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4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4-15)
“Can the wedding guests mourn
as long as the bridegroom is with them?
The days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is taken away from them,
and then they will fa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이 무엇인지 알려 준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는지 묻는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택시 운전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엄지척!’을 세웠습니다.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랐던 분이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창피하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의 아내와 딸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는 가족의 응원이 제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체면을 이야기하며 응원하지 않는 사람은 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늘 나의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신은 늘 나의 몫이었고, 그럼에도 늘 나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세상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봐야 합니다.
바리사이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 정신의 철저한 실행으로 단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단식은 조금 유별난 점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포도주와 물도 마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친 삼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 옷을 찢고, 먼지나 재를 머리에 뿌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성경 문구를 써넣은 작은 갑을 이마에 달고 다녔고, 재계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단식하지 않는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모습을 예언자들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기쁨은 인류가 구원되는 기쁨으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이날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지금은 기뻐할 혼인 잔치의 때이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단식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단식은 고통의 원인이 허기짐보다는 헛헛함임을 보게 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9QFDY_1TgVI
단식의 윤리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lGKW-yCgElM
오늘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단식의 의미와 윤리를 일깨워줍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던 재의 수요일 미사 복음에서도 기도와 단식과 자선의 윤리에 대해서 들었고, 이 세 가지 행위가 주요한 종교적 성무가 된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단식도 그저 음식을 끊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기도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기 위해서이며, 단식으로 절약된 몫을 가난한 이웃과 나누기 위함이라고 상기시켜 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매우 근본적으로 단식의 이유와 의미를 성찰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단식 관행에 대하여 이사야는 아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된다.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3-5).
이러한 이사야의 비판은 당시 유다교에서 아주 형식적으로 행해지던 단식 관행을 고발하는 것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당시의 유다교의 형식주의적 종교질서를 송두리째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이후 5백 년이 흐른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형식적인 단식 관행에 머무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를 기준으로 예수님과 제자 일행을 비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사야가 전해준 예언의 뜻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한 귀머거리였던 셈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물론 그분이 바라시는 종교질서를 선보이고 계셨는데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고 단식 여부 그 자체에만 잣대를 들이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 활동은 이사야 예언자가 내다본 바를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나오고, 너희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8-9).
교우 여러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사야 예언자가 우리의 종교 현실을 바라본다면, 과연 무어라 말할 것 같으십니까? 구체적인 실천이야 믿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저마다 다를 것이니 이사야가 비판할 것 같아 보이는 바를 이 강론에서 언급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이사야가 촉구할 것 같은 메시지는 전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크게 하느님과의 관계와 교우들과의 관계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는 일은 매일의 기도와 주일의 미사차례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그분의 뜻을 알아듣기 위한 제사이며, 우리의 실천을 다짐하는 것이 그 예물입니다. 우리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기를 바란다면, 매일의 기도를 거르지 말고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기를 바란다면, 주일미사를 의무감에서만 참례해서는 안 될 것이고 하느님께 본격적으로 드리는 제사답게 정성껏 바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흐름을 파악하며, 그 안에 담겨 있는 시대의 징표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우들과의 관계를 맺는 일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본당에서든 다른 활동에서든 교우들끼리 맺는 인간관계는 교우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로의 신앙감각을 존중하는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흔한 인간관계처럼 돈이나 사회적 지위나 나이 등으로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세상과의 관계는 교우들끼리 맺어 놓은 공동체가 사도직의 지향을 가지고 활동하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이익으로 뭉쳐서 관계를 맺지만, 교우들이나 의로운 이들은 선한 지향으로 관계를 맺고 사도직 활동에 임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자주 분열하고 쉽게 해체됩니다. 하지만 이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는 일이 사도직 활동의 생명입니다. 마치 종이 주인 앞에서 발을 씻겨주듯이 섬기는 마음으로 상대방을 대하되, 겸손한 처신으로 완덕의 길을 걸으려 하고, 서로의 뜻이 살아 있는 한 함께 하려는 지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개의 세속적인 모임이 그러하듯이 쉽게 갈라서고 쉽게 헤어질 것입니다. 이 구조는 교황청이나 교구청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직 현장에서 평신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맺는 인간관계에서는 더 필요하고 또 그리되기만 한다면 위력적인 선교의 힘이 발휘될 것입니다.
오늘 미사의 화답송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조재형신부-
2020년 세계는 ‘코로나’를 맞이했습니다. 현대의 의학과 과학 기술로 충분히 막아 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는 생각보다 강했고, 세계는 오미크론으로 진화한 코로나와 아직도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초기에 3가지 방법으로 대응했습니다. 첫째는 철저하게 봉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국경을 폐쇄했고, 외국에 있는 국민들의 입국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에 꼭 필요한 장소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시설을 폐쇄했습니다. 시민들은 큰 불편을 겪었고, 경제 활동이 위축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코로나 대응에 실패했습니다. 코로나의 전파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연적인 면역을 택하였습니다. 거리두기도 하지 않고, 마스크 착용도 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리면 집단 면역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코로나의 증상은 생각보다 강했고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집단면역을 기대하는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대부분의 나라는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손 소독을 의무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국경을 폐쇄하지 않고, 시설을 닫지도 않으면서 철저한 추적, 신속한 검사, 적절한 치료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방법으로 경제적인 피해를 줄였고, 코로나 확진 속도도 늦출 수 있었고, 선거도 무사히 치를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 방법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협조와 국가의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가동되었을 때 효과가 있었습니다. 3번째 방법을 선택한 나라들이 코로나 방역의 선진국이 되었습니다.
신학생 때입니다. 옆 본당 보좌신부님은 독특한 피정을 하였습니다. 2박3일 단식피정을 하였습니다. 겨울에도 맨 발로 십자가의 길을 하였습니다. 주일학교 학생들도 무릎 꿇고 묵주기도를 하였습니다. 신부님의 피정 방식을 좋아하는 분도 있었지만, 신부님의 피정 방식을 염려하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던 작은 아버님의 권유로 옆 본당의 피정에 참석하였습니다. 4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눈 위를 맨발로 걸으면서 하였던 십자가의 길이 생각납니다. 신학생이기에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갔던 것도 생각납니다. 단식하면서 배고팠던 것도 기억납니다. 피정을 마치고 먹었던 밥 냄새도 기억납니다. 극기와 절제 그리고 단식은 신앙생활에 필요한 영양제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단식을 합니다. 어떤 분은 체중 조절을 위해서 의사의 조언을 듣고 단식합니다. 자신들의 요구와 주장을 표현하기 위해서 단식합니다. 오늘 독서는 단식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렇습니다. 단식은 고행이 아닙니다. 단식은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단식은 자기주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으로 앞서 나가고,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단식의 참된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명과 율법에 따른 단식도 의미가 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의미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말씀 전례는 ‘참된 단식’에 대한 말씀입니다.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그릇된 단식, 곧 당시의 유대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질타하면서, ‘참된 단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 줄을 끌러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 58,6-7)
이는 ‘참된 단식’이란 곡기를 끊고 생명을 죽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명이 아니라 타인의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곧 단식의 참된 정신이 타인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오늘 입당송에서는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하고, 화답송에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주소서.” 라고 노래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단식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식으로 모은 곡식을 모아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자비의 특별희년 칙서' [자비의 얼굴]에서 “자비”를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이라고 또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라고 말하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단식이란 <레위기>(16,29-3)에 따르면, 잘못을 속죄하고 정결해지기 위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깨끗한 새로운 삶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단식을 배척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재의 수요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는 단식을 기도와 자선과 함께 경건한 생활의 핵심으로 인정하셨습니다.
단지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단식을 배척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단식하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마태 9,15)
이는 오늘날의 우리가 단식을 해야 할 이유를 밝혀줍니다.
곧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주님의 수난에 감사드리며, 다시 오실 신랑이신 예수님을 사랑하여 드리는 사랑의 단식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로운 의미의 단식입니다.
곧 구약의 ‘속죄의 단식’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감사와 자비와 희망의 단식’이야말로 새 시대에 행하는 새로운 단식이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새 포도주가 됩니다.
결국, 단식은 이미 베풀어진 주님의 자비에 대한 우리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자비의 얼굴]에서 말합니다.
“우리가 자비를 입었으므로, 우리도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9항)
아멘.
「단식은 왜 하나요?」
-반영억신부-
저는 특별한 경우 외에 아침 식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늘 단식을 하는 것이고 따라서 재의 수요일이나 성금요일에 지켜야 하는 단식재를 별도로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진정한 절제와 희생, 그리고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보속의 마음으로 매일 아침을 먹지 않는다면 그것은 단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귀찮아서, 건강 때문에,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먹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인의 단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어떤 분은 생일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금요일이고 고기국이 준비가 되어서 곤란했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심지어 마음에 걸려서 고기는 먹지 않고 국물만 마셨다고 하시며 고해성사를 보시는 분이 계시고, 모처럼 귀한 손님이 와서 음식점에 가서 불고기를 맛있게 먹고 보니 금요일이기에 성사 보러 왔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이럴 때 고해성사를 봐야 하나요? 성숙한 신앙인이라면 그것에 죄책감을 지니지 않고 다른 날을 정해서 금육재를 지킵니다.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행으로 몰라서 궐했으니 죄를 모면했다고 좋아하고 넘어가는 신자라면 미성숙한 신자입니다(정하권). 진정 깨어 있는 사람은 그 법의 의미를 생각하고 내용, 알맹이를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법이나 규정 안에 녹아있는 의도를 읽어야 합니다. 물론, 법이나 규정, 규칙을 함부로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9,14).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서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9,15).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혼인 잔치에 온 친구들이고,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는 즐겁고 기쁘게 지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과 직면하게 될 때 단식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질을 흐리는 모든 벽을 허물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법의 내용을 지킬 수 있는 성숙함에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외적인 단식을 통하여 내면의 성숙을 가져와야 합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마음의 단식은 너희 자신과 재물과 피조물에 대한 무질서한 애착에 대해 마음을 닫아걸고 경계함을 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빵과 물만 먹고 단식하기보다 혀를 억제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하고 영적인 단식을 강조하셨습니다. 단식과 희생은 영혼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군살을 빼고 선한 의지의 근육을 키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단식을 통하여 영적인 성장을 가져오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단식의 생명은 자비로움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단식은 우리를 이웃을 향한 구체적인 사랑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단식하는 이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겪으신 배고픔의 의미를 깨닫는 순간부터 배고픈 이에 대한 애정을 느끼며 온 정성을 기울여 가난한 이들을 돕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따라서 단식을 통하여 모은 정성은 반드시 이웃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 맺는 단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랑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있을 때 잘해!”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신심행위』
-송영진신부-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14-15)”
여기서 요한의 제자들이 하는 말은, 겉으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하는 말이지만, 사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마태 11,19).”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신 분”,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분”이라고 증언했습니다(요한 1,29-34).
이 증언은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 증언을 가장 먼저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메시아로 보이지는 않고,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라는 그들의 말은,
뜻으로는 “우리는 당신에게서 메시아다운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라는 비난으로 해석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다운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이 생각하는 ‘메시아다운 모습’은,
첫 번째는 ‘신비스러움’(요한 7,27), 두 번째는 요한이 했던 것보다
더 엄격한 극기고행을 하는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하려는 예수님의 사랑’과
‘죄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자비’는
‘메시아다운 모습’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혼인 잔치 손님들’이라는 말과 ‘신랑’이라는 말은,
세례자 요한이 했던 말에서 표현을 빌려온 것입니다.
(질문한 사람들이 요한의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말을 인용하셨을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28-30).”
여기서 ‘신부’는 ‘신앙인들’입니다(2코린 11,2).
예수님의 말씀에서 ‘혼인 잔치 손님들’도 ‘신앙인들’을 뜻합니다(마태 22,3).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손님들’이라고 표현하셨을까?
‘복음 선포’는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초대하는 일’이기 때문에
‘손님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는, 우리는 ‘손님들’이 아니라 ‘신랑’ 옆에 있는 ‘신부’이고,
그 잔치의 주인공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 가득한 생활’입니다.
이 ‘기쁨’은 지금 이곳에서 시작되어서,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완성됩니다.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뒤에도 계속 그 단식을 했습니다.
<오늘날의 유대교가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는 단식도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입니다.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에서, 요한의 증언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로 가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요한 1,35-42),
다른 사람들은 그냥 요한 곁에 머물면서
바리사이들처럼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오신 메시아를 거부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당연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미 오신 메시아와 함께 살고 있는 종교이기 때문에,
유대교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단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신랑을 빼앗길 날’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때에
제자들이 단식을 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루카 24,30.41-42).
(너무 경황이 없어서, 또 너무 두렵고 슬퍼서, 제대로 식사를 못했겠지만,
그래도 일부러 단식을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교회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다는 의미로 단식을 하게 된 것은
‘성령 강림’후부터입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신랑을 빼앗길 날’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등지고 떠나서 ‘신랑을 잃어버리는 날’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에 신랑에게 되돌아가기 위한 ‘회개의 단식’을 하게 됩니다.
“회개한다면 꼭 단식을 해야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대답은, “해야 한다.”가 아니라, “하면 좋다.”입니다.
단식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신심행위 가운데 하나일 뿐입니다.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의 단식은 교회의 공동 신심행위이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닙니다.)
단식이든지 금육이든지, 또는 개인적으로 다른 신심행위를 하든지 간에,
신심행위는 그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으로부터 회개하지도 않으면서 ‘회개의 단식’을 하는 것은,
‘회개하는 척’을 하는 것이고, 쓸데없이 굶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단식 같은 극기고행을 하는 것이지,
그런 행위 자체가 곧 회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행하는 ‘9일 기도’나 ‘100일 기도’ 같은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9일이나 100일을 채우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정성과 간절함이 중요합니다.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으면서도 겉으로만 어떤 신심행위를 하는 사람들,
즉 ‘위선자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마태 6,2.5.16).”
이 말씀은, “위선자들의 거짓 신심행위는
하느님으로부터 신심행위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 9, 15)
-한상우신부-
잔치의 풍경과
단식의 풍경
모두
하느님을
향해 있는
사람의
풍경들이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람의 일이다.
빼앗긴
그 마음만큼
더 사랑하게
되는 신비이다.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너무 마음을
빼앗기며
살았다.
단식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이다.
그리스도가
중심이시다.
단식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바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잔치와
단식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삶에
멀리 있지
않다.
치러야 할
마음의
여정이다.
생각을 끊고
마음을
끊어야 할
단식의 때이다.
단식으로
사라진 마음을
다시 만난다.
작아지게
하는
자아의
단식이다.
영혼에
약(藥)이 되는
우리 소유의
단식이다.
비움과
얻음 사이에
우리가 있다.
오고 가는
시간 속에
우리가 있다.
가장 큰 사랑을
빼앗기며
살고 있다.
하느님 사랑을
되찾는 시간이다.
마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이다.
올바른 단식은
사랑의 마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다.
모든 것을
빼앗기고도
남는 것은
다시 시작하는
사랑의
마음이다.
하느님 사랑을
먹고 사는
우리들 삶이다.
욕심을 끊고
사랑을 먹는
사순이다.
단식은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사랑이며
참된
기도이다.
단식으로
하느님께
하느님의 자리를
기쁘게
내어드린다.
잘하는 단식
-김찬선신부-
“저희는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회개의 사순절에 실천해야 할 것으로 단식, 자선, 기도
이 세 가지를 권면하는데 그것은 그제 읽은 복음말씀대로입니다.
사실 회개한 사람과 성인들은 예외 없이 이 세 가지를 잘한 사람들이기에
우리도 회개하여 성인이 되려면 이 세 가지 실천을 잘해야 하는데
이 세 가지 중 오늘은 단식에 집중하여 교회는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자기들은 단식을 많이 한다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단식을 아무리 많이 하였어도 어떻게 많이 했다고 주님 앞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그럴 수 있다고 쳐도
단식을 많이 하는 것이 뭐 그리 대수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이 중요한 거야!’라고 흔히 얘기하듯
단식도 많이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제가 환갑이 되던 해에 서품 30주년이 겹쳐 자연스럽게
제 인생과 수도 생활을 함께 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때 든 생각이
제가 60년을 그리고 사제생활 30년을 참 열심히 살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열심히는 살았는데 잘 산 것은 아니었다는 반성이 되었고,
그래서 이제부터는 ‘열심히’가 아니라 ‘잘’이어야 한다고 마음먹었지요.
단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이 중요하고
그래서 오늘 이사야서도 그런 조로 얘기합니다.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요,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요,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주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사랑을 거스르지요.
내 배 부르기 위해 남의 입의 것 빼앗고,
높이 오르기 위해 남을 짓밟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잘하는 단식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음식을 끊는 것보다 욕망을 끊는 것이요,
욕망을 끊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겁니다.
내 입에 넣기 위해 남의 것 빼앗던 우리가
내 입에 들어갈 것으로 자선을 실천한다면 이것이 진정한 단식인데
그러나 오늘 주님은 여기서도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신랑을 위한 친구의 단식을 가장 완전한 단식의 예로 제시하십니다.
진정한 친구는 친구가 먼저고 음식은 늘 2차적인 겁니다.
사람보다 먹는 것이 중요한 식도락가는 맛에 탐닉하지만
사랑이 중요한 사람은 맛보다 누구와 먹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즘 와서 저의 최고의 식탁은 맛집에 가서 먹는 것이 아니라
제가 정성껏 준비하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와 맛있게 먹어주는 식탁이고,
그래서 협동조합을 시작하고 센터가 마련되면 이런 식탁을 마련할 것입니다.
한 주일에 한 번 열두 분의 조합원을 번갈아 초대하여 미사를 봉헌한 후
제가 준비한 식탁에서 주님과 제자들처럼 사랑의 나눔을 하는 겁니다.
음식은 내 배를 채우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라고 있는 것이니
사랑을 배운 우리는 누구에게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쁘게 축하하며 먹고,
안 좋은 일이나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넘어가지 않아서 먹지 않습니다.
세월호 단식투쟁을 할 때 옆에서 폭식한 사람들처럼 그래서도 문제지만
좋은 일에 같이 기뻐해주기를 바라는 사람 앞에서 단식하는 것도 문제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과의 식탁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어쩌시겠습니까? 단식하시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식사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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