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5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가 5,27-32)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to repentance but sinner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어 회개시키러 오셨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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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대기업을 다니다가 정년 퇴임을 하신 형제님이 있습니다. 이 형제님은 퇴임 후의 할 일을 계속 생각하다가 택시 운전을 결정했습니다. 퇴임 후 사업한다고 쫄딱 망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고, 일하지 않으면서 폐인처럼 사는 사람도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평소에도 운전을 좋아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했기에 자기에게 딱 맞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택시 운전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향해 ‘엄지척!’을 세웠습니다. 대기업에서 높은 자리까지 올랐던 분이 정말 대단하다며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창피하게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일까요? 그의 아내와 딸들이었습니다.
새로운 일을 할 때는 가족의 응원이 제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사회적인 체면을 이야기하며 응원하지 않는 사람은 늘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늘 나의 힘이 되어줄 것 같지만,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신은 늘 나의 몫이었고, 그럼에도 늘 나를 사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세상의 시선보다 주님의 시선을 봐야 합니다.
바리사이 사람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율법 정신의 철저한 실행으로 단식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의 단식은 조금 유별난 점이 있었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포도주와 물도 마셔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친 삼베옷을 입고 땅바닥에 앉아 옷을 찢고, 먼지나 재를 머리에 뿌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신심 행위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성경 문구를 써넣은 작은 갑을 이마에 달고 다녔고, 재계를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고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람들 앞에 나섰습니다. 그러면서 단식하지 않는 사람을 신심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모습을 예언자들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주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기쁨이었습니다. 혼인 잔치의 비유를 통해, 기쁨은 인류가 구원되는 기쁨으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이날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오신 지금은 기뻐할 혼인 잔치의 때이지, 단식할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단식을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 사랑에 보답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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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할 때 차려진 식탁에서만 성장한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WHXsCT0Yw4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레위라는 세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당신 제자들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왜 식사하는 것까지 트집일까요? 그리고 왜 예수님이 아닌 제자들에게 투덜댈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신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서 죄인들을 치료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삼위일체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식탁. 이어서 그 식탁 안에서 치유되고 자라는 자녀들입니다.
먼저 ‘아빠–엄마–사랑’을 ‘성부-성자-성령’처럼 삼위일체로 생각해봅시다. 그런데 ‘사랑’은 어디에서 드러날까요?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 식탁입니다. 식탁은 아빠가 벌어온 돈과 엄마가 아빠를 위해 자신을 내어줌이 만나는 곳입니다.
저도 사제가 되어서도 결혼해서 신혼생활 할 때의 꿈을 꾸었는데 그 식탁에서 아내가 불만을 말하니 꿈속에서도 기분이 나빴던 것이 기억납니다. 나가서 돈 벌어오기 싫은 마음이 확 일어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상황에 아이가 놓여있다면 아이는 당연히 자아가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아는 생존이 불안할 때 커집니다. 왜냐하면, 생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돈을 벌어다 주기 싫거나 아내가 남편을 위해 제대로 된 식탁을 차려주기 싫으면 그 식탁에서 식사하는 자녀는 ‘불안’을 느낍니다. 부모의 불안함이 자녀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스스로 생존하려는 마음이 커지는데, 그렇게 자아가 큰아이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그래서 식탁에 앉은 자녀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는 모든 생존의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신앙고백 안에서 자녀는 돈에 대한 집착이나 자신만 아는 마음이 성장할 수 없고 오히려 치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제자 사이에서 오고 가는 사랑은 바로 이러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세리는 특별히 돈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식탁 안에서 돈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지고 세리는 그렇게 돈 좋아하는 마음이 치료되는 것입니다.
이런 삼위일체로 만들어진 환경 안에서 자라지 않는 아이는 반드시 돈에 대한 욕구이든, 육욕에 대한 욕구든, 힘에 대한 욕구든 간에 치유되지 않는 사람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습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76회 ‘힘 과시하는 감당 안 되는 아이의 폭력성은 ADHD 때문일까요?’가 방영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여자아이인데도 친구 사귀는 법을 모릅니다. 자신과 놀아주지 않으면 때리겠다고 하고 하늘나라 보내버리겠다고 합니다. 심지어 엄마에게도 대듭니다. 식탁에서 지시하는 것은 거의 따르지 않습니다. 생떼를 쓰고 욕을 하고 음식을 엄마에게 쏟기도 합니다. ADHD 약을 먹어도 상태가 악화되어 유치원에 등교시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금쪽이는 자신이 아빠를 대신해 엄마를 보호하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빠가 폭력을 가하여 엄마 얼굴에 피가 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혼한 엄마를 보며 아이는 생존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 것이 아빠의 폭력과 엄마의 약함이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강해져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를 바꾸려면 엄마에게 자신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내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야합니다. 엄마가 먼저 하느님을 굳게 믿어 마음을 평화롭게 해야합니다. 아이는 엄마의 감정을 먹고 삽니다. 엄마가 불안하면 아이도 불안합니다. 아이를 바꾸려 하지 말고 먼저 엄마부터 마음의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고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도 평화를 찾고 그 식탁에서 자아가 죽어가며 온전한 하느님 자녀로 성장합니다.
상황이 안 좋다고 상황 탓만 해서는 안 됩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1997)에서 아빠와 엄마는 5살 아이와 함께 독일군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탑니다. 엄마와 아빠는 수용소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아빠는 재치있는 행동으로 홀로 떨어진 엄마에게 자신과 아들이 살아있음을 알립니다.
낯선 환경에서 독일군에게 잡히면 죽임을 당할 것을 뻔히 아는 아빠는 아들에게 1,000점을 따면 탱크를 탈 수 있는 게임이라고 속입니다. 그래서 아들은 아빠의 말을 듣고 수용소의 상황이 탱크를 탈 수 있는 하나의 게임이라고 믿어버립니다. 아빠는 죽음 직전도 아이 앞에서 웃으며 나아갑니다. 아이는 끝내 들키지 않고 살아 엄마와 재회합니다. 그리고 탱크를 타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하는 것은 아이가 불안하지 않으려면 부모부터 불안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축음기를 이용해 아내와 함께 보았던 오페라 음악을 틀어줍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아무 걱정 할 필요 없다며 죽음 직전까지 안심시킵니다. 이 때문에 아이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감정이 식탁에서도 벌어져야 합니다. 결국, 먹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지성소에 들어가면 일단 맨 밑에 계약의 궤가 있습니다.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십계명 판과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하느님 아버지를 상징하는 구름이 내려옵니다. 그 중간에 대사제가 잡은 소의 피를 일곱 번 뿌립니다. 그 중간 자리가 속죄소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빠를 상징하는 구름과 엄마를 상징하는 계명판 사이에서 차려지는 사랑의 식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식탁에서 자녀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이런 식탁을 마련하여 우리 자아를 죽여 우리를 치료하려고 하십니다. 이것이 미사 안에서 말씀과 성체의 식탁에서 이뤄지는 것입니다.
식탁은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마련하는 평화의 자리입니다. 그 평화의 자리에 머물 때 우리는 치유되고 주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항상 이 자리에 머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관상의 단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보는 세상은 아무리 고통스러운 환경일지라도 온통 사랑입니다. 그냥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모든 게임 환경을 자신이 유리하게 만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또 누군가는 게임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생존 걱정을 하는 부모는 자녀를 식탁에서부터 망칩니다.
성당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와 신자 간에 남편과 아내가 마련한 식탁처럼 따듯한 온기가 있는 분위기가 없다면 누군가를 성당으로 데려와도 그 사람의 죄가 사해지고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따듯한 밥상이 차려진 식탁에서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일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j0obJLFoUXs
오늘의 독서는 단식의 윤리에 이어서 안식의 윤리에 대해 일깨워줍니다. 이는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서 주일을 거룩히 지내야 할 의무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네가 삼가 안식일을 짓밟지 않고, 나의 거룩한 날에 네 일을 벌이지 않는다면, 네가 인식일을 ‘기쁨’이라 부르고, 주님이 거룩한 날을 ‘존귀한 날’이라 부른다면, 네가 길을 떠나는 것과 네 일만 찾는 것을 삼가며, 말하는 것을 삼가고 안식일을 존중한다면, 너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나는 네가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리게 하며, 네 조상 야곱의 상속 재산으로 먹게 해 주리라”(이사 58,13).
오늘날 우리 교회에서는 신앙생활의 정상과 냉담 상태를 가르는 기준이 주일미사 참례가 되어 있습니다. 주일날 본당에서 거행되는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으면 열심한 신자라고 칭찬하고, 그 반대로 빠지면 냉담자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계명의 네 번째에 규정된 바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계명은 “주일미사에 빠지지 마라.”는 계명으로 축소되어 버린 셈입니다.
하지만 이사야는 자기 일 대신에 하느님의 일을 해서 그분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날을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종교적인 봉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일과 공동선을 위한 봉사까지를 다 포함합니다. 무릇 종교적인 봉사도 원래는 사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상황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레위를 눈여겨보셨던 듯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세관에 앉아 있던 그를 보시고 마치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사이인 것처럼, 더구나 그저 알고 있었던 사이 정도가 아니라 둘 사이에 이심전심(以心傳心) 상태인 것처럼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고 부르셨고,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습니다.
세리를 할 정도로 영민했던 레위는 예수님께서 눈여겨보시기도 전에 그분에 관한 소문을 듣고 여러 차례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도 여러 번 가서 열심히 듣다 보니 그분의 눈에 뜨일 정도가 되었겠지요. 그는 세리라는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차에 그분의 말씀과 인상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던 듯합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라.” 하시는 말씀 한 마디에 주저 없이 모든 것을 버려둔 채 그분을 따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신 예수님께 그는 고마운 마음에서 동료 세리들을 죄다 불러 모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틈에 덩달아 참석한 사람들도 제법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속사정을 눈치채지 못한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은 엉뚱한 딴지를 걸었습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5,30).
그래서 스스로 의로운 체 하던 바리사이들과 그들의 율법 학자들의 위선을 익히 알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수하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그네들이 이 말씀의 진의를 알아차렸든지 또는 알아차리지 못했었든지간에 예수님으로서는 매우 점잖게 그들의 비난을 받아치신 셈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회에서는 불평등 추세가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보고 있는 한편, 또한 우리 교회는 중산층화되어 가는 추세가 굳어지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을 잘 지키는 길도 분명합니다. 그냥 쉬는 날이나 노는 날, 또는 가족과 함께 지내는 날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일을 함으로써 주일을 ‘존귀한 날’로 드높이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세상 높은 곳 위를 달릴 수 있으며, 하느님 백성의 일원으로서 약속된 축복을 듬뿍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일에는 미사 참례를 중심으로, 평소에는 일 때문에 쉽사리 시간을 내어 하기 어려웠던 귀한 일을, 가족과 함께 또는 교우들의 가족들과도 어울려서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다음 날이면 또 일하러 나가야 하니까 너무 무리해서 할 필요는 없고, 매 주일 지속적으로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그러나 그치지 않고 하시면 되겠지요. 이렇게 하여 주님을 믿고 섬기는 기쁨을 느끼고 알아간다면, 자녀들이 믿음을 잃고 냉담하는 일은 예방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함께 나누거나 지켜보는 세상 사람들도 하느님을 믿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차츰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상황에서도 그렇고 실제로 공생활 내내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전하신 방식입니다. 다시 한 번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방식에 대해 간추려 전해 드립니다. 미사 참례를 먼저 하고 나서, 가장 귀한 일을, 가족과 함께, 천천히, 조금씩, 지속적으로 하는 겁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미사의 화답송 후렴이 우리가 이 사순절에 바쳐야 할 회개의 기도입니다.
“주님, 제게 당신의 길을 가르치소서. 제가 당신의 진리 안에서 걸으오리다”(시편 86,11)
-조재형신부-
신문홍보를 다니면서 가장 신경 쓰이는 것은 ‘구독신청’입니다. 가장 효과적인 것은 본당 신부님의 적극적인 권면입니다. 아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도 큰 힘이 됩니다. 며칠 전 홍보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한 본당에서 같은 주일에 잡지 두 곳이 홍보를 왔다고 합니다. 젊은 수사님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구독신청이 적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잡지를 홍보하러 왔던 형제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수사님이 만드는 잡지를 많이 구독해 주세요. 여유가 있으시면 저희 잡지도 구독해 주세요.’ 그렇게 말을 마치니, 꽉 막혔던 마음이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듯이 편해졌다고 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들이 형제님의 잡지를 많이 신청하셔서 놀랐다고 합니다. 수사님의 잡지도 평소보다 많이 신청하였다고 합니다. 세상은 1등만을 알아주고,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저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며 오늘 샬롯 성 이윤일 요한 성당으로 홍보를 가려합니다.
이제 곧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대통령의 자리는 하나이기에 후보들의 경쟁은 치열합니다. 정책을 만들고, 공약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보다 편안하고,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는 후보들이 토론을 통해서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약점을 들추어내고, 거짓된 정보로 상대방을 모함하는 후보를 선택하는 국민은 없을 것입니다. 상대의 정책과 공약 중에서 좋은 것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국민을 위해 충실하게 일하려는 후보는 국민들의 선택을 받을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들 간의 비열한 경쟁이나 모함의 난장판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대통령 선거가 후보들이 자신들의 정책과 비전을 드러내는 멋지고 아름다운 축제의 자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난장판을 만드는 것도, 축제의 자리로 만드는 것도 현명한 국민들의 선택입니다. 검증이라는 이유로 후보들의 작은 허물을 침소봉대하는 언론의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알고 싶어 하는 것은 후보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아닙니다. 후보들의 정책 실현 능력을 알고 싶어 합니다. 후보들의 정책을 비교하고, 가능성을 분석하는 것이 언론의 역할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눔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굶주린 이에게 네 양식을 내어 주고, 고생하는 이의 넋을 흡족하게 해 준다면, 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르고, 암흑이 너에게는 대낮처럼 되리라.” 예수님께서도 경쟁의 삶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려고 한다면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합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신앙은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기도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반했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죄를 묻지 않으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던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지키고, 계명을 충실하게 지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나약해서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을지라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에게 해 주는 덕담이 있습니다. 서로의 조건을 보기보다는 서로에게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을 보라고 하였습니다. 평강공주는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따지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보다는 ‘본당 신부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이해하면 더 큰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보좌 신부가 그럴 수가 있나.’라고 험담하기보다는 ‘보좌 신부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면 더 큰 신뢰가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죄인을 받아 주셨고, 아픈 이를 위로해 주셨고, 배고픈 이를 배부르게 하셨습니다. 넘어진 이의 손을 잡아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아온 탕아를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며,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자비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해하고, 용서하고, 받아 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며 받아 주고, 품어주는 신앙이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크게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셨습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유다 사회는 신분이나 계층의 구분이 확연했습니다. 유유상종이라고, 만남도 끼리끼리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지도층 인사들이나 평민이 하층 신분인 세리나 죄인들과 어울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율법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한 곳에 있으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거룩한 존재인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 적어도 평민들이 속된 존재인 세리나 죄인들과 한 자리에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리 레위가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새출발하던 저녁, 그의 집에서는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해가 지자 참석자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지켜보던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동료 세리들, 인신매매 업자들, 밤업소 종사자들, 거래처 사람들...각양각색의 뒷골목 사람들이 총출동한 것입니다.
그 잔치는 일종의 송별회였습니다. 잔치에 모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이룬 것을 통해 우리는 레위가 보통 세리가 아니었음을 잘 알수 있습니다. 그는 말단 세리가 아니라 일정 지역을 총 책임지고 있었던 세관장, 다시 말해서 보스였던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잔치는 레위가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을 위해 마련해드린 기쁨과 감사의 잔치였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를 들면 영등포구나 태안군 전체를 주름잡던 큰 형님, 조직 보스가 회개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으니 동료 세리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이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또 레위 본인은 얼마나 감지덕지하고 황공무지한 사건이었겠습니까?
뿐만아니라 그런 자리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는 거나하게 차려진 잔치 음식을 만끽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만 해도 불결한 존재인 세리와 죄인들 사이에서 태연하게 머무시며 포도주잔을 기울이는 예수님의 모습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기에 기가 차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루카 복음 5장 30절)
이 말은 ‘어찌하여 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오?’ ‘어찌하여 율법을 어기는 것이오? 어찌하여 조상 대대로 내려온 소중한 전통을 깨트리는 것이오?’란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참으로 통쾌합니다. 뿐만 아니라 평생 죄 속에 살아가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복음 5장 31~32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죄인들이 용서받을 희망을 크게 품게 하시고자, 세리의 일을 하던 레위를 선택하시어 얼마나 높은 의로움으로 피어나게 하셨는지를 생각하면 참으로 즐겁지 않습니까? 그가 일원이 된 사도단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바뀌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존자 베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과 레위의 집에서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습니다.'
(루카 5,27)
사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라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발걸음으로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앵무새처럼 입으로만 혹은 다람쥐처럼 몸짓으로만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이고 본질적인 삶의 자세와 태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화답송에서 말해주듯이, ‘진리 안에서 걷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 가치관, 방식에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죄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불결한 이들과의 접촉은 그도 불결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식사를 하십니다.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상징입니다.
그것은 서로 기쁨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요, 한 가족임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보내는 신의요, 자비요, 호의입니다.
그들을 단죄한 것이 아니라 용서하신 까닭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죄인들 속으로 들어와 그들을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십니다.
자신의 몸에 죄를 묻힘으로 죄인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죄인들의 회개를 앞세우기보다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자비를 베푸십니다.
흔히 우리는 죄지은 이에게 ‘먼저’ 회개하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는 ‘먼저’ 용서하시고, ‘먼저’ 함께 식사를 하시며, 당신과 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먼저’ 죄인을 찾아오시고, ‘먼저’ 우리를 부르시고, ‘먼저’ 죽으시고, ‘먼저’ 당신을 건네주시고 자비를 베푸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루카 5,2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2)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의인들인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야 하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단지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인 까닭에 용서해야 하는 일을 소명을 받은 죄인들입니다.
곧 이미 사랑과 자비를 입었기에, 또한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소명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루카 5,27) 하심은 우리 역시 죄지은 형제에게 ‘먼저’ 다가가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루카 5,32)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의인인체 하는 죄인」
-반영억신부-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5,31).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병자와 죄인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병자를 낫게 해주고 죄인을 구해준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병자라고 알고 있는 환자가 있는가 하면 병자임을 모르고 있는 병자가 있습니다. 본인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죄인이 있는가 하면, 의인인체 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입는 사람은 자신이 병자요, 죄인임을 깨닫는 사람입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은 본인이 병자이면서도 병자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신들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오?” 하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스스로 건강하며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까지는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았으면 좋으련만 남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사실은 그것이 죄입니다. 정작 주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죄인은 주님의 도움을 외면하고 여전히 의인을 자처하였습니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고,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무시당하고 비난 받으며 살았던 세리나 죄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은총입니다. 더군다나 의인으로 자처하며 상종도 하지 않는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나를 따르라” 하시며 음식을 함께 나눌 수 있게 안배하시니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도 병자를, 죄인을 부르십니다. 병자요,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은 그분의 식탁에서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교부 사르마타스는 말하였습니다. “죄를 짓지 않고서 자기 자신을 의롭게 여기는 사람보다는 죄를 지었음을 깨닫고 뉘우친 죄인을 하느님께서는 더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느님께 마음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돌리는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은총의 사순절에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는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31,34). "회개하는 것은 살아가는 방법만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는 방법까지 바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요한12,47)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부하게 내렸다”는 말씀대로 하느님의 자비가 영원에서 영원까지 한결같음을 믿으며 하느님의 자비를 영원토록 노래하시기 바랍니다.(성 베르나르도)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1,9).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 이스라엘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모세, 왕 중의 왕이라고 했던 다윗, 이방인의 사도 바오로, 주님의 으뜸제자인 베드로에 이르기까지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허물을 인정하였기에 하느님의 자비를 입었으며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야말로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우리도 그 행복을 차지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모든 것을 버려둔 채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루카 5, 28)
-한상우신부-
모든 것을
버려야
길은 다시
새롭게
열린다.
따르면서
새 삶은
시작된다.
우리 삶의
진정한 모습을
만나는 은총의
사순이다.
따른다는 것은
욕망에 빠진
우리 삶을
바로
잡는다는
것이다.
삶의 자세를
바꾸지 않고서는
올바로
따를 수 없다.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사순시기는
삶의 정체성을
만나는 시간이다.
우리 일상에서
새로운 뜻의
전환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다시금
영원한 것을
따르는
마음의 전환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따르는
마음이 있다.
인생전체를
주님께 던지는
마음이다.
그 마음의
실천이
바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실천 없이는
다다를 수 없는
복음의 관계이다.
복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기쁨이다.
일어나
따라야 할
사순의
시간이다.
말씀 나누기 - 죄의 수요일 다음 토요일-필요한 사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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