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10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성주간
‘성주간’이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주간으로,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토요일까지의 한 주간을 말하며 교회 전례주년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신 하느님의 구원 신비를 특별한 방식으로 기념하고 경축한다.
성주간 월요일에는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고(요한 12,1-11), 화요일에는 제자들의 배반을 예언하며(요한 13,21-33.36-38), 수요일에는 유다의 배반과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지내신 사건을 기념한다(마태 26,14-25). 성주간 목요일부터 성토요일까지는 성주간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는 날들로서 ‘파스카 삼일’이라고 부른다.
성목요일은 사순 시기의 끝 날이며, 예수님께서 성품성사와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념한다. 이날 오전에는 각 교구별로 성유 축성 미사를 봉헌한다. 이 미사에서 한 해 동안 사용할 예비신자 성유와 축성 성유, 그리고 병자 성유가 축성된다. 또한 사제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주교에 대한 순명 서약을 갱신한다. 성목요일 저녁에는 주님 만찬 미사가 거행되는데, 사목의 이유로 필요하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을 본받아 사제가 신자들의 발을 씻기는 ‘발 씻김 예식’이 이루어진다.
성금요일에는 미사가 봉헌되지 않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을 기억하는 ‘주님 수난 예식’이 거행된다.
이렇게 한 주간 동안 이어지는 주님 수난에 대한 묵상은 성토요일을 거쳐 부활 성야 예식 전까지 계속된다.
=================================================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일로, 임금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예루살렘 입성을 전례 안에서 성대하게 기념하지만 동시에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예고하는 날이다. 교회는 이날 성지(聖枝) 축복과 성지 행렬의 전례를 거행하면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영광스럽게 기념하고, 수난 복음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장엄하게 선포한다. 이러한 전례는 4세기경부터 시작되어 10세기 이후 서방 교회에 널리 확산되었다.
☆☆☆
그들은 외쳤다.
“그자를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루카 22,14 ─ 23,56)
They continued their shouting,
“Crucify him!
Crucify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종은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다고 한다(제2독서). 루카가 전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이다(복음).
주님 사랑의 눈빛
-키엣 대주교_
세상의 성공과 실패
삼십년 동안 나자렛에서 겸손한 삶을 살아오신 에수님께서는 마지막 3년, 유다 전 지역에서 설교를 하시면서 성공과 실패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유다인의 가장 중요한 날인 유월절을 맞이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셨습니다. 12살 때부터 매년 유월절에 이곳에 오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곳에 오신다는 것도, 위험에 처할수도 있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실패를 겪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20세기 초 베트남의 유명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성공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실패와 성공 중 성공만이 성공한 사람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대하는 태도나 행동입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가지신 분이기에 모든 것을 성공으로 만드실 수 있음에도 인간의 삶에 수 없이 경험하게 되는 실패와 성공, 인간의 삶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코끼리에게 밟혀 죽는 것을 피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조금 더 ‘현명하실 수 없으셨을까요?’ 그 분께서는 여전히 해야 할 일을 하셨고, 숨기지 않으셨으며, 어떤 어려운 상황도, 어떠한 임무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잡으러 왔을 때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할 수 없다고 생각하느냐? 청하기만 하면 당장에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 주실 것이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왜 그런 고난과 수모의 길을 가신것일까요?
당신의 권위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지 않으셨고, 도전을 받아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모든 경우가 당신에게 참혹한 고난일지라고 당신 스스로 '인간과 똑 같은 조건'을 마지막 순간까지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과연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간으로서, 인간이기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상황에 따라 인간은 변합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하던 군중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져 예수님께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내며 예수님을 심판하라고 소리지르며 조롱하고 있습니다. 스승과 빵을 나누고 잔을 들었던 유다는 스승을 팔기 위해 서둘러 빠져나갔고, 스승 옆에서 삶과 죽음을 이야기 했던 베드로는 이제 스승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포악한 군중들 속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넘치는 사랑과 자비, 평온을 유지하시고 계셨습니다.
십자가위의 고통과 치욕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제자인 베드로를 걱정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한 후에야 비로소 스승의 어두운 표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애로운 모습 속에 가슴 에이는 슬픔을 담고 계신 스승의 모습에서 배신한 제자를 비난하는 눈빛이 아니라 나약한 제자를 용서하는 넓은 사랑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의 용서는 베드로를 깊은 참회의 슬픔에 잠기게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마치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정결하고 순수한 봉우리를 피워내는 연꽃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성찬례를 통해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사랑을 나누는 기적, 사랑의 행위는 사람들이 자신을 극복하고, 모든 상황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악은 사랑 앞에서 무력합니다. 우리가 실천하는 봉사, 그것도 숭고한 나눔의 사랑입니다.
분노와 배반을 초월하는 고귀한 사랑 이것이 바로 주님 크신 사랑이고 주님 사랑의 승리입니다.
겸손하시고 인자하신 주님, 편협한 저희 마음을 고쳐주시어 넓고 자비로운 주님의 마음을 닮게 하소서. 아멘.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2.jpg)
1. 패션과 트랜드를 쫓기에 바쁜 세상입니다. 사람과의 관계도 내 의지와 무관하게 그러한 세상을 쫓아가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나는 어디쯤 서 있는 지 생각해봅시다. 2. 그리스도교는 박애와 자비로 믿음을 표현하고 실천합니다. 배신을 당하고 불공평함으로 인해 손해를 보았을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돌이켜보십시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line02.jpg)
1.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칠 수는 없습니다.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숭고한 사랑은 정의를 실천하고 나누는 사랑입니다. 나의 가족, 나의 이웃에게 사랑의 눈길, 사랑의 마음, 나눔의 사랑을 전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우리가 정신을 집중하려고 애쓰면 동공이 확장됩니다. 주의력과 집중력이 동공에 투영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만 계산하게 하면 저절로 동공이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공은 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동공의 움직임이 생기면 뇌도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계산이나 암기할 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상황에서도 동공이 확장된다고 합니다.
좋아하는 대상을 보려고 할 때, 또 부정적인 말이 아닌 긍정적인 말을 하려고 할 때 동공이 확장됩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 뇌 건강을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이상한 것도 과감하게 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하물며 실천하기 그렇게 어렵지 않은 사랑하기와 긍정적인 자세로 사는 것을 굳이 피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렇게 사는 사람의 눈은 반짝반짝 빛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면 예뻐진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멋진 사람이 됩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도 사랑과 긍정적인 자세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매일 약을 챙겨 먹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주간의 첫째 날인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파스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리고 성주간을 시작하면서 복음은 아주 긴 수난 복음을 읽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문득 예수님을 향해 적의를 표현했던 사람들의 눈을 떠올려 봅니다. 과연 어떤 눈이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초롱초롱 빛나는 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철천지 원수를 바라보는 듯한 적의 가득한 눈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정적인 마음이 과연 그들 자신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요?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제거하는 커다란 죄의 무게만을 키웠습니다.
이런 부정적인 마음과 미움의 감정에서 생겨난 행동은 결국 커다란 후회를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게 되지요.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2,27)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루카 22,48)
우리의 눈을 바라보십시오. 혹시 우리의 눈 역시 예수님을 부정하는 적의 가득한 눈이 아닐까요?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하다면 다시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커다란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며 후회할 행동은 2000년 전의 이스라엘 사람들로도 족합니다. 이제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고 칭찬할 사랑의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기쁨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하느님 백성을 위한 메시아의 수난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CmhVHTIorY
1. 오늘은 성주간을 시작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구름처럼 모인 군중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으시며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로부터는 부활 논쟁으로 그리고 바리사이들로부터는 세금 논쟁으로 마치 사상 검증과도 같은 통과 의례를 거치신 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논쟁에서 말문이 막힐 정도로 궁지에 몰리자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바리사이들과 연합 전선을 펴는 한편, 바랍바라는 자신들의 동료를 구하려고 가담한 젤로데 당원들과도 야합했으며 이 당원들을 움직여 재판을 방청하던 군중을 선동하였습니다. 군중은 야바위꾼처럼 수작을 부린 이들의 위세에 눌려 동조하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했지만 대세를 거스르거나 그 자리를 떠나지는 않으면서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심을 확인하고 석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중 소요가 일어날까봐 겁이 나서 공연히 그분에게 태형을 명령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하는 바람에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2. 모세의 활약으로 종살이하던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천 년 이상이나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메시아를 환영하는 듯 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배신하는 장면이 오늘의 복음 내용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배신도, 그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도 그분의 부활과 새 하느님 백성의 창조를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와 다수 군중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해 메시아께서 수난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신 메시아께서 열두 제자를 포함한 소수의 이스라엘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삼으시어 새 하늘과 새 땅의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3.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은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헌장 8항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 잘못을 범한 유다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던 역사적 선택은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이고, 공의회 역시 교회 역사상 잘못을 저지르는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통공의 신비 원리에 따라서 인류 앞에 대신 참회를 하면서도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을 구분합니다. 메시아께서 부활하시어 세우신 교회라는 참이스라엘은 여전히 거룩하지만 교회의 지체들은 과거 옛 이스라엘의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나 젤로데 그리고 다수 군중처럼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이스라엘을 반면교사로 삼고 있지만, 과거 그들의 잘못만큼 가톨릭교회의 지체들도 어리석은 잘못을 많이 저질렀습니다.
4. 지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생의 신비: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이라는 문헌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지난 이천 년 교회 역사를 뒤돌아보며 과거 잘못을 역사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인류 앞에 참회하고, 교회가 나아갈 미래를 신학적으로 전망한 이 문헌은,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온갖 형태의 폭력과 증오로부터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기억의 정화는 과거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범한 잘못들을 인정하는 용기와 겸손의 행위입니다. 이런 기억 행위는 교회 신비체 안에서 서로를 결합시키는 그 유대 즉 통공의 신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화해 행위는 지금의 교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지만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오류와 잘못의 짐을 짊어지고 공동의 몫으로 보속함으로써 부활하신 메시아를 따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쇄신시킨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함에 있어서는 흠이 없지만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오늘날은 물론 과거에 교황으로부터 일반 신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구성원들이 범한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 가운데에는 교회를 분열시킨 과오도 있고, 과학적 신념이나 문화적 관습이나 개인적 양심을 인정하지 않은 과오도 있으며, 시대의 징표를 제때에 식별하지 못해서 복음화를 지체시킨 과오도 있습니다.
5. 예를 들어, 11세기에는 로마 공동체의 수위권을 둘러싸고 동서방 교회가 서로 파문하며 갈라졌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오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서로 첫째가 되고자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서방 교회가 갈라진 후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고 동방교회 지역을 위협하자 동방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당시 우르바노 2세 교황가 시작한 십자군 전쟁은 동방 교회 신자들과 이슬람 신자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상처를 주었고, 지금까지도 이슬람 세력권과 동방 교회 영향권 아래에 있는 가톨릭 공동체의 소외를 자초하는 선교적 실패를 야기시켰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과오였습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를 전해야 할 교회가 평화 대신 전쟁을 일으킨 이 어처구니 없는 과오 탓에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두고 두고 보속하고 있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16세기에는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과도한 모금으로 인해 항의하는 개혁가들을 단죄하고 파문시키는 바람에 이들이 소위 프로테스탄트로 떨어져 나가게 만든 과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오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당시 복마전 노릇을 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는데 성전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신자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으며 스스로 권력자요 부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오들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제자 윤리를 지키지 못한 책임의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6. 이러한 교회 내부 질서를 분열시킨 잘못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룩된 진보와 성과를 알아보지 못하고 강압적으로 단죄하고 중단시킨 과오도 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 갈릴레이를 단죄한 일을 비롯해서 이단적 신념을 지닌 이들을 단죄했던 종교재판과, 억울한 이들을 마녀로 몰고 화형과 같은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했던 과오가 있고, 중국과 조선에서 조상을 공경하는 민간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우상 숭배로 단죄하여 금지시키는 바람에 대규모 박해가 장기간 벌어지게 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그리고 조상 제사 금지령으로 인한 박해에서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배교자로 낙인찍힌 신앙 선조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할 과제도 남겼습니다.
7. 또한 산업혁명의 폐해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일어난 노동자 운동과, 인간 존엄성을 주장하는 시민혁명을 무신론으로 단죄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시대의 징표를 제때에 식별하지 못해 복음화를 지체시킨 선교적 책임과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 책임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근세에 일어난 이 사태는 역설적이지만 교회 바깥에서도 활동하시는 성령을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이 두 무신론 사태에 숨어 있던 역사의 징표를 일러주신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예수님의 역사적 계시 진리와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어 고양된 존엄성이 자유와 평등, 정의와 연대라는 가치를 공의회 문헌에 담았습니다.
8. 대희년을 맞이하기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롭고 참신한 눈으로 교회 자신을 돌아보았고 세상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새 복음화’의 여정입니다. 심지어 과거에 단죄하기 일쑤였던 무신론자들과 개신교 그리스도인들과도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며, 동방교회와도 상호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교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의미에서,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복음의 기준과 현대인들의 눈높이로 조명하고 식별한 새롭고 참신한 메시지가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교회가 보화로 보전해온 성체신심 및 성모신심과 더불어 복음적으로 쇄신된 가톨릭교회의 담보가 바로 이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9. 역사적 반성과 겸손한 성찰 위에 세상과 교회 자신을 관찰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시대의 징표를 냉정하게 판단한 다음에, 교회 전체가 할 일과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그리고 작은 공동체들이 사도직으로 행해야 할 일들로 합리적으로 나누어서 지혜롭고도 인내로이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닮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보고 세상이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쇄신되고 변화된 그 행실에 따라서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메시아의 수난은 하느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의 부활은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 태어나겠다는 다짐과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왜 하느님은 우리를 낮추시는가?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9AJlGTkDa7Y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성전으로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루카 19,38)이라고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임금님으로 임명되어 우리에게 오시는데, 그분은 평화를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기뻐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루카 19,39)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40)라고 하시며, 슬픈 마음으로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 그러나 지금 네 눈에는 그것이 감추어져 있다. (중략)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라고 한탄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실 때,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겉옷을 그분 밑에 까는 것이고 하나는 귀가 찢어질 정도로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느님을 주님으로 맞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의 짝을 구약에서 찾으라고 한다면 솔로몬 임금의 즉위식으로 볼 수 있습니다(1열왕 1장 참조).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기 대를 이을 임금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형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규합하여 왕이 되려 합니다. 현 상황으로는 그를 막을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다윗 임금도 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탄 예언자와 솔로몬의 어머니 밧 세바가 청원하자 다윗은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곧 자기 나귀에 솔로몬을 태워 샘이 있는 기혼으로 내려가 거기에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팔을 분 다음 “솔로몬 임금 만세!”하고 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나귀를 타고 임금의 왕좌까지 올라오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의 뒤를 따라 피리를 불고 올라가며 큰 기쁨에 넘쳐 환호하였는데, 그 소리에 땅이 갈라질 지경이었다.”(1열왕 1,40)
상황이 이렇게 되니 이 찬미 소리를 듣고 아도니야는 겁을 먹고 성전의 뿔을 잡고 나오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도니야는 결국 다윗을 시중들던 여인을 솔로몬에게 청했고 솔로몬은 계속 왕위를 노리는 것 같은 아도니야를 죽입니다. 아도니야는 왕권을 강탈하려는 자였고 시민들의 찬미 소리에 질겁하고 결국 솔로몬의 왕국에서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카인의 제물이 왜 하느님 앞에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요? 그의 제물이 정성스럽지 않았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따르면 십일조를 상징하는 겉옷을 까는 사람들의 찬미 소리가 우렁차게 올려졌습니다. 그래야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예식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카인은 제물은 바치되 기쁘게 찬미하지 못한 것입니다. 기쁘게 드리지 못하는 예물은 나의 것을 드리는 것이지, 그분의 것을 기쁘게 돌려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혼 샘은 본래 예루살렘 외곽 아래쪽에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름을 부으라는 말은 겸손해져야 받을 수 있는 것이 성령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부터 주님을 찬미해야 모든 예루살렘 시민이 들을 수 있습니다. 겸손과 봉헌은 하나입니다.
만약 아이에게 과자를 사주고 “아빠도 하나만 줄래?”라고 할 때, 주는 것을 망설이는 아이에게 아빠는 다음에 또 과자를 사주고 싶을까요? 기쁘게 주는 아이에게 더 주고 싶을 것입니다. 아빠를 아빠로 인정한다면 기쁘게 과자를 내어주고 아빠가 좋다고 소리쳐야 합니다. 그러면 아빠에게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이 다윗에게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지만 참 왕이신 하느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습니다. 계약의 궤를 모셔 오는 것입니다. 그때 그도 옷을 다 벗고 주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왕의 행세를 하지 않고 그분 앞에서 벌거벗은 어린이가 된 것입니다. 이때 그의 아내 미칼은 이렇게 비웃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 가운데 하나가 알몸을 드러내듯이, 자기 신하들의 여종들이 보는 앞에서 벗고 나서니, 그 모습이 참 볼 만하더군요!”(2사무 6,20)
미칼은 사울의 딸로서 다윗이 위험할 때 그것을 다윗에게 알려주어 다윗의 목숨을 구한 적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미칼은 여전히 다윗 위에 서 있으려 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아버지와 그 집안 대신 나를 뽑으시고, 나를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우셨소. 바로 그 주님 앞에서 내가 흥겨워한 것이오.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 그러나 당신이 말하는 저 여종들에게는 존경을 받게 될 것이오.”(2사무 6,22)
결과는 이렇습니다.
“그 뒤 사울의 딸 미칼에게는 죽는 날까지 아이가 없었다.”(2사무 6,23)
이스라엘 여인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수치입니다. 아도니야와 같이 왕권을 노리다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왕 앞에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낮아져 천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 방법이 창피함을 무릅쓰고 춤추며 찬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사 때 이렇게 합니까? 우리는 어쩌면 하느님보다 더 근엄합니다. 찬미도 거의 소리를 내지 않거나 율동까지 한다고 하면 비천한 모습이라고 꺼리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그러면 안 됩니다. 오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서 우리 안에서 자아의 압제를 이기고 당신이 평화의 왕이 되시는 날입니다. 그러니 팔마가지를 마음껏 흔들고 힘껏 찬미해야 합니다. 그리고 매 미사가 그래야 합니다.
미사 때 하는 봉헌이 우리 겉옷을 까는 것이고 그것과 함께 기쁜 찬미가 울려 나와야 합니다. 그다음에 나귀를 타고 오시는 그분, 곧 성체를 우리 안에 모셔 우리 왕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찬미하지 않는 사람은 실제로 그 사람을 맞아들여도 왕으로 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자신을 왕으로 삼고 있기에 새로운 왕 앞에서 기쁠 수 없는 것입니다.
베르나데트는 지금은 큰 성지가 된 루르드 한 지역에서 성모님을 만납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작은 흙탕물을 가리키며 가서 마신 다음에 몸을 씻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베르나데트는 그대로 했고 주변 사람들은 베르나데트가 미친 줄 알았습니다. 성모님은 베르나데트에게 그 구덩이를 손으로 파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깨끗한 샘물이 갑자기 엄청난 양으로 솟아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시고 다른 사람들이 치유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알려지면서, 많은 기적 사례가 보고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7명은 1860년 베르게 교수에 의해 어떠한 의학적 설명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왜 성모님은 기적을 주시기 전에 사람을 저렇게 낮추실까요? 내가 정말 온전히 겸손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은총을 주면 오히려 독이 되기 때문에 먼저 낮추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왕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자신을 종으로 낮춘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기쁘게 낮춘다는 말입니다. 나로 사는 것보다 그분의 종으로 사는 것이 훨씬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당신께 자신을 봉헌하며 기쁘게 찬미할 줄 안다면 주님은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이를 치유하게 하십니다. 특별히 봉헌 시간에 더 크게 찬미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강론 후에 기쁨의 찬미를 바로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필립보 네리가 성녀라고 불리는 수녀님을 조사하기 위해 방문했습니다. 비가 와서 신발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래서 그 수녀님을 불러 신발을 닦으라고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수녀는 자신을 뭐로 아느냐며 거부하였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돌아가서 교황에게 말했습니다.
“그곳에는 성인이 없습니다.”
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낮추실까요? 더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유치원에 다녀온 아이가 배운 춤을 부모 앞에서 춘다면 부모는 얼마나 기쁩니까? 더 부끄럽게 소리높여 찬양합시다. 이것이 부모에게 더 내어놓는 자세이고 더 받을 자세입니다.
-조재형신부-
2021년 8월 30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철수 했습니다. 2001년 10월에 시작된 전쟁이 20년 만에 끝났습니다. 미군은 텔레반과 협상하면서 미군의 철군을 결정했습니다. 당시에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 ‘가니’는 먼저 외국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대통령도 도망갔고, 정부의 관료들도 모두 도망갔습니다. 수도인 카불 공항은 외국으로 도망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기차도 아니고, 비행기에 매달려서 도망가려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미국이 지원해준 무기는 탈레반에게 넘어갔고, 행정조직은 쉽게 무너졌습니다. 미국은 20년간 아프가니스탄의 자치정부가 국가를 통치할 수 있도록 지원했지만 무능과 부정부패에 물든 아프가니스탄 행정부는 탈레반에게 국가를 넘겨주었고, 국민들도 도망간 국가지도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와준다고 합니다. 국민을 외면하고 가족들과 해외도 도망간 대통령을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요?
2022년 2월 24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였습니다. 군사대국 러시아의 침공으로 우크라이나는 3일이면 수도인 키이우가 함락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1달이 넘었지만 아직도 키이우는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러시아는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경제재제로 러시아 경제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물론, 명분 없는 전쟁에 자녀들이 사망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러시아 내에서도 반전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러시아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는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도 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도력이 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끝가지 수도인 키이우에 남아서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였습니다. 미국, 유럽연합, 영국의 의회에 화상으로 연설하면서 지원을 요청하였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협상을 맺고 전쟁을 마무리한다면 역사는 젤렌스키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할까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호산나 하느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는 환영을 받으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심각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 시작은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의 배반이었습니다. 유다는 스승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지옥까지라도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는 새벽닭이 울 때까지 스승인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였습니다. 수석사제와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율법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발이 두려워 예수님을 로마의 총독인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서로 원수였던 헤로데와 빌라도는 친구가 되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바로 십자가의 길에 서 있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 곁에는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길을 함께 하시는 어머니 성모님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지만 성모님은 예수님 고난의 길에 끝까지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무게에 넘어지셨던 예수님은 잠시 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드렸던 베로니카가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예루살렘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의 슬픔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면서 하혈이 멈추었던 여인, 예수님의 ‘일어나라’라는 말씀으로 죽었다 살아났던 소녀의 어머니, 예수님께 믿음을 칭찬받았던 이방인이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 예수님께 죄를 용서 받고 새 삶을 찾았던 여인,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렸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 자비를 청하였던 십자가 위의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성서는 이들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주일입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었는지 돌아봅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 속에 있었는지,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와 함께 있었는지,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을 모함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갈 수 있다면,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의 제자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처럼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의 편에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실 것입니다. ‘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나라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아무런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양승국신부-
전례 지침에 따르면, 긴 수난 복음을 봉독한 후에는 반드시 다음의 권고를 덧붙입니다. “주님의 수난기를 봉독한 다음, 경우에 따라 짧은 강론을 한다. 또한 잠깐 침묵할 수 있다.”
주님의 수난기가 길고, 따라서 봉독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강론을 짧게 하거나 생략하라는 의미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의 수난기 내용 그 자체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을 담고 있기에, 수난기 자체가 가장 좋은 강론이기에, 강론을 생략해도 무방하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겟세마니 동산으로부터 시작되어 골고타 언덕에서 종료된 예수님 수난 여정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배반자 유다, 겁쟁이 헤로데, 애매한 총독 빌라도, 대사제 가야파, 겁쟁이 베드로,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키레네 사람 시몬, 손수건으로 그분의 얼굴을 닦아드린 베로니카, 결박된 그분을 채찍질하고 침 뱉고 조롱하던 군사들, 끝까지 그분의 십자가 죽음을 지킨 성모님과 마리아 막달레나, 그리고 애제자 사도 요한...
하늘이 울고 땅이 우는 성주간 우리는 그 옛날 예수님 수난 여정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 깊이 성찰해볼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긴 예수님의 수난기를 들으면서 나는 과연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에 어떤 모습으로 참여했는지 곰곰이 돌아봐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을 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 길을 바로 내 삶으로,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나는 그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영광스런 부활의 적극적인 증인입니까? 아니면 그분 수난 여정의 길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는 변두리 관찰자입니까?
빌라도 총독의 관저로 끌려 들어가신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모욕과 수치심은 하늘을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총독의 병사들은 그야말로 예수님을 갖고 놀았습니다. 그들은 마치 가장무도회라도 벌인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옷을 벗긴 그들은 주황색 망토를 걸치게 했습니다. 주황색 망토는 로마 황제의 신하들이 입던 옷이었습니다. 그분의 머리에는 가시로 만든 왕관을 씌워드렸습니다. 오른손에는 갈대를 하나 들려드렸습니다.
군사들은 예수님을 아주 우스꽝스럽게 만든 후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유다인의 왕 만세!”하고 외쳤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존귀하신 그분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들고 계시던 갈대를 빼앗아 거룩하신 그분의 머리를 내리쳤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한번 생각해봤습니다. 뱃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모욕감과 수치심에 온몸이 부르르 떨렸을 것입니다. 강렬한 분노와 적개심에 가슴이 벌렁거렸을 것입니다.
아버지로부터 부여받은 능력으로 내 말 한마디면 저따위 한갓 말단 병사들 순식간에 쓸어 엎어버릴 수 있었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기적의 능력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결박을 풀어버리고 둘러서 있는 적대자들 한 방에 다 날려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끝내 침묵하셨습니다. 잔혹한 폭력 앞에 결코 폭력으로 대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견디기 힘든 경멸과 조롱을 깊은 침묵 속에 묵묵히 견뎌내셨습니다. 일말의 저항도 없이 끝까지 자기 비하의 길, 극단적 겸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죄인인 인간들의 무자비한 폭력과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침묵하시고 인내하시는 수난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 왕직의 참된 실체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하느님의 왕직은 인간이 저지른 잔혹한 악 앞에서도 침묵으로 견뎌내시는 왕직입니다. 그분의 왕직은 해도 해도 너무한 인간의 조롱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며 봉사로써 인간을 다스리시는 사랑의 왕직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
-이영근신부-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건을 기념하는 성지주일입니다.
동시에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수난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영하는 상징적 행위로 성지가지를 축성하여 성당에 들고 들어왔으며,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사를 들었습니다.
오늘 전례 역시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임금으로 환호하고 환영하던 행렬은 배척과 조롱의 십자가 행렬로 바뀌고, 하늘 높이 흔들던 영광과 축복의 성지가지는 저주와 모욕의 채찍으로 바뀝니다.
자신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았던 바로 그들이 이제 예수님의 속옷마저 벗겨가고, 나귀 위에 오르셨던 바로 그분은 이제 십자가 위에 매달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왕으로 성 안으로 모셔진 바로 그분이, 죄인으로 강도와 함께 성 밖에서 처형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신기하게도 이러한 일을 예언자 이사야는 제1독서에서 미리 예언하고 있고, 사도 바오로는 제2독서에서 찬미노래로 부릅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는 부활성야 때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선 사랑을 거절한 까닭이 아닐까!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까닭 말입니다.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아드님이 왔건만, 그분도, 그분의 사랑도 거절된 까닭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은 사랑의 거절 때문에 고통 받으신 것이 아닐까!
오늘도 당신 사랑에 대한 나의 거절 때문에 당신께서는 고통 받고 계시지는 않는 걸까요!
그러나 당신의 사랑은 하도 커서 거절당해도 멈출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하도 커서 배신을 당해도 그칠 수가 없는 사랑인가 봅니다.
‘죽기까지’ 해도 다하지 못할 사랑인가 봅니다.
사랑에는 자신을 죽이는 아픔이 따르기 마련인가 봅니다.
고통 속에서도 당신의 사랑은 식을 줄을 몰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주십시오.”(루카 27,34)하고 간청하십니다.
사랑 때문에 고통을 감수하시면서까지 용서하시는 자비의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이 일이 빚어진 것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거절 때문이지만, 드러난 것은 하느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고통 받으셨습니다.
결국 고통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한 걸까요?
왜 예수님을 거절한 것일까요?
종교지도자들과 원로들은 왜 예수님을 반대한 걸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걸까요?
또 유다스와 베드로, 그분의 제자들은 왜 걸려 넘어진 걸까요?
그것은 그들이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지배와 권세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옥신각신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감으로 자신을 내세우다 꾸중을 듣고,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옆자리를 요구하다가,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그것을 보고 화를 내다가 꾸중을 들었습니다.
그들이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은 까닭이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세상의 왕들과 기득권자들은 가진 자로서 권세와 횡포를 부리고 지배하고 군림하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작은 자들에게서 빼앗고 힘없는 이들을 때리고 억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것을 다스림의 기준으로 제시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하십니다.
아버지를 섬기고, 제자들을 섬기고, 최후만찬에서는 자신을 배신할 제자들마저도 섬기십니다.
참으로 작아지고 낮아져서 남을 섬기며, 많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왕으로 자처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뒤따르는 우리의 삶도 또한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호사스런 영광을 취하기보다 작아지고 섬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혹 우리 역시 당시의 제자들처럼 작아지고 섬기려 하지 않으려다 자칫 예수님을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루카 27,34)
주님!
그 어떤 모든 일을 통해서도 드러나는 것은 당신의 사랑이게 하소서.
그 어떤 저의 거절 때문이라도 드러난 것은 당신의 크신 사랑이게 하소서
먼저 사랑하시고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그 사랑을 결코 잊지 말게 하소서.
상처 받더라도 사랑하기를 결코 멈추지 말게 하소서.
죽기까지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다.』
-송영진신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다 알고 있고,
예수님의 죽음 뒤에 부활과 승천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는 말은 믿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부활’이라는 결말을 바탕으로 해서 이해해야 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모든 전례는 부활 신앙 안에서 거행해야 합니다.
<성주간 예식을 해마다 반복하다보니,
마치 결말을 잘 알고 있는 영화를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고,
그런 느낌에 너무 깊이 사로잡혀서
형식적으로, 또 의욕 없이 성주간을 지낼 때도 있는데,
그렇게 되지 않도록 더욱 능동적으로 성주간 전례에 참여해야 합니다.>
성주간 예식을 해마다 반복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를 재방송하는 것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에 어떤 수난을 겪으셨는지,
그리고 그 수난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를 묵상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일이고, 반복해서 되새겨야 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회개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의 부활도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부활 후의 이야기는 짧게 기록하고,
수난 이야기는 아주 길고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우리의 회개와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해마다 재연하는 것은
단순히 ‘기념’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예수님의 사랑과 희생에 ‘회개’로 응답하기 위해서입니다.
(회개가 완성되고 구원이 완성되는 하느님 나라에서는
성주간 예식을 거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나라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회개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믿어야 하는 일’이고,
우리 자신의 부활은 우리가 ‘희망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누구든지 노력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하고,
그렇게 되기를 희망해야 하고, 그 믿음과 희망 속에서 ‘끝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확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탈락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자만하거나 방심하지 말고,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가셨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올리브산이라고 불리는 곳 근처 벳파게와 베타니아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예수님께서 제자 둘을 보내며 말씀하셨다. ‘맞은쪽 동네로 가거라. 그곳에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을 풀어 끌고 오너라. 누가 너희에게 ′왜 푸는 거요?‵ 하고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여라. ′주님께서 필요하시답니다.‵’ 분부를 받은 이들이
가서 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다(루카 19,29-32).”
여기서 ‘아무도 탄 적이 없는’이라는 말은 ‘종교적 순결’을 상징합니다.
오직 메시아만을 위해서 준비된 나귀라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는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일은,
즈카르야서에 있는 예언을 실현하신 일입니다.
“딸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딸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라, 너의
임금님이 너에게 오신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겸손하시어 나귀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분은 에프라임에서
병거를,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시고, 전쟁에서 쓰는 활을 꺾으시어,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시리라. 그분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즈카 9,9-10).”
“그리고 그 어린 나귀를 예수님께 끌고 와 그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치고,
예수님을 거기에 올라타시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나아가실 때에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깔았다(루카 19,35-36).”
제자들이 나귀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친 것은,
아직 어린 나귀여서 안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길에 겉옷을 깔아 놓은 것은, 왕에 대한 존경의 표시입니다(2열왕 9,13).
당시에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당장 세우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루카 19,11).
“예수님께서 어느덧 올리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이르시자, 제자들의 무리가
다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 때문에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자들을 꾸짖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루카 19,37-40)”
제자들은 즈카르야서의 예언이 실현된 것을 직접 보면서 기뻐하였고,
그래서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는 시편 118편 26절을
인용한 것인데, 원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온 순례자를 환영하는
사제의 인사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인사말에 임금님이라는 말을 넣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메시아를 환영하는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늘에 평화’는 메시아께서 오심으로 해서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에
평화가 있게 되었다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는 뜻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의 찬양이 듣기 싫었는지, 제자들을 꾸짖으라고
예수님께 요구하는데,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요구를 거절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라는 말씀은,
제자들의 환호와 찬양은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돌들’을 ‘모든 피조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메시아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참 기쁨과 행복을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마르 16,15).>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루카 22, 31)
-한상우신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갈채와
환호 뒤에
뒤따라오는
십자가이다.
성지가지
사이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성지가지로
예수님을
환호하는
우리들을 향해
예수님은
십자가로
화답하신다.
모든 것을 거시는
주님의
십자가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기억하는
성주간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숨길 수 없는
우리의 거짓과
우리의 교만을
아프게 보게된다.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언제나 사랑의
십자가이다.
십자가가
다시 사람을
아름답게 만든다.
우리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였다.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는
다시 하나가
된다.
십자가로
삶의 고통을
통과하시는
주님이시다.
십자가가
다시 삶의
길을 만든다.
가장 위험한 것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하느님의
뜻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느님을
깨닫게 된다.
자아를
깨뜨리는
십자가이다.
죽지 않고서는
다시 살 수 없는
십자가의 진리이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사랑을 다시
살리신다.
인생이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사랑의 배움이다.
하늘 아래
하늘나라를
보여주시는
십자가가 있다.
십자가의
사랑을 배우지
않고서는
삶을 알 수 없다.
사라지지 않을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또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사랑으로
창조되고
십자가로
닮아가는
삶의 성주간이다.
나뭇가지 성사
-김찬선신부-
올해는 수난 주일 나눔을 하지 않고 성지 주일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지금껏 성지주일을 수없이 지내며 성지 축성을 하고 방에 달아놓고는
왜 성지를 1년 동안 방에 달아놓는지 그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음을 이번에 문득 성찰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관습적으로 성지를 걸어놓았을 뿐이었습니다.
성지는 왜 축성하고, 왜 방에 걸어 1년을 보는 겁니까?
성지는 주님이 예루살렘 입성 때 밟으시라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옷과 함께 깔은 가지지요.
주님께서 자기들 도성을 찾아오시는데
아니, 주님께서 자기들을 찾아오시는데
어찌 맨 땅을 밟고 오시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깔은 거지요.
이는 큰 축제에 관계되는 귀빈을 모시고는 입구에서부터 주행사장까지
주단/레드 카펫을 깔아놓고 그것을 밟고 들어오게 함과 같고,
경우는 다르지만 김 소월의 시 '진달래 꽃'에서 진달래 꽃길과 같은 거겠지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그러니까 그 가지가 거룩한 가지인 이유는 주님이 밟으신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거룩함은 주님과 닿기 때문에 거룩한 거지요.
주님께서 와서 닿든 우리가 가서 닿든 주님과 닿아야지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축일이랄까 주일의 거룩한 의미는 오랫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고 싶어하던 그 '간절한 닿음'의 의미이고,
연인의 손을 처음 잡을 때 떨면서 잡는 그런 '떨리는 닿음'입니다.
주님께서 내게 오시는데 나와 상관없이 오시는 분인 듯
맨 땅을 밝고 오시게 해서는 안 되고 옷을 깔든 주단을 깔든 깔아야
주님은 내게 오시는 것이 되고 나의 옷이나 주단은 거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지를 깔고 옷을 까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대문을 활짝 여는 것이고 예루살렘 성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를 여는 성무일도 초대송 시편에서 자주 이 시편을 노래하는데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의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후렴과 함께
"성문들아 너희의 머리를 들라. 영원한 문들아 활짝 열려라.
영광의 임금님이 듭시려 하시나니. 영광의 임금님이 누구이신고.
굳세고 능하신 주님이시다. 싸움에 능하신 주님이시다."라고 노래하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성지를 축성하여 집에 가지고 가 자기 방에 다는 것은
한갓 장식이 아니라 그것을 볼 때마다 성사가 발생하기 위해 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뭇가지 성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거룩한 나뭇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 문을 활짝 열어젖혀야 합니다.
우리 집에 달았으면 우리 집 대문을 열겠다는 뜻이요
나의 방에 달았으면 나의 방 문을 열겠다는 뜻이며
나의 마음을 열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가지를 볼 때마다
우리 마음을 열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은 떨려야 합니다.
그래서 무딘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서는 아니 되고
간절하고 떨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영접해야 하고,
무엇보다 대환영의 마음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큰 소리로 환영하는 사람들을 보고 군중 속에 있던 바리사이가
그들을 꾸짖으시라고 주님께 청하는데 이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주님이 오실 때 우리는 잠자코 있으면 안 되고
돌같은 마음이거나 돌들보다 못한 마음이 되어서는 더더욱 아니 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오늘의 복음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2년 4월 12일 성주간 화요일 (0) | 2022.04.12 |
---|---|
2022년 4월 11일 성주간 월요일 (0) | 2022.04.11 |
2022년 4월 9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0) | 2022.04.09 |
2022년 4월 8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0) | 2022.04.08 |
2022년 4월 7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0) | 2022.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