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4. 8. 06:42

2022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 이다.” 
(요한 10,31-42)


If I do not perform my Father's works, do not believe me;
but if I perform them, even if you do not believe me,
believe the works, so that you may realize and understand
that the Father is in me and I am in the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그의 곁에 계시니,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하느님을 모독하였다며 유다인들이 돌로 치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의 일들은 믿으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의대 교수는 의대생들이 시험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왔을 때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답지에 적어낼 때 감점을 아주 크게 한다고 합니다. 보통 답을 몰라도 자기 나름의 답을 적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의대 교수는 의사가 생명과 연관된 직업이기에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하긴 진찰하고서 잘 모르겠다며 아무 약이나 처방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절대로 해서는 안 될 행동이 분명합니다.


추측의 위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측을 삶의 전반에서 취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추측, ‘아니면 말고’ 식의 말들, 한 가지 모습만을 보고서 ‘그 사람은 ~ 이런 사람이다.’라고 단정 짓는 모습 등등….

이 추측은 과거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향해서도 똑같이 범했던 죄였습니다.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합니다. 죄목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라는 예수님 말씀이 신성모독이기에 돌로 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성모독의 경우는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를 때에만 해당했습니다. 율법해석가인 랍비 압바우(300년)은 “어떤 사람이 나는 하느님이요 라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나는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면 그는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즉, 굳이 따진다면 ‘거짓말’을 했다는 죄에만 해당하지, 신성모독 죄는 아닙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나는 메시아다.”라는 말을 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로마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기에, 사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결국 억지 주장을 펼치고 있는 유다인들의 모습입니다. 좋은 일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은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른다는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통해서라도 하느님을 믿으라는 호소인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계속됩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왜 받아들이지 못할까요? 어떻게든 믿지 않으려는 완고한 마음이 그 사랑의 손길을 보지도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만듭니다. 이제 더는 함부로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참다운 기도란, 내 뜻을 하느님께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고 계시는지를 묻는 순간이다(성녀 마더 데레사).

 마고르 미싸빕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sIdpOBTozQ

선과 악이 뒤바뀌면 의인이 죄인처럼 단죄당하고 악인이 선인처럼 위장하여 현실의 권력을 장악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동족들에게 박해받던 예언자 예레미야가 따돌림당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하느님께 하소연하였습니다. 이 기도에서 사면초가로 고립된 자신의 처지를 사람들이 놀려대는 말이 히브리어로 ‘마고르 미싸빕’입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 반항하는 동족 유다인들이 돌로 치려 하자,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빵과 물로 선포하신 영원한 생명의 복음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이 하시는 일을 보아서라도 하느님은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신 때는 요시아 왕이 한창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기원 전 7세기 중반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의 개혁은 신하들과 예언자들 그리고 사제들의 고질적인 부패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남유다 왕국은 급속하게 몰락해 가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앗시리아와 바빌론 그리고 이집트 등 주변 강대국들은 지역 패권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고 어떻게든 애써야 했으나, 요시아 왕과 백성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가짜 예언자와 가짜 사제들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야말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안팎이 어렵던 시절인데도, 이 청맹과니 예언자 사제들은 딴청을 피우며 멍청한 낙관론을 유포하였습니다(예레 5,12). 그러나 예레미야가 받은 하느님의 말씀은 정반대로 ‘소름끼치는 무서운 일’(예레 5,30-31), 즉 예루살렘의 파괴와 바빌론으로의 유배였습니다(예레 20,4-5). 

 

  그런데도 유배생활이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도 지배자만 바뀌었을 뿐 강대국의 지배는 지속되었고, 이제는 자기 땅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었으며, 하느님께 대적하려 드는 못된 버릇도 여전히 고쳐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을 보고 가르치신 바를 들으면서도 되려 그분을 거짓 예언자로 몰고 가면서 돌을 던져 죽이려고까지 드니까, 답답해지신 그분께서(요한 10,32) 아주 근본적인 이야기, 즉 아담의 후손이자 노아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기시키셨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으로부터 하느님께 관한 특별한 신앙적 교훈을 듣고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이 정체성으로 아직 하느님을 모르는 주변 민족들에게 하느님의 빛을 반사해서 전해 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계신 분을 신성모독자로 간주하고는 돌로 쳐서 죽이려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감쪽같이 벗어나셨습니다(요한 10,39). 이렇게 하여, 예수님을 배척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의식조차 걷어 차 버렸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현실도 예레미야 당시나 예수님 당시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 선과 악을 뒤바꾸어 놓은 범인들은 ‘檢言政判’, 즉 검사들과 언론인들과 정치인들 그리고 판사들입니다. 특히 정의를 수호하겠다는 선서를 했던 검사들은 어이없게도 범죄를 대놓고 저지른 후에는 ‘일단 도망가고, 잡히면 부인하고, 백을 쓰면’ 처벌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고제규, 2021.11.17., 시사인). 작년 ‘채널A 검언 유착 사건’, ‘라임 술 접대사건’, ‘고발 사주 의혹 사건’ 등 모두 검사들이 연루된 사건에서 수사 대상이 된 검사들은 휴대전화를 폐기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정치공작이라고 주장하며 검찰권력 뒤에 숨었습니다. 가증스럽게도 죄를 지은 검사 출신들이 숨는 권력의 백그라운드는 죄인을 재판에 넘길 수도 또는 넘기지 않을 수도 있는 기소권 독점 현실과 선택적 정의를 편리하게 구사하는 타락한 검찰입니다. 이 부당하고 사악한 현실을 정상화시켜 놓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정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게 되어 버렸습니다. 억울한 피고인을 보호하고 적폐를 청산해야 할 검사들이 거꾸로 적폐세력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스스로 적폐가 되어 악랄한 활약을 하는 바람에 대선판까지도 뒤집어 놓아서, 피의자로 수사를 받아야 할 사람을 최고 권력자로 올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아직 취임도 하기 전이지만 벌써 국민적 저항의 기운이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눈앞의 작은 이익에 팔려서 넘어갔던 ‘묻지마’ 지지 여론까지 깨어나면, 머지않아 뒤바뀐 현실을 제대로 돌려놓으려는 복원력이 거세게 작동할 것입니다.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단, 세상의 그 빛은 태양이 시간이 되면 떠오르듯이 저절로 비추어지지 않습니다. 나라의 공동선과 정의에 깨어있는 이들이 세상의 빛이 되어 어둠을 몰아내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무죄함을 탄원하며 의로운 이들과 가난한 이들이 종내는 승리하리라는 희망을 피력하던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억합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하느님을 믿으라고 분부하신 예수님 말씀을 기억합니다. 우리 사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어둠의 악은 조만간 ‘마고르 미싸빕’이 되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빛입니다. 

 -조재형신부-


인문학으로 성경 읽기를 듣고 있습니다오늘은 도미니코 페티의 걸작과 습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도미니코 페티는 요한복음 19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모티브로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는 작품을 그렸습니다하나는 거의 습작의 수준이었고다른 하나는 정성을 기울인 걸작이었습니다걸작은 이탈리아 피렌체의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하지만 피렌체에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이 많았습니다도미니코 페티의 걸작은 그곳에서는 그리 높게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다른 걸작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습작으로 그렸던 작품은 독일의 뒤셀도르프 미술관에 전시되었습니다하느님의 섭리는 걸작에 있지 않았습니다습작처럼 그렸던 그림을 통해서 사람들을 변화시켰다고 합니다그림에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이것을 하였다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왔느냐?(Ego pro te haec passus sum. Tu vero quid fecisti pro me.)”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영국의 해버걸이라는 여성은 이 그림 앞에서 깊이 묵상하였고 영혼을 울리는 성가를 작사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하고 잘났던 바리사이의 기도보다는 겸손했던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넉넉한 가운데서 헌금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헌금보다는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하느님께서는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엘리야의 시대에 이방인이었던 시렙다 과부의 집에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했다고 하셨습니다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도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방인이었던 나아만을 치유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을 신뢰하면서 굳이 방문하지 않고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고 했던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에서는 이런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걸작이라고 생각하는 학력능력업적재물명예권력신분과 같은 것들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습작이라고 생각하는 겸손희생나눔인내기도봉사절제와 같은 것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예수님께서 선택하셨던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예수님께서 반석이라고 하셨던 그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던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키레네 사람 시몬이었습니다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로니카였습니다.

 

저는 교구청에서 5년 동안 성소국장으로 지냈습니다교구장이신 추기경님주교님들국장신부님들과 함께 지냈습니다교황님의 한국방문을 준비하는 모임에도 함께 했습니다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걸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물론 그 5년도 감사하고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제 주변에는 주교님다른 국장신부님들이 많아서 저는 그리 드러날 일이 없었습니다저는 경기도의 작은 성당에서 3년 동안 지낸 적이 있습니다신자수도 적고헌금도 적고할 일이 그리 많지도 않았습니다어찌 보면 제 사제생활의 습작과 같은 시간들이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습작과 같았던 그 시간들이었습니다하지만 저의 사제생활 중에 다시 돌아가고픈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그 시간들 속에 감사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빌라도가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을 보라.’ 예수님의 모습에서 결코 걸작의 품위를 찾기 어렵습니다가시관을 쓰면서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는 습작의 모습이 보입니다하지만 구원은 걸작과 같은 빌라도의 권위에 있지 않았습니다걸작과 같은 헤로데의 신분에 있지 않았습니다걸작과 같은 대사제 가야파와 안나스의 율법에 있지 않았습니다구원은 한 없이 초라해 보이는 이 사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습니다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떤 사람을 보려고 하는지요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셨는데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요?

 

사순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우리는 편견과 오만 그리고 교만과 이기심을 버려야 합니다겸손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우리는 참된 진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가르침의 핵심은 나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나의 욕망이기심자존심명예 그것들을 버리는 것입니다그러면 새로운 세상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배은망덕 앞에서도 진노하시거나 징벌을 내리지 않으시는 하느님!

 -양승국신부-

 

유다 문화 안에서 돌을 든다는 것은 장난삼아 하는 일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 죽을죄를 지은 사람을 향해 명백한 살의(殺意)를 지니고 행하는 살상 행위였습니다. 

 

공생활 기간 동안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살기등등한 적대자들의 위협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이 밀어붙인 예수님의 죄명은 신성모독죄였습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을 자처하고 있소.”(요한복음 10장 33절)

  

끝끝내 예수님 당신의 신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거부하고 무시하는 동족 유다인들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는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은 보지 못하고 인성만 바라보았습니다.

  

유다인들은 눈에 보이는 본성만 알아보았지, 눈에 보이지 않은 본성은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본성을 파악했더라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신성 모독죄는 예수님이 아니라 유다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안에 깃든 신성을 알아보지 못하고 완전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참 하느님이요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신비를 조금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오라.”며 신신당부하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사순절의 막바지입니다.

  

신간 안내: ‘양승국 신부의 기도 맛들이기’

  

또다시 부끄러운 한 권의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기도와 관련해서 제게 오랜 고민거리 한 가지가 있습니다. 기도를 주제로 그럴듯하게 글도 쓰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열변을 토하기도 하지만, 정작 제 기도는 너무 부족하고 한심스럽다는 것입니다.

 

한없이 부끄러운 글들이지만, 일년내내 기도 안에 살아보려고 나름 발버둥친 흔적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좋은지 고민하고 계신 분들에게 미력하나마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어 성전 봉헌축일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우리에게 분명히 말하시오.”(요한 10,24)라는 질문에 대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한 10,30)라는 예수님의 증언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곧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신성모독으로 여기고 돌로 치려고 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일은 또한 아버지와 아들을 알고 믿고 따르는 ‘우리의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0,38).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말씀을 믿고 받아들인 이들 안에서 말씀이 되는 일, 곧 말씀으로 거룩해지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처럼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이를 흔히 ‘신화’(θεοσισ)라고 합니다.

이는 앞서 예수님께서 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혹 하느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모독하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한다.”

(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내 방식이 꼭 최고는 아닙니다」

 -반영억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엉뚱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를 무시하고 지나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버릇을 고쳐 주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 버릇을 고쳐 주기보다도 혼을 내주고 싶은 마음이 더 큽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엉뚱한 소리를 통해서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를 탓할 것이 아니라 그를 품어줄 수 있는 마음을 키우지 못한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행세를 하며 신성을 모독하였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행동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하느님은 하느님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인간 주제에 하느님의 행세를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해도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 예수가 하느님의 행세를 하였으니 돌을 맞을 일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거나 따르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요한10,26). 받아들이고 따르기 위해서는 마치 양 떼가 목자를 알아보고 따르듯 자기가 머물던 자리를 떠날 줄 아는 포기와 용기가 필요한데 유다인들에게는 자기 생각과 가치와 자존심이 그 무엇보다 소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양 떼 안에 들어가 목자이신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또 다른 양이 되길 거부한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간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를 ‘육화의 신비’, ‘강생의 신비’라고 합니다. 강생은 우리를 위하여 인간이 되시기까지 한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같이 완전할 수는 없지만 완전하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완전하게 이끌기 위해서 먼저 우리의 처지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아버지 하느님의 일을 하심으로써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하느님 안에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이웃 사랑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이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에 대한 시선도 그러해야 합니다.

 

자명한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면 영적으로 하느님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하느님의 사랑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와 구원의 희망을 안겨 주었듯이 우리도 사랑으로 이웃에게 다가가서 기쁨과 평화, 위로와 희망, 구원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고 우리를 기대하십니다. 주님의 일을 함으로써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음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이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는 이는 더 행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복하십시오.

 

유다인의 지도자들은 눈앞에 계신 하느님, 곧 예수님을 보면서 오히려 자신들 안으로 파고들었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기존 관념 안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좋은 일을 보지 않고 그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사실에만 집착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가 싫어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들에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롭게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려면 내 방식으로 나를 채우기보다 비워야 합니다. 그 빈자리에 주님께서 오실 것이고 주님께서 나의 모두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 일들은 믿어라.』

 -송영진신부-


“그러자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요한 10,31-33)”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요한 10,28).”,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 라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말씀들을 신성모독 발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좋은 일’은 ‘하느님의 일’을 뜻하고,

예수님의 일과 말씀과 삶을 모두 가리킵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라는

말씀은, “나의 일과 말과 삶은 모두 아버지께서 시키신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성모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라는 유대인들의 말은,

“당신의 일을 ‘하느님의 일’로 인정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했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과 말씀을 ‘사람의 일’로만 생각했습니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하는 말입니다.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칭 메시아’로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뿐이고,

당신 스스로 하느님으로 자처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 부활 후에

토마스 사도가 처음입니다(요한 20,28).>

 

<신앙은, 상식이나 과학이나 논리가 아니라, 선택과 결단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무신론자들은 이 세상이 ‘저절로, 우연히’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문제로 서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믿는 대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인생을 살고,

무신론자들은 목적지 없는 유랑 같은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요한 10,34-36)”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구절은 시편 82편에서 온 것입니다.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6).”

여기서 ‘신’은 법관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법관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재판한다는 점에서

구약시대 사람들은 법관들을 ‘신들, 하느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7-38).”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은, ‘인간 구원’이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또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신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병자들과 장애자들을 고쳐 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구원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들은 모두 ‘아버지의 일’입니다.

앞의 9장을 보면,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뜬 사람이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3).”

예수님께서는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똑같이 보아도,

어떤 사람은 믿고, 어떤 사람은 안 믿습니다.

왜 그렇게 갈라질까?

하느님(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믿는(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요한 5,42).”

“너희는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 마음속에 사랑이 없어서,

예수님의 일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니까 믿지 않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을 알아보지 못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에는 관심도 없고, 알아보지도 못하고,

그래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에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주셨다면,

사람들은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따랐을 것입니다.

‘빵의 기적’ 후에 일어난 일이 좋은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기적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고

그 빵만 보고서 열광하면서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요한 6,15).>

 

예수님 말씀에서,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는

거짓 예언자와 가짜 메시아를 믿으면 안 된다.” 라는 뜻입니다.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라는

말씀은, “나에 대해서 모르더라도 내가 하는 일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된다면, 나를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를 믿는다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요한 10,30) 깨닫게 될 것이고, 믿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요한 10, 32)

-한상우신부-

이미 지나왔던
많은 길이
좋은 일들로
넘쳐난다.

보여주신
좋은 일로
좋으신
하느님께로
돌아선다.

좋은
모든 일은
하느님의
생명이다.

생명의 봄이
힘차게
생명의 길에서
피어나고 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실천하시는 좋은
행위(行爲)이시다.

원래부터
있었던
좋은 사랑을
행위로
드러내신다.

아름답게
가꾸시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신다.

하느님과
하나되는
좋은 일이다.

원래부터
하느님과
우리는 좋은
하나였다.

하느님의
좋은 자녀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

분리될 수 없는
하느님과
우리들의
좋은 관계이다.

본래의
우리로
돌아가는
십자가의
사순이다.

끝내 하느님께서
하시는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은
좋으신 사랑이다.

가장
좋으신 사랑의
하느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좋은 일은
좋은 행위로
드러난다.

봄꽃이
더욱 눈부시다.

말씀 나누기 - 사순 5주 금요일-격상합시다. 인격에서 신격으로! (ofmkorea.org)

-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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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 26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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