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0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7-12)
Do to others whatever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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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에스테르 왕비는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구하는 기도를 바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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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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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유가족들은 진상규명을 외치며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했습니다. 그때 이들 앞에서 피자 파티를 열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가족이 벼슬이냐!”면서 유가족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습니다.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불순세력’이라며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했습니다.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그들에게 가식적이라도 위로해주면 안 되었을까요? 이때 아픔을 주는 ‘솔직’이라면, 아픔을 주지 않는 ‘가식’이 더 낫다 싶었습니다. 아픔을 주는 ‘솔직’보다 ‘무관심’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종종 스스로 솔직하다며 “나는 뒤끝 없는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말로 솔직할지는 몰라도 “저는 전혀 배려하지 않는, 사랑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을 위한 것이라면, 또 위로와 힘을 주는 것이라면, 가식이라도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더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즉, 하느님 나라를 열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악인과 선인을 가리는 심판이 있겠지만, 주님의 사랑으로 인해 누구나 이 나라 백성이 되는 자격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늘 뛰어넘습니다.
우리는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대신 돌을 주지 않으며,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주지 않습니다. 하물며 사랑 가득하신 하느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를 결코 나쁜 길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늘 간곡히 기도해야 한다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그런데 기도에는 사랑의 실천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주님께서 제일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를 주님께서는 황금률을 통해 가르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
솔직과 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실천 측면에서 바라보면 지금 해야 할 것이 분명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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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은 상처는 모래에 기록하고, 받은 은혜는 대리석에 새겨라(벤저민 프랭클린).
무엇이든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받는 가장 확실한 방법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02DclfYL1Hw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라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4z9bX7MoPxk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도가 되어 복음을 잘 선포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은 사도들만이 아니라 신앙인들 누구라도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귀담아 들어야 할 권고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권고의 대전제는 진복팔단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행복을 얻기 위해 사랑을 실천하고자 하는 이에게 들려주는 비결인 것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전제하신 바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고 들으면, 어떤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다고 하는 매우 무책임한 만병통치약 같은 광고로 전락할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대목을 루카 복음사가는 자신의 복음서에도 삽입하면서 이는 성령을 뜻함이라고 명기해 놓았습니다(루카 11,13). 성령을 받으면, 그 이끄심에 의해서 무엇을 청해야 하고 무엇을 찾아야 하며 무슨 문을 두드려야 하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렇듯 성령의 이끄심에 의한 올바른 청원 기도는 청하는 대로 받고, 찾는 대로 얻을 것이며, 문을 두드리는 대로 열릴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일깨워주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권고에 이어 황금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역시 사랑의 이치에 관한 진리로서,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라는 것입니다. 그 최대한은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먼저 남에게 해 줄 것이며, 그 최소한은 남이 우리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도 남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자는 자기 희생이 필요한 영성이라 할 것이고, 후자는 남에 대한 배려가 요구되는 예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전자의 방식으로 하기는 어렵겠지만, 가까운 가족 및 지인들이나 사도직에서 주어진 이웃들에게는 이러한 자기 헌신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후자의 방식으로 배려해야 하고 그러한 윤리의 최소한이 법률 규정일 것입니다. 그래서 준법정신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태도가 됩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에스테르는 일찍 세상을 떠난 부모 대신에 모르도카이의 손에서 자라났다가 페르시아 제국 크세르크스 임금의 왕비가 되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그가 유다인 혈통이라는 사실은 임금이 모른 채였습니다. 그러다가 제국의 2인자인 하만이 유다인 민족을 모두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으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를 임금에게 고해달라는 당부를 수양 아버지 모르도카이에게서 받았습니다(에스 4,8). 에스테르는 사흘 밤낮동안 단식을 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 후에 왕명 없이 함부로 나아간 처벌을 받을 각오를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 청했는데, 다행히도 하느님께서 그 임금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왕비 자신의 안전을 도모함은 물론이고 유다인들 대신에 악한 하만이 사형당함으로써 위기는 수습되었고, 유다인들은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에스테르는 바빌론 유배 시절에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증거하여 유다인들의 안전을 확보한 다니엘처럼 신앙으로 동족을 구해낸 유다인으로 기억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처럼 에스테르도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리는 신심을 갖춘 신앙인이었습니다.
다니엘도, 에스테르도 절대군주의 권력에 신앙심에 기대어 맞서기는 했지만,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서 벗어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민족은 지역 패권을 추구하는 강대국들의 터무니없는 요구와 욕심에 떠밀려서 평화를 원해도 전쟁을 끝낼 수 없는 기가 막힌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백 년 전 구한말에 이웃 나라들의 탐욕에 휘둘려 민족이 왜인들의 종노릇을 해야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우리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상황이 되도록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지구상에서 우리 민족만 빼고 다른 모든 민족들이 누리고 있는 민족 주체성입니다.
또한 우리 교회도 그 동안 서구 교회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정통 신앙을 비롯 여러 가지 교회 문물을 배워서 이만큼 성장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서구 교회의 아류처럼 그들을 좇아갈 것이 아니라 주체적인 사고방식으로 복음을 구현하는 교회를 이룩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민족의 종교적 심성을 반영하는 교리와 전례, 선한 영향력의 근원을 찾아내는 역사의식과 공동선을 위한 사회의식 등은 우리 스스로 청하고 찾으며 문을 두드려 이룩해야 할 과업입니다. 이는 교회가 복음화 과업을 수행하자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정체성입니다.
결국 나라도, 교회도 추구해야 할 과제는 주체성과 정체성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성령을 청해야 하고 찾아야 하며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이것도 실력입니다.
-조재형신부-
일주일에 한번은 부르클린 한인성당 사제관에서 머물게 됩니다. 머물 때마다 강론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며칠 전에는 강론자료를 깜빡하고 신문사에 놓고 왔습니다. 사제관에서 신문사까지는 차로 40분가량 걸리는 거리입니다. 갔다 오려면 2시간 정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강론 자료를 가져와야 하는지, 다시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지 망설였습니다. 차를 타고 가져오면 시간은 걸리지만 준비된 자료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강론자료를 준비하면 힘은 들지만 차로 갔다 와야 하는 번거로움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미리 준비했던 자료를 깨끗하게 포기하고, 새롭게 강론자료를 준비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막막했는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니 어렵지 않게 강론자료를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많은 발명품들은 수많은 실패를 거친 후에 세상에 나올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실패를 했을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갖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뚝 솟아 있는 나무를 봅니다. 나이테는 나무가 긴 겨울을 보냈음을 알려줍니다. 나이테가 있어서 나무는 높이 자랄 수 있듯이, 우리는 저마다 삶의 나이테가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위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한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를 들어주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음의 위험에서 벗어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디언들의 기도는 꼭 들어 주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은 하느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비가 오지 않아서 ‘기우제’를 드릴 때도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드린다고 합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보다는 기도를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험한 파도를 헤쳐 나가는 배를 생각합니다. 노를 젓는 사람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하고 싶을 때 노를 젓는다면 배는 험한 파도를 뚫고 나갈 수 없을 것입니다. 배는 파도를 견디지 못하고 난파할지도 모릅니다. 파도가 거셀수록 함께 힘을 모아 같은 방향으로 호흡을 맞추어서 노를 저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우리가 두드리고, 찾고, 열어야 하는 것은 바로 생명에 대한 사랑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이가 되어주는 헌신과 봉사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라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아침을 여는 열쇠고, 하루를 닫는 자물쇠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고, 기도로 하루를 마치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늘 함께 할 것입니다.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주님께서는 제게 응답하셨나이다.”
주님께서 어찌 지극정성의 기도, 목숨 바쳐 올리는 기도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양승국신부-
바빌론 유배 때 인질로 끌려간 유다인들이 머나먼 타국땅에서 겪었던 고초는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과 타고난 총명함으로, 혹독한 유배지에서도 자신의 삶을 활짝 꽃피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벤야민 지파 출신 모르도카이, 그리고 그의 조카 에스테르였습니다.
에스테르의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는 삼촌 모르도카이의 손에 양육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빼어난 미모를 자랑했습니다. 처세술이 남달랐던 모르도카이는 크세르크세스 임금 시절 왕국 안에서 봉직하고 있었습니다.
와스티 왕비가 폐위되자 모르도카이는 즉시 조카 에스테르를 후궁으로 들어가게 힘을 썼고, 오래가지 않아 아름답고 붙임성 있는 그녀는 왕의 눈에 띄게 되었으며, 총 애를 한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왕은 즉시 그녀를 왕비로 임명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초고속 신분의 상승이었습니다. 유배를 끌려온 것만 해도 가련한데, 부모마저 여읜 한 소녀가 순식간에 대제국의 왕비가 된 것입니다. 당시 크세르크세스 왕이 통치하던 지역은 어마무시했습니다. 인도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는 127개 주의 제후들과 지방관들이 그의 휘하에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는 어느 날 엄청난 큰 위기 앞에 봉착합니다. 꽤나 까칠했던 모르도카이가 왕국의 제2인자 하만에게 허리를 숙이지 않자 미운털이 박힙니다. 하만의 계략으로 대제국 전 지역에 임금의 인장이 찍힌 칙령을 보내게 되는데...그 내용이 ㅎㄷㄷ입니다.
“아이와 여자 할 것 없이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다인들을 열두째 달인 아다르 달 열사흗날 한날에 파멸시키고 죽여서 절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라.”
동족들이 몰살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파악한 모르도카이와 에스테르는 해결책을 찾기 위해 머리를 싸맵니다. 그리고 목숨을 건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게 되지요. 2인자 하만을 제거하기 위해서 왕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2인자 자리에 앉은 하만은 보통내기가 아니었습니다. 자칫 말 한마디 잘못하면 왕과 하만 둘 사이를 이간질하는 수작으로 몰려 역공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에스테르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왕에게 나아가는데, 결코 그냥 나아가지 않습니다. 사흘간에 걸친 간절한 기도가 이어졌습니다.
화려한 의복을 벗고 고뇌와 슬픔의 의복을 입었습니다. 값진 향료 대신 재와 오물을 머리에 뒤집어 썼습니다. 즐겨 치장하던 온몸을 헝클어진 머리칼로 덮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스라엘의 주님께 외쳤습니다.
“저의 주님, 저희의 임금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신들의 임금님, 모든 권세의 지배자시여! 사자 앞에 나설 때, 잘 조화된 말을 제 입에 담아 주시고, 그의 마음을 저희에게 대적하는 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꾸시어, 그 적대자와 동조자들이 끝장나게 하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에스테르기 4장 17절)
에스테르 역시 어쩔 수 없이 나약한 한 인간 존재였기에 동족 전체의 목숨이 걸린 사명을 안고 임금 앞으로 나아갈 때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나 사색이 되어 우왕좌왕한다거나 자포자기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평생토록 그녀가 믿어왔고 의지해왔던 주님의 이름을 목청껏 부릅니다. 그분께 목숨바쳐 간절히 청합니다. 영혼과 육신, 마음과 정신 모든 것을 다 바쳐, 자신의 존재 전체를 다 바쳐 간절히 기도를 바칩니다.
주님께서 어찌 이런 지극정성의 기도를 물리칠 수 있겠습니까?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영근신부-
이틀 전에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늘에 계신 아빠, 아버지께'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오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깨우쳐주십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
(마태 7,11)
이는 '우리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는 분’이심을 밝혀주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우리 아버지께' 해야 할 바를 이렇게 알려주십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7)
주님께서는 먼저 기도로 ‘청하라’고 하십니다.
‘청하라’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해결사가 되지 말고 구원자이신 주님께 희망을 두라는 말씀이요, 나아가 희망하고 열망한 바를 신뢰하고 의탁하라는 말씀입니다.
겸손하게 자비를 구하라는 말씀입니다.
귀먹은 이가 들을 수 있기를 청하듯, 눈먼 이가 볼 수 있기를 청하듯, 자신의 처지를 알고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청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청하기도 전에 다 아시지만, 우리가 그 필요를 깨달아 알고 절실하기를 바라시며, 또한 그것을 당신께 바라고 당신께 의탁하기를 바라십니다.
다음에는 "찾아라"고 하십니다.
‘찾는다’는 것은 수고로움을 바치는 것이요, 믿음으로 찾는 것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바를 찾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온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하여 믿고, 믿는 분을 찾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십니다.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대로 “내가 나를 찾아 부르기 전에 내가 너희에게 ‘나 여기 있노라’ 하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다음에는 “두드려라”고 하십니다.
'두드린다'는 것은 가슴에 타오르는 한결같은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마음을 열고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이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 3,20) 라고 하십니다.
이토록 주님께서는 우리가 입(말)과 몸(행동)과 가슴(마음)으로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아버지를 향하여' 있고 '아버지께 매달려' 있기를 바라십니다.
곧 말로 희망하는 바를 청하고, 행동으로 믿는 바를 찾으며, 마음으로 사랑하는 바를 두드리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많이 주시듯이 우리도 아버지께서 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마태 7,12)고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희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진리이신 당신을 찾게 하시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시는 당신의 음성을 들으며,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오늘의 말 · 샘 기도>
“청하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마태 7,7)
주님!
희망을 당신께 두게 하소서!
제 희망이 아니라 당신이 희망하는 바를 청하게 하시고, 당신의 희망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응답하게 하소서!
말로만 청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당신을 몸으로 찾게 하시고, 진리 안에서 행동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진리의 문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두드리게 하소서!
우리를 가로막은 장막을 찢으시고, 우리 서로가 열리게 하소서!
아멘.
「가장 강력한 힘」
-반영억신부-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도 양보하시는 힘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그 자녀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이고, 주 하느님나라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입니다”(작자미상).
그런데 기도의 응답은 때때로 즉각 이루어 주십니다. 가르멜 산위에서 기도한 엘리야의 기도를 듣고 곧 불을 내려 주셨습니다. 천천히 적당한 때에 이루어주시기도 합니다. 다윗왕은 성전을 건축하려 하였지만 아들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케 하였습니다. 어느 때는 이루어주지 않음으로 응답이 되게 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들어주어서 손해가 될 것은 들어주지 않음으로 해서 유익하게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큰 사랑으로 우리의 필요를 반드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최선의 방법으로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7,8). 라고 하셨습니다. 각자의 바람이 많이 있겠지만 세속적인 만족과 위로를 찾고 구하기보다 먼저 하느님을 찾고 갈망하여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청해도 얻지 못하는 것은 욕정을 채우려는데 쓰려고 청하기 때문(야고4,3)이라고 하였으니 헛된 수고의 기도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하느님께 마음의 문을 열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울지 않는 아이는 젖도 못 얻어먹는다.”고 했습니다. 먼저 청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울 자리보고 발 뻗는다.”는 말도 있습니다. 들어주실 것을 청하십시오. 에둘러서 하거나 구구절절 설명하려들지 말고 그냥 청하십시오.
사실 문이라는 것은 열릴 때 열리고, 닫을 때는 닫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에는 열고, 악에는 닫아야 합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께는 물론 아내에게, 남편에게 ,자녀에게,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부와 명예, 명성의 유혹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마음은 열고 욕심의 입은 닫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실 수 있는 분이고 따라서 우리는 받을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만 구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더 고마운 응답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청하고, 찾고 두드리되 내 뜻이 아니라 주시는 분의 뜻대로 이루어 주시길 바라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7,1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께 좋은 의향을 가지고 마음껏 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반복해서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을 그분 손에, 그분의 처분에 맡기고, 마음 깊은 곳에서 그분의 음성을 조용히 듣는 것입니다.” “기도는 심장과 심장의 만남입니다”(마더 데레사). 우리의 바람과 기도가 헛되지 않기를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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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주는 것인가, 받는 것인가?
내가 무엇인가를 받을 때, 어떻게 감사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는가?
주님과 더불어 베풀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 기도 』
-송영진신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7-12).”
이 말씀은 다음 말씀들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마태 6,8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마태 6,31-32).”
겉으로만 보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과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라는
말씀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모순이 아니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조금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고, 그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버지께 ‘청원 기도’를 바치는 것은,
‘주시는 그것을 잘 받는 방법’입니다.
(청하지 않는 것은, 주시는 것을 받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해성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사제는 고해실에 앉아서 ‘주님의 용서’를 전해 주려고 기다리고 있고,
그 용서를 받기를 원하는 이들은 스스로 고해실로 들어갑니다.
(‘주님의 용서’는 이미 주어져 있고,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그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고해실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받지 않겠다는 사람입니다.
고해성사를 보지 않겠다는 사람에게 고해성사를 보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혹시 아파서 누워 있는 사람이라면 사제가 그 사람에게 가지만,
용서를 안 받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주는 일은 없습니다.
이 말에 대해서, “고해성사는 단순하고 명확한 일이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청하는 기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라고 반박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정말로 “먼저 준비하셔서, 주려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그게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청하는 것을 끝끝내 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과 내가 ‘청하는 것’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어떻게 해야 그것을 알 수 있는지?
‘내가 받기를 원하는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원하는 것을 달라고 청하기 전에 먼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아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청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더 열심히, 더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말장난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입니다.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로마 8,26).”
성령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 덕분에 눈을 뜬 사람이
‘기도’에 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누가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십니다(요한 9,31).”
(여기서 ‘죄인들’은 죄 속에서 살면서 청하지도 않고
받으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기도도 들어 주시고, 필요한 것을 주시는데,
죄인들 쪽에서 청하지 않거나 ‘나쁜 것’을 청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것을 받지 못합니다.)
이 증언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으려면,
우리 쪽에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나는 내 마음대로 막 살면서,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고,
잘 받을 준비도 안 하고서 ‘생떼’를 부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무거나’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그것을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면서,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한다면,
아버지께서 이미 주신 것을 잘 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올바른 지향’으로 기도하는 것은, 첫 번째는 ‘좋은(선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악한 것’을 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죄’입니다.
두 번째는 ‘모두에게 좋은(선한)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만일에 나에게만 좋은 것이고, 남에게는 해를 끼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악한 것’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라는
말씀은, 황금처럼 귀한 계명이라는 뜻으로 ‘황금률’이라고 부릅니다.
황금률은 신앙생활의 원칙이기도 하고, 기도의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에서 ‘남’은 이웃이기도 하고, 하느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일만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께 드리는 일도
생각해야 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한다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이라서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그런데 황금률에서 ‘너희도’를 ‘너희가 먼저’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것을 ‘너희가 먼저’ 남에게 해 주어라.”
“받으면 그때 가서 해 주겠다.”가 아니라,
먼저 해 주고 나서 받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정하신 ‘가장 좋은 때’는 ‘지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성급함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믿음은 ‘기다림’입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을 것이다."(마태 7, 8)
-한상우신부-
태어나
기도로
살아가는
우리들 삶이다.
간절한
기도의
주인은 언제나
우리의
주님이시다.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먼저
받아주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살리는
기도이며
거짓을
허무는
기도이다.
끝없는
기도의
여정을 우리는
살아간다.
생명과
기도는
하나의
몸이다.
그래서
기도는
뜨겁다.
기도는
살아있다.
기도는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다.
기도
아닌 것이
없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시는
주님이시다.
기도로
우리를
사랑으로
데리고
가신다.
다시
하느님께
집중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우리에게는
힘겨움을
이겨내게 하는
기도가 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기도를
내어주셨다.
청하면 얻고
두드리면
열리는
기도가
다시 우리를
살게한다.
외로운 이의 기도
-김찬선신부-
외로운 이의 기도.
오늘 복음을 묵상하다가
외로운 이의 기도만이 진실한 기도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너무 심한 말이라면
외로운 이의 기도가 더 진실하다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어제는 일어나자마자 이유 없이 마음이 어둡고 한동안 불안이 이어졌습니다.
심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해버릴까 하다가
왜 그럴까 정식으로 꺼내어 성찰을 해보았습니다.
과거 경험으로 볼 때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어둠이 있으면
죄나 잘못이 있을 경우이고,
특별한 죄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뭔가 욕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뭔 욕심이 있을까 성찰해보니 큰 욕심은 아니지만
역시 욕심이 제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이렇게 마음을 어둡고 불안하게 했구나,
욕심이 기도도 안 되게 했구나 하고 실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내려놓으니 마음도 개운해지고 기도도 되었습니다.
만일 이렇게 마음을 들여다보는 관상기도를 하지 않은 채
억지로라도 기도를 했다면 아마 욕심의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정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봅시다.
욕심은커녕 너무도 곤궁하고 아무도 도울 이 없습니다.
언젠가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자는 영상을 봤습니다.
아무 것도 먹지 못해 축 늘어져있는데 파리가
코와 눈가를 기어 다녀도 그것을 쫓을 힘도 없습니다.
이 아이에게 식욕이나 식탐이 있어 먹기를 바라겠습니까?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먹을 것을 줄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고 구해줄 누가 나타나길 바라는 간절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제 생각에 이 간절함과 이 외로움이 저절로 기도를 하게 할 뿐 아니라
가장 진실한 기도, 가장 진실한 청원기도를 하게 합니다.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시선을 잡아끄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에게 기쁨을 주는 누가 있다면,
조금이라도 나를 즐겁게 하는 사람과 일이 있다면
그만큼 하느님을 진실하고 충실하게 대면하지 않을 것이고
절실하지 않기에 그만큼 절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늙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늙는 만큼 더 진실하게 기도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도 처량하지만 다른 한 편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가 되고,
냄새나는데다가 보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주는 제가 되면
차츰 저를 찾는 사람이 없을 것이고 같이 있는 사람들도 저를 피하겠지요.
그때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왜 찾아오지 않느냐고 불만하지 않고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언제나 오나 오매불망 기다리지 않고
오늘 독서의 에스델처럼 외로움의 기도를 저도 드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은 유일하십니다.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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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https://blog.kakaocdn.net/dn/pyZNc/btqQXAjoT2I/gXgEJJhu0tOtSRr8lkgvf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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