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8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오 6,7-15)
Thy Kingdom come,
thy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입에서 나가는 말은 반드시 주님께서 뜻하시는 바를 이루고 만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하시며,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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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학생이 미국에 유학 갔습니다. 큰 꿈을 품고서 유학하러 왔지만, 언어와 문화의 차이로 힘들 수밖에 없었지요. 너무 힘들어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 중에 타고 가던 배가 뒤집혀서 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수영을 전혀 하지 못하는 이 학생을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마침 저 멀리에 지나가는 사람이 보였습니다. 그는 힘들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Would you mind…. helping me?”(혹시 괜찮으시다면…. 저를 살려주시겠어요?)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서도 예의를 차려 정중하게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 말을 듣고서 과연 지나가는 사람이 자신의 걸음을 멈추고 도움을 줬을까요? 말을 들었으면 도움을 주기 위해 왔겠지만, 급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로는 관심을 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같이 빠진 다른 사람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Help me!!!!”(살려주세요!!!)
그제야 지나가는 사람은 이 목소리에 반응해서 도움을 주었습니다. 위급할 때는 정중한 말보다 간단하고 간절함이 표현되는 말이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 주님 앞에 최대의 예의를 갖추고 기도해야 할까요? 때로는 간절한 마음은 정중함을 뛰어넘습니다. 이런 간절함이 먼저 필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바로 우리가 가장 많이 바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그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은 하느님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였습니다.
모세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였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어서, 그들은 ‘야훼’, ‘아도나이’ 등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면서 근엄하게 통치하는 임금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이루어짐으로 하느님과의 통교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가까워졌음을 ‘아버지’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기도는 바뀌어야 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 계신다며 형식적인 ‘빈말’을 되풀이했던 기도의 모습에서, 마음을 다해 하느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기에, 우리 역시 하느님처럼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어떠한가요? 간절한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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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iopf5EQvA24
오늘 복음은 ‘주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시며 ‘하느님을 바꾸려고 기도하지 말고 자신이 바뀌려고 기도해야 함’을 먼저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내가 바라고 청할 때 나는 나에게서 벗어나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가 하는 주님의 기도는 건성일 때가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묵상하지 않고 그냥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변할 수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변하고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변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주님의 기도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와한 비디오’에 클립으로 만든 ‘무게만 25kg이 넘는 갑옷을 입고 사는 아주머니’ 사연이 나옵니다. 아주머니는 집 안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누군가가 흘려보내는 전자파 때문에 온 집안 집기들을 비닐로 싸놓고 자신은 클립으로 갑옷을 만들어 입고 살아갑니다. 예전 치마를 입을 때 정전기가 날 때 클립을 꽂아두었더니 정전기가 줄어든 것에서 이런 아이디어를 낸 것입니다. 그런데 조사를 해 보니 집 안에 전자파는 다른 집보다 적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왜 이런 피해의식을 지니고 사는 것일까요? 전문가는 아주머니가 집 자체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전에 한 번 만나주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 한 남자가 스토커처럼 아주머니를 괴롭힌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시간이 두려움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집 안에서 안 좋은 전자기파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전문가는 만약 힘들 때 누군가가 함께 있어 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자신을 혼자 방어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어렸을 때도 혼자 방치되었던 기억이 있으리라 추측합니다.
동영상을 보니 아주머니는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십자고상도 나오고 성모상도 나옵니다. 성당에서 미사보를 쓰고 찍은 사진도 보이고 피아노 치는 모습, 그리고 책도 읽고 기도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할까요? 어쩌면 분명 주님의 기도만 제대로 바쳤어도 이런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며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식하고 죽음에 대해 덜 무서워해도 되었습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며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만 생각하여 자기 죽음에 대해 걱정할 시간을 줄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며 육체의 생존보다 마음의 기쁨과 평화를 청하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믿게 됩니다.
그리고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며, 클립으로 된 무거운 갑옷이 아닌 영적인 힘을 청하게 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며 자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며, 다시는 아버지를 두고 내 생존 문제로 두려워하지 않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결국 “악에서 구하소서”라며 자아의 압제에서 해방됩니다. 이렇듯 주님의 기도만 의미를 되새기며 바쳐도 하루하루 분명히 달라집니다.
추측건대 이분은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자신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주로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에는 관심을 둘 에너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생떼를 쓰는 궁극적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 굳게 믿고 싶어서 부모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부모에게서 나왔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부모가 자신들의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채우고 싶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자녀는 자기 욕구에만 집중하여 부모의 뜻에 귀를 막습니다. 그렇게 자기만 아는 아이로 자랍니다.
아이가 이제 자신이 부모의 자녀임을 더욱 믿게 만들기 위해서는 동생의 육아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 ‘오은영쌤 육아지침서’에 ‘질투 폭발, 동생 스트레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누나는 남동생이 태어나자 질투 폭발입니다. 엄마는 딸을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지만, 딸은 모두의 관심이 동생에게 간 것만 같아서 서럽습니다. 그래서 생떼를 부립니다.
이때 오은영 박사의 꿀조언은 ‘동생 육아에 누나도 참여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인형을 사줘서 조금씩 동생을 안고 다독이는 연습을 하게 하고 조금씩 엄마가 보여주는 쉬운 일부터 돕도록 하는 것입니다. 누나는 그렇게 동생의 육아에 동참하며 자신도 가족의 한 일원임을 깊이 인식하게 됩니다. 만약 친딸이 아니면 동생을 잘못 건드려 다치게 될까 봐 동생에게는 손도 못 대게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형제를 사랑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육아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자신도 부모의 자녀임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을 사랑하게 하시는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한 형제로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 굳세게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를 다 알려주시고 마지막에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14)라고 되풀이하십니다.
이웃은 나의 형제들입니다.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느님 육아에 동참함으로써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임을 더욱 굳게 믿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오는 평화 때문에 이제 나의 욕구로 생떼를 부리기보다는 감사하여 주님의 뜻에 관심을 둡니다. 이렇게 주님의 기도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청하며 진정 그리스도처럼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기도가 이웃 사랑으로 향하지 않으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흐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목적으로 기도할 때야만 내가 하느님 자녀라는 확신이 더 커지고, 그러면 오직 주님의 기도 말 안에 자녀가 청해야 할 모든 내용이 다 들어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들을 주님께 청하면 그 주님의 뜻이 나의 것이 되어 그분의 본성대로 변화합니다.
기도를 바칠 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내 뜻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내 뜻만 청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 자녀인지 아닌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녀의 믿음은 내가 이웃을 사랑할 때 더욱 확실해집니다. 따라서 자신 안에 갇혀 외로운 사람의 기도는 주님께 절대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뜻을 이루고야 만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WACGQy2JzU
우리가 미사에서 독서와 복음으로 선포되는 하느님의 말씀에 주목하는 이유나,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찬례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이유는 말씀과 성찬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루신 역사적 업적에 대한 증언이거나 이를 기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과 신약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오랜 세월 동안을 거치면서 수도 없이 많은 기록자들이 오로지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의 감도를 받아 쓰여진 것입니다.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일어난 이후에 쓰여진 인간의 기록물 중에서 성경보다 정확하고 진실한 기록은 없습니다. 성찬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성사이므로 그 품위가 종교적으로 최상위에 올려져 있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한결같이 봉헌되어온 이 성찬은 성체성사로서 한 치의 변경도 없이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그대로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그분을 기억하고 그분의 업적을 기념하는 거룩한 기준이요 기점이 되어 왔습니다. 이 말씀과 성찬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 안에로 현존하여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성령의 작용 또는 성령의 이끄심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 이사야는 자연현상에 빗대어 매우 인상적인 표현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고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 55,10-11).
하느님의 말씀이 돋아나게 할 싹과 맺을 열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그 나라에서는 하느님의 이름이 빛나게 마련이고 하느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당신을 따라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섭리를 먼저 전제하고 나서 생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해 하는 노동도, 우리가 서로 맺는 인간관계도 이 기준에 따라서 행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의 역사성이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리의 생명은 하느님께서 주도하신 업적의 결과이며, 그것도 무상으로 주신 선물인가 하면, 우리가 달라고 청하지 않았어도 먼저 주신 은총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주도성과 선물의 무상성 그리고 은총의 선행성이 하느님께서 행하신 업적의 특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인생은 물론 인류의 역사, 그리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의 질서와 문명이 모두 이 전제 하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인간의 몫입니다.
사순시기는 평소에 우리가 자칫 잊어버리고 살던 이 진리를 새삼 상기하는 때입니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자주 허물을 저지르는 우리가 이 세상 질서와 생명 질서의 원점이 되는 진리를 상기하면 주님의 기도 후반부를 실천으로 채우기가 조금은 더 쉬워질 듯합니다: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이 기도를 가르쳐주시면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도, 기도는 빈 말을 되풀이하면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무릇 종교는 이를 신봉하는 이들에게 절대적인 양심을 요청하며 이 속에서 하느님의 소명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기본질서입니다.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하느님의 소명을 중시하지도 않은 채 빈 말로 기도를 해 봐야 그 어떠한 변화도, 단 한 사람의 성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이 종교 현실의 한 단면이기 때문에 하느님과 종교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공동체의 시련이나 공동선의 위기에 대해서 선한 영향력에 이끌리는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정작 그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결과인 줄을 모르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올바르게 하느님께 이끌리도록 하자면, 종교인들이 먼저 절대적인 양심의 요청을 소홀히 하지 말고 귀하게 들어야 할 것이며, 그 양심의 소리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명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양심의 절대적 소리를 듣고 이를 통해 하느님에게서 들려오는 소명에 충실하는 일, 이것이 교리 교육이나 입교 절차보다 더 중요하게 선행되어야 하는 선교적 노력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선한 영향력은 민족 사회에게로 퍼져나가고 있는 반면에,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야 할 신앙의 정체성은 흔들리고 있는 지금의 이 종교적 형국에서 다시 한 번 하느님의 역사성이 지닌 엄중함을 강조한 이사야 예언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조재형신부-
산보를 하면서 가까이 하는 것이 있습니다. 블루투스 이어폰입니다. 2년 정도 사용하고 보니 오른쪽 이어폰이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어폰을 청소해 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냥 흘려듣다가 이어폰을 꺼내서 내부를 보았습니다. 오른쪽 이어폰에는 작은 이물질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물질을 꺼내고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른쪽에도 선명하게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어폰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가끔씩 이어폰을 청소해 주지 않았던 저의 문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서 2번이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시편 137장은 유배를 떠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배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가 강한 나라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배를 떠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회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유배의 원인은 자신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의 신을 섬겼고,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불로 금을 단련하듯이,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단련시키신다고 생각했고, 유배지에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70년간의 유배생활을 마치고 그리운 고향 땅으로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교포사목 성당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인사이동에 따라서 임기를 마치고 신부님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오셔야 하는데 비자문제로 3개월 정도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공백을 메워줄 신부님을 구하는 과정에서 혼동이 있었다고 합니다. 시간이 되어서 신부님은 떠났고, 당장 주일 미사를 집전해 줄 사제를 구하지 못해서 봉사자들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갈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미 다른 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 드리고 있어서 어려웠습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서 미사를 도와드릴 신부님을 구했습니다. 박사학위 준비로 바쁜 신부님께서 기꺼이 시간을 내 주셨습니다. 걱정과 근심을 가득 안고 왔다가 환한 웃음을 머금고 돌아가는 분들을 보니 저도 기뻤습니다. 폭풍우가 없는 바다는 없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나무도 없습니다.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들은 분명 있습니다. 본당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본당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본당을 분가하는 과정에서 의견의 대립과 갈등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럴 때도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공동체가 단합할 수 있다면, 공동체가 기도할 수 있다면 위기는 새로운 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원인을 밖에서 찾기 보다는 먼저 내 안에서 찾아보면 좋습니다. 어둔 방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환한 바깥에서 찾으면 결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지 마라.’입니다. 풍랑에 배가 흔들릴 때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함께 계셨음에도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오실 때입니다. 제자들은 유령인 줄 알고 모두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을 따라서 물 위를 걷다가 두려움에 물에 빠지는 베드로에게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움과 걱정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없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다 채워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독서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가련한 이 부르짖자 주님이 들으시어, 그 모든 곤경에서 구원해 주셨네.”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에게 위기는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될 것입니다.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주님의 기도와 함께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깁시다!
-양승국신부-
예수님 시대 당시 이스라엘에 인접했던 근동 지방 이민족들이 바치던 기도는 엄청나게 요란스럽고 장황했습니다. 복잡하고 떠들썩했습니다. 수십, 수백 가지의 신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치며 그들을 ‘기도의 현장’으로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들에게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몇 시간이고 반복해서 신들을 압박하고 졸라대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신들이 귀찮아서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청을 들어준다는 억지스런 기도 방법이었습니다.
이런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 이방인들의 기도 스타일이 은연중에 유다 백성들 사이에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접한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황당하셨을 것입니다. 어떤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협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시험해보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조롱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이 땅에 육화하신 하느님의 분신인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복잡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아주 단순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복잡하고 수많은 율법 조항들을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란 단 한 문장으로 압축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단순성은 기도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오 복음 6장 7~8절)
우리가 잘 되기만을 간절히 염원하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희망, 우리의 모든 근심 걱정, 우리가 매일 지고 가고 있는 고통과 십자가를 환희 들여다보고 계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좋은 길, 결국 구원과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고자 애를 쓰시는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데 줄줄이 잡신의 이름을 불러낼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이 계시는 데 수백 가지 걱정에 시달릴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좋으신 주님의 손길에 우리 인생 전체를 온전히 맡기는 일, 그분 사랑과 자비의 손길에 우리 삶 전체를 봉헌하는 일이야말로 참된 기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하느님께서 가장 기쁘게 받으실 기도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만드셔서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기도입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바치게 되는 주님의 기도를 올리는 순간마다, 우리의 삶, 우리의 의지, 우리의 사랑을 그분께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기도할 때 ~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이영근신부-
우리는 '재의 수요일'에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통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어계신 아버지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드러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사순절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말씀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곧 기도를 통한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기도할 때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마태 6,7)고 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고 말씀하시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기도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무엇보다도 '아빠, 아버지' 면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를 향하는 벌어지는 일입니다.
'아빠, 아버지' 라 부르는 자녀로서 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곧 인간인 저희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인 당신의 반열에 들게 하십니다.
곧 우리를 하느님 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시편 82,2)라는 시편 작가의 노래를 실현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특전을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을 통하여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이 엄청난 영예를 선사받음으로써 동시에 자녀로서의 삶이 소명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들로서의 삶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 됩니다.
그 일은 다름 아닌 아버지께서 생명의 빵으로 선사하신 당신 아드님 그리스도를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아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일이신 '용서'하는 일을 저희도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시련이나 '유혹'이나 '악'에서도 자신이 스스로 구원자가 되려 하지 않고 아버지께 의탁하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신 아버지께 신뢰를 두며, 그것을 제거해 달라거나 없애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아버지를 향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우리가 가야 하는 길은 오로지 자녀로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아들의 길을 가는 일입니다.
주님!
길이신 주님을 찬미하며 아빠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
아빠, 아버지!
무엇을 청해야 할지를 알게 하소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소서.
진정 바라야 할 것을 바라게 하소서.
알아야 할 바를 알게 하시고, 사랑해야 할 것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떤 상황에서나 무슨 일에서나 아버지를 향하게 하소서.
아멘
「기도를 하면할수록 하느님을 알게 됩니다」
-반영억신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기도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누군가가 기도해 준다고 하면 마음의 위로를 받습니다. 본인은 기도에 소홀히 하면서도 남에게는 기도해준다고 말하고 또 기도해 달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기왕 기도할 바에야 효과 있는 기도, 올바른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다. 그저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되는 기도, 열매를 맺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빈말을 되풀이 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6,7-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청하기도 전에 알고 계신다니 청하는 바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야 하겠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기도의 본질적 요소는 많이 생각하는 데에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 기도란 사랑의 행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더 많이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잘 살아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사랑함으로써 사랑자체이신 하느님과 잘 통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묵주기도, 9일기도, 15기도, 33일 봉헌기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도등등 성인 성녀들이 즐겨 봉헌하였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 기도에 따르는 삶의 쇄신과 실천 없이 목표한 바를 채우기에 급급해 하면서 꼭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서 얻는 그 댓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면 할수록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께 나를 맡기게 됩니다.
루이 에블린은 “사람에게 비는 하느님”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열심을 다해 공덕을 쌓고, 많은 것을 청하지만 실제로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구원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기를 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먼저, 더 많이, 더 깊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한상봉). 그러므로 구하기도 전에 우리의 뱃속까지 환히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기도가 들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 이사야서 말씀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고 말하였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들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14,14).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 의심하는 사람은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주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생각을 말아야 합니다”(야고 1,6-7). 나보다 나를 더 환희 아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주시지 않고 더 좋은 것을 당신께서 주시고자 하는 때 당신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주심을 믿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올바른 기도, 주님의 기도』
-송영진신부-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니 그들을 닮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7-8).”
여기서 ‘다른 민족 사람들’이라는 말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상 숭배자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빈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는 듣지 못하는 우상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에 ‘빈말’이고,
올바른 신앙 없이 말만 많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빈말’입니다.
<제물을 바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은 제물을 많이 바치기만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종교 행위를, ‘신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일’로 생각하는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그들을 닮지 마라.”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기도는 하느님을 상대로 흥정하는 일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상대로 거래를 하는 일이 아닙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인간에게 무슨 대가를 요구하시지 않고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알고 계신다.”는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다.”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왜 하는가?
기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기 위해서 합니다.
신앙생활은 왜 하는가?
우리는 은총을 받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을 이미 받았으니까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이미 받은 은총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주신 은총 속에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 너희가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면,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태 6,9-15).”
‘빈말’의 반대는 ‘참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참말’의 모범으로 가르쳐 주신 기도문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기도문의 형식이나 표현이나 순서보다
기도문 안에 들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 중요합니다.
1) 기도는 나를 사랑하시고, 내가 사랑하는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입니다.
하느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사랑이신 분’입니다.
그 하느님의 사랑은,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시는”(마태 18,14), 그런 사랑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에 첫 번째로 할 일은
하느님께서 나를 극진히 사랑하신다는 것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내가 잘되기만을 바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2)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소망하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후반부의 기도와 따로 떨어져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사실상 같은 기도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은,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죄를 짓게 만드는 유혹도 없고,
‘악’도 없습니다.
3) 아무 생각 없이 습관적으로 바치면, ‘주님의 기도’도 ‘빈말’이 됩니다.
‘주님의 기도’는 행동으로 실천해야 할 ‘신앙생활 지침’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이 일용할 양식을 서로 나누고, 이웃을 용서하고, 악에 맞서 싸워서
그것을 물리치는 일을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위해서 당연히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리고 그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주님의 기도’의 기도문 순서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인간의 바람’보다 ‘하느님의 뜻’이 우선이다, 또는 ‘하느님의 뜻’의 실현이
먹고사는 일보다 먼저다, 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행복’을 따로 구분해서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의 기도문의 순서는
중요도의 순서가 아니고, 어떤 일을 먼저 하느냐의 순서도 아닙니다.
다 똑같이 중요하고, 전부 다 동시에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만일에 중요도에 따른 순서라면, 먹고사는 일이 용서보다 더 중요한 일인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기도’의 기도문의 순서는, 하느님께 기도를 바칠 때에
‘하느님 찬미’를 먼저 하는 전통적인 순서를 따른 것일 뿐이고,
순서 자체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4)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용서’를 강조하시는데, 이 말씀은 앞의 5장에 있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마태 5,44-48).
우리가 모두 ‘원수 같은 사람’도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완전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이룰 수 있습니다.
(개인의 일로 좁혀서 말하면, “그렇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두가 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곳에는 ‘원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세상을 그런 세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5) ‘주님의 기도’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라는 뜻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호소’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소망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 ‘뜻’에 따라 사람들이 모두 구원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는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살면서,
서로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용서함으로써,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주님의 간절한 바람을 나타내신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바람은 곧 모든 신앙인의 바람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한상우신부-
기도의
자녀들이다.
주님의 기도로
마침내
기도에 눈 뜨는
우리들 삶이다.
주님의 기도로
하느님 사랑이
열린다.
오늘을
이끌어 가는
주님의
기도이다.
기도는
일회성이
아니다.
기도는
생활이다.
생활과 기도는
분리될 수 없다.
기도로
자라나는
우리들 삶이다.
삶의 출발은
기도이다.
기도로
이루어 나가시는
주님이시다.
기도로
주님을
닮아간다.
늘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기도로
용서를
배운다.
우리의 인생이
주님의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가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주님의 기도로
인생 여정을
걸어간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는 마음과
삶을 주님께
드린다.
기도 안에
주님과
우리가
함께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악에서
구하소서 라며
정성들여
기도드린다.
빈 기도 대신 빈 마음
-김찬선신부-
사순 시기 회개의 실천 중에서 어제는 자선에 대해서 얘기한 다음
오늘은 기도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그런데 독서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 얘기하고,
복음은 인간이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정 기도입니다.
아오스딩 성인이 기도는 하느님과 대화라고 했는데 바로 그거지요.
대화란 쌍방이 얘기를 나누는 것이니
우리가 진정 올바른 기도를 한다면 나의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을 반드시 들어야 하고 들을 뿐 아니라 경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내 말만 하고 경청은 아니 하지는 않는지요?
경청을 하더라도 하느님 말씀 먼저 듣고 내 얘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얘기 먼저 하고 하느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닌지요?
사실 우리의 많은 기도가 이런 식입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가 아니라
'주님, 간절히 청하니 제 기도 굽어들으소서.'라고 하거나
'간절히 청하오니 어서 빨리 들어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가 사순절에 회개한다면 기도에 있어서도 회개해야 합니다.
말하자면 <기도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어서 빨리 저의 기도 들어주소서.'라고만 하던 내가
'주님, 말씀하소서. 당신 종이 듣나이다.'로 바뀌는 겁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 무디게 가지지 말라"는
사순 시기 성무 일도 초대송 후렴처럼 주님의 말씀이 들리면 언제고
즉시 들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대기하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떠드는 것보다 듣는 즐거움이랄까 기쁨이 있어야겠지요.
자기 혼자 싫컷 떠들고, 그러고나면 허전하던 사람이 듣는 즐거움과 기쁨을
발견한 것처럼 하느님 말씀 듣는 것이 그렇게 달콤하고 맛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한순간에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랫동안 빈 기도와 헛된 기도를 해오던 내가 앞서 본 것처럼
<기도 허무>를 체험하다가 어느날 문득 허무한 마음에
하느님 음성이 들리는 놀랍고도 달콤한 체험을 거쳐야 합니다.
떼를 쓰고 달라고 청했을 때는 들어주시지 않는 것만 같았는데
마음을 비우고 나니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주님께서 들어주시는,
거저 받은 체험 곧 은총 체험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처럼
빈 기도를 하는 대신 빈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샅샅이 살피시고 나를 다 알고 계시는 주님,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을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주님,
그 주님을 체험한 다음 이제 마음을 비울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https://blog.kakaocdn.net/dn/pF8nA/btqQ0PG6aOz/UDuWeXSP91LjxbotLRQ6l0/img.jpg)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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