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3월 2일 재의 수요일

Margaret K 2022. 3. 2. 07:08

2021 3 2일 재의 수요일 

 

재 의 수요일’은 사순 시기를 시작하는 날이다. 교회가 이날 참회의 상징으로 재를 축복하여 신자들의 머리에 얹는 예식을 거행하는 데에서 ‘재의 수요일’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이 재의 예식에서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축복한 나뭇가지를 태워 만든 재를 신자들의 이마나 머리에 얹음으로써, ‘사람은 흙에서 왔고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창세 3,19 참조)는 가르침을 깨닫게 해 준다.
오늘은 단식과 금육을 함께 지킨다.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오 6,1-6.16-18)

 

 "Take care not to perform righteous deeds
in order that people may see th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당신이 만드신 것을 하나도 미워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죄를 덮어 주시고 용서하시니, 주님, 당신은 저희 하느님이십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시골 마을에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승패가 갈렸습니다. 싸움에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구석에 시무룩하게 있었고, 싸움에 이긴 수탉은 승리의 기쁨을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높은 담장 위에 올라가 “꼬끼오~~”라고 큰 소리를 내지르며 자신의 승리를 알렸습니다.

이 소리를 하늘에 있던 독수리가 들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서 하늘로 날았습니다. 이제 암탉은 누구의 차지가 되었을까요? 오히려 싸움에 진 수탉이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영원한 승자, 영원한 패자는 없다고 합니다. 그만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래서 늘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특히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때는 더욱 이 겸손이 필요합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패배보다 승리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이 더 많다.”

주님께서도 직접 겸손함을 보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노력만을 선호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에 겸손은 사라지고 대신 위선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 복음 말씀을 묵상해 보면 매우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 사회에서 무엇인가를 잘하고 나면 으레 그 보상이나 칭찬을 기다리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의로운 일을 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면? 의로운 일을 했음에도 오히려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게 된다면? 다시는 의로운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로운 일로, 세 가지 종교적인 의무를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이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유다인들이 종교적인 신심으로 예부터 지켜오던 의무였습니다. 율법보다도 한 단계 위의 선행으로 생각했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하느님의 인정을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나쁘다고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제1독서의 요엘 예언자도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요엘 2,13)라고 말씀하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회개의 모습이 아닌, 진정으로 마음에서부터의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위선자의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닐까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자선, 기도, 단식의 모습이 아닌, 주님께서 보시기에 미소 지을 수 있는 자선, 기도, 단식을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가 오늘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적을 없애는 방법은 친구가 되는 것이다(링컨).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누군가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소진한다

-전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L2EdrebW6yY

오늘은 사순절이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머리에 재를 뿌리며 삶의 유한함을 인식합니다. 그리고 나는 무엇을 위해 재가 되어가고 있는가를 묵상합니다. 사람은 어떻게 살든 다 재가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특별히 위선자들처럼 남에게 잘 보이려고 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위선자’인 그리스어는 무대에서 남에게 박수를 받으려고 공연하는 사람을 칭하는 단어였습니다. 남의 기대에 따라 살면 삶을 허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이들은 남의 시선을 위해 평생을 살다 재가 됩니다. 

 

    이와는 반대로 많은 철학자는 남의 기대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며 살라고 권합니다. 남의 시선의 노예가 되기보다 차라리 자기 자신의 노예가 되라는 말입니다. 더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사람은 다 누군가의 욕망을 성취시켜주며 삽니다. 나를 위해 살라는 말은 자아를 위해 살라는 말입니다. 자아는 생존을 위해 삽니다. 곧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삶은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삶입니다. 

    우리는 분명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며 삽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살아서도 안 되고 남을 위해 살아서도 안 됩니다. 내가 욕망을 채워주며 사는 그 대상이 내가 재가 되면서까지 그 욕망을 채워줄 가치가 있는 대상인지 분명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튜브 ‘멘탈케어’란 심리학 채널에 ‘연수익 1,300억 찍고 느낀, 돈이 자유를 주지 않는 이유’란 박진영 씨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박진영 씨는 처음 성인이 되어 꾼 꿈이 20억을 버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20억을 은행에 넣어두면 그 이자로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1990년대에 20억이면 상당히 큰돈이었습니다. 연대 지질학과를 다니던 박진영은 지금 전공으로는 큰돈을 벌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뒤늦게 음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래서 음악성보다는 비닐을 입고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같은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 관객에게 호감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이런 퍼포먼스가 잘 먹혀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초고속으로 지금의 JYP 엔터테인먼트를 차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그토록 꿈꿨던 20억을 얻는 데도 성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운 JYP는 현재 시가 총액 2조 원에 달합니다. 여기서 박진영이 보유한 지분은 15~20%입니다. 한 해 1300억이 이익을 창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행복이 오래갔을까요? 금방 무너져내렸습니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먹고 살 정도는 있어야 하지만 그 이상의 돈으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박진영 씨는 돈이 있는데도 왜 행복하지 못한지를 생각했습니다. 돈은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누구도 내가 돈을 많이 갖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님이나 가족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만족 때문에 조금이나마 덜 허탈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박진영 씨는 이제 행복이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명예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왔지만 아무도 만족해주지 못할 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타인이 원하는 것과 일치할 때 옵니다. 그러니 타인이 원하는 것을 내가 추구해 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인생의 목표를 잘못 세웠구나!’

 

    그래서 새로운 꿈을 꿉니다.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이 뒤늦게 찾는 것은 명예였습니다. 그래서 그도 목표를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자’라는 ‘명예’로 바꿨습니다. 동양인 최초로 자신이 작곡한 곡을 빌보드 차트에 올리겠다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리고 2004년 그는 기적적으로 자신이 작곡한 곡 ‘The love you need’를 빌보드 4위까지 진입시킵니다. 세계적 명성도 얻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행복을 느낄 줄 알았는데 또 무너져내렸다고 합니다. 처음엔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힘들고 벅찬데 살아있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다가 또 어느 순간에 좌표가 무너졌습니다. 

박진영 씨는 ‘왜 목표를 이루고도 마음이 채워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너무나 많은 고민을 하다가 그때 깨달은 게, 내 꿈이 잘못됐다는 것이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지면 ‘허무’하고 안 이루어지면 ‘슬픈’ 목표에요. 답이 아니에요.”

 

    그는 꿈이라는 것에서 ‘무엇을 위해’가 빠져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은 ‘왜 태어났을까?’로 연결됩니다. 진화론으로는 이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진화론이 주는 삶의 의미는 생존인데, 우리는 살아남는 목적만으로는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분명히 나를 만든 존재가 있을 것이고 그 존재가 나에게 바라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목표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이유를 찾아야만 합니다. 

    “돈을 벌어보니까 한 3분의 1은 행복해지더라는 거죠. 그다음에 명예와 사랑을 받으니까 훨씬 더 행복해요. 그런데 또 허무해지기 시작하더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들이 ‘남을 도와야 한다’라고 해서 도왔더니, 꽤 많이 행복해지더라고요. 근데 점점 느끼는 것은 아무리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남에게 다 주더라도 결국은 세상과 인간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모르면 결국은 끊임없이 쓸쓸하고 혼란스럽고….”

 

    아기는 처음에 자기 자신을 만족시킵니다. 그거면 그만입니다. 젖을 주는 엄마에게 고맙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동물 수준의 행복입니다. 아이는 차차 깨달아갑니다. 나를 사랑해주는 누군가의 기대를 채워주는 것이 행복임을. 그래서 부모가 바라는 대로 행동합니다. 그런 삶은 나를 소진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나를 창조한 이를 위해 내가 소진되는 것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나를 다시 만들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에서 목수 생활을 하던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찾으신 것이 바로 이 삶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처럼 광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순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누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며 사는지 살피는 것입니다. 자아를 충족시켜줘 봐야 남에게 피해만 주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짐승이 아닌 이상 나의 삶의 목표가 이웃도 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나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복도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기대는 유한합니다. 그리고 보답도 유한합니다. 내가 재가 되었을 때 그들이 나에게 무엇을 보답할 수 있겠습니까? 

 

    피노키오는 나무토막 아이가 온전한 인간이 되는 과정을 그렸습니다. 피노키오는 자신을 창조한 아버지가 아니라 늑대와 서커스 구경꾼들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당나귀가 되어갑니다.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나를 창조한 분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욕망을 채워주며 사는 게 인생이라면, 나는 나를 창조하신 분의 욕망을 채워주며 사는 게 가장 안전합니다. 그분은 다시 나를 재에서 부활시켜 새로운 나를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사실 창조주는 나를 무(無)에서 창조하셨으니 재에서 재창조하는 것은 일도 아니십니다. 

 

    어린이가 부모의 기대를 충족시켜 줄 때 정말 행복한 이유는 부모를 자신의 ‘존재 이유’라 믿기 때문입니다. 사춘기가 지나면 더는 부모가 존재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나를 존재하게 만드신 분이 계시고 나는 그분이 원하는 것을 충족시켜주며 살아가겠다는 것. 이것은 선택입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느꼈던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진정한 창조자로 선택하고 그분의 기쁨을 나의 뜻으로 삼을 때 어린아이의 행복을 회복합니다. 사순은 머리에 재를 뿌리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생각하고, 누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며 살 것인지 선택하는 시기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NGFzW65yIz0

오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는 주님의 부활을 기쁘게 맞이하기 위하여 사십 일 동안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수난의 길과 죽음에 동참하려는 묵상과 준비를 하는 때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는 이 날, 교회가 거행하는 재의 예식은 우리네 육신 생명이 언젠가는 재로 돌아갈 것을 상기시키는 한편, 우리가 육신 생명이 살아있는 동안 지향해야 할 목적은 이미 이 현세에서부터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임을 상기시키는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주시는 내용이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이는 유다교에서도 전통적으로 행해 오던 종교적 관습이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관습의 전통을 계승하시면서도 뒤틀리고 잘못 실천되어 오던 유다교의 우상숭배적 실천을 넘어 하느님께로 향하는 근본정신에로 돌아가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 초점은, 자선이든 기도든 단식이든 사람들의 눈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식하여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가이나 바리사이 같이 열심한 유다인들이 자선도 기도도 단식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거창하게 행하면서 정작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고 겉치레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을 실질적으로 믿고 섬기는 신앙의 회복을 촉구하는 것이고, 마태오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모아 산상설교에 담았습니다. 이 가르침에 담겨 있는 도덕적 요구가 철두철미한 배경에는 먼저 주어져 있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거저 주어진 자비를 부족하나마 가능한 대로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는 각오도 들어 있습니다. 인생과 세상은 결코 당연하게 주어진 것이 아니며 창조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신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주어진 자유를 남용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신 외아들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값비싼 희생을 치루고 당신을 저버렸던 인간과 화해하시고자 하셨다는 신비를 담고 있습니다. 전자가 창조의 신비라면 후자는 십자가의 신비요 구원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선을 행하되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은 이미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나보다 더 필요한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결국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정의입니다. 

 

  기도하되 사람들 앞에서 보란 듯이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가르침 또한 이미 주어지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듣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듣지도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일방적인 방식의 기도로서는 하느님과 원활한 의사소통이 이루어 질 리가 만무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공리입니다. 

 

  단식하되 얼굴을 찌푸리지 말라는 가르침 역시 우리가 먹는 일용할 양식이 모두가 함께 먹었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우리만 배불리 먹는 동안에 굶주리고 있는 이웃이 있으니, 이제는 그들도 먹을 수 있도록 나누어주어서 원래의 질서대로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절약된 몫을 이웃과 나누는 자선과 반드시 연결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회적 사랑으로서 종교의 원래 모습입니다. 

 

  자선이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봉헌이 되기 위해서는 또한 기도와 연결되어야 마땅합니다. 기도함으로써 본래 우리가 거저 받은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야 자선의 행위가 가난한 이웃을 돕는 효과를 누리기 이전에 우리 자신이 하느님께 대한 도리를 갚는 의미가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죄의 파괴력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단식하며 자선을 베푸는 참회의 힘으로 하느님께서 죄인인 우리들을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것이 참회와 용서의 치유력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본연의 자세를 회복시켜 주는 사순 시기는 은총의 때입니다.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라는 전통적인 종교 행위가 습관적인 행사가 되지 않고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이 되기를 예수님께서 바라십니다. 

 

  이 세 가지 종교적 성무는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내 뜻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뜻을 내가 알아듣고자 하는 영적 노동이어야 하며, 그래서 기도는 종종 단식을 수반합니다. 하느님의 뜻에 집중하기 위해서 몸의 기본 욕망을 채우는 일에 안주하지 않고 제한하고자 단식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절약된 몫을 자선하는 데 씁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풀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게 되면 물질적으로 도움을 받는 대상은 그 가난한 이들이지만 영적으로 은총을 입는 주체는 우리 자신입니다. 물질을 나누면서 은총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은 하느님을 믿고 의식하는 신앙인들에게서만 가능합니다.

 

  결국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우리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성화되도록 노력하는 특별 시기입니다. 세상의 복음화에 앞서 우리 자신의 복음화에 집중하는 때입니다. 

-조재형신부-

 

함께 일하는 직원의 며느리가 한 달 반 정도 아기를 일찍 출산하였습니다. 손녀를 돌보고 온 직원이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아이의 탄생은 태어나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잉태되는 순간부터라고 하였습니다. 한 달 반 일찍 태어난 아이는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이보다 모든 것이 한 달 반 정도 느렸다고 합니다. 6개월이면 몸을 뒤집을 수 있는데 아이는 7개월 반이 되어야 몸을 뒤집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같은 6개월이지만 아이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것은 먼저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욕 주는 그렇게 일찍 태어난 아이들을 위해서 전문가를 가정으로 보낸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아이의 발달과정을 설명하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합니다. 아이가 3살이 될 때가지 도움을 주며 모든 비용은 정부에서 부담한다고 합니다. 한국은 태어나면서 1살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잉태되는 순간부터 생명이 시작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태어나서 1년이 지나면 1살이 된다고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생명이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조산아의 발달과정을 보면서 한국의 나이 계산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으면서 시작됩니다. 10년 정도 신학생들과 3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제게는 소중한 날들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하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세상 만물을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느님을 따를 수도 있고, 하느님을 멀리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멀리하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이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두 번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했던 죄와 허물들을 돌아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의탁하면서 고백성사를 봅니다. 세 번째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던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합니다. 제자들을 부르셨던 것처럼 나를 불러주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는 예수님께서 나에게도 용기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네 번째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나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의 배신을 나의 삶에서도 바라봅니다. 다섯 번째는 빈 무덤을 묵상합니다. 주님의 부활을 묵상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설명해 주십니다. 함께 빵을 나눌 때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미사성제 안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큰 영광을 위해 살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40일 동안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무죄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빌라도와 결탁했던 대사제가 있습니다.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가 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뿔뿔이 도망갔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조롱하고, 침을 뱉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들도 보았습니다.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던 여인들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이 있습니다.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가 있습니다. 모든 슬픔을 간직한 채 예수님의 죽음을 바라보았던 성모님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이 있습니다. 2022년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처럼 40일을 지내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와 단식을 하면 좋겠습니다. 이웃을 위해서 자선을 베풀면 좋겠습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 이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양승국신부-

 

재의 수요일만 되면 존경하는 왕신부님 생각이 납니다. 아흔을 훌쩍 넘기셨지만, 아직도 쌩쌩하시고, 총기가 흘러넘칩니다. 송해 선생님 저리 가라입니다. 언젠가 재의 수요일 미사 주례가 왕신부님이었습니다. 형제들의 이마에 바를 재를 손수 준비하셨습니다. 미사 참석하는 형제들 숫자가 열 명 남짓밖에 되지 않기에 조금만 준비해도 좋을텐데, 엄청 많이 준비하셨습니다. 거기다 물까지 듬뿍 부었습니다.

 

저 같으면 재를 머리 위에 살짝 얹어주고 마는데, 왕신부님께서는 형제들 이마에 엄청 큰 십자가를 그어주셨습니다. 형제들은 뚝뚝 떨어지는 잿물을 보며 이게 뭐냐며 얼굴을 찡그리는데, 신부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형제에게까지 진한 십자가를 그어주신 신부님께서 그 형제에게 재가 담긴 접시를 건넸습니다. 그 형제는 남아있는 재를 모조리 끌어모아 신부님의 이마에 초대형 십자가를 그어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형제들은 재의 수요일이라 웃으면 안 되는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울을 보신 신부님께서는 너무 좋아하셨는데, 저녁기도 때까지 이마의 십자가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신심가이십니다.

 

또다시 재의 수요일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는 지난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사용했던 종려나무 가지를 태워 얻은 재를 머리에 얹습니다. 재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타고 남은 것, 아무것도 아닌 것, 무가치한 것, 허무한 것, 보잘것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재를 머리에 얹을 때 우리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쳐야겠습니다.

 

“본래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먼지요, 티끌, 무(無)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이토록 보잘것없는 제게 큰 은총을 베푸셔서 생명으로 불러주셨습니다. 오늘 지금 저는 여기 서 있지만, 주님의 흘러넘치는 자비가 아니라면, 단 한 순간도 스스로 설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입니다. 과거도 저는 흙이었지만, 지금도 흙과 다름없는 존재요, 언젠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신심 깊은 유다인들은 속죄 행위를 요란스럽게 실시했습니다. 일단 식음전폐, 다시 말해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씻지도 않았습니다. 일도 손에서 놓았습니다. 평상복을 벗고 거친 삼베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속죄의 재물로 짐승을 잡았습니다.

 

엄청난 양의 재를 만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이부었습니다. 그것도 양에 안 차 가슴을 치면서 통곡을 하고 옷까지 찢었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잘못은 인간들이 저질러놓고, 아무런 죄도 없는 가축들까지도 속죄 행위에 강제로 동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요란스럽고 과장된 속죄 행위 대신 다른 방법을 쓰라고 가르치십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너그럽고 자비로우신 분, 분노와 역정에 더디신 분, 주 너의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너라.”(요엘 예언서 2장 12~13절) 결국 주님께로의 유턴, 다시 말해서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울러 주님께서는 우리가 새롭게 맞이한 이 사순 시기, 어떤 모습으로 자선을 베풀고, 기도하고, 단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주 명쾌하게 세 가지 지침을 내려주고 계십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오 복음 6장 3절)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오 복음 6장 6절)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오 복음 6장 17~18절)

 

예수님께서 주신 세 가지 지침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 하느님 앞에 애써 꾸미려 하지도 말고, 굳이 감추려 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위선자가 아니라 안과 밖, 말씀과 삶, 기도와 활동이 일치되는 진실된 신앙인으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은 재의 수요일입니다.

사순시기가 시작되는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를 ‘회개’로 초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주 너희 하느님께로 돌아오너라.”(요엘 2,13)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요엘은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단식하고 울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라.’고,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과 화해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날을 맞이하라.’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자들처럼 자신의 의로움을 보이려고 자선과 기도와 단식하지 말고 숨어계신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몸과 옷을 찢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뉘우침이며, 자신을 드러내는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신앙의 빛>에서는 ‘회개’를 “주님을 향해 거듭 되돌아가는”(13항) 것으로,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며 ~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라 거듭해서 기꺼이 변모되려”(13항) 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회개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합니다.

수도승들은 이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생활방식으로 채택하고 ‘제2서원’으로 삼아 살아갑니다.

 

이처럼 ‘회개’는 ‘뉘우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옴’이라는 실행을 요청합니다.

곧 마음만 찢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행동을 요청합니다.

여기에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이 요청되고, “용기를 요구”(14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올바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 받고자 했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는 않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늘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이라 함은 단순히 숨기라는 말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행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행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드러나거나 말거나에 여의치 않는 자유로운 마음입니다.

그것은 오로지 하느님 앞에 있는지라, 사람들이나 자신 앞에서 자유로운 것을 말합니다.

곧 ‘진실한 마음’을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 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어지고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의로움을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 마음이 기도로 순결하게 하소서!

오늘도 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고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기쁨을 준비하라」

-반영억신부-

 

부활의 기쁨을 준비하는 사순절입니다. 사순이라는 말은 40일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중대한 사건을 두고 그를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받기 전 40일간 재를 지켰고, 엘리야도 호렙산에 갈 때 천사가 주는 음식만 먹으며 40일을 걸었으며,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전 40일 동안 단식과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인 부활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해 40일간의 기간을 정하여 기도와 희생으로 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제한된 미사와 재의 예식을 거행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리며 조속히 장엄한 미사를 함께 거행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믿는 이들에게 부활의 영광이 없다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몸소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기쁨이 큰 만큼 거기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은 그것을 자선과 기도, 단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자신에 대한 절제와 극기의 상징입니다. 그냥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한 부분입니다. 단식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순간부터 배고픈 이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돕는 계기를 마련하게 됩니다. 내가 허기져봐야 굶주린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단식을 통해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는 내 삶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함으로써 하느님과 통교하게 됩니다. 마치 전등이 발전기와 연결됨으로써 빛을 발하듯 기도는 우리를 하느님과 연결시켜 줍니다(구엔 반 투안 대주교).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안에 살려면 호흡을 하듯이 기도해야 합니다. 왜 호흡을 해야 합니까? 하지 않으면 이미 죽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미 신앙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샤를 드 푸코).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자선은 단식과 기도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기도의 열매는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풀어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또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누가 보든 그렇지 않든 자선은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바치는 좋은 예물입니다. “자선으로 씨를 뿌리면 열매는 천국에서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저함이 없이 베푸십시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자선을 통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합니다.

 

기도와 단식, 그리고 자선은 서로를 보완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이웃, 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해 줍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다른 것이 불완전 해 집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재의 수요일을 맞으면서 기도하고 단식을 지켰는가? 그렇게 하셨다면 그 희생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려고 마음먹었는가? 사실 아침을 굶고 나니 배가 고파요. 그래서 점심을 평소보다 더 많이 잡수셨어요. 그렇게 한다면 알맹이가 빠진 것이지요. 평소에는 굶어도 굶었다는 생각도 없이 지나치는데 사순절이 되면 유난히 배가 고파 옵니다. 마음을 먹고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유혹의 빌미는 항상 생기게 마련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해요. 그러면서 하루 세 끼 식사는 꼭 챙겨 드시려고 하거든요.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바빠서 제 길을 걷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분의 소리를 알아듣기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선은 베풀면 베풀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아쉽고 아까운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시면 하실수록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나중에 한꺼번에 좋은 일을 하겠다고 하시는 분은 평생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일상생활의 작은 일에서부터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떠야 합니다.

 

사순절을 맞이하여 외적인 기도와 단식, 자선에 앞서 마음의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에도 소홀함이 없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은혜로운 때, 구원의 날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먼지로 돌아가지 마라.』

-송영진신부-

 

‘재의 수요일’에 사제는 사람들의 머리에 재를 얹어 주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또는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허무하게 먼지로 돌아가는 인생을 살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을 향해서 나아가라.”,

즉 먼지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말입니다.

“당신께서는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아, 돌아가라.’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시편 90,3-5).”

하느님은 인간을 먼지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고, 당신처럼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로 만들어 줄 수도 있는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먼지처럼 허무하게 끝나고 싶지 않다면, 즉 영원한 존재가 되고 싶다면,

회개하고, 믿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다시 깨우치고,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 ‘재의 수요일’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일에 영원히 살면서도 그 인생이 ‘한숨, 고생, 고통’뿐이라면,

안 죽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영원한 지옥’입니다.

<“하느님 없는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인생’은 하느님의 생명력이 충만한 인생,

하느님과 함께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인생입니다(묵시 21,3ㅁ-4).

 

‘하느님의 생명력’이 내 안에 충만해지게 하려면, ‘온 마음’과 ‘온 삶’으로

그 생명력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로는 그 생명력을 받을 수 없습니다.)

만일에 회개하지 않고, 그래서 ‘마음’과 ‘삶’에 변화가 없다면,

‘재를 머리에 얹는 예식’은 아무 의미 없는 형식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위선자들을 싫어하신 것은, 그들이 겉으로만(형식적으로만)

잘하는 척을 하고, 실제로는 아무 변화가 없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재의 수요일’마다 듣게 되는 복음 말씀은, 위선자들의 거짓 신앙생활을

꾸짖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런 위선자가 되지 말라는 훈계이기도 하고,

진실한 신앙생활로 하느님의 생명력을 제대로 받아들여서,

먼지로 돌아가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2).”

 

위선자들의 자선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에, 자선이 아니라 ‘거짓 자선’입니다.

물론 위선자들도 실제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그 돈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자선으로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참 사랑’에는 ‘나’는 없고 ‘너’만 있습니다.

만일에 ‘너’는 없고 ‘나’만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흉내 내는 일입니다.

사랑 없는 자선은 자선이 아니라 자선을 흉내 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실제로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더라도.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5).”

 

위선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기도하는 척’을 하는 ‘연기’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더라도 연기는 연기일 뿐입니다.

자기의 신심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연기를 하는 것은

‘거짓 기도’를 하는 것이고, ‘죄’입니다.

위선자들의 ‘거짓 기도’는 하느님께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16).”

 

단식의 경우에, 위선자들도 실제로 밥을 굶긴 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마음도 없고, 사랑도 없이,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단식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헛일’일 뿐입니다.

(위선자들은 마음에 없는 단식을 하기 때문에, 단식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충분히 먹거나, 단식이 끝난 후에 양껏 먹기도 합니다.

그 경우에 그것은 단식이 아니라 먹는 시간을 조금 바꾼 일입니다.)

자선이든지, 기도든지, 단식이든지 간에 ‘거짓 신심 행위’로 하느님을

속일 수는 없고, 그런 일은 진실 자체이신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위선자들이 자기의 신심을 자랑하려고 하면 할수록 죄만 커집니다.)

 

자기의 신심 행위가 위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않고

계속 그렇게 하는 위선자는 사실상 마귀의 유혹에 완전히 넘어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위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는데,

바로 그 칭찬과 존경이 우리를 위선자로 만드는 유혹이 됩니다.

칭찬과 존경을 받는 것을 좋아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그 유혹에 빠지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위선자로 바뀌게 됩니다.

‘아무도 모르게’ 신심 행위를 하라는 예수님 말씀은(마태 6,3-4.6.17-18),

그 유혹에 빠지는 위험을 피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칭찬하는 사람’이 유혹하려는 의도로 칭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본의 아니게 유혹하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칭찬하는 쪽에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1년 2월 17일 재의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