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9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45-56)
“You know nothing,
nor do you consider that it is better for you
that one man should die instead of the people,
so that the whole nation may not peris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한 민족으로 만드시고,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시리라고 한다(제1독서). 카야파 대사제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구상에는 인간처럼 뇌가 있는 생물이 많을까요? 아니면 뇌가 없는 생물이 많을까요? 실제로 뇌가 없는 생물체가 월등하게 많다고 합니다. 생물체의 총중량을 따져도 압도적입니다. 이는 뇌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동물들은 대부분 뇌를 가지고 있지만, 인간처럼 큰 뇌를 가진 동물은 많지가 않습니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유일하게 뇌를 키우는 방향으로 진화한 유일한 종족이라고 합니다.
생물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뇌 개발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라고 합니다. 뇌는 방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는 비효율적인 장치이기 때문입니다. 심한 두통이 생겼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하지요. 바로 모든 에너지를 뇌에 쏟아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생물은 살아남기 위해 에너지 소비를 줄여 뇌의 크기를 줄이고 때로는 없애기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치와 의미를 따지면서 진정한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많이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가치와 의미를 찾아서 사는 삶입니다. 단순히 살아남는 것만 생각하는 생물적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서 인간다운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선 그들의 고발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억지스러운 정치극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내버려 두면 사람들이 믿게 되어서 왕으로 추대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로마의 군사력을 자극하게 되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민족을 짓밟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신 적도 없고 또 비슷한 말씀을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들의 예상대로 40년 후에 예루살렘 멸망을 현실로 맞이하게 됩니다.
대사제 가야파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허위적인 전제에 나온 것으로, 이 말 이후 예수님을 죽일 이유를 찾기 시작합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아무런 죄도 없는 분을 제거하려는 모습에서 참 인간의 모습을 찾기 힘듭니다. 그보다 주님과 함께하면서, 참된 가치와 행복을 찾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과연 어떠합니까?

너희는 하느님의 백성이니라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t0O3S7jU3Y8
사순시기가 막바지에 접어 들었습니다. 이제 내일부터는 성주간이 시작되고, 그 주간 안에 파스카 성삼일을 보내게 됩니다. 이 성삼일의 마지막 날에 우리는 부활성야미사를 통해 부활시기로 넘어갑니다.
에제키엘이 예언한 메시지는 세 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는 말씀은 믿는 이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 즉 신앙적 정체성이 분명해야 함을 알려줍니다. 그 다음,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한 민족이 되리라.”는 말씀은 본시 하나였으나 갈라진 사람들이 다시 만나는 통합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신앙과 통합이 가능해질 수 있게 하는 표지가 바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믿는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되면 신앙적 정체성이 뚜렷해져서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가시적으로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믿는 이들이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면 더 이상 흩어져서 반목하지 않고 서로 통공을 이룩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성전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더욱 뚜렷이 선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은 더 이상 건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위가 신앙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며, 또한 제도적이고 법적으로 구분된 종교집단을 넘어서 갈라진 겨레를 한데 모을 수 있는 공동선으로 뭉친 하느님 백성입니다. 이것이 믿는 이들에게 열려진 미래의 현실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구심점은 그 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이신데, 그분은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장의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죽게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을 무릅쓰고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셨는데 그 목적은 바로 부활 신앙을 일깨워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힘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일으키신 기적들 중 마지막으로 이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이는 당대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후대의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하신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죽은 라자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소문이 파스카 축제를 지내려고 모인 예루살렘 군중 안에서 퍼져나가자, 이에 불안을 느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대책회의를 열어서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몄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경건하게 믿어온 사람들이라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이렇게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대적하는 죄악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표징으로 당신이 신적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따라서 믿는 이들의 미래 현실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온전히 이끄실 수 있는 하느님이심을 나타내어 주신 바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의 2장에서 11장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이 모두 일곱 가지의 기적이 그 표징들이었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요한 2,1-11)이 첫 번째요, 헤로데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기적(요한 4,43-54)이 두 번째입니다. 38년 동안이나 중풍으로 고생하던 앉은뱅이를 벳자타 못가에서 고쳐주신 기적(요한 5,1-9)이 세 번째요, 오천 명도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빵의 기적(요한 6,1-15)이 네 번째이며,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구하시러 급히 오시고자 갈릴래아 호수 물 위를 걸으신 기적(요한 6,16-24)이 다섯 번째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눈이 멀었던 이를 보게 해 주신 기적(요한 9,1-12)이 여섯 번째이며,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기적(요한 11,38-44)이 마지막 일곱 번째입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기적으로 당신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신 가운데에서도 특히 죽은 이를 다시 살리심으로써 능력을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결정적으로 우리의 신앙의 목표와 희망이 되셨습니다. 즉,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로이 하여 신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할 목표는 부활하신 예수님이시며, 그 신앙적 정체성을 통해서 믿는 이들이 서로 통공하게 될 것이고, 이렇듯 믿는 이들의 통공으로 이룩되는 새 하느님 백성이야말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새 성전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은 우리의 반면교사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우리에게는 그분을 알아보기 위한 표지가 다섯 가지나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과 성찬, 서로 섬기는 삶, 서로의 신앙 감각을 존중하기 그리고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기가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믿는 이들 안에 현존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이 다섯 가지 양식을 모르고 지나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통공 그리고 우리의 성전이 그 양식들에 들어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제 다가올 성주간 전례에서 십자가에서 부활로 넘어가는 파스카 신비를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조재형신부-
로마는 제국을 이루면서 식민지를 통치했습니다. 로마의 통치 방법은 직접 통치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에서 엘리트들을 선발하였고, 그들이 식민지를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로마는 식민지에서 2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하나는 로마에 대한 충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금의 납부였습니다. 로마는 반란에 대해서는 잔혹하게 진압하였습니다. 반란을 주도하는 사람은 십자가형에 처하였습니다. 대사제를 비롯한 이스라엘의 지도층은 이스라엘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로마는 잔혹하게 반란을 진압할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배층을 새로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누리던 특권과 권력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우리의 역사에도 이스라엘의 지배층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친일파’라고 불렀습니다. 친일파에게는 대한민국의 독립은 결코 이룰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일본의 힘이 너무나 강하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 현재 누리는 부와 권력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대적 배경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많은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율법과 안식일의 규정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 죄인들, 이방인들, 과부들, 고아들, 병자들과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윗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골리앗을 물리쳤던 것처럼, 마카베오 가문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독립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스라엘 백성의 기대와 희망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에게는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율법과 하느님의 이름으로 죽일 수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지배층은 로마의 힘을 빌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로마에 반란을 도모한 반역자로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에 반란을 꾀한 정치범으로 몰아 십자가형에 처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리고 대사제 카야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하느님의 뜻은 로마라는 강력한 제국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율법과 계명을 잘 알고 있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로마의 힘에 의해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에 의해서 버려졌던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나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신이 원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들춰내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은 남이 나에게 해 주기 원하는 일을 먼저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파수꾼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등대지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빛과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때로 힘들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끝까지 참고 하느님께 의지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들었습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서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실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약속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눈동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양승국신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요한복음 11장 50절)
위 말씀과 관련해서 헨리 나웬 신부님께서는 특별한 에피소드 하나를 우리에게 소개하면서 참된 사목자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성찰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한 나라 안에서 두 패로 갈라져서 싸우는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날 한 작은 마을에 어린 병사 하나가 큰 부상을 당해 나타났습니다. 군복을 보니 적군이었습니다.
이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비록 적군이지만 불쌍한 소년병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은신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상처를 치료해주었고 먹을 것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즉시 그날 저녁 한 무리의 병사들이 찾아와 그 소년병을 어디에 숨겼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들은 내일 새벽 동트기 전까지 소년병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마을 주민들은 모두 본당 신부님을 찾아갔습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가르쳐달라고 자문을 청했습니다. 진퇴양난의 순간 앞에 신부님도 난감했습니다. 소년병을 넘겨주면 소년병이 죽고, 소년병을 안 넘겨주면 마을 사람 전체가 죽고...
무거운 마음을 안고 사제관으로 들어간 신부님은 올바른 길을 열어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응답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신부님은 성경 안에 답이 있겠지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밤새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기적처럼 동트기 직전 답이라고 여겨지는 성경 구절 하나를 찾았습니다. 그 성경 구절은 오늘 우리가 봉독한 요한 복음 11장 50절의 말씀, 대사제 가야파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신부님을 무릎을 탁 치며 즉시 이장님을 찾아가서 주님께서 위 구절을 답으로 주셨다고 통보해주었습니다.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적군에게 소년병의 은신처를 알려주었고, 병사들은 소년병을 끌고 가 죽였습니다.
그날 밤 마을 회관에서는 큰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지혜로운 신부님의 기도와 조언으로 마을 사람 모두가 살아났다며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마음이 무척 찜찜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살았지만, 불쌍한 소년병의 모습이 계속 머릿속에 어른거렸습니다. 깊은 슬픔과 자책감에 사로잡혀 침실로 들어갔는데, 그날 밤 주님의 천사가 그를 찾아와 물었습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저는 너무나 난감한 상황 앞에서 간절히 기도하다가, 그래도 응답이 없다 싶어, 성경 말씀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밤새 읽었습니다. 그리고 답이 되는 구절을 찾았기에 그 답을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천사는 화가 나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너는 메시아를 적군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신부님은 괴로워하며 반문했습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가 어젯밤 간절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는 대신 단 한 번이라도 그 소년병을 찾아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 예화를 통해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착한 목자는 기도만 열심히 하고 성경만 열심히 읽는 사람이 아니라 양들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착한 목자는 상처 입은 양의 얼굴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와 눈동자를 마주침을 통해 그의 내면, 그의 영혼의 상태를 확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결국 사목자는 맡겨진 양들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 양들 사이로 내려가는 사람입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이영근신부-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에,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에 다다랐을 때에 생긴 일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생긴 일입니다.
곧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라자로의 장례식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은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 곧 산헤드린을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메세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이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 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가 가기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백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요한 11,50)
이는 결국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의 죽음을 말해줍니다.
곧 이는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런데 이는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재로서 예언한 것”(요한 11, 51)임을 밝혀줍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모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복음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분의 죽음과 영광을 준비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소서.
아멘.
「하나로 모으기 위한 일에 동참해야」
-반영억신부-
좋은 일에는 생색내기를 좋아하고 어려운 일에는 꽁무니를 빼는 것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어렵고 힘든 일이 나에게 닥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시련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간절합니다. 그러다가도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태연하게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느냐?”고 말합니다. 정말 속 보이는 일이죠. 그러나 이런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그만큼 마음이 굳어진 탓입니다.
대사제인 가야파는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라는 명분을 내세워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카야파는 의회의 결의를 독려하고자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다그칩니다. 하지만 정작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사람은 카야파였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계획이 그들 가운데에서도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기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렇게하는 사람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사실 죽어야 할 사람이 왜 예수님입니까? 자기가 온 백성을 위하여 죽으면 안 됩니까? 왜 나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이 십자가를 짊어져야 함을 당연하게 생각합니까?
유다인들은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 희생양을 선택하였는데 안타깝게도 그들의 구원자 메시아를 제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명분을 내세워 자기 자신과 가문을 위하고 자기 실속을 차리려 하였습니다. 자기가 희생하려 하지 않고 명분을 내세워 남을 희생시키는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궂은일은 내가 하고 생색나는 일에는 남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이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지요?
때때로 나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지니게 되는데 바로 그 순간이 메시아를 희생양으로 삼는 때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명분에 앞서 나의 진심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간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희생 봉헌이 다른 사람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구원을 가져옵니다. 희생은 주님 사랑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희생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구원이 온다고 생각하면 한 순간순간이 소중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연장입니다.
예수님의 성녀 데레사와 함께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황홀한 환시보다도 숨은 희생의 단조로움을 선택하렵니다. 희생과 사랑으로 작은 핀 한 개를 줍는 것이, 한 영혼을 구하고 회개시킬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희생을 바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행하였다면 그 자체가 보상이고 기쁨입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요한3,16).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모으기 위한 노력에 마음을 써야 하겠습니다. ‘우물쭈물’, ‘어영부영’, ‘할까말까.’ 망설임 없이 사랑합시다. 신속하고 민첩하게 후회없이!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 53)
-한상우신부-
누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決意)하는가.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욕망의 불꽃이
드디어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다.
예수님마저
욕망을 가로막는
적(敵)으로
간주된다.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욕망은
끝없는 희생을
요구한다.
누군가의
희생을
먹고 사는
모순된 삶이다.
공짜란
없다.
십자가가
있을 뿐이다.
깨달음은
더디고
인생은
너무 어리석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시
결심하는
사순의
끝자락이다.
욕망이 우리의
내면이 되어서는
안된다.
생명의 길은
십자가와
함께하는
생명의
길일뿐이다.
우리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올가미를 쳐놓고
기다리는 축제의
희생양일 뿐이다.
몹쓸 짓을
멈추는 것이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수없이 자행되는
이 끔찍한 슬픔의
추태를 멈추는
것이다.
잠시 지나가는
우리들 삶이
봄꽃처럼
아름답기를
기도드린다.
죽이는 결의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새로운 결심과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살리는 결심이
예수 그리스도
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를 다시
보게된다.
말씀 나누기 - 사순 5주 토요일-우리 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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