로서의 고통", 그리고 "아들의 딸" 즉 하느님의 딸로서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하느님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은 항상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도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믿음에 따르는 순명의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르는 경청의 달인이요, 행동하는 어머니이셨습니다. 우리도 일상 안에서 다가오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말씀대로 실천하는 성모님을 닮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

 -송영진신부-

 

‘예수님의 탄생 예고’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흔히 놓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일이 순전히 성모 마리아 혼자만의 체험이라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온 일도, 천사가 성모 마리아에게 한 말도,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응답도 모두 성모 마리아 혼자만 알고 있는 일입니다.

다른 목격자도 없고 증인도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에 성모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자신의 힘만으로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사람들을 설득해야만 했다면,

그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

인간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바로 뒤에 나오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이야기’가 중요해집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을 확인하고 증언했습니다(루카 1,39-45).

아마도 성모 마리아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가장 먼저 요셉에게 알렸을 텐데,

요셉은 그 말을 믿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했고,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많이 고민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에게 나타난 ‘주님의 천사’ 덕분에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마태 1,18-25), 성모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보증하는 증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님 탄생 직후에 찾아온 목자들(루카 2,15-17),

동방박사들(마태 2,1-12), 성전에서 마주친 시메온과 한나도(루카 2,25-38)

성모 마리아를 위한 보증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임무를 맡기고 나서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입니다(마르 16,20).

성모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짐’을 성모 마리아 혼자서 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또 천사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도와주셨습니다.

성모 마리아가 기꺼이 응답하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하느님의 도우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도 바로 그 믿음입니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6-29).”

 

하느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요셉도 함께 부르셨음을 뜻하고, 마리아와 요셉이 약혼할 때까지

기다리셨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왜 마리아와 요셉이었을까?

‘온 삶’으로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성모 마리아와 함께 계셨고,

부르심과 응답의 순간에도 함께 계셨고, 생애의 끝까지 함께 계셨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성모 마리아 자신도 주님과 함께 살았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데,

내가 자꾸만 한눈을 팔고, 다른 생각을 하면서 주님을 떠나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30-33).”

 

예수님은 신성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고,

인성으로는 인류를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큰 인물’(가장 위대한 사람)이신 분입니다.

(아마도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신원을 세례자 요한보다 먼저

사람들에게 증언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야곱 집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왕좌’ 라는 말과 ‘그분의 나라’ 라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4-38).”

 

여기서 성모 마리아의 질문은,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 바로 요셉과 결혼해야 합니까?” 라는 뜻입니다.

천사의 대답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니 너는 응답하기만 하면 된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말은, “태어날 아기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인간의 힘이 작용하는 일

없이, 즉 완전히 하느님의 힘으로만 잉태되고 태어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동정녀가 아기를 낳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라는 말로

그 생각을 근본적으로 차단합니다.

천사는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엘리사벳이 임신한 일을 말하는데, 엘리사벳은 동정녀도 아니었고,

남편이 있었지만,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임신을 했다는 점에서

성모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일과 같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라는 말은,

종이 주인의 말에 복종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뜻입니다.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뜻이 저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저도 원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진정한 순종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원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어서 복종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빼지 말고

 -김찬선신부-

 

우리의 주님께서 마리아의 태중에 잉태되신

오늘 축일의 뜻을 담고 있는 것이 삼종기도의 첫 구절입니다.

 

"주님의 천사가 마리께 아뢰니, 성령으로 잉태하셨도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성령의 정배이자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프란치스코는 당시 일반적인 생각과 달리

클라라와 자매들에게 성령의 정배들이라고 합니다.

 

오늘 축일의 마리아처럼 성령의 정배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을 받은 클라라는 그래서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다음과 같이 애기합니다.

 

"그대는 하늘도 담을 수 없는 그런 아드님을 낳으신

그분의 지극히 감미로우신 어머니께 매달리십시오.

동정녀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태중인 작은 봉쇄 안에

그분을 모셨고, 처녀의 품으로 안으셨습니다.“

 

여기서 아주 특이한 표현이 바로 '거룩한 태중인 작은 봉쇄'인데

다른 봉쇄 수도자들과 달리 봉쇄가 몸의 밖에 있지 않고

동정녀의 거룩한 태 안에 있는 것이고

이로써 동정녀 마리아가 어머니 마리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이 그저 마리아를 칭송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리아처럼 거룩한 태를 지닌 어머니 마리아가 되기 위함이라면

우리도 오늘 마리아처럼 주님을 우리의 태 안에 모셔들여야겠지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태가 이미 정결하고 거룩하기에 주님을 모셔들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심으로써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클라라는 또 이렇게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권고합니다.

"그분을 사랑할 때 그대는 정결하고,

그분을 만질 때 그대는 더욱 깨끗해지며,

그분을 맞아들일 때 그대는 동정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요르단강이 깨끗하기에 주님께서 그 물에 들어가 세례받으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요르단강 물에 들어가심으로 그 물이 깨끗해지고

그 물이 세례의 물이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더럽다고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러우니 들어오셔서 깨끗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하늘에 고고하게 계시지 않고 죄 많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 때문이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기 위함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몸 안에도 들어오시겠다고 하실 때 빼지 말고,

오늘 마리아처럼 용기를 내어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3월 25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