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9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이 세대에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
(루카 11,29-32)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요나 예언자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자,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악한 길에서 돌아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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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오랫동안 연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젊은 남녀가 있었습니다. 여자는 오랫동안 만났기 때문에 결혼을 생각하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남자친구가 자신을 정말로 사랑하는지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물었습니다. 남자는 그때마다 “그럼, 당연히 자기를 사랑하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여자친구의 질문이 계속 반복되다 보니, 남자친구의 대답이 점점 무성의한 답변이 되었습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나, 얼굴도 보지 않고 “아직도 모르겠어?”라고 답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그런 질문 좀 던지지 마라.”고도 합니다.
이 둘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상태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랑의 증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사랑의 증명은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단 한 번의 행동으로도 증명을 입증할 수 없습니다. 서로의 사랑 안에서 싹트는 믿음을 통해서만 말하지 않고 또 행동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유다인들, 특히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 표징은 병자들이 치유되는 놀라운 기적과는 다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의 10가지 재앙, 광야에서의 만나, 그리고 예언자들로부터 받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을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 11,29)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에게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자체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이었습니다. 그래서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면서 하느님의 보호를 직접 보여 주셨고,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전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조금의 믿음도 없었습니다. 조금이라도 신앙의 눈으로 보면 충분히 볼 수 있지만, 불신의 눈으로 보고 있으니 그분의 말씀과 기적을 보고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표징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이야기를 전해주신 것도 여기에 있습니다. 요나 자체가 하느님의 표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을 점령한 적국의 수도인 니네베로 가서 하느님의 보호를 전했고, 그들이 구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증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믿음만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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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가 있다면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IsQbFwCpDmQ
오늘 복음의 핵심 단어는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는 이들은 예수님께 표징을 보여달라고 합니다. 표징이 있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지혜가 없어서 당신을 믿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지혜가 있어야 ‘회개’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며 ‘요나’의 표징밖에 남지 않았음을 말씀하십니다. 요나의 표징이란 요나가 물고기 속에서 사흘 동안 있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란 표징입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회개’하고 믿었습니다. 그래도 유대 지도자들은 믿지 않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행복인지 알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혜’란 말을 많이 사용하지만 사실 지혜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정확히 정의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먼저 지혜는 ‘선택’과 관련됨을 알아야 합니다. 더 행복한 것을 선택할 줄 아는 게 지혜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가는 길에서 믿는 게 더 행복한지, 안 믿는 게 더 행복한지 구별할 수 있는 것을 지혜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믿음을 표징으로 가지겠다는 이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징을 말씀하시는데, 이는 ‘죽음과 부활’에 관한 믿음을 나타냅니다.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믿는 게 좋을까요, 안 믿는 게 좋을까요?
한 건물의 입구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얼굴에 주름이 많고 옷차림도 허름했습니다. 그러나 밝은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한번은 건물의 주인이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으시나 보지요. 표정이 항상 밝아 보여요.”
그러자 할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제 걱정을 트럭에 담으면 아마 100대 분량도 더 될 것입니다.”
부자가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그런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있습니까. 무슨 특별한 비결이 있나요?”
할머니는 부자에게 행복한 삶의 비결을 들려주었습니다.
“내게 특별한 비결이 하나 있어요. 저는 고통이 닥치면 예수께서 무덤에 머물러 계셨던 사흘을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기다립니다. 사흘 뒤에는 어김없이 걱정이 해결됩니다. 지금 걱정이 사흘 뒤면 사라질 거라 믿는 거죠.”
할머니는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는 표징을 보고서 믿는 게 아닙니다. 경험으로 체득하신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게 행복한지, 안 믿는 게 행복한지.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가만히 놔두면 사흘 뒤면 사라질 걱정을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 이유는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지 못하니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도관으로서 29명 사형수의 사형집행 모습을 지켜본 박효신 장로의 간증과 같습니다. 그는 29명 사형수의 사형집행을 지켜보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13명과 믿지 않는 16명의 사형대 앞에서의 모습이 확연히 달랐다고 합니다. 부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두려움 없이 죽음으로 나아갔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 다른 종교나 참선한 이들은 여지없이 주저앉고 오줌을 싸고, 그런 것도 하지 않은 이들은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강제로 사형집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자신만 본 것이 아니라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것이라 자신이 그렇게 말해도 누구도 반박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사형 집행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를 기다리는 각양각색의 죽음입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 있는 그리스도를 믿고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그냥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 혹은 자신의 힘으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볼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증거를 대보라고 말해보는 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증거는 믿어보면 알게 됩니다. 죽음 앞에서 여유로울 수 있는 자신의 모습에 믿기 잘했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는 자들은 이 두 행복의 차이를 구별할 수 없으므로 안 믿는 것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지 않고 마지막 때도 불행하며 내세에서도 좋은 심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혜’는 이 세상의 행복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합니다.
그러면 이 지혜의 눈을 멀게 만드는 장본인은 무엇일까요? ‘자아’입니다. 자아는 자신을 믿게 만듭니다. 그러면 눈이 멉니다. 자아가 커지면 시야가 좁아집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하와가 뱀을 유혹할 때. 모든 유혹에서 항상 그것을 따르면 좋은 점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더 큰 좋지 않은 점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눈뜬 소경이 됩니다.
푸틴 대통령은 지혜로운 사람일까요? 분명 전쟁을 해서 얻는 게 있습니다.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는데 그것을 통해 돌파구를 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잃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동안 쌓아온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나라를 국제적 왕따로 만들고 끝내고 싶어도 자존심 때문에 전쟁을 끝낼 수도 없습니다. 자신 때문에 목숨을 잃고 고통받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그 양심의 가책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할까요? 참 멍청한 선택으로 보이지만 우리도 이런 실수를 많이 합니다. 자아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믿음으로 가는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눈을 가리는 것이 자아입니다. 이제는 지혜의 눈을 넓힐 방법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지혜와 지식’의 차이점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지식입니다. 그러나 지혜가 지식과 같지는 않습니다. 지혜는 이미 충분히 체득한 지식을 잘 활용하여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지식이 있어야 지혜가 작동합니다.
스웨덴 영화 ‘오베라는 남자’(2005)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43년간 다닌 직장에서도 해고된 오베라는 남자가 살 의욕을 잃고 자살만 생각하는 순간 따듯한 이웃들을 만나며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받고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도 사고로 돌아가시는 비극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내를 얻었으나 또 그 아내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고 유산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재기하여 훌륭한 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렇게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베는 너무 무뚝뚝하고 사람을 싫어해서 이웃이 없었지만, 결국엔 매일 죽으려고 하는 터에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그는 말합니다.
“이게 사는 맛이구나!”
오베는 자신의 장례식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들만 초청하라는 편지와 함께 평안히 눈을 감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할 때는 혼자였으나 죽으려고 할 때는 수많은 이웃이 생겼습니다.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이 없게 이웃이 몰려왔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고 하면 살 것입니다. 그는 편안하게 저승에서 아내를 만납니다.
이것이 부활을 꿈꾸는 사람의 삶입니다. 무엇이 행복한지는 죽어야 할 이유, 살아야 할 이유를 번갈아 보며 결정해야 합니다. 이 지혜가 참으로 사는 맛을 선사합니다. 오베라는 남자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아내를 잃고 직장을 잃었어도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행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에 대한 지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약 그 행복에 대한 지식을 갖추었다면 지금 죽는 것과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것 중에 무엇이 행복한지 비교가 가능했을 것입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제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할 때 그것을 선택하는 것과 선택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명확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점과 나쁜 점을 비교하여 선택하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통일 후 한국이 겪게 될 모습은?”에 초등학생이 답한 것입니다.
-좋은 점: 1. 이산가족의 슬픔 없어짐, 2. 인구 늘어남, 3. 자원과 기술이 결합해 경제력이 높아짐, 4. 유라시아 철도가 건설되어 관광 대국이 됨, 5. 일자리가 늘어남, 6. 북방-남방 한계선이 없어짐, 7. 전쟁 위험 없어짐, 8. 군사력 증가, 9. 북쪽으로 마음대로 갈 수 있음, 10. 북쪽의 문화재(역사) 체험 가능.
-나쁜 점: 1. 경제 혼란, 2. 세금 늘어남, 3. 지뢰 제거가 어려움, 4. 언어 잘 통하지 않음, 5. 보이지 않는 차별 존재, 6. 돈이 많이 필요함, 7. 사회적 혼란(대통령 선거, 민주주의-공산주의, 정치).
부모에게 떼쓰는 아이는 자신이 갖고 싶은 것에 대한 좋은 것만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인해 올 나쁜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좋은 것만 생각해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부모는 선택에 대한 책임을 가르치기 위해 그 선택에 대해 좋은 좀과 나쁜 점을 A4 반반으로 나누어서 써오라고 시키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 따져보면 무조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지혜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연습을 많이 해야합니다. 그래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무조건 떼쓰는 자아의 편을 들어주지 말고 잠시 종이를 꺼내 장단점을 써보는 노력을 하면 좋습니다. 지혜는 더 행복한 선택을 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지혜롭게 자란 아이는 반드시 부활의 그리스도를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RLV718aJYGw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와 남방 여왕의 표징을 빗대어 당신이 보여주실 표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요나의 표징이란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더러 회개하지 않으면 니네베가 40일 안에 망한다고 경고하자 니네베 임금이 단식을 선포하며 회개한 일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기원전 765년과 759년에 대기근이 일어나는 바람에 정복전쟁에서 끌려온 포로들이 두 번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763년에는 대낮에 어두워지는 개기일식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표징은 자연과 사회에서 일어난 현상을 겪으면서 하느님께서 더 큰 재앙을 일으키실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 권력자들에 의해서 일어난 회개를 뜻합니다.
그런가 하면 남방 여왕의 표징이란 이스라엘 남방 스바에서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고자 찾아왔던 옛 일을 말합니다. 이때 여왕은 금과 향료 등 사치스런 선물로 사례했고, 솔로몬은 이 선물들로 호사를 누리면서 여왕이 함께 가져온 신상들까지 궁정 안에 모셔놓았습니다(느헤 13,26).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솔로몬은 외국에서 데려온수많은 왕비들과 후궁들이 섬기던 우상들까지도 모조리 신당을 지어주기 시작하면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지혜는 사라지고 하느님께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1열왕 11,1-13). 그러므로 남방 여왕의 표징은 하느님의 지혜를 청하느라 땅 끝에서부터 찾아오는 수고를 하고, 값비싼 선물까지 주었지만 우상숭배의 빌미까지도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헛수고를 한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군중을 향하여 ‘악한 세대’라고 단죄하신 까닭은 그토록 회개하기를 가르침으로 촉구하시고 기적으로 또 재촉하셨는데도 그들이 회개를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지 한 세대만에 로마군의 침공을 두 차례 받아 성전과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무려 2천 년 동안 전세계로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회개하기를 미루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 말씀의 표현으로, “남방 여왕이 이스라엘 백성 중 그 당시 세대와 지난 2천 년 간의 모든 세대들이 함께 되살아나서 단죄할 사람들”은 바로 우리 세대요 그 중에서도 우리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나보다 더 크고 솔로몬보다 더 큰 이로 당신 자신을 소개하셨는데, 그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를 보우하시고 이끄시는 역사의 표징은 여러 차례 일어났었습니다. 그래서 고려시대 불교로도 조선시대 유교로도 없앨 수 없었던 하느님 신앙이 수천 년 동안 겨레의 심성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샤마니즘 혹은 무교라고 부르는 이 하느님 신앙의 영향력은 주술과 역술에 의존하는 무속인이나 역술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어 온 민간의 심성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지 그들은 올바른 하느님의 신앙의 방식을 아직도 만나지 못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징, 즉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 필요한 자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같은 이름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만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내용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실상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신 일은 2백여 년 전에 기묘한 섭리로 천주교 신앙을 깨우치게 하심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조정과 유림 등 권력자들은 백 년 간이나 박해를 가하고서 이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이 박해로 짊어져야 했던 겨레의 십자가는 그 후에도 반세기에 걸친 일제의 종살이, 겨레가 갈라지는 분단과 동족상잔의 전쟁, 가난과 독재, 친일적폐세력의 국정농단 등으로 이어졌지만, 끝내 선한 영향력을 잃지 않고 위기 속에서 더욱 단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고, 전방위적으로 한류가 그 선한 영향력을 온 세계에 미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더 남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겨레 안에서 이 선한 영향력으로 일하고 계심을 알아차리는 민간의 회개가 일어나야 하고, 이를 위해 먼저 믿은 이들이 분명한 하느님의 빛과 매력을 보여주려는 교회의 회개가 또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번영하는 단체가 되려고 하지 말고 사회의 번영의 그늘에 뒤처진 이웃들을 보살펴주어야 한다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러자면, 성전을 신축하거나 본당을 신설하는 데 큰 돈을 쓰기보다 소외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하고, 교회의 인력과 조직도 재조정하여 우리 교회 자신을 위한 관리 부문보다 복음적인 실천을 위한 부문에 더 투입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고, 예수님의 길입니다. 그리고 이미 천주교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겨레의 공동선에 관심을 갖고 투신하는 이들을 격려하며 그들이 받고 있는 선한 영향력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함께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민족 사회의 공동선이 증진되고 사회악이 제거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머지않아 겨레 안에서 부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너그럽고 자비로우니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복음 환호송. 요엘 2,12-13).
-조재형신부-
어린왕자에 그림이 하나 나옵니다. 중절모로 보이기도 하고, 뱀이 삼킨 코끼리로 보이기도 합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같은 그림이 다르게 보입니다. 심리학에서는 같은 그림을 다르게 보는 성향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노파와 여인’과 ‘루빈의 꽃병’입니다. 같은 그림인데 노파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젊은 여인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같은 그림인데 마주보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꽃병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 모습이 같이 보이지는 않습니다. 마치 양자역학처럼 관찰자가 보는 것에 따라서 그림의 모습이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같은 현상을 놓고도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서, 직책에 따라서 전혀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던 예수님을 신성모독의 죄로 고발했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고집과 아집이 마음에 들어오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됩니다. 형제들은 어머니의 묘소가 맞는다고 하는데 장남은 엉뚱한 묘지를 어머니의 묘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장남의 고집을 꺾지 못한 형제들은 결국 다른 사람의 묘를 이장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묘에 성묘하러 왔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어머니의 묘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던 장남은 정중하게 사과하고, 이장했던 묘를 다시 원상으로 복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말했던 묘를 다시 이장했습니다. 아집과 고집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빌라도는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결정했습니다. 대사제는 한 사람이 여러 사람을 위해서 죽은 것이 좋다는 엉뚱한 예언을 하였습니다.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 넘겼습니다. 호산나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했던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집과 고집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요양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치매에 걸리신 어르신이 침상 밖을 나오다가 넘어져서 크게 다쳤습니다. 그럼에도 어르신은 자꾸만 침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모두 걱정하였습니다. 어르신이 제대로 판단 할 수 없는 치매환자였기 때문입니다. 고령으로 제대로 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르신이 걸을 수 없을 거라는 이유를 찾으면 10가지도 넘었습니다. 다들 안타깝게 바라볼 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였습니다. 그렇게 걱정하고 있을 때입니다. 새로 온 막내 간호사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할아버지의 신발이 작네요.’ 보니까 할아버지의 신발이 정말 작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연락해서 발에 맞는 신발을 가져다 드렸습니다. 어르신은 힘은 들지만 신발을 신고 조심스럽게 화장실을 다녀오셨습니다. 걷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은 사람들의 눈에 할아버지는 치매환자였고, 걸을 수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걸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은 막내 간호사는 할아버지의 신발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방인을 차별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한 때는 이집트에서 차별받던 이방인이었지 않느냐?’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에서 가끔씩 인종차별 때문에 문제가 생기곤 합니다. ‘Black Lives Matter.'와 ’Stop Asian Hate.'를 외치는 시위가 있었습니다. 백인도, 흑인도, 아시아인도, 남미에서 온 사람도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편견을 버리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던 요나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롭도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주님께서 우리 국민들에게 잘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양승국신부-
예언자로 불림받은 요나가 요리 조리 도망다니다가, 마침내 주님의 손아귀에 잡혀 최초로 파견된 도시는 당대 잘나가던 도시, 최강대국의 수도 니네베였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니네베 성안으로 들어가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참 딱해 보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 하룻길을 걸은 요나 예언자가 마침내 이렇게 외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예언서 3장 4절)
니네베 사람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요나 예언자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아무리 외쳐본들 뭐하겠어? 귀 여겨 듣지도 않을 니네베 사람들인데...그래도 주님께서 외치라 하시니, 일단 한번 외쳐나 봐야겠다. 안 그러면 주님께서 내게 또 어떤 끔찍한 조치를 취하실지 모르니...’
그런데 정말이지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이 요나 예언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것입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했습니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자루 옷을 입었습니다. 왕도 왕좌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자루 옷을 걸친 다음 잿더미 위에 앉았습니다.
그런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습니다.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그들의 모습에 마음을 돌리시고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그러나 한번 회개해서 용서를 받았던 니느베는 기원 전 612년, 자취도 없이 이 지상에서 사라졌습니다. 멸망의 이유는 아시리아 제왕들의 잔혹함 때문이었습니다. 교만과 사악함, 사치와 게으름에 빠져 있던 아슈르바니팔 왕은 연합군이 바빌로니아를 앞세우고 쳐들어오자 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궁녀와 시종들 그리고 자신까지 불길 속으로 내던지며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습니다.
본 선거일을 앞두고 별의별 생각을 다 합니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던 아시리아 왕의 예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교만하고 그릇된 지도자, 폭력적이고 몰상식한 지도자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에게로 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루카 복음 11장 29절) 이 세상 안에는 악과 선이 반드시 공존합니다. 현대 정치사 안에 뼈아픈 아픔을 체험했던 우리들입니다.
그저 자기 주머니 속 채우는 데만 혈안이 된 사기꾼이나 세상 물정 하나도 파악 못하는 모지리를 지도자로 뽑아놓고 통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비전이나 청사진이 아예 없다 보니 임기 내내 허수아비처럼 살았던 사람, 애초부터 도둑 심보를 지녔기에 국토 전체를 파괴시킨 사람으로 인해 10년 세월 뒷걸음친 게 불과 얼마 전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해 잠을 설칩니다. 누군가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는데, 대내외적으로 혼란스럽고 위태위태한 시기, 밤낮없이 회의를 소집하고, 머리 맞대고 고민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몸에 밴 습관이 어디 가겠습니까?
당면한 과제에 대한 고민이나 성찰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머릿속에 든 게 거의 전무(全無)하니, 언제나 주변 간신배들에게 휘둘리고, 그저 밤이면 밤마다 패거리들 잔뜩 모아 폭탄주를 돌리고,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무속인들 불러들여 자문을 구하고, 굿판을 벌이고...참으로 끔찍합니다.
아무쪼록 자비하신 주님께서 우리 국민들에게 잘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길 간절히 청합니다. 너무 많은 것을 바래서는 안되겠지요. 그저 말이 통하는 상식적인 지도자, G7이나 G20 같은 정상회담에 참석했을 때, 부디 나라 망신 시키지 않을 지도자, 선제 타격이니 뭐니 하면서 전쟁의 위기나 갈등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는 평화주의자, 사분오열된 대한민국을 잘 조율하고 통합하는 지혜로운 지도자를 원합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이영근신부-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불신의 완고함을 벗고 회개하도록 촉구하십니다.
오늘 독서는 이방인 성읍인 니네베 사람들의 회개를 들려줍니다.
반면에 복음은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을 들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시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그 어떤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루카 11,29)
여기서 '악한 세대'라는 말은 단지 마음이나 행실이 악할 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의 병렬 구문에 따르면 '믿음이 없고 비뚤어진 세대'(마태 17,17)를 의미합니다.
곧 군중이 표징을 요청하는 것은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함할 구실을 찾기 위한 완악함과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곧 표징을 요구하며 시험하려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루카 11,30)
그렇다면 요나의 표징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요나가 “이제 사십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라고 외치며 회개의 때가 왔음의 표징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루카 4,18-19)하시면서 구원의 때가 왔다는 표징이 되셨습니다.
또한 요나의 표징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징이기도 합니다.
곧 요나가 고래 배속에서 사흘째 날에 다시 나온 일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었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나는 것을 예표해 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드러내시며 말씀하십니다.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2)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루카 11,31)
사실 요나와 솔로몬은 예수님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요나는 소생했을 뿐이지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번영과 지혜는 사라질지라도 예수님의 지혜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줍니다.
곧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표징을 볼 줄 아는 눈, 곧 믿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사실 믿음으로 보면 모두가 신비요 사랑이요 자비요 기적일 뿐입니다.
모두가 다 하느님의 활동이요 현존일 것입니다.
그것은 기이한 일을 보는 눈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보는 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언가 불가사의한 일로 우리를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크나큰 사랑과 그 자비를 선포하시기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찾는 이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표징일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표징을 알아보지 못함은 우리의 불신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루카 11,29)
주님!
당신께서는 불가사의한 일로 놀라게 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자비를 선포하시려 오셨습니다.
제 눈이 기적을 보기보다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제가 찾기도 전에 저를 찾으시고 제 안에서 구원을 이루시는, 먼저 베푸신 당신의 자비를 보게 하소서.
아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반영억신부-
사람의 마음은 흔들비쭉입니다.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기까지는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정작 이루고 나면 언제 그랬는가 싶게 잊어버리고 맙니다. 한번 깨우침을 얻었다든지 소망을 이루었으면 그 감사함을 오래도록 지켜야 하는데 마음 같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예수님의 진면목을 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기적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루카11,29). 하고 말씀하시며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귀를 막고 있는 사람에게는 천둥치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아무리 표징을 보여줘도 마음을 닫아건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습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일에는 정성을 들이지 않고 딴 곳에만 마음을 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군중들이 그랬습니다. 참된 신앙과 회개에는 무관심한 채 표징에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통하여 말씀이 참되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고 당신의 권능을 일깨워 주심으로써 새 삶으로 인도하려 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에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표징을 일으킬 수가 없으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사참례를 하여 성체를 모시면서도 주님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기 보다는 이상한 현상이나 신비로운 표징에 더 많은 관심을 보입니다.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모실 수 있다는 것이 표징중의 표징이요, 기적중의 기적이지만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모두를 주시지만 우리는 그저 밀떡하나 받아먹는 것으로 만족하니 주님의 역사하심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준비하지 않은 나를 보지 못하고 더 큰 것을 요구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번 사순절에는 더 큰 것을 바라기에 앞서 지금 내가 주님 앞에 서 있음을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기적은 내가 지금 살아있음이 기적입니다. 많은 실수와 잘못, 허물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이기는 자비에 힘입어 이렇게 살아있음이 사랑이신 주님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쫓기보다 내 삶의 자리를 표징의 자리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을 영성체를 통해 모실 수 있음을 기뻐하며 우리도 주님처럼 이웃을 위한 빵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빵을 먹을 때마다 생명의 양식이 되신 주님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표징 』
-송영진신부-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과 함께 되살아나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
그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29-32)”
이 말씀 앞에,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셨는데, 마귀가 나가자 말을 못하는 이가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군중이 놀라워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느라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그분께 요구하기도 하였다(루카 11,14-16).”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은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정말로 ‘하느님의 권능과 권한’으로 한 일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요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그런 요구를 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왜 믿기 싫어했을까?
예수님이 나자렛의 가난한 목수였다는 것이 그 이유였을 것입니다(마르 6,3).
또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 것은,
“예수는 가짜 메시아니까 표징을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백성들은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이자가 다른 이들을
구원하였으니, 정말 하느님의 메시아, 선택된 이라면 자신도 구원해 보라지.’
하며 빈정거렸다(루카 23,35).”
우리는 “사람들의 그런 요구는 옳은 일인가?”부터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피조물이 조물주에게 조물주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한 일이고, ‘신성모독’입니다.
그것은 감히 조물주의 위에 서려고 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아야 할 인간이 구세주(메시아)에게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오만이고 신성모독입니다.
구세주보다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물주가 자신이 조물주라는 것을 피조물에게 증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세주가 자신이 구세주라는 것을,
구원받아야 할 인간들에게 증명할 이유도,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또 구세주와 우리의 관계는
‘자비’와 ‘믿음’의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자비’를(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라는 말씀은,
“믿으려고 노력하지는 않고, 표징만 요구하는 것은
‘악한 일’이다.” 라는 뜻입니다.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의 ‘죽음’과 ‘부활’이 표징이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표징’이라는 말은,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구원과 멸망의 갈림길에 서 있는 표지판” 같은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사용한 ‘표징’이라는 말은 ‘신원증명서 같은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요나 예언자의 표징’이라고 표현하신 것은,
요나가 사흘 낮과 사흘 밤을 큰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나온 일과(요나 2,1)
당신의 ‘죽음과 부활’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도, 오늘날까지도,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은 안 믿고 있습니다.
표징이 주어진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믿게 되는 것은 아니고,
믿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 믿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요나가 니네베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이라는 말씀에서
‘표징’이라는 말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살아서 나온 일이 아니라,
그가 니네베에서 행한 ‘멸망 선포’를 가리킵니다.
니네베 사람들은 그 선포를 ‘하느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고,
회개했습니다(요나 3,4-9).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나 자신이 곧 표징이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 ‘나 자신’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말씀을, 제자들의 증언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안 믿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가 됩니다.
이 말씀을, “나의 ‘복음 선포’와 ‘구원 활동’ 자체가 표징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는 ‘일’이 곧 당신을 증명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 5,36ㄷㄹ).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는 말씀은,
“이 세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은 유죄라고
‘남방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이 증언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땅 끝에서 온 남방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왔다가
하느님을 찬양한 여왕입니다(1열왕 10,9).
그 여왕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에 비하면 별것도 아닌
솔로몬의 지혜의 말만 듣고서도 하느님을 찬양했습니다.
니네베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낯선 예언자의 말만 듣고서도 하느님을 믿고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예언자일 뿐이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구세주이신 분입니다.
구세주이신 분의 ‘구원의 복음’을 직접 듣고, ‘구원 활동’을 직접 보고서도
믿으려고 하지는 않고, 구세주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요구나 하는 사람들은
유죄선고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1, 32)
-한상우신부-
모든 일은
회개에서
비롯된다.
회개가 필요한
우리들
삶이다.
회개를 통해
우리는
참된 표징을
얻게된다.
회개로부터
시작되는
건강한 삶의
새로운
모습이다.
우리들
사는 모습이
표징이
되어야 한다.
회개라는
표징보다
더 큰
가르침은
없다.
회개와
참다운
생활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진실한
신앙인의 삶이
바로 참된
표징이다.
회개를
실천하는 사람은
결코 하느님을
외면하지 않는다.
진리를 향한
발걸음을
다시 내딛는다.
참된 표징은
회개로
거듭나는
우리들 삶의
기쁜
탄생이다.
교만과
이기심을
벗어나야
우리의 신앙도
표징이 된다.
표징의 길은
회개의 길이다.
회개의 길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회개는
새로운 삶의
문(門)을 여는
가장 아름다운
복음의 표징임을
믿는다.
회개하여 할
우리자신이다.
진리를
찾는 이는
회개로
새로워진다.
새로운 생활
새로운 마음이
우리가
따라야 할
맑은 표징이다.
꽃이 아니라 가시를 보는 악
-김찬선신부-
“이 세대는 악한 세대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오늘 표징을 요구하는 세대를 보고 악한 세대라고 하십니다.
표징을 요구하는 것이 왜 악한 것일까 우리는 당연히 생각게 됩니다.
왜 악한 지에 대해 다른 측면에서 얘기할 수 있고,
아주 심오한 차원에서 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좀 다른 차원에서 보렵니다.
우리는 악하다고 할 때 보통 악한 행동을 했을 경우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결과로서 악을 저지른 경우입니다.
그래서 실수로 악을 저지른 경우 악하다고 하지는 않지요.
죄인 줄 알면서도 남을 괴롭히고, 피해를 주고, 상처를 주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거나 누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기에
그것이 왜 죄이고 왜 악한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관점을 좀 달리 하여
선을 보지 못하는 악에 대해서 보려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고,
한없이 널려있는 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악하다는 겁니다.
꽃이 있는데 왜 가시를 봅니까?
장미꽃의 얘깁니다.
하늘이 있는데 왜 구름을 봅니까?
아니, 하늘은 못 보고 왜 구름만 봅니까?
그것은 내 안에 상처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은 내 안에 어둠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그리고 그것은 내 안에 악이 있기 때문이고,
더 심하게 얘기하면 악만 가득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악이 악을 보고,
선이 선을 봅니다.
그러니 자연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내 안의 악은 어떻게 들어온 걸까?
아담과 하와처럼 뱀이 밀어 넣은 걸까?
뱀도 우리 주변에 많지만 욕심이 악을 생산합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못 가진 선만 보기 때문에
가진 선을 못 보는 악이 발생하고,
못 가진 것을 가지려는 악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난하면,
우리의 욕심이 가난하면,
그래서 ‘더’를 바라지 않는다면
지금 가진 선들만으로 감지덕지感之德之하고
하늘에 더 이상 ‘더’를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장미꽃이 하느님이 만드신 하늘의 표징임을 보지 못하여,
하늘을 보면서도 하늘을 내신 하느님을 보지 못하여
또 다른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늘의 표징을 여전히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도 ‘네가 바뀌라’고, 회개하라고 하실 겁니다.
![](https://blog.kakaocdn.net/dn/pF8nA/btqQ0PG6aOz/UDuWeXSP91LjxbotLRQ6l0/img.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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