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12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43-48)
Be perfect,
just as your heavenly Father is perfec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의 규정과 법규들을 실천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며, 하늘의 아버지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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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분노, 짜증, 원망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에 큰 부담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 몸에는 스트레스에 대한 면역 능력이 있는데 면역 기능이 채 발동되기 전에 또 다른 스트레스를 느끼면 면역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몸에 무리를 주는 것입니다. 고혈압, 동맥경화, 위장 및 심장질환, 자가 면역 질환, 더 심하면 암까지 걸릴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 싸웁니다. 그런데 싸운다고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질까요? 계속 내 마음에 남아서 내 생각을 지배합니다. 때로는 꿈에서까지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을 굳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보다 긍정적인 감정으로의 전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주님께서는 사랑의 실천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상대방과 논쟁을 벌일 때가 있습니다. 제 생각에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점점 나쁜 쪽으로 흐릅니다. 이때 해결책은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치고받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긍정적 마음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나를 먼저 설득해야 했습니다.
항상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문제의 해결은 이미 내 안에 있었습니다. 자신을 망가트리는 부정적 생각에서 벗어나 나를 살리는 긍정적 생각인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에 대해 주님께서는 우리가 실천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복수하지 않고 참으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냥 원수를 피하라고 한다면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도저히 실천에 옮기기가 힘든 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역사 안에서 원수가 많았습니다. 오랫동안 적국의 침략을 받아왔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을 공격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공격하는 것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미워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과 원수의 차별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어느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움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우리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증오를 없애는 방편은 ‘사랑’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어려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완전하신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덕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미움, 증오 등의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 어떻게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할지를 늘 염두에 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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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믿음이고 미움도 믿음이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12B2e8d5TEk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어제 복음과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감정의 통제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새로 태어난다는 말은 ‘다른 세상에 산다’는 말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신이 사는 세상입니다. 고정원 씨는 세례를 통해 새로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를 용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을 못 받아 이 세상이 두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면 당연히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기도 합니다. 이 상태에서 누군가를 용서하고 사랑하려고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감옥에 갇혀서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서는 쳐다보기만 해도 화가 날 수 있습니다. 에스키모인들이 화가 나면 무작정 걸어서 화가 발생한 곳에서 멀어지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우리도 미움의 세상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지금 복음은 ‘산상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내용입니다. 마치 이 지상에서 떠나 산에 오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누구는 하느님 나라에 살고 누구는 지옥에 삽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대로 감정을 발산하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어제 묵상 내용처럼 삼위일체 하느님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이는 거울과 오은영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위해 하는 노력, 이 세 가지의 도움으로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렇게 말썽부리며 살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믿음밖에 없습니다.
『다정함의 과학』, 켈리 하딩 박사는 의사로서 사람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도록 훈련된 사람입니다. 그가 의대에 입학해 해부학 교수에게 처음 받았던 것은 한 인물의 간단한 소개였습니다.
“9번 테이블: 폴, 공장 노동자, 사망 원인: 폐 암종.”
처음엔 그래도 자신의 테이블에 누워있는 시체가 한 인간의 존엄한 존재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자르고 쪼개고 분해하고 하다 보니 점점 폴이라는 한 인물의 시신이 아닌 하나의 교육 보조재정도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영혼의 존재에 대해 점점 잊어가고 환자를 약물과 수술로 치료해야 한다는 물질적 세계관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의사인 그녀가 『다정함의 과학』이란 책을 쓰게 된 것일까요? 이 책은 수술과 약물보다 사랑이 인간의 몸까지 더 완벽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의사로서 많은 비판을 받을만한 내용입니다. 그녀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자신 어머니의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켈리 박사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2주 전 침대에 누워 영화를 보다가 어머니에게 문법이 전혀 맞지 않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문자를 보낼 때 문법을 꼼꼼히 따지던 사람이었습니다. 의사인 딸은 이 문자를 받고 곧바로 엄마에게 뇌졸중이 왔음을 깨닫고 곧바로 병원에 도착하였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지 몇 시간 만에 어머니는 오늘 손을 쥐었다 펴는 것 외에는 움직일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켈리는 손으로 ‘사랑해’라고 말하는 신호를 만들었습니다.
“I(꼭 쥐기) LOVE(꼭 쥐기) YOU(꼭 쥐기).”
그날 켈리와 어머니는 수도 없이 서로의 손을 세 번씩 꽉 쥐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어머니는 걱정하는 딸에게 괜찮다는 엄마만의 리듬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2주 동안 어머니 옆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다가 더는 어머니가 손을 쥘 힘이 없음을 알았을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의사 수업을 할 때 그렇게도 세세하게 해부하던 인간의 육체만 남은 어머니. 어머니의 영혼은 어디 간 걸까? 영혼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는 켈리의 거의 두 살이 다 된 사랑스러운 아들 제이를 자주 돌봐 주었습니다. 제이는 자신과 놀아주던 할머니의 부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듯하였습니다. 더 자주 할머니를 찾았습니다. 켈리가 할머니가 매우 아프다고 말할 때마다 제이는 “할머니는 내 마음 안에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를 화장하던 날 밤, 제이는 울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제이를 켈리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말을 갓 시작한 제이는 켈리의 품에서 “사랑해!”라는 말을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예상하지도 못한 말이었습니다. 켈리는 어둠 속에서 활짝 웃으며 아들을 더 꽉 안아주었습니다. 그러자 제이가 갑자기 켈리의 손을 잡고 세 번을 꽉 쥐었다 폈다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처음 엄마 손을 꽉 쥘 때 엄마는 놀랐습니다. 두 번째는 이상하다는 점을 느꼈으며, 세 번째 잡아줄 때는 그만 울고 말았습니다.
제이는 엄마의 품에서 잠이 들었고, 엄마는 완전히 잠이 달아났습니다. “사랑해”라고 말할 때 손을 세 번 꽉 쥐었다 펴는 것은 켈리와 엄마만의 비밀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도 남편에게도 말한 적이 없고 제이는 정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엄마의 손을 잡는 적도 없었습니다. 증거 중심으로 일하는 의사로서의 켈리는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엄마의 딸로서의 켈리는 “얘야, 엄마는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나는 여전히 네 곁에 있어”라고 말하는 사랑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소위 ‘토끼 효과’를 발견합니다. 한 사랑 가득한 여성이 준 음식을 먹은 토끼들만 특별히 더 건강하다는 실험을 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그 사람을 사랑의 환경 안에 살게 하여 인간의 감정으로 일어나는 병까지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화병이 있는데, 이것은 약물이 아닌 새로운 환경에서만 치유됩니다. 다시 말해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아웅다웅하고 미워하며 살았던 것들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이것이 용서고 원수까지 사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는 매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여객기가 무인도에 불시착하며 벌어지는 내용입니다. 괴물도 나타나고 이상한 생명체도 나타나지만, 또 그 사람들 안에서 불목과 의심과 미움과 살인까지 일어납니다. 가끔 죽었던 사람들도 등장하고 이전에 지었던 잘못과도 연결되며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 참 궁금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그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무인도에 불시착한 것이 아니라 바다에 빠져 다 익사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살고 있었던 곳은 천국과 지옥의 ‘중간계’였고 여기에서 진짜 선인과 악인이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연옥의 역할도 하는데 이 지상에서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이들은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황당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들은 생존하려고 서로를 죽이기까지 하면서 본인들이 이미 죽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믿기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자신들이 죽었음을 인정한 이들은 이 세상에서의 모든 감정을 털고 천국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죽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은 이 세상의 미움 속에 남겨집니다. 지옥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우리 감정을 규정합니다. 지옥에 머물며 천국의 감정을 느낄 수 없고 천국에 살며 화를 내거나 음탕한 마음을 품거나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을 바꾸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은 증거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믿고 살 것인가에 대한 용기 있는 결단이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참된 예배와 올바른 제사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OrdFbNcxSmw
오늘 미사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마음으로 회개하고, 언제나 필요한 그 한 가지만을 찾으며 사랑을 실천하여,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본기도).
구약 시대에는 모세가 정해준 율법이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규정하였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신명 26,16)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섬기는 길이었고, 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아 돌보아주시겠다던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그 백성 사이의 관계를 율법을 넘어 사랑으로 규정하셨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함은 물론 원수도 사랑해야 하고 심지어 그 원수가 박해를 하면 기도를 해 줄 수도 있어야 한다고까지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도 이 말씀을 어려워하고, 믿으려던 이들도 이 말씀을 핑계 삼아 믿기를 망설이곤 합니다.
그런데 어제의 복음에서 들으신 바를 상기해 보자면, 사랑이 율법을 넘어서는 진리일 수 있는 이유는 보편적이라는 데 있고, 또한 사랑이 생각이나 말로만 그쳐서는 안 되며 실천되어야 하기 때문에 최대한과 최소한이라는 한도가 정해질 수밖에 없는 윤리입니다. 사랑의 최대한은 상대방이 나에게 해 주기를 원하는 것을 먼저 내가 그에게 해 주는 것이고, 이는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지킬 수 없습니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가족이나 지인 또는 사도직에서 주어진 최소 범위의 소수 사람들에게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필요한 자기 희생 내지 자기 헌신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믿는 이들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이 부르신 열두 제자들을 상대로 이 최대한의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제자들이 당신에게 해 주었으면 하셨던 바를 예수님께서는 스승으로서 먼저 하셨습니다. 믿어 주신 것도 그래서였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쳐주신 것도 그래서였으며, 종처럼 그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도 그래서였고, 잘못을 저지른 제자를 용서하신 것도 역시 그래서였습니다. 유다가 스승을 배신할 마음을 먹은 낌새를 눈치채시고도 먼저 내치지 않고 끝까지 기다려주신 일이 그렇고, 수제자로서 스승을 부인한 베드로에게는 나무라지 않고 찾아가셔서 끝내 신앙의 고백을 받아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열두 명의 범위 안에서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적인 인연을 맺으신 범위가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들 각자에게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 어머니께 대해서는 아들로서 할 수 있는 효도를 다 하셨습니다. 어려서는 순종하셨고, 장성해서는 당신 어머니가 가르치고 전해준 신앙에 따라서 복음선포를 하셨으며, 당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시게 되자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당신이 하셨듯이 어머니를 모셔달라고 요한에게 유언을 남기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가족에게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완전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상대로 해서는 최소한의 사랑을 지켜야 합니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일, 즉 무시한다거나 차별한다거나 폭력을 저지르거나 속인다거나 하는 일들은 우리도 누구에게든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의이고, 규범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두 제자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두가이들에게 성전정화 사건으로 일깨움을 주셨지만 모욕하지는 않으셨고, 바리사이들과 일일이 맞서셨지만 앙갚음을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주어진 인연 안에서 최대한의 사랑으로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참된 예배요 올바른 제사입니다. 이제 우리는 구약 시대의 하느님 백성과 달리 신약 시대를 살고 있는 하느님 백성입니다. 그러니 그 기준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실천적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이 십자가야말로 세상의 어둠을 비출 수 있는 진리의 빛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진리를 세상은 알지 못하기에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갈등과 스트레스가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부딪치는 거의 대부분의 갈등과 스트레스는 자기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어서, 이를 조금만 줄여도 대부분의 갈등이 해소되고 스트레스가 확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이 세상살이를 지옥이 아니라 천국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천상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이 십자가를 피하고 싶은 유혹을 누구나, 또 수시로 받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 유혹을 뿌리치고 당신처럼 사랑할 수 있도록 말씀과 성찬으로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미사를 마치면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주님, 천상 양식을 받은 저희를 끝까지 돌보아 주시고, 천상 지혜를 받은 저희를 구원의 샘으로 이끌어 주소서”(영성체 후 기도).
-조재형신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아본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 코로나에 걸렸던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던 사람은 그 느낌을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얼마나 아픈지, 격리에 따른 소외감은 어떤지, 꼭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아쉬움은 어떤지, 가족이나 이웃에게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걱정에 가슴 졸이는지 모릅니다. 후배 신부님이 코로나 확진으로 5개월을 고생했다고 합니다. 신자들의 기도와 사랑을 깊이 느꼈다고 합니다. 코로나 확진 환자를 방문할 때도 두려움이 없었다고 합니다. 따뜻하게 손을 잡아 주었고, 함께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같은 고통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사기(史記)’는 사마천이 쓴 역사책입니다. 방대한 내용과 철저한 고증으로 유명합니다.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록하지 않고 인물, 사건, 제도, 경제 등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습니다. 사기에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비극적인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사마천의 삶 역시 비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은 바른 말을 했지만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과 궁형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궁형을 선택하였고, 평생 부끄러움을 간직한 채 살았습니다.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궁형을 선택한 이유는 필생의 과업인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삶의 순간에 운명처럼 고통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런 고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는 전례에 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가장 성대한 초는 부활성야에 밝히는 ‘부활초’입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축성하면서 그해의 연도를 표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시작이며 마침임을 표시합니다. 사제는 부활초를 들고 행진을 하며 성당 안에 있는 교우들은 모두 부활초에서 불을 얻어 초를 밝힙니다. 전례에서 초를 사용하는 이유는 초가 가지는 3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초의 3가지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희생입니다. 초는 자신을 태우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셨습니다. 서품식에 초를 드는 것도, 종신서원에 초를 드는 것도 바로 이런 희생의 삶을 위한 다짐입니다. 교회는 화려한 건물과 조직 때문에 2000년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모든 것을 바친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2000년 역사를 이어온 것입니다.
둘째는 나눔입니다. 초는 아낌없이 자신의 불을 다른 초에 전해줍니다. 그래도 초의 빛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부활초에서 전해지는 불은 성당 안을 환하게 하지만 부활초는 그대로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배불리 먹었지만, 물고기와 빵은 오히려 많아졌습니다. 성체성사는 나눔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세포가 자신의 양분을 나누지 못하면 암세포로 변하게 됩니다. 세포는 자신의 양분을 나눌 때 건강한 몸이 됩니다. 셋째는 빛입니다. 아무리 깊은 어둠도 작은 촛불을 이길 수 없습니다. 촛불이 있는 것만으로도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에게도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은 생명을 주고, 이 빛은 희망을 주고, 이 빛은 지혜가 되었습니다. 풍랑에 휘말리는 배가 멀리 빛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가 이웃에게 희망의 빛, 사랑의 빛, 믿음의 빛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완전한 사람이 되십시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완전함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를 더욱 아름답게 존재하도록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어려운 원수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오 복음 5장 44~45절)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사랑은 그냥 사랑, 통속적인 사랑, 드라마에 나오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는 사랑,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 자유를 주는 사랑,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사랑입니다.
언젠가 임종을 목전에 둔 한 형제님께 병자성사를 집전하러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가 깜짝 놀랄 체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병세가 깊어질 대로 깊어져 의식도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정성껏 병자성사를 정성껏 집전했고, 돌아서 나오기 직전, 그 형제의 귀에 대고 큰 목소리로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 그간 정말이지 수고 많으셨습니다. 형제님께서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하신 일들을 보니 놀랍습니다. 달릴 길을 다 달리신 형제님의 삶을 보고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제 조금만 참으시면 영원하신 하느님 품에 안기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마지막 순간까지 잘 견디시길 바랍니다. 형제님, 편안히 잘 가십시오. 먼저 천국에 도착하시면 주님께 안부 잘 전해주십시오. 형제님 사랑합니다. 파이팅!”
솔직히 저는 그 말씀을 드리면서, 설마 형제님께서 제 말씀을 들으실까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 말씀을 끝내고 나니, 형제님의 얼굴 근육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형제님의 두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룩 흘러내렸습니다. 형제님께서 제 말을 들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간 존재는 그 어떤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사랑 빼면 시체인 존재가 인간입니다.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 치유 불가능한 말기 암 환자, 임종을 목전에 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랑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상대방에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는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에게 삶의 진정한 의미,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나를 위해 더 존재하는 그를 보며, 그가 더욱더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를 더욱 아름답게 존재하도록 노력하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를 더 아름답게 성장시키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가 더욱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내가 한 줌 거름이 되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그가 더욱 충만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내가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선교국에서 전해온 우크라이나 소식과 연대에 대한 알림을 공유합니다.
지난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군사 침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UN총회 결의안을 포함,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나, 3월 8일 기준 현재 200만명 이상의 난민들이 인근 국가로 피신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떠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살레시오회는 폴란드 관구와 우크라이나 준관구 등을 기점으로 전 세계적인 연대를 통해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향한 인도적 지원을 시작했으며, 한국 관구와 선교국도 동참하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는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서 민간인과 함께 머물며 우크라이나 난민들, 특히 어린이, 청소년,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보호할 공간을 마련하고, 식량, 상처를 치료할 붕대 및 의약품, 위생용품, 전력 등을 지원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끝나지 않는 무력 전쟁과 대립 상황 때문에,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와 난민이 생길지 알 수 없습니다.
저희 한국 살레시오회 선교국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동참하실 후원자 여러분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립니다. 어느 때보다도 긴급한 상황이기에, 더욱 집중적이고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연대가 우크라이나 피난민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도록 함께해주세요. 후원해주시는 성금 전액은 살레시오회 우크라이나 관구로 전해져 가장 필요한 사업을 위해서 사용됩니다.
*후원계좌: 국민은행 090-01-0313-578 (재)한국천주교살레시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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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도 어제 복음에 이어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의 ‘의로움’인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마태 5,44)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해 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단지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혹은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만도 아니요, 또는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더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죄인이기에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나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 다음에 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처럼(1코린 4,12),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넘어 사랑할 때라야 비로소 의로움을 행하게 되고,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받으라는 소명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48)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묘하게도 결핍을 메울 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비울 때 일어납니다.
자신의 결핍과 한계를 극복하고 채울 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수락할 때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완전함’이란 그 어떤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있는 채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받아들이게 될 때 오히려 자기의 결핍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고, 결국 부족과 한계를 받아들일수록 온전해지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부족과 한계는 우리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물을 끌어들이는 통로가 됩니다.
그러니 우리의 불완전함이 완전함이 들어오는 통로인 셈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마태 5,44)
주님!
단지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그에게도 사랑이 되게 하소서.
내가 기도해해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나의 기도가 가장 필요하고 나의 사랑이 가장 필요한 사람, 나를 힘들어 하고 나의 용서가 절실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이 약이다」
-반영억신부-
홍문택 신부님의 ‘사람을 상대할게 아니랍니다’라는 글입니다.
“누가 당신을 모함합니까? 누가 당신을 두고 빈정거립니까?
누가 당신을 험담하고 다닙니까? 누가 사사건건 당신을 반대합니까?
누가 당신을 미워합니까?
그래서 얼마나 속이 상하십니까? 얼마나 분하십니까?
얼마나 야속하십니까? 얼마나 그가 밉겠습니까?
하지만 당신이 미워하시는 사람들과 싸우지 마십시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이 싸울 상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악(惡)의 세력입니다.
그러니
그가 상대가 아닌 만큼 그를 미워하거나
그에 대한 미움과 실망을 부질없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싸움 상대가 악의 세력인 만큼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법을 생각하십시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오로지 완전한 선(善)입니다.
오로지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로지 진실뿐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자제된 침묵입니다. 그렇게 싸워야 이길 수 있습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긴 예수님의 방법이 바로 그 방법이었답니다.
절대,
당신을 비난하고 욕하며 미워하는 사람과 상대하여 싸우지 마십시오.
그건 적을 모르고 싸우는 꼴입니다. 싸움을 부추긴 장본인은 멀쩡히 놔두고
엉뚱하게 딴 사람과 아웅다웅하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기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용서를 넘어 사랑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먼저 길을 알려주셨기에 믿고 따르면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마태5,44-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원수를 골라서 사랑하라는 말씀도, 원수이기 때문에 사랑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상대가 누구이든 가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서 만난 억울한 일들을 그저 ‘억울함’으로 안고 살면 그것은 억울한 채로 남아서 슬픈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따라서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가슴에 담고 행복해야 하겠습니다. ‘돼지는 열 받으면 바비큐’가 된답니다. ‘사람은 열 받으면 쓰러집니다.’ 그리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마음에 화를 담지 않기를 희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멘틱한 사랑을 진정한 사랑으로 착각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명분으로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사랑은 커다란 맛을 느끼는데 있지 않고 매사에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란 한가할 수 없고 한가로운 사랑은 벌서 잘못되었다는 표시인 것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참된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십자가의 성요한). 따라서 십자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 사랑,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에 지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밖에 난 사람에게도 마음을 두어야 하고 허물을 안고 있는 상대방을 보면서 바로 나의 숨겨진 연약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상처를 입힌 미운 사람을 주님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의 모습이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 안에도 어둠이 도사리고 있으며 언제든지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그는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그는 결국 나를 올곧게 살아가게 하는 빛입니다. 따라서 그에게 감사해야 하고 한편으로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의 허물은 그의 본래 모습이 아니라 어둠의 세력에 한 순간 이용당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면서도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나를 어렵고 힘들게 하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때 오히려 내 마음의 넓이와 깊이를 확인하는 순간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발점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미움에는 세월이 약이 아니라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약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자만하지 마십시오. 방심하면 한 순간에 어둠의 세력에 지배당하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으로 마칩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참된 정의의 실현을 수반합니다.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느님의 정의는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해방되도록 양심을 지니게끔 도와주는 용서를 우리에게 계속해서 선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용서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도 서로 용서하기 위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초월 의지
-김찬선신부-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
어제 바리사이의 의로움을 능가하라고 가르쳐주신 주님께서
오늘은 그들의 사랑을 능가하라고 가르치시며
그것은 하느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에게 원수가 있을까,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런 의구심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는 원수가 없다는 겁니다.
하느님께는 사랑의 대상만 있지 원수가 없으며,
하느님을 원수로 여기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하느님께서 원수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고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합니다.
사랑할 수 있는 원수는 없으며
원수였던 사람을 사랑할 수는 있겠습니다.
1초 전까지 원수였던 사람인데 이제는 원수가 아니어야 사랑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지금은 아직 원수이지만
그래도 사랑하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말씀이며
마침내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하느님처럼 사랑하면 된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사랑에 있어서 하느님처럼 완전하면 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월 의지입니다.
내게 잘해주는 사람은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인간적인 사랑,
이 인간적 사랑을 초월하여 하느님 사랑에 도달하려는 초월 의지 말입니다.
교만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지나고 나면 원수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원수가 아닙니다.
아직 원수인 사람은 아직 지나지 못하고 여전히 원수인 상태이고,
여전히 원수인 사람은 하늘로 오르지 않고 여전히 땅에 있는 겁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 뭣하러 뒤를 돌아다보며 과거에 머물고 원수에 머물고,
하늘로 올라가 하느님 사랑에 머물려는 사람이 어찌 땅의 원한에 머물겠습니까?
그러므로 거듭 얘기하지만 초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 초월 의지는 우리 사랑이 하느님 사랑의 수준까지 오르려는 의지이기도 하지만
그전에 인간적인 사랑과 미움을 초월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려는 의지입니다.
이런 초월 의지에 의해 하느님 사랑에 머물게 되어
이제 더 이상 원수는 없고 불쌍한 사람만 있으며
그래서 불쌍한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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