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3일 사순 제5주일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 요한 8,1-11)
“Let the one among you who is without sin
be the first to throw a stone at her.”
Again he bent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새 일을 시작하려 하시며,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긴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이들에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시고는 그 여자를 단죄하지 않고 보내신다(복음).
현 시대의 '거룩하고 잔인한 돌'
-키엣대주교-
세상에는 여전히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A씨, B씨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가 바로 그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과 논리, 행동방식을 표준으로 정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논리와 방식을 따를 것을 강요합니다. 근거없는 주관적인 판단,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 수용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돌을 맞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죄 없는 자, 돌을 던져라”라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SNS라는 문명 뒤에 숨어 한치의 망설임없이 자신의 편협되고 주관적인 잣대로 상대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수없이 많은 돌을 던지고 있습니다. 당사자의 해명을 들을 필요도 없고, 그들의 고통은 보이지도 않고, 볼 필요도 없으며 나와 무관합니다.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했다고 자신하기 때문입니다. 포용과 배려는 없습니다. 그들이 수 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쌓아 놓은 명예를 손상시키고 회복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줍니다. SNS에 거침없이 쏟아내는 비난은 현대 사회의 ‘거칠고 잔인한 돌’입니다. 실제 벽돌로 때리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세상에 그래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어두운 과거를 잊고, 밝은 미래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시고 거센 물 속에 큰길을 내신 분’ 주님의 사랑은 바다가 되어 인간의 모든 죄를 씻어주실 것입니다. 회개를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는 따뜻한 포용으로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나는 이미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끊임없는 마라톤과 같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순간의 사사로운 것에 연연해하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열심히 온몸을 던져 달려가는 기나 긴 마라톤, 그 목적지 끝에는 우리를 기다리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회개의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간다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를 관대하게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시며,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다’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것을 보십니다. ‘자비의 하느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단지 ‘진실된 회개와 실천’이 필요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은 나도 과연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내가 무심코 던진 돌들이 상대방의 마음에 잔인한 상처를 주고 있는 지 깨닫고 회개해야 합니다.
나의 잘못된 지난 날을 회개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주님의 믿음과 사랑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주님의 용서를 통하여 무한한 자비의 은통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자하신 주님,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감사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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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심판과 용서 중 무엇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까?
2. 다른 사람을 심판하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심판하고 있습니까?
3.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 때 그에 대한 신뢰가 바탕이 되어 진심으로 용서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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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NS에 즉각적인 반응보다는 객관적인 시각과 침묵으로 지켜보는 한 주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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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은 정말로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해주신 말씀입니다. 솔직히 저 자신은 스스로 부지런하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게으르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고, 귀찮고 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지런한 사람’으로 평가하십니다. 좋은 의미로 말씀하셨기에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했지만, 분명 저를 완전히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유령으로 만들곤 합니다. 즉, 상대를 판단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이야기하며 세상에서 제일가는 악인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유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의 부족함으로 인해 100%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판단에 앞서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유령 만들기’를 하는 것이 아닌지를 말입니다.
개인적인 판단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본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면, 주님 역시 유령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이 간음한 여자 한 사람을 잡아다가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서 판단을 재촉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약혼녀가 혼전 정사를 다른 남자와 범했을 경우 친정의 동네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했고, 창녀는 군중이 돌로 치고 창으로 찔러 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따를 수는 없었습니다.
유다인의 사법기관이라 할 수 있는 최고의회는 로마제국의 통치 밑에 있으면서 그들 자신이 직접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자를 율법대로 돌로 치는 사형에 처하라고 하면 로마 행정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반대로 풀어 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가장 멋진 말씀을 하시지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율법에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기 전에 적어도 두 사람의 증인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는 증인이 없었지요. 또 실제로 간음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간음한 여자의 상대 남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예수님을 곤란한 상황에 놓이도록 한 여자를 극한 상황으로 몰았던 것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주님께서도 단죄하지 않는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단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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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해서 휘둘리는 걸까?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Km3slVmo6ek
오늘 복음은 간음한 여인을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로부터 구해 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은 볼 것 없이 돌로 쳐 죽이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적으로 여기는 이들은 예수님께 이 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십니다.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언가 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고 말씀하심으로써 상황을 종료시키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변화시키실 때 항상 ‘은총과 진리’를 이용하십니다. 은총은 피요, 진리는 말씀입니다. 벳자타 연못의 병자를 고쳐주실 때도 은총의 힘으로 치유해 주시고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으로 새로 나게 하십니다. 그러니 여기서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시는 행동은 분명 은총을 주시는 행동입니다. 은총의 힘으로 무언가가 땅에 써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드러나게 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른 복음에서 이렇게 나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
누군가의 마음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려면 누군가는 피를 흘려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에 무언가 쓰시는 것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기 위한 사전작업입니다. 그러니까 당신 심장이 칼에 꿰찔림으로써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이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행동의 원리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들 행동에 대해 책임이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각자의 책임은 각자가 지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책임을 나누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자신들이 변했습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요한 8,9)
손예진, 김갑수 주연의 영화 '공범'의 줄거리입니다.
다은과 순만은 매우 각별한 부녀지간입니다. 순만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애지중지하며 키우고, 엄마는 어렸을 때 돌아가셔서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순만은 다은을 키우기 위해 온갖 굳은 일을 도맡아하며 딸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 이제 다은은 기자 지망생으로 취직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느 날, 남자친구와의 데이트 도중 영화를 하나 보게 됩니다. 15년 전, 유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 속에서는 실제 범인의 음성을 마지막 장면에 추가하여 관객들에게 범인 잡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음성 속 목소리가 매우 익숙한 목소리임을 눈치 챈 다은은 그리고 이어진 범인의 말이 자신의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자기에게 습관처럼 했던 말임을 기억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은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음성을 듣고, 듣고 또 듣고.. .수 차례 의심을 반복하다가 남자친구를 통해 아버지의 신원조사를 부탁합니다. 그러다 자신의 아버지가 전과 3범이며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는 요양 병원에 의식을 잃은 채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15년 전 유괴사건은 공소시효가 얼마 안 남았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로 이슈를 만든거고, 사람들의 관심이 쏟아지며 경찰은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범인을 잡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다은의 신원조사 요구로 순만의 인적사항과 과거 행적들이 꼬리를 잡히게 되고 경찰쪽에서도 순만을 의심합니다.
순만의 집으로 유괴사건 피해자 아동의 부모님이 경찰들과 함께 오게되고, 순만의 목소리를 듣고는 기겁을 하며 순만을 내려칩니다. 그렇게 공소시효 2일인가 3일을 앞두고 쓰러진 순만은 의식을 잃게 됩니다. 이 때, 다은은 순만의 쪽지와 필적이 담긴 것들은 모두 싹 없애버립니다. 피해자가 찾아오기 전 다은은 기자를 사칭하며 피해자 부모님에게 가서 유괴사건 당시에 범인에게 받은 쪽지를 건네받고 그 쪽지를 보고는 자신이 아버지와 함께했던 받아쓰기 기억이 생각나며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다은에게 시킨 받아쓰기는 피해자에게 지령을 내리기 위한 쪽지였던 것입니다.
다은은 차라리 아버지가 깨어나질 않길 바라며, 집 안에 있던 모든 증거를 없애버립니다. 다은도 공범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릴 적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았던 되었던 공범과, 현재 성인이 된 지금 스스로 공범이 되었습니다. 수사에도 협조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순만은 깨어나게 되고 목소리 검증을 하는데, 목소리 불일치로 순만은 풀려납니다.
순만은 풀려났지만, 다은은 아버지를 향한 의심이 확신이 되어 다시 물어봅니다. 왜 그랬냐고, 왜 어린 나에게 받아쓰기를 시켜서 공범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공범으로 만드냐고 이야기합니다. 순만은 자신은 아니라며 내 말을 믿으라고 애원합니다.
함께 트럭을 타고 가던 중, 공소시효가 끝난 12시 정각이 되자 순만은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합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게 아니라고 했지..?" 자신을 옥죄여오던 15년의 공소시효가 풀리자마자 순만은 변합니다. 다은은 트럭에서 내려서 같이 죽자며 왜 그랬냐고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그 뒤에 이들을 따라 오고 있던 유괴사건 피해자 아동의 아버지가 이야기를 듣자마자 트럭을 받아버리고, 피해자 아버지와 순만은 사망합니다.
다은은 충격으로 튕겨져나가며 목숨은 구했으나 매우 심각한 중태에 빠집니다. 마지막 씬에서는 다은의 엄마가 나오며 진실을 이야기합니다.
어릴 적, 자신의 아이는 유산이 됐고 순만은 산부인과에서 다른 신생아를 납치하게 됩니다. 그게 다은이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엄마의 동생(삼촌)은 순만에게 끊임없이 다은을 미끼로 돈을 요구했습니다. 순만은 그 돈을 마련하기 위해 또 다른 아이를 납치하고 죽이게 되고 (유괴사건 피해자), 결국 다은은 납치 된 아이었으며, 범죄가 또 다른 범죄를 낳은 이야기였습니다. 입원실의 다은의 이름은 윤미선으로 바뀌게 되며 이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하느님 자녀를 유괴하는 것과 같습니다. 공범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을 안다면 나 스스로라도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그 사람도 하느님과 함께 단둘이 자기 일을 해결하게 해야 합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휘둘릴 때 나도 피해자가 아닌 공범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휘두르는 사람들은 타인의 자유를 빼앗는 범죄에 나를 가담시켜 공범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의 죄를 아담과 공유하고자 아담에게 선악과를 내미는 순간을 연상하게 합니다. 아담은 그때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요? 선악과를 권할 때 땅에다 무언가 쓰는 시간을 가졌어야 합니다.
아무리 부부지만 네 인생은 네 것이고 내 인생은 내 것입니다. 내가 비록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 쓰는 쓸모 없어 보이는 일을 할지라도 그것을 멈출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일단 침묵하며 당신이 나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엔 선악과를 먹으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의 자유입니다. 죄이지만 그 책임은 온통 자신이 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담이 하와에게 휘둘리지 않고 완전히 독립적일 수 있었다면 하와도 하나만 먹고 말았을 것입니다. 죄책감은 공유할수록 작아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지면서 끝까지 그런 행위를 고집하기는 어렵습니다.
만약 아담이 이렇게 했다면 아담이 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착한 것입니다. 착한 사람이 오히려 휘둘리지 않습니다. 착한 사람은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자신의 것임을 알려줄 뿐이지 그 사람의 자유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행동을 일관되게 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도 존중받으려 합니다. 그래서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카톡을 하루에 한두 번만 봅니다. 아침에 카톡을 한 사람은 밤에 답장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분이 나쁠 수 있지만 제가 그때그때 카톡에 답장한다면 정신이 없어 아무 일도 못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처음에 좀 기분 나빠 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다 이해를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그 분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남의 자유는 아무리 친해도 휘둘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가 휘둘리고 있다면 어쩌면 나도 휘두르는 사람이어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혼자 남겨져도 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느님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으로부터 다 버려져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된다는 생각이 없으면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어야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무언가 하려고 하는데 해도 되느냐고 묻는다면 저는 다 하라고 합니다. 다만 그 책임은 나에게 없다는 것을 명확히 합니다. 각자의 삶은 각자의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해서 하도록 놓아두지 않습니다. 나의 권고와 그 사람의 행위는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 사람이 선택하고 책임도 그 사람이 지게 합니다. 결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면 지옥 갈 수도 있다고. 그리고 대부분 잘 알아듣습니다.
누군가에게 휘둘리지 않고 그런 사람을 바꾸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두 과정을 거치도록 노력합시다. 그러면 정말 훌륭한 상담가가 될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하는 것을 꾸짖는다면 그것 역시 그 사람에게 휘둘리는 것입니다. 일단 자신을 돌아보도록 내가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나도 그 사람에게 자유를 주니 책임 있는 행동을 잘 생각해서 하도록 놓아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은 자신 행동에 대한 책임을 혼자 지지는 못하게 됩니다.
메마른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어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Aj8AV6rP6c
1. 오늘은 사순 제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 때입니다. 다음 주일은 성주간이 시작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고 그 다음 주일에는 부활대축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죄와 용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의 공통적인 본성은 힘과 이익을 좇다가 죄를 짓는 존재라는 것이고, 이에 대해 하느님께서는 그 죄의 현실에서 새롭게 시작하도록 자비를 베푸시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수많은 문명을 일으키고 스러졌다가 다시 일으켰지만 그 안에 공통된 특징 역시 죄의 역사라는 점입니다. 그 죄 때문에 힘 없는 이들이 고통을 받아야 했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푸시러 세상에 오셔야 했습니다.
2.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모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노아 시절에 하느님께서 당시 인류가 저지르는 죄에 노하셔서 일으키신 대홍수에 대한 기억입니다. 대홍수로 인해 지구에는 커다란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산이란 산이 죄다 물에 잠겼고, 그러다가 물이 빠지면서 바다 가운데 있던 땅에 강이 흘러 물길이 났습니다. 엄청나게 거센 물이 급하게 빠져 나오면서 땅을 침식하여 커다란 협곡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의 커다란 강들과 호수 그리고 대협곡들은 이때 조성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상들이 대대로 전해준 전승을 떠올려 전해준 이사야는 대홍수로 말미암은 격변만이 아니라 그에 숨겨져 있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고 타일러주었습니다. 다음 말씀이 그 뜻입니다: “예전의 일들을 기억하지 말고, 옛날의 일을 생각하지 마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이사 43,18-19). 훗날 세례자 요한이 이사야의 이 말을 받아서 외쳤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이 오실 길을 곧게 내어라”(마르 1,3).
3. 과연 요한이 곧게 낸 그 길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오셨고, 뒤늦게 이를 깨달은 사도 바오로는 오늘 제2독서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필리 3,8). 그가 애초에 가려고 했던 바리사이즘의 길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길을 택한 것은 율법에서 인정받는 의로움이 쓰레기인 줄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정받는 의로움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죄 때문에 죽음을 각오하시고 천국의 길을 여신 예수님을 본받아, 그분처럼 부활의 힘으로 죄를 없애는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아직 그 길의 목적지에 다다른 것은 아니지만,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고 가야할 길을 향하여 내달리고 있다고 고백하면서 그는 필리피 교우들에게도 같은 길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외람되지만, 자기를 본보기로 삼아 함께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자고 권고하였습니다.
4.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온 바리사이파 유다인들을 심판하시고 그 여자를 용서해 주신 이야기였습니다. 그 바리사이들은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고 계시던 예수님께 다짜고짜 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세워놓고 재판해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무례하게 굴던 그들의 속셈은 그 여자의 죄를 빌미로 예수님을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던 것이었습니다. 유죄로 판결하면 평소에 가르치시던 자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며 동네방네 모함하고 다닐 것이 뻔했고, 반대로 무죄라고 판결하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한다며 고소할 태세였습니다.
5.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바리사이 유다인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이었습니다. 죄가 있으면 자신들의 율법대로 재판하면 될 일이었고 굳이 예수님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또 그 죄가 간음행위로 인한 죄라면 상대 남자도 함께 데려와야 했는데 그들은 여자만 데리고 와서 재판을 강요했습니다. 재판의 최소 형식요건에도 맞지 않게 억지로 재판을 강요하고 있는 이 행위 자체가 죄였습니다. 평소에도 힘 없는 사람들을 율법을 모른다고 비난하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낙인찍던 그들이었는지라, 그들은 증거도 없고 증인도 없이 심증만으로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예수님께서 움직이시는 동선을 미리 파악해 놓은 듯이 그분께서 백성들과 함께 있는 시간에 맞추어 느닷없이 들이닥친 그네들이 짜고 치는 놀음에서 죄의 악취가 물씬 풍겨 나왔습니다.
6.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러 왔다가 졸지에 재판을 방청하게 된 백성은, 이미 손에 돌을 들고 여차하면 여자에게 던질 기세로 그분을 다그치던 바리사이파 유다인들보다도, 터무니 없는 재판을 느닷없이 강요당하신 예수님께서 과연 어떻게 하실 지가 매우 궁금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태연자약하게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그분이 피우시는 딴청에 조바심이 난 바리사이들이 재촉하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한 말씀 던지셨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7. 그리고는 다시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이때쯤이면 지켜보던 방청 백성도 과연 누가 죄인인지 상황이 파악되었을 듯합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떠나가자 백성도 기다렸다는 듯이 너나 할 것이 서둘러 그 자리를 떴습니다. 어렵사리 뱉으신 이 말씀 한 마디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선고였습니다. 그 말씀을 뒤집으면 죄 있는 자들은 너희들이고, 너희들이야말로 재판을 받아야 할 자들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자리를 떴다는 기록도 재미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죄가 많을 수도 있겠고, 나이가 많으면 많던 적던 지은 죄에 대한 성찰도 깊어지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고백은 죄에 비례하지 않고 성찰에 비례합니다.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죄를 성찰하는 사람, 그것도 깊이 있게 성찰하는 사람이 더 뉘우치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도 죄 많은 순서대로가 아니라 뉘우치는 순서대로 받습니다.
8. 여인에게 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예수님께서는 관심이 없으셨던 듯합니다. 그저 힘이 약해서 끌려온 그 여인이 안쓰러우셨고, 발언권도 없고 변호받을 권리도 없었던 그 여인이 불쌍해서 그 여인의 편에 섰을 터입니다. 다들 가 버리고 났을 때,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요한 8,10). 한 눈에 척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인데도 구태여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물으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분은 그 여인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싶으셨던 겁니다. 자기를 변호할 기회조차도 빼앗긴 그 여인이 자기 입으로 당당하게 상황을 설명하라고 기회를 주신 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요한 8,11ㄱ)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ㄴ) 하고 말씀하시고 상황을 마무리하셨습니다.
9. 하느님께로부터 심판자의 역할을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으로 지목된 이들을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보여주는 복음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죄인입니다. 또한 문명은 생활을 물질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지만 그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기회가 고르지 않기 때문에, 문명이 발달할수록 빈부격차가 커지고, 나눔이 없는 채로 세대가 대물림되면 빈부양극화는 갈수록 커집니다. 그래서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도 늘어납니다. 사람이 죄인이고 문명이 죄를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문명을 이룩한 역사 역시 죄스런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의 한가운데에 하느님께서 오셔서 죄를 없애기 위한 하느님의 대책을 발표하셨으니,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10.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되고 대감염 상황이 일상화되면서, 이 여인처럼 목소리를 빼앗긴 사람들이 숨도 못 쉬고 움츠리고 있습니다. 자신의 일자리를 떳떳하게 차지하지 못하고 눈치 보아 가며 일하던 여러 분야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이 고통을 참아 주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방역에 성공한 국가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재난은 평등하지 않았고 약자에게 더 가혹했습니다. 그들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일해 왔지만, 재난 상황에서는 생계 유지 방편조차 잃어버릴 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1. 그 약자들이란 자영업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에서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에게 다양한 교육과 돌봄을 제공했던 방과후 교사들, 여행멈춤의 시대에 여행과 관련된 일로 생업을 유지하던 이들이나 관광통역안내사들, 그리고 식당 노동자들, 재난지원금을 받을 꿈도 꾸지 못하는 임시체류 이주노동자들, 장기간 공연 방학으로 무대를 빼앗긴 공연예술 노동자들, 그리고 겹치기로 일하던 각종 알바 노동자들도 있습니다.
12. 무작정 끌려와 자기 목소리도 내지 못하던 여인에게 물어봐 주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아주신 예수님처럼, 집단감염의 대재앙 시대에 불평등한 노동현실에서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나 상시적 해고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 그러면서도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에게 자비로운 시선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소리 없이 세상의 죄가 쌓이는 동안에 힘 없는 약자들이 죄로 인해 입는 상처와 당하는 피해도 소리 없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메마른 욕심의 광야에 사랑의 길을 내야 할 때입니다.
-조재형신부-
1988년 5월 4일 군대에서 제대하였습니다. 3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같은 모양의 머리 모습을 해야 했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인원점검을 하였습니다. 군복을 입었고, 창의적인 일보다는 시키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였고,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갈 수 있었고, 늦잠을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었습니다. 군복이 아닌 옷을 입을 수 있었고, 머리도 자유롭게 기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신학생이었기 때문에 ‘성소국장’ 신부님께 인사드리러 갔습니다. 성소국장 신부님은 복학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지 물었습니다. 저는 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복학 할 때까지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돈보스코 청소년 센터는 집안 형편이 어려운 학생, 학교 공부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이 기술을 배우는 학교였습니다. 학생들은 기술을 배우면서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였고, 매일 아침에 미사를 보았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은 학생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을 도와서 미사 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방송통신 고등학교에 갈 때 동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생들과 함께 농구, 축구를 같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10개월간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낮에는 기술을 배우고, 밤에는 야학에서 선생님들에게 배웠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학생들에게, 잠시 방황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학생들에게도 돈보스코 센터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기술을 배운 학생들은 취직하여 새로운 자리로 옮겨 갔고, 방송통신 고둥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돈보스코 센터는 학생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준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힘들고, 기숙사에서 지내는 것이 마치 군대에 있는 것 같았지만 제게는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외국에서 온 신부님들과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칫 무료하게 보낼 수 있었는데 복할 할 때까지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정한 여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여인은 돌에 맞는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돌에 맞으면 죽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돌에 맞아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사람들은 여인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여인의 입장에서 그 자리는 심판의 자리였습니다. 이제 곧 돌에 맞아야 하는 고통의 자리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며 죽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다. 그저 자리에 앉아 무엇인가를 쓰고 계셨습니다. 한참이 지난 다음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들이 먼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십시오.’ 그러자 나이가 많은 사람들부터 자리를 떠났습니다.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자신들도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간 뒤에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야기합니다. ‘당신도 돌아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 예수님께로부터 용서를 받았던 여인에게 이제 심판의 자리였던 곳, 돌에 맞아 죽어야 했던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습니다. 죽어야 할 여인은 이제 새롭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척박한 광야라 할지라도, 설사 감옥이라 할지라도 그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헤로데의 궁궐일지라도, 풍족한 삶일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은 될 수 없습니다. 순교자들이 죽었던 새남터, 절두산, 서소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어서 순례자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평화가 있는 곳이라면 곧 돌에 맞아 죽어야 할 곳일지라도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용서를 받았던 그 여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주님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용서와 평화가 있다면 지금 이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신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것을 얻은 것도 아니고, 목적지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차지하려고 달려갈 따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이미 나를 당신 것으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내 앞에 있는 것을 향해 내 달리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온전한 신앙고백입니다. 또한, 우리 모두를 초대하는 말입니다. 이제 우리도 바오로 사도와 같은 열정으로 우리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 달려가야 하겠습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 정녕 나는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리라.”
괜찮다, 다 괜찮다!
-양승국신부-
참으로 은혜롭고 감동적인 에피소드가 요한 복음에 등장합니다. 이른바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님 앞으로 끌려온 여인의 스토리’(요한 복음 8장 1~11절)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의 순간에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반응은 참으로 특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복음 8장 1절)
이 부분이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대체 예수님께서 그 절박한 순간에 땅에 무엇을 쓰셨을까요? 수많은 성경학자들과 교부들이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리셨습니다. 둘러서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쓰셨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적대자들에게 건네고 싶은 성경 구절을 쓰셨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께서는 ‘악한 고발자들의 죄목’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닥에 쓰신 내용에 대해서는 귀신도 모른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도 모르신다는 것, 오직 예수님 자신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 사이에서도 어렵고 곤란한 질문을 받을 경우, 즉답을 피하고 싶을 때, 말없이 땅에 무엇인가 쓰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과열된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의도에서 그런 행동을 취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촌각의 순간, 하느님 아버지께 지혜를 구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적대자들을 향해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셨습니다. 단단한 방어막도 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침묵 속에 가만히 계셨습니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바닥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작전명은 ‘김빼기 작전’이었습니다.
적대자들 입장에서 이번 먹잇감을 가운데 두고 예수님과 언성 높여 대판 한번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짠 ‘예수 고발과 체포’작전이 팍팍 진척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시며 깡그리 그들을 무시해버리셨습니다.
갑자기 김이 빠질 데로 다 빠져버린 적대자들은 엄청난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위기관리능력이 참으로 뛰어난 예수님이셨습니다.
이어서 맥 빠지고 허탈해진 적대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결정타 한방을 더 날리십니다.짧은 한 마디 말씀은 이 세상 그 어떤 현자, 솔로몬 할아버지도 내놓을 수 없는 불멸의 명언이었습니다.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복음 8장 7절)
그 말씀 끝에 사람들은 하나하나 떠나가고, 결국 텅 빈 성전 마당에는 예수님과 그 여자 단 둘만 남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그 순간에 대해서 아주 아름다운 주석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다 빠져나가고 오직 둘만 남았습니다. 우리 인간을 대표하는‘비참한 여인’과 ‘하느님의 자비’ 둘만 남았습니다.”
하느님의 인간을 향한 이 어처구니없는 사랑,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 기막힌 사랑으로 인해 여인은 눈보다 더 깨끗하게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여자의 상태를 가리켜 교회 전승은 ‘순결한 창녀’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창녀, 이것은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언인가 쓰셨다고 복음사가는 전하고 있는데 사실 땅바닥은 여인의 가슴이었습니다. 그 땅바닥은 죄와 타락과 방황으로 얼룩진 여인의 마음이자 우리 각자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땅바닥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마음 하나하나에 당신 손가락이 아프도록 꾹꾹 눌러 또 다른 한 말씀을 새겨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내 딸들아, 너희들이 아무리 죄가 많다할지라도, 너희들이 아무리 몹쓸 짓을 했다 할지라도, 괜찮다, 다 괜찮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영근신부-
사순 5주일입니다.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말씀전례는 ‘하느님의 자비’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놀라운 자비를 베푸시어 구원하심과 보살핌을 주셨음을 기억하고 찬양하라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자비를 마음 깊이 간직하기를 권고하면서,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필리 3,14)임을 말해줍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의 용서’를 통해 실제로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십니다.
혹 우리는 가슴에 돌덩이 한 두 개 정도 품고 살아가지는 않는지요?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 말입니다.
‘화’라는 돌덩이, ‘상처’라는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 돌덩이는 스스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들이 들려주어서 들게 된 돌덩이든, 타인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짓누르고 있고 자신을 무겁게 할 뿐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고발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말합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11,7)
그러자 고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나이 많은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
돌을 손에 든 채로 갔는지 땅에 내려놓고 갔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차마 지금은 던지지 못하고 나중에 더 세게 던지려고 그냥 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그들은 여인을 구실로 삼아 이미 예수님에게도 여인에게도 돌을 던진 이들입니다.
단지 더 이상 돌을 던지지 못했을 뿐입니다.
단지 그 자리를 피하였을 뿐입니다.
죄송하다고 말하지도 않고, 용서해달라고 말하지도 않고, 단지 떠나갔을 뿐입니다.
아마 그들은 또 다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진정으로 회개한 이들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회개는 단지 심판하지 않고 돌을 던지지 않는 것에 머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돌 맞은 이의 아픔과 상처를 위로하고, 쓰러진 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만 피하는 것이 아니라, 혹은 용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를 위하여 그에게 선을 베푸는 일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지은 여인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돌 맞은 그의 상처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또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도와주십니다.
구원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용서의 표시입니다.
그것은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도와주고 기도해주고 이끌어주는 일입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시는 죄짓지 마라.”
(요한 8,11)
우리 주님께서는 죄인은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새롭게 살 수 있는 힘과 위로를 주십니다.
도와주시고 이끌어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차마 던지지도 못하고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기만 하는 돌덩이가 있지는 않는지 보게 하소서.
돌덩이를 품은 바람에 오히려 그 무게에 짓눌린 자신을 보게 하소서.
화라는 돌덩이, 상처와 미움의 돌덩이, 원망과 심판의 돌덩이를 내려놓게 하소서.
돌덩이가 아니라 그를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도와주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요한 8,7)
주님!
제 가슴에 돌덩이를 품고 살아가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돌덩이로 오히려 저 자신이 짓눌려 있지 않게 하소서.
돌덩이를 가슴에 품고 만지작거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만지작거리게 하소서.
위하는 마음을 품고 가벼워지게 하소서!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죄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악의 세력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원을 주시고자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시어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고자 하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비와 용서로 드러납니다. 이 시간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면 화를 내고 못된 사람이라고 욕합니다. ‘세상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고 할 때도 있습니다. 더더구나 ‘성당에 다니는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 ’고 말합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이고 상대는 못된 사람이라고 단죄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정작 자기도 잘못을 범하고 있으면서 그 사실은 잊고 삽니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에 앞서 내 마음속에 있는 욕망과 무질서를 먼저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교회는 성인들을 전시해 놓은 박물관이 아니라 죄인들을 치료하는 병원”(모튼 켈시).입니다.
유다인들의 지도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예수님께 끌고 와서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이것은 여인을 단죄하기보다는 예수님께 올가미를 씌우고자 하는 속셈이 더 컸습니다. 사랑과 자비, 용서를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돌로 치시오.” 하고 그를 단죄하면, 지금까지의 가르침이 헛된 것이요, 위선자가 됩니다. “여자를 돌로 치지 마시오.” 하고 단죄하지 않으면, 전통의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야말로 고약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하십니다. 그리고는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습니다. 무엇이라고 쓰셨을까요? ‘너 자신을 알라!’ 하셨을 까요? 아니면, ‘거기 있는 사람들의 죄목을 하나하나 쓰셨을 까요?’ 어찌 되었든 무엇인가 쓰고 계실 때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습니다(요한 8,9). 그들은 과연 자신이 돌을 던질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여인을 단죄하기 이전에 먼저 자기 자신부터 냉정하게 심판해야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로마3,10-16). 하늘 아래 죄인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돌을 던지지 않고 자리를 떠난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주님의 한 말씀에 자신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과거를 속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떠났습니다. 사실 자기가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타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결코 돌을 집어 들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죄인을 만나게 됩니다. 잘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우리는 바리사이처럼 고발하고 단죄하는 모습이 아니라 몸을 굽히시어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주시는 예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는 것이 마음에 듭니다. 즉각 판단을 내리지 않으시고 여유를 주셔서 자신의 속을 보도록 해 주셨다는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자신의 속을 보고도 돌을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허물에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의 허물에는 한없이 관대합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모습 때문에 더 큰 자비가 필요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총도 충만히 내렸다’(로마5,20)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허물이 많은 우리에게 주님의 충만한 은총이 주어지길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은 사랑하지만, 죄는 미워하십니다. 무조건 눈감아 주는 것이 용서가 아닙니다.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죄를 인식한다 하더라도 통회하지 않는다면 용서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얼마나 진심으로 통회하느냐에 따라서 용서의 체험도 달라집니다. 깊이 통회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용서를 그만큼 깊이 체험할 것이고, 적게 통회하는 사람은 그만큼 적게 체험할 것입니다(송봉모). 그러므로 고해성사를 준비할 때 성실한 양심성찰과 통회,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결심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복수는 복수하는 사람과 당하는 사람 모두를 파멸시킵니다. 그러나 용서는 용서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수를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함으로써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7,3). 고 말씀하십니다. 나의 허물을 인정할 수 있는 깨달음을 얻게 되길 기원하며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비를 내려주시는’(마태5,45) 아버지 하느님,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잊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기억하시죠?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란다고 했습니다. 꼭 와 있을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 지옥에 떨어질 것으로 생각한 사람이 와 있어서,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이 거기에 와 있어서 놀란답니다. 우리는 겉모양으로 판단하지만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편협한 비판이나 판단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성인이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 평생 소원은 다시는 당신 마음을 상하게 해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도록 필요한 은총을 주십시오.” 이 기도를 들은 하느님께서 크게 웃으시며 대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은총을 구하는 구나. 그런데 내가 그런 은총을 모든 사람에게 준다면 도대체 나는 누구를 용서해줄 수 있단 말이냐?”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입니다. 한계와 죄스러움 속에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시작하시기를 바라십니다. 언제나 자비로움으로 나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기쁨으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을 단죄했던 이웃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가타 성경을 만든 예로니모 성인은 오랜 세월 성욕에 시달리며 살았답니다. 성인은 성경번역에 더욱 열정을 쏟아 넣어 자신의 정욕을 승화시키려고 했습니다. 어느 날 성인이 기도하고 있었는데 주님께서 아기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너무 기뻐서 “사랑하는 예수님, 제 정성을 다하여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이 가장 기뻐하실 선물이 무엇인지 말해 주십시오.” 그랬더니 아기예수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인데 그대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예로니모 성인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하기에 무엇인가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수도자라 가난하지만 마침 어떤 이가 좋은 곳에 쓰라고 돈을 주었는데, 드릴 터이니 받아주십시오.” 예수님은 웃음을 띤 얼굴로 대답하셨습니다. “그 돈은 그대가 직접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나는 돈이 필요없으니까.” 그런대도 예로니모가 계속고집하자 예수님께서는 웃음을 거두시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대는 정말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을 주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대의 모든 죄와 욕망을 나에게 주어라. 내게 필요한 선물은 바로 그것이다. 나는 너의 죄와 욕망 때문에 십자에서 다시 죽을 것이다. 이것만큼 내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울 선물은 없으니.” 예로니모 성인은 이 환시체험 후 두 번 다시 성욕에 시달리는 일이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허물을 온전히 주님께 맡겨 드려 자비를 입고 자유를 누려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죄인
@@ 위대한 수학자요 천문학자이며 과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가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 유언을 따라 묘비명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습니다. “나는 바오로가 가진 특권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베드로에게 주신 능력도 구하지 않습니다. 나는 다만 십자가에서 강도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를 원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송영진신부-
요한복음 8장에 있는, ‘간음하다 잡힌 여자 이야기’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여기서 ‘심판’이라는 말은 ‘처벌’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에게 ‘벌’을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구원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여기서 ‘죄인들’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처벌’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가르침은
구약성경에도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살기를 바라시는데,
즉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시는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 쪽에서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일이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능동적으로’ 받으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지은 죄를 그대로 두고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것은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심판과 처벌을 받는 쪽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에 세워 놓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서 이런 여자에게 돌을 던져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몸을 굽히시어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기 시작하셨다(요한 8,3-6).”
여기서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라는 말은,
판결을 내려 달라는 뜻이 아니라, ‘의견’을 말해 달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라는 말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일부러 여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왔음을 나타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여자의 처벌 여부에는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고발할까?”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미끼였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율법대로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시면,
그들은 로마법을 안 지켰다고 예수님을 로마 당국에 고발할 것이고,
여자를 그냥 풀어주라고 말씀하시면,
유대교 율법을 안 지켰다고 유대 당국에 고발할 것입니다.
당시에 로마는 죄인을 사형에 처할 권한을
이스라엘에 주지 않았습니다(요한 18,31ㄴ).
그러면서도 로마인들은 유대교 율법 문제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었습니다(요한 18,31ㄱ).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을 쓰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침묵을 지키셨다는 점입니다.
그 침묵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해 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으로 해석됩니다.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몸을 굽히시어 땅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갔다. 마침내 예수님만 남으시고
여자는 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요한 8,7-9).”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1) 죄인을 심판하고 처벌하는 일은 하느님만의 권한이다.
2) 무슨 죄를 지었든지 간에 죄인을 처벌하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3) 너희부터 회개하여라. 구원받고 싶으면.
이 말씀은 인간 세상의 사법제도를 부정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인간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는 사법제도가 필요하고,
죄인을 처벌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처벌은 죄인을 회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최후의 심판 때의 처벌은 곧 멸망인데,
이 세상에서의 사법제도의 처벌은 그 멸망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해서 모두 떠나간 것은,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획이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미끼로 사용했던 여자를 버려두고 그냥 떠나버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떠나가서 회개를 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그 여자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0-11)”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라는 말씀에는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않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처벌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나도 너를 처벌하지 않겠다.” 라는
뜻이고, 당신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려고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너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겠다.”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죄 선고’가 아니라 ‘집행유예 선고’입니다.)
“너를 용서한다.” 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신 것은,
아직 여자가 회개하기 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거라.” 라는 말씀은 “회개하여라.”로 해석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회개하고 새 인생을 살아라.”
라는 뜻인데, 만일에 여자가 회개하지 않고 다시 죄를 짓는다면
전에 지은 죄까지 합해서 가중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하시는 경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말씀 나누기 - 사순 제5주일-어디로 갈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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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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