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6일 사순 제1주일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루카 4,1-13)
Filled with the Holy Spirit,
Jesus returned from the Jordan
and was led by the Spirit
into the desert for forty days,
to be tempted by the devil.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거둔 수확의 맏물을 바치며, 주 하느님께 경배드려야 한다고 말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다(복음).
![](https://blog.kakaocdn.net/dn/m64Bv/btqQ3gjSMB0/yoVF4IeVISmCXuOZ2APAZk/img.jpg)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2019년 한국직업사전에 등재된 우리나라 직업의 수는 1만 6,891개였습니다. 정말로 다양한 직업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제 우리나라 실업률은 3.10%(경제활동인구 중에서 실업자가 차지하는 비율)으로 전 세계 실업률 평균보다는 낮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다며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직업의 수는 일본의 경우 2만 5,000개로 우리보다 훨씬 많고, 미국은 3만 654개가 된다고 합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직업의 숫자도 늘어납니다. 계속 발전해나가는 우리나라이기에 직업의 숫자도 계속 늘어나겠지요. 따라서 ‘일할 곳이 없다’라고 말하기보다 새로움을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에 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단정을 짓는 순간,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닫혀버립니다. 열린 가능성을 보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주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다.’라고 단정 지으면, 전지전능하신 주님의 다양한 활동을 볼 수가 없게 됩니다.
악마의 유혹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게 만들어서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못하게 합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하는 악마도 이 방식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십니다. 광야란 세속과 완전히 분리된 곳으로,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고 먹을 것을 찾기도 힘든 곳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오로지 하느님만을 떠올리며 하느님과 함께하는 공간이지요. 하느님과 함께하기에 정신적으로는 풍요롭겠지만, 육체적으로 아주 힘든 상태였을 것입니다. 하루만 굶어도 힘든데, 자그마치 40일을 굶은 상태였으니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십니다.
첫 번째 유혹은 40일 동안 굶은 상태에서 먹을 것을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허기진 사람이 먹을 것을 찾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로 자격 운운하며 기적을 하라는 유혹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자기 앞에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 땅에 이루시려는 예수님의 일을 더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유혹입니다. 솔깃합니다.
마지막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당시 모든 사람의 눈이 바라보는 구원의 장소로,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입니다. 이제 공생활을 시작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멀쩡하게 뛰어내릴 수 있다면 사람들의 관심은 엄청날 것입니다.
이 모든 유혹을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느님 말씀을 통해 이겨내십니다. 우리가 받을 유혹 역시 하느님 말씀을 통해 이겨낼 수 있음을 직접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단정 짓지 마십시오. 하느님 말씀만이 모든 유혹을 이겨내게 합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죽이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pZ7vJVdZIK0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시는 내용입니다. 정말 잘 알아두어야 할 것은 예수님을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도록 이끄신 분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
다시 말해 성령께서 오지 않으시면 누구도 광야에 나가지도 않고 유혹과 싸우지도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유혹과 싸우게 만드시어 주님께 더 합당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유혹과 싸우면 그 사람 안에는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자신과 싸운다는 말은 자아의 세속-육신-마귀와 싸운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귀가 세상을 섬기라고 유혹한 것이 세속이요,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고 한 것이 육신이며,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한 것이 마귀입니다.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고 있음이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죽입니다. 죽이지 못하면 사랑이 아닙니다.
JTBC, ‘내가 키운다’에서 ‘ADHD 솔루션 중단 위기?! - 다시 시작되는 우경이와의 전쟁’이 방영되었습니다. 이지현 씨의 아들 우경이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엄마를 몰아붙입니다. 전문가들이 여러 해결방법을 알려주고 지현 씨도 노력했지만 잘 먹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엄마 앞에서 집을 나가겠다고 하고 죽어버리겠다고 합니다. 이에 이도 저도 안 되는 상황 때문에 지현 씨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은 분명 상대를 죽이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지현 씨 사랑은 우경이를 죽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분명 지현 씨가 하는 것은 참으로 사랑이 아닙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성령을 부를 때, ‘사랑’(Amore-Persona)이신 한 인격체로 규정합니다. 성령께서 사랑이시기에 사랑과 반대되는 생존 욕구와 싸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결국엔 죽입니다. 가리옷 유다처럼 다 성장하여 본인 의지로 성령을 거부하면 모를까 아이들은 100% 부모님 사랑이 참사랑이라면 반드시 자아가 죽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엄마가 사랑이 아닌 집착을 하고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이 얻고 싶은 것을 얻어내려 떼를 쓰는 것입니다.
영화 ‘몽골’(2007)을 보니 세계 절반을 차지했던 칭기즈 칸이 그냥 싸움만 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싸움으로 그토록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 부족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12세기 몽골. 훗날 대륙의 지배자로 불리게 될 대 몽골 제국의 창시자, 테무진이 태어납니다. 테무진의 아버지가 자신의 부족을 지키기 위해 아들 테무진을 경쟁 부족과 혼인시키러 가던 도중 잠깐 들린 곳에서 테무진은 보르테라는 여자아이에게 한눈에 반해버리고 5년 뒤 돌아와 혼인하기로 약조합니다. 그러나 그 부족은 큰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테무진의 선택을 존중하여 돌아갑니다. 그러다 결국 아버지가 경쟁 부족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어쩌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은 그 탓을 자신의 마음을 빼앗은 보르테에게 돌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테무진은 그럴수록 더욱 보르테를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를 잃고 집으로 돌아온 테무진은 자기 부족 이인자의 반란으로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게 됩니다. 수레바퀴보다 키가 작은 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행히 어린 테무진은 살아남게 됩니다. 그러나 항상 쫓겨 다니며 조금씩 성장합니다. 이때 테무진을 도와준 것은 이웃 족장 아들 쟈무카였습니다. 그리하여 테무진은 쟈무카와 의형제를 맺습니다.
쟈무카 덕분으로 무사히 어른으로 성장한 테무진은 결혼을 약속한 보르테를 찾아가 혼인을 청합니다. 하지만 복수의 씨를 없애려 테무진의 아버지를 배신한 이인자에게 보르테를 납치당합니다. 보르테는 화살에 맞은 테무진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대신 납치당한 것입니다.
테무진은 자신의 의형제이자 이젠 어엿한 한 부족의 수장이 된 쟈무카를 찾아가서 도움을 청합니다. 쟈무카는 한 여자 때문에 전쟁해 달라는 테무진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보르테가 아니면 안 된다는 테무진을 도와주기로 합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위해 자기를 낮추는 수모를 감수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보르테를 찾은 테무진은 보르테가 원수의 아이를 배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테무진은 그동안의 보르테의 고통을 생각하고 원수의 아이도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입니다. 원수의 아이를 키워야 하는 테무진이지만 그냥 보르테가 자신의 아내가 된다는 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쟈무카는 테무진을 이인자로 임명하려 합니다. 그러나 보르테는 한 우리에 두 이리가 살 수 없다고 테무진을 설득합니다. 테무진은 쟈무카에게서 벗어나 자신의 세를 늘립니다. 이젠 쟈무카와 원수지간이 됩니다. 테무진은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준 의형제와 갈라지게 했지만 여전히 보르테를 사랑합니다.
쟈무카도 점점 세력이 커지는 테무진을 그대로 놓아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일으켜 테무진을 생포합니다. 테무진은 자신이 잡히는 대신 보르테와 가족들을 피신시켰습니다. 테무진에게 영예로운 죽음을 선사할 수 없었던 쟈무카는 테무진을 누구도 찾기 힘든 아주 먼 곳의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감옥에 갇힌 테무진이 미래에 세상을 통치할 인물이 될 것을 알아본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테무진은 그 스님에게 보르테를 찾아가게 합니다. 멀리 달려온 스님은 보르테에게 테무진이 살아있음을 알리고 지쳐 죽습니다. 한 여자가 아이를 데리고 그 먼 길을 혼자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이에 보르테는 테무진이 살아있는 곳으로 가는 상인 대열에 끼여 그들에게 몸을 팝니다. 그러다 보르테는 또 테무진의 아이가 아닌 상인의 아이를 낳습니다. 테무진은 보르테의 기략 덕분으로 감옥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 상인의 아이를 보며 보르테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합니다. 보르테도 테무진 때문에 순결을 잃고 남의 아이를 여러 차례 낳아야 했지만 불평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몽골의 통일을 두고 이제 테무진은 쟈무카와 격돌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쟈무카의 군대가 더 강력하였습니다. 그러나 때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습니다. 몽골인들은 번개를 무서워하여 번개가 치면 땅에 주저앉습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었던 테무진은 덕분에 땅에 웅크린 쟈무카의 군대를 일망타진합니다. 그렇게 몽골을 통일시키고 이제 세상을 정복하는 칭기즈 칸이 됩니다. 그는 끝까지 보르테를 존중했고 가장 사랑하고 아꼈으며 그녀의 조언을 귀담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토록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듭니다.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께서도 그러하십니다. 성령은 “가난해져도, 먹을 것이 없어도, 멸시를 당해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사순 때 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을 잃어도 상대의 존재만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17살 고등학생이 된 홍원기는 소아조로증을 앓고 있습니다. 국내에 유일한 프로제리아라는 이 조로증은 어린이에게 조기 노화 현상이 발생하는 유전질환입니다. 아빠는 강연과 글로 돈을 벌었는데, 코로나로 이것이 잘 안 돼서 “원기야, 아빠 이제 뭐 하지?”라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원기는 아빠에게 “오늘도 최고의 하루를 사는 거야. 한 번뿐인 인생 후회하지 않도록”이라고 말해줍니다.
원기의 시간은 남들보다 7배나 빠르게 흐릅니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만으로 ‘최고의 하루를 살겠다’라고 말하는 원기가 참 대단해 보입니다. 그리고 사순을 지내는 의미가 원기처럼 주님만 있으면 상황이 어떻든 오늘 하루를 최고로 행복하게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키우는 것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그의 부모가 준 사랑은 분명 원기의 자아를 죽였기 때문에 진짜입니다.
하느님은 사탄을 시켜 의로운 욥의 재산, 자녀, 자신의 건강과 명예까지 다 빼앗으십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게 하십니다.
“벌거벗고 세상에 태어난 몸, 알몸으로 돌아가리라. 주께서 주셨던 것, 주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지라.”(욥 1,20)
우리 안에 들어오신 성령은 돈이 없어도, 먹을 게 없어도, 멸시받아도 최고로 행복한 하루를 살 수 있음을 매일 우리에게 일깨워주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창조해주신 분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유혹의 궁극적인 목적은 불만으로 내일을 희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이 순간 충분히 감사하고 행복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 자선, 단식하며 고통을 받는 것이 사순이 아닌, 그런 것을 통해 고통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훈련하는 것이 사순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 자아를 죽이는 하느님이 보내신 불칼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aWHxffXFVuk
1. 오늘은 사순시기의 첫 주일입니다. 우리는 연중시기를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보도를 들으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내려오시며 하늘에서 그분의 신성을 알려주는 메시지가 들려왔음을 알았습니다. 이때 내려오신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공생활을 앞두고 광야에서 하느님께 홀로 기도하시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도 알아야 하겠거니와 그분의 기운을 받아야 하겠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정신을 더욱 명료하고 날카롭게 하시고자 단식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다 보니 사십 주야에 걸쳐, 그야말로 목숨을 건 처절한 고행이 되었습니다.
2. 그런데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정신은 명료해지며 날카로워지셨지만, 육신은 극심한 허기로 시달리셨습니다. 이를 틈타서 악마가 허기를 달랠 수 있는 음식과, 허기에 따라 피폐해진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영광과, 영광에 따라 뒤따라올 수 있는 교만을 부추겼습니다.
3.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일어난 이 두 사건, 즉 세례와 유혹이 사실은 공생활 내내 일어난 현상이고, 이 사건과 현상의 본질을 모두 파악해야 그분의 참 모습과 역할을 깨달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기사와 유혹 기사가 다 일생의 줄거리를 전해주는 이야기를 짐작하게 해 주는 복선인 것입니다.
4. 예수님의 공생활은 3년 내내 하늘이 열리는 과정이었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그분에게 열린 하늘이 믿는 이들 모두에게도 열리는 계기였습니다. 제자가 되려는 나타나엘에게 예수님께서 장담하신 바가 이것이었습니다: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51). 열려진 하늘에서 내려오신 성령은 줄곧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끄심의 핵심은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아들이시고, 그분을 가장 닮은 아들이시니 믿는 이들이라면 모두 그분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닮아야 한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렇게 세례 기사의 메시지는 공생활 내내 적용되었습니다.
5. 세례만이 아니라 유혹도 공생활 내내 예수님을 뒤따라 다녔습니다. 사두가이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존중해 줄 것과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구약의 제사 형식에 따라야 한다고 요구했는데,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 사건으로 이 요구를 행동으로 거절하시자 탄압이 시작되었고 끝내 그들은 그분을 죽임으로 몰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해석해 놓은 율법의 권위를 존중해 줄 것과 자신들과 같은 노선을 걸을 것을 요구했는데, 사사건건 예수님께서 비판하시자 그들은 그분의 기적에서 나타나는 권능도 마귀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험담하거나 그분이 말씀으로 밝히시는 신성도 부인하고자 애쓰다가 끝내 사두가이들과 야합하여 그분을 죽임으로 몰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분이 보이시는 기적의 능력에만 열광하여 억지로라도 왕이 되어 달라고 졸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끈질긴 요구를 피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하시자, 끝내 그들은 사두가이와 바리사이들의 음모가 사악한 요구임을 알면서도 침묵하거나 방관했고, 일부는 혁명당원들의 선동에 못이기는 척 따라갔습니다. 악마의 유혹은 이렇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혁명당원들과 내통하고 있었던 이스카리옷 유다는 공생활 내내 예수님 곁에서 로마와의 대결을 내심 기다리다가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시던 그분이 자신이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않으실 것이 분명해지자 끝내 사두가이와 결탁하여 스승을 배신했습니다. 당대 유다인들의 우상숭배적 처신에 숨겨진 악마의 유혹이 실제적인 죽임의 공포로 나타날 즈음에 예수님께서 고뇌하신 바가 겟세마니 동산 기사에 나타나 있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루카 22,42).
6. 세례와 유혹을 전하는 기사의 복선적 성격은 복음서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과 그들로 인해 이루어진 교회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신앙인의 일생에서도 또 교회의 역사에서도 세례와 유혹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신 성령의 이끄심과 악마의 유혹은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비단 나타날 뿐만 아니라 확대되기도 하고 반복되기도 합니다. 개별 신앙인들의 신앙 역사에 대해서는 각자가 식별할 일이거니와,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만 극히 간단하게 간추려 보면 이러합니다.
7. 20세기 중반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이러한 역사의 교훈을 여실히 보여주었습니다. 공의회에 모인 교부들은 그리스도 신앙이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기 전까지 박해로 순수했던 교회가 공인 이후에 로마 제국의 제도와 권력을 본받으면서 또 다른 제국이 되어 180도로 달라진 역사의 현실을 뼈아프게 반성했고, 역사가들은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천동설을 믿던 교회가 지동설이 과학적 진리로 드러난 후에도 자기중심의 세계관을 고집하고, 구원의 길을 독점한 듯이 다른 종교와 문화를 무시하는 행태를 비판한 것입니다. 심지어 유럽의 백인들은 예수님도 백인으로 묘사했으며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위한 종교라는 전제 하에서 신학을 전개해 왔습니다. 로마 제국의 공인 이전과 이후가 마치 세례와 유혹처럼 다가와서, 공인 이전에는 박해 속에서도 성령의 이끄심을 받았지만 공인 이후에는 권력과 재물과 영예의 유혹을 악마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 여러 나라의 왕정 위에 군림하는 황제가 되었고, 그 권세로 십자군 전쟁도 일으켰으며, 그 권세가 흔들리려 하자 베드로 대성전을 크고 화려하게 짓기도 했고, 이에 반발한 그리스도인들이 떨어져나가자 내부 단속을 위해 더욱 엄격하고 차별적인 교회 내부 질서를 다잡는 바람에 마녀사냥도 일어났고 종교재판도 인권을 해칠 정도로 다반사로 일어났었다는 것입니다.
8.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이런 통렬한 자각에 힘입어 지난 대희년에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역사상 처음으로 이러한 가톨릭 교회의 잘못들을 인류 앞에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참회하였습니다. 그리고 다 함께 새롭게 그리스도께로 나아가자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국 천주교 주교단에서도 신앙이 전래된 이후 민족에게 끼친 누와 잘못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며 참회하는 예를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4년에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에 더하여 쐐기를 박듯이 한국 천주교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주교단 앞에서 천명하였습니다. 악마의 유혹을 받고 있는 현상을 냉정하게 경고하면서 그 대신에 성령의 이끄심을 따르는 교회가 되라고 간절하게 권고한 것입니다. 다음은 한국 천주교회가 받고 있는 유혹에 대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경고한 메시지를 일부 발췌한 내용입니다.
9. “번영의 시대에 떠오르는 한 가지 위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그저 또 다른 ‘사회의 일부’가 되어 버리는 위험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신비적 차원을 잃고,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능력을 잃으며, 그 대신에 하나의 영적 단체가 되는 위험입니다. 이 단체는 그리스도교 단체이며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가진 단체이지만 예언의 누룩이 빠진 단체입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가난한 이들은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자신들의 적절한 역할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이 유혹에 특정 교회들과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크게 고통을 겪어왔습니다. 어떤 사례들에서 이런 교회와 공동체들은 그 자체가 중산층이 되어서 그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가난한 이들이 심지어 수치감을 느낄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영적 ‘번영’, 사목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그런 교회는 더 이상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아니라 오히려 부유한 이들을 위한 교회, 또는 돈 많고 잘나가는 이들을 위한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리고 이는 낯선 일도 아닙니다. 이 유혹은 초대교회 때부터 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째 서간에서 코린토 신자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1코린 11,17).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이 문제를 더욱 강하고 명확하게 제기했습니다(야고 2,1-7). 그는 이들 부요한 공동체들, 부요한 사람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들을 질책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을 배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들이 누리는 생활양식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그들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꺼리게끔 하였고 가난한 이들은 그런 공동체에서 편안하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번영의 유혹입니다.“
10. ”저는 여러분 주교들께서 좋은 일들을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는 지금 여러분을 훈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신앙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확인해야 할 의무를 지닌 한 형제로서, 저는 여러분께 이렇게 말하고자 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여러분의 교회는 번영하는 교회이고 매우 선교적인 교회이며 위대한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악마가 교회의 예언자적 구조 자체로부터 가난한 이들을 제거하려는 이런 유혹의 씨앗들을 뿌리도록 허용되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악마로 하여금 여러분이 부요한 이들을 위한 부요한 교회, 잘 나가는 이들의 교회가 되게 만들도록 허용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여러분의 교회가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는 아마도 “번영의 신학”을 펼치는 정도까지는 아니겠지만,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제대로 되지 못하는) 그저 그런 별 쓸모없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아직 현재 진행형입니다.
-조재형신부-
‘그러자’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과 ‘왜’라는 말을 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번 주일에 ‘인왕산에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이번에는 ‘내려와서 칼국수 먹으러 갈까?’라고 물으면 ‘그러자’라고 대답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상대방이 하는 말에 ‘그러자’라고 대답합니다. 이번 주일에 ‘미술관에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저녁에 중국집 갈까?’라고 물으면 ‘왜’라고 대답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친구입니다. ‘왜?’라는 말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과학, 문학, 예술은 ‘왜?’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말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지금 슬픔에 겨워하는 사람에게, 지금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헤어짐의 아픔을 참고 있는 사람에게는 ‘왜?’라는 말보다는 ‘그러자’라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러자’라는 ‘공감’이 필요합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왜?’라는 질문대신 ‘그러자’라는 응답으로 주님의 수난에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거지 할아버지가 상자에 앉아서 구걸을 하였습니다. 30년 넘게 구걸을 하였습니다. 어느 날입니다. 한 사람이 지나가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앉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할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예전부터 앉아 있던 상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말했습니다. ‘상자 안에는 무엇이 있나요?’ 할아버지는 대답했습니다. ‘글쎄요. 잘 모릅니다.’ 지나는 사람이 말하였습니다. ‘상자 안을 열어보세요.’ 할아버지는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한 번도 상자 안을 열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할아버지는 상자 안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할아버지가 그렇게 원하던 ‘황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원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밖에서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통해서 얻으려고 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영원한 생명은 우리 마음이라는 상자 안에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3가지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저는 재물, 명예, 권력에 대한 유혹보다는 다른 유혹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유혹들입니다.
첫 번째 제게 다가오는 ‘유혹은 다음에 하지’입니다. ‘사랑하자, 내일이 없는 것처럼’이라는 말을 마음에 담아야 하는데 저는 늘 내일을 생각하면서 오늘 꼭 해야 할 일들을 미루곤 했습니다. 유명한 사상가도 자기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너 그럴 줄 알았다.’ 매번 내일로 미루더니 오늘 땅에 묻혔다는 의미입니다. 담배를 끊겠다고 하는 것도, 평일 미사를 가겠다고 하는 것도, 부모님께 전화하겠다고 하는 것도, 사과의 문자를 하겠다고 하는 것도, 다음에 하지라는 유혹에 넘어가곤 합니다.
두 번째는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입니다. 나의 잘못과 허물을 남들에게 떠넘기는 것입니다. 저도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앞의 차가 빨간 불인데 갔습니다. 저도 따라갔습니다. 경찰이 저만 잡았습니다. 앞의 차도 갔다고 말을 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남들도 그렇게 하는데’라는 표현은 나보다 더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을 따라갈 때 사용하면 좋을 것입니다. 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을 따라가면서 그런 표현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입니다. 베드로 사도와 유다 사도는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의 삶은 달랐습니다. 유다 사도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혔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는 안 돼’라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지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겨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죄가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는 안 돼’라는 열등감에 마음을 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뉘우치기만 한다면, 우리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우리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마음으로 믿어 의로움을 얻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을 얻는 우리의 신앙은 우리들의 삶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양승국신부-
심한 식중독에 걸려 호되게 고생하던 때가 기억납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박 일주일간 링거주사에만 의지한 채 단식을 했습니다. 담당 간호사님은 매정하게도 제 침대 앞쪽에 '절대 금식'이란 팻말을 달아놓았지요.
그리고 매서운 눈초리로 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이틀간은 그런대로 견딜 만했습니다만 사흘이 지나면서 정말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매끼 식사 시간은 제게 그야말로 지옥이었습니다.
옆 병상에 누워있는 환자분이 병원밥 투정을 하면서 딱 한 숟가락만 뜬 식판을 물리며 '그냥 내어가라' 할 때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저런저런!'하는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배가 출출해지는 9시 뉴스시간 때마다 통닭이다, 족발이다 몰래 야식을 즐기는 '날라리 환자'들이 얼마나 얄미웠는지 모릅니다. 어찌 그리도 야속한 사람들이 다 있던지요.
당시 제 머릿속은 온통 평소 제가 좋아하던 음식으로 가득 찼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떡라면, 푹 고아서 얼큰한 우럭찌개, 매콤한 갈치조림, 그리고 소주 한 잔. 닷새가 지나가면서 헛것이 다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가져온 꽃바구니는 싱싱한 사과가 가득 담긴 과일바구니로 보이면서 입에 침이 다 돌았습니다. 창밖에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니 달콤한 솜사탕 생각이 나더군요.
인간 생리구조상 하루 세끼 식사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입니다. 단식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에 통제를 가함으로써 나름대로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다이어트나 건강진단, 질병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단식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단식은 하나의 목적성을 지닙니다. 사순시기 동안 그리스도 신자들은 작은 몸짓이지만 단식을 통해서 예수님 수난에 상징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40일간 단식해 오신 예수님께서 악마로부터 유혹받으시는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지니신 하느님이기도 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와 똑같은 육체 조건을 지니셨던 인간이셨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고통과 배고픔을 똑같이 겪으셨던 참 인간이셨습니다.
휴가지에서 40일은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겠지만, 단식하면서 보내는 40일은 정말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허기가 져서 거의 탈진상태에 도달한 예수님 앞에 악마가 나타납니다.
갖은 감언이설과 달콤한 유혹거리를 미끼로 내세우며 예수님을 현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모든 유혹들을 의연히 이겨내십니다. 허탈해진 악마는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악마의 유혹 앞에 끝까지 굴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버지께 대한 항구한 충실성과 철저한 순명, 아버지를 향한 지속적 신뢰와 끊임없는 자아포기, 그 결과가 유혹의 극복이란 결실을 가져왔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아버지와 연결된 끈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아버지 현존 안에 뿌리내림으로 인해 우리는 강합니다. 세상 유혹 앞에 설 때마다 예수께서도 유혹을 받으셨음을 기억합시다. 아버지께 대한 간절한 기도를 통해 그 모든 유혹들을 물리치셨음을 기억합시다.
우리가 걸어가는, 사순절이라는 광야 여정에는 악마에게서 유혹도 많겠지만 그 여정이 든든하신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나날이 되시길 빕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방법」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셨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에게 부활의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 머무는 동안 악마의 유혹을 받으셨고 그 유혹을 물리침으로써 우리에게 악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이 시간 유혹에 관해 묵상하는 가운데 악을 지배할 수 있는 주님의 힘과 능력을 입으시길 기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무 근심걱정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떤 유혹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모두가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근심걱정이 없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도 악의 유혹을 받으셨고 더군다나 악의세력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음기회를 노리며”(루카4,13)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도 이러한 어려움이 생겼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있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겠습니까? 그러므로 근심 걱정이 없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유혹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키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근심과 곤란이 없으면 자만하는 마음,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 사치한 마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따라서 근심과 곤란으로서 마음의 회초리를 삼아 살아갈 수 있는 삶의 지혜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한 젊은이가 여행을 떠났다가 다 허물어져 폐허가 된 성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안내문을 보니 그곳은 한때 그 권세와 덕망이 사방천리를 갔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궁금해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청소하는 할아버지 한 분이 그 답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성이 이렇게 된 것은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했기 때문이란다.” 젊은이가 놀라서 “네? 그건 잘한 일인데 어째서?” 그러자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선을 좋아 했지만 실천하지 못했고, 악을 미워했으나 제거하지 못했다네!” 그렇습니다. ‘나쁜 일은 멈추고 좋은 일만 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지만 실천하기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유혹을 물리치는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2,18). 그러나 그 길을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겪은 첫째 유혹은 생계문제 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쓰리고의 문제입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고)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고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면 무엇보다도 돈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돈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마더데레사 수녀님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여러분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분명, 빵이 중요하지만 빵보다 사랑이 중요합니다. 물질적인 것 위에 영적인 것이 있습니다.
두 번째 유혹은 권력에 대한 유혹입니다. 사탄을 경배하면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성경말씀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상대방을 더 많이 지배하고픈 마음,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불의와 타협하고도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순교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많은 성인 성녀들이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세상의 부귀영화를 버렸습니다. 박해 시절에 그들이 세상과 타협했다면 목숨을 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지상의 조그마한 유익함 때문에 하느님을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정치에 발을 디뎠던 분이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치를 하려니 “얼굴에 철판을 깔아야 하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야 하며 소신이 없어야 하더라.” 만약 우리가 불의와 타협한다면 그것이 사탄을 경배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유혹은 명성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성경의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고 받쳐주리라.’ 하는 말씀을 들먹이며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루카4,9).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살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의 능력인 기적을 남용하라’는 요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의 눈에 띄고 인정받으며 찬사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일상의 십자가는 남몰래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생색내기의 유혹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부, 권력, 명예의 3가지 유혹을 보았는데 결국 예수님께서는 모든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물리쳤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에페소서 6,10. 17절을 보면 “주님 안에서 그분의 강한 힘을 받아 굳세어지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떤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히브4,12). 따라서 말씀에 나를 비추어 새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을 보면 “악마는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4,13)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유혹은 끊임없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혹이 없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라 유혹을 이겨낼 힘과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 힘과 능력이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혹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유혹을 통해 인격을 연마하고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증명할 기회로 삼으십시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지상 순례생활에는 유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유혹을 통해서 이뤄지고, 유혹을 당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부와 권력과 명예의 유혹을 받지 않을 만큼 거룩하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찌 보면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 큰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세상과는 동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잘 못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만큼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더 빛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밝히 비춰야 합니다. 유혹과 시련에서 지면 보통인물이 되고 유혹을 이기면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유혹이란 넘어가면 달콤한 죽음이요, 넘기면 쓴 보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죽음의 문턱에서도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태27,40) 하고 말하였습니다. 율법학자들도 “다른 이들은 구원하였으면서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군. 이스라엘의 임금이시면 지금 십자기에서 내려와 보시지. 그러면 우리가 믿을 터인데.”(마태27,42)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최후의 순간에 십자가에 같이 못 박힌 강도까지도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시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루카23,39)하며 조롱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시며 숨을 거두셨습니다. 결국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우리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한 백인대장과 그와 함께 예수님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말하였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27,54).
예수님의 처신이 바보같이 보였지만 결국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러저러한 소리가 나면 반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확인해서 콧대를 꺾어주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유혹의 순간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떤 유혹도 주님의 힘을 입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 유혹을 통해 내 자신을 볼 수 있고 더 큰 성숙의 기회로 만드는 은총의 날들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유혹>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유혹이 가득한 광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면서 유혹을 물리치려고 애쓸 때,
그 광야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 그 기간이 끝났을 때에 시장하셨다. 그런데 악마가 그분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루카 4,1-4)”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악마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라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오복음을 보면,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4,4).
두 복음서의 기록을 합해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버리고
빵을 선택하여라.”가 악마의 유혹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마의 말을 겉으로만 보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아라.” 라는
유혹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런 유혹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내가 나라는 것을 너에게 증명할 이유가 없다.” 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빵도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더 필요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빵이 필요하지만,
그 생명은 지상에서의 육신의 생명일 뿐입니다.
‘영혼의 생명’을 유지하려면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ㄱ).”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마의 첫 번째 유혹을 물리치신 일은,
영혼보다 육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유혹을 물리치신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지니신 신적 특권을 포기하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신 일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는 모범을 보이신 일입니다.>
그런데 사실, 사람의 ‘몸’도 하느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러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몸이 병에 걸렸다면 치료해야 하고,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의 ‘몸의 병’을 많이 고쳐 주셨고,
또 사람들의 배고픔을 당신이 먼저 걱정하셔서(마태 15,32)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마태 15,36-37).
그러나 ‘몸’에 대해서만 집착하지 말고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힘쓰라고 가르치셨습니다(루카 9,24).
(몸의 건강도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영혼을 잊어버릴 정도로 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한순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며, 그분께 말하였다. ‘내가 저 나라들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내가 받은 것이니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루카 4,5-8)”
여기서 악마의 유혹은 “나에게 경배하고 나만 섬겨라.”입니다.
세속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말은 ‘미끼’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니” 라는 악마의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것도 악마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하는 이에게 주는 것이오.” 라는 말과 “당신이 내 앞에
경배하면 모두 당신 차지가 될 것이오.” 라는 말도 거짓말입니다.
악마의 것이 아니니 악마가 자기 마음대로 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세속의 권세와 영광을 차지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마에게 경배하고 악마를 섬기는 일을 해서라도
그것을 차지하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악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갖고 싶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모습이
바로 악마를 섬기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아무것도 차지하지 못하고,
악마와 함께 멸망하게 될 뿐입니다.
사실 세속의 권세와 영광 자체가 허무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경배하고 하느님만 섬기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되고,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자 악마는 예수님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그분께 말하였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여기에서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너를 보호하라고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 하신 말씀이 성경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9-13).”
여기서 악마의 유혹은 “하느님을 시험해 보아라.”입니다.
이 유혹은, “너는 정말로 하느님께서 항상 너를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믿는가?”
라는 질문이고, 많은 신앙인들이 자주 마주치는 의문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내 기도를 듣고 계시는가? 정말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끈질기고 간절하게 기도하는데도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기도가 이루어지기는커녕 더 나쁜 상황이 되기만 할 때, 그런 의문과 의심이
생기는데, 바로 그때가 악마가 우리를 유혹하려고 노리는 때입니다.
구약성경 욥기를 보면, 모든 것을 잃은 뒤에 욥의 아내가 욥에게,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그 흠 없는 마음을 굳게 지키려 하나요?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 버려요(욥 2,9).” 라고 말하는데, 이 말은 ‘심각한 유혹’입니다.
그런데 욥은,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 2,10)” 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나쁜 것도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라면, 우리 눈에 나쁜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라는 뜻입니다.
의심이 들 때에는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굳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루카 4,1-2)
-한상우신부-
살아있으니
삶의 광야가
있다.
삶이란
안전지대를
찾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광야를
은총으로
받아들이는
복음의
삶이다.
고향 산천에
붉은 화마가
또 아프게
지나갔다.
아직도
광야처럼
산불은
현재
진행중이다.
예수님께서도
광야를
향하신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일을
시작하신다.
광야가
사람을
만든다.
사랑과 유혹을
깨닫게 하는
사람의
광야이다.
광야가
우리의 욕망을
비추어준다.
회개로
정화되어야 할
우리들 욕망이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자신을
파괴하지 않는다.
광야안에도
사랑이 있고
광야밖에도
사랑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멈추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빵만 있고
말씀이 없다면
소유만 있고
나눔이 없다면
기도만 있고
실천이 없으면
삶은 선물일 수
없다.
사순은 광야가
가리키고 있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다.
하느님과의
만남으로
살아있는
사랑의
시간이 된다.
사랑은
사랑으로
우리자신을
사랑이
되게한다.
삶 안에
광야가 있고
사랑 안에
고통이 있다.
광야에서
삶의 길을
만난다.
말씀 안에
유혹을
봉헌하는
시간이다.
말씀과
유혹 사이에
사람의 삶이
있다.
유혹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먼저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이시다.
오직
하느님만을
만나게 되는
우리자신의
광야이다.
유혹은
하느님 사랑을
이길 수 없다.
하느님과
함께 하는
광야이다.
말씀 나누기 - 사순 제1주일-악마의 반 생태적인 유혹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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