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7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2. 3. 7. 07:20

2022 3 7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
마태오 25,31-46)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did
for one of these least brothers of mine, 
you did for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거룩하시니 주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당신께 해 드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은 아동학대라고 하면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실험이겠지만, 13세기 독일의 프레드릭 2세는 아이를 대상으로 실험했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완벽히 차단해서 키우는 것입니다. 그때 어떤 언어를 말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안아주지 않고 말도 걸어주지 않았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고, 말을 할 나이가 되기 전에 대부분 사망했습니다. 끔찍하다고 할 수 있는 비윤리적인 실험이었지만, 신체적 접촉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친밀하고 행복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우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육체적으로는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어도, 감정적으로는 무조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안에서만 그럴까요? 이렇게 사랑의 관계를 맺지 못하면, 하느님 앞에 서서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최후의 심판’을 이야기하는 오늘 복음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오시는 사람의 아들은 여기서 모든 백성을 심판하는 임금으로 나타나십니다. 그 앞에 세상을 살아온 모든 백성이 서게 되고, 각자 믿음과 그 실천에 관하여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사람을 대하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사랑이 넘치는 임금이신 주님은 자신에게 하는 것보다 가장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을 자신에게 해 준 것으로 여기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율법에서도 이렇게 강조합니다. 오늘 독서의 레위기는 이렇게 말하지요.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레위 19,15)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레위 19,17)

우리 주변에는 우리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무수히 많습니다. 이런 이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곧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최고의 찬양을 드리는 것이 됩니다.

자신과 이루는 모든 관계는 나를 살게 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관계를 끊으려고 하십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고…. 이런 식을 끊어버리면 이 세상에서도 그리고 주님 앞에서도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의 관계 중에 하나를 끊으면 또 다른 관계를 끊는 것도 쉽게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계속 관계를 끊다 보면, 심지어 주님과의 관계도 끊게 됩니다.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에게 어디로 가라고 하실까요?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어떤 일에 희망을 갖는 것이다(칸트).

거룩함, 정의와 자비

-이기우 신부-

 

유투브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y7C7TfwBimo

 

 -조재형신부-

 

군자삼락(君子三樂)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부모님이 건강하시고형제들이 무탈한 것입니다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입니다저는 군자삼락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부모님이 모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형제들과는 멀리 떨어져있습니다하늘은 물론양심을 비추어도 부끄러움이 있습니다누군가를 가르칠 만큼 깨달음에 이르지도 못하였습니다하지만 제게도 3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책을 가까이해서 읽는 즐거움입니다산보하면서 기도하고강의를 듣는 것입니다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2년째 미사를 하는 것입니다사순시기를 지내는 신앙인에게 3가지 즐거움이 있다면 무엇일까요교회는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단식과 절제를 통해서 주님의 수난과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자선과 희생을 통해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기도와 회개를 통해서 키레네 사람 시몬처럼베로니카처럼 주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요즘 2권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지구의 짧은 역사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입니다하나는 45억년 지구의 역사를 전해주고 있습니다미국의 보스턴과 영국의 런던이 1년에 2,5센티씩 움직여서 1억년이 지났는데 지금은 2500킬로 떨어져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맨틀 위에 떠있는 지각이 화산과 지진으로 떠오르기도 하고섭입의 과정을 통해서 지각이 맨틀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새로운 지각이 생긴다고 합니다짧은 우리의 생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우리의 별도 태어나고자라고변하고 있다고 합니다다른 하나는 마음생각을 이야기합니다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따라서 움직이지만 마음과 생각 너머에 진정한 자아가 있다고 이야기합니다진정한 자아는 존재와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진정한 자아를 만난 사람을 깨달은 사람이라고 합니다진정한 자아를 만난 사람은 지복직관의 삶을 산다고 합니다순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진정한 자아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짧은 지구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도 자연의 일부라는 성찰을 하게 됩니다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온 우주와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독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이 가는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 거룩하시니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게 됩니다그런 사람은 부모에게 효도하고살인하지 않고간음하지 않고도둑질 하지 않고거짓증언하지 않고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고남의 재산을 탐하지 않습니다공정과 정의를 드러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식별하는 기준을 이야기하십니다지금 가장 굶주리고가장 헐벗고가장 아픈 사람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사람은 진정한 자아를 찾은 사람이라고 하십니다지금 가장 굶주리고가장 헐벗고가장 아픈 사람을 외면하는 사람은 진정한 자아를 만나지 못하고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32년 전입니다술에 취해서 길에 누워있던 사람을 보았습니다추운겨울인지라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본당 신학생과 함께 남자를 부축해서 택시에 태웠습니다택시기사가 함께 가길 원했습니다우리는 택시를 타고 남자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술에서 깬 남자가 우리를 오해하고 욕을 했지만 남자의 가족들은 진심으로 고마워했습니다돌아오는 길에 하늘에서는 눈이 내렸습니다그때 함께 했던 신학생들은 모두 사제가 되었습니다잠시나마 진정한 자아를 만났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여러분이 돌보고 있는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양승국신부-

 

젊은 시절, 매 주말이 다가오면 소년원과 분류심사원, 교도소와 구치소를 내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습니다. 주간에는 제게 맡겨진 아이들 위해서 밤낮으로 뛰어다니느라 거의 녹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말이 되면 만사 제쳐놓고 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갇혀있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이제나저제나 마냥 기다리고 있는 형제들 생각에 또 다시 지친 몸을 이끌고 육중한 철 대문을 넘나들곤 했습니다. 매주 방문할 때 마다 큰 고민거리는 간식이었습니다.

  

개신교나 불교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에다, 고급 과자에다, 엄청난 물량 공세를 펼치는 데 비해 저희 천주교는 언제나 초라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혈기와 열정 하나로, 양질의 프로그램으로 승부를 건다는 마음으로 참 열심히 다녔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주 목숨 걸고 칙칙한 담장을 드나들던 협조자들의 얼굴이 오늘따라 참 그립습니다. 

 

줄기차게 다녀봐야 별다른 변화도 없고, 감사의 표현도 없고, 밑빠진 독의 물붓기 같아 별 의미를 못 찾겠다는 협조자들에게 제가 늘 강조한 복음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종말과 관련된 복음 구절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 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주었다.”(마태오 복음 25장 34~36절) 

 

저는 이 구절을 근거로 침이 마르도록 설명해드렸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갇힌 이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교정 사목, 정말 힘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일은 가장 복음적인 일이며,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갇힌 사람으로 변장해 계시는 주님을 찾아뵙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며, 대대손손 큰 축복을 내리실 사목입니다.” 

 

오늘도 힘겨운 사목 현장에서 열 일 하시며 고생하시는 형제자매님들께도 똑같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무료급식소나 청년 밥집에서, 소년원이나 분류심사원에서, 교도소나 구치소에서 하루하루 전쟁 같은 날을 보내시는 여러분, 여러분이 돌보고 있는 그들이 바로 살아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부디 그들을 잘 돌보십시오. 그것은 곧 살아계신 예수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여러분은 정말이지 귀찮고 힘겨운 바로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오른편에 앉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레위 19,2)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는 성덕으로의 부르심은 나중에 바오로 사도에 의해 '아버지의 뜻'으로 선포됩니다.

곧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테살 4,3)

 

그리고 이 부르심은 오늘 복음에서 ‘자비와 사랑을 실행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눈여겨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 기준은 신앙이나 종파가 아닙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이스라엘인이냐 이방인이냐도 아니요,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도 아닙니다.

초월적인 신비 체험이나 관상도 아니요, 기적이나 예배도 아닙니다.

교리나 신심도, 신분이나 성공도, 부나 힘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과 자비의 실천일 뿐입니다.

특별히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마태 25,40)에게 해준 사랑과 자비의 실천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해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를 분명히 말해줍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해준 것이 당신에게 해준 것이라고 하시고 그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 되고, 하느님을 인간들 사이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이 외면하는 버려진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았다."

 

이를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 4,20)

 

한편 이 심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처벌을 받은 왼편의 사람들이 어떤 큰 범죄나 악행을 저지른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단지 무관심하고 소극적이었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처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적극적인 사랑을 하지 않은 사실에 있음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사랑하지 않음, 곧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죄짓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하려고 애쓰는 일일 것입니다.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오늘의 말 · 샘 기도>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마태 25,40)

 

주님!

어느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어느 누구든지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결코 당신의 선물을 보잘 것 없이 여기지는 말게 하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사순 1주 월요일-하느님 사랑에로의 도전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3월 2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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