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Margaret K 2022. 3. 3. 06:56

2022년 3월 3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가 9,22-25)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그들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당신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던집니다. 제게도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또 사제로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물론 마지막 날에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기에, 마치 갓난아기로 다시 태어날 일은 없습니다. 그래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변하시겠습니까?

아마 지금까지의 후회되는 일을 고치고, 차마 하지 못했던 일을 다시 하는 삶을 살겠다고 대부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회학자 토니 캠폴로가 이제 삶의 끄트머리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95세 이상의 어르신에게 위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은 다음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날마다 반성하며 살겠다.”, “용기 있게 살겠다.”, “세상을 떠난 뒤에도 무언가를 남기는 삶을 살겠다.”

‘많은 돈을 벌겠다’라는 답변이 없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얻겠다’라는 답변도 없었습니다. 세상 안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한 소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계셨습니다. 이 생각이 지금을 사는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새롭고도 어려운 결단을 촉구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주님의 수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기에, 먼저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고,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에게 가장 소중하다고 하는 목숨까지도 버릴 용기를 가져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며 사는 것은 오히려 삶의 목표를 잃게 되며, 반대로 진정한 삶은 목숨을 희생하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 나아가는 데서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그래서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라고 하십니다.

제1독서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신명 30,16)라는 신명기 말씀이 우리가 가야 할 지표가 됩니다.

희망과 근심, 공포와 불안 가운데 그대 앞에 빛나고 있는 하루하루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그러면 예측할 수 없는 시간은 그대에게 더 많은 시간을 줄 것이다(호레스).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실 수밖에 없는 이유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hCKbT7il9_k

오늘은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십니다. 예수님은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 그리고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고 또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피 흘림 없이는 인간이 구원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느님께서 피를 흘리셨는데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수는 없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느님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나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구원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내가 사는 세상에 나오기 위해 반드시 나의 창조자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머니의 태중에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습니다. 누구도 이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알아야 할 것은 내가 어머니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깨닫는 자만이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유튜브 채널 ‘우와한 비디오’에 ‘누워서 수업 듣는 아이, 엄마와 아들의 위대한 등교’가 있습니다. 성우는 척수근위축증을 앓고 있습니다. 17살 성우는 몸을 움직이지 못할 뿐 아니라 휜 허리 때문에 왼쪽 세상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의사가 되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서 정신과 의사가 되겠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우를 학교에 데리고 갑니다. 체력이 안 되어 오전만 수업하고 오후는 집에 와서 과외를 합니다. 어머니는 쉽지 않은 가정 살림에도 과외 선생님을 붙여 아이가 공부할 수 있게 합니다. 

 

    성우는 왜 이렇게까지 공부에 매달리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어머니에게 타인의 손을 빌려 쓴 편지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엄마, 아들 성우에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엄마도 다른 엄마들처럼 놀러도 가고 영화도 보고 자유로운 생활도 하시고 싶을 텐데 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시잖아요.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해요. 제가 아프지 않게 태어났으면 엄마도 마음이 안 아팠을 텐데….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받아서 짜증 내고 투정 부려서 미안해요. 마음은 그렇지가 않은데 나 자신을 못 이기나 봐요. 엄마에게 투정 부린 날은 하루 종일 마음이 안 좋아요. 엄마 힘든 거 누구보다 제일 잘 아는 놈이 저인데 자꾸 몸이 힘들고 아프니까 저도 모르게 그러는 것 같아요. 엄마한테 말은 한 했지만, 하루하루 더 늙어가는 어마 얼굴이 너무 속상하고 죄송해요.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공부한다고 너무 유난 떨고 엄마 힘들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공부를 잘해야지 엄마도 호강시켜 드릴 수 있잖아요. 꼭 성공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우리 조금만 참고 힘내요. 사랑해요, 엄마. - 이 세상에서 엄마를 가장 사랑하는 성우가.”

 

    우리가 나의 처지에 대해 불평하고 남의 탓을 하는 이유는 진정으로 나의 창조자를 찔러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아니 분명히 찔렀는데 기억하지 못해서입니다. 누구도 내가 어머니 밖으로 나올 때 어머니를 피흘리게 했음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영영 기억해내지 못한다면 그 자녀는 어머니의 세상에서 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부모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세상의 무게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이들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은 하느님이 자신들을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의지적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하느님 나라에서 살 힘을 얻지 못합니다. 

    성우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힘을 어머니의 희생을 깨달으며 얻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하느님의 희생에서 힘을 얻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돌아가심을 인정하지 못하면 진짜 하느님의 죽음을 죽이는 인간이 되어버립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 같은 경우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신 임언기 신부가 어느 임종 직전의 냉담 신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간암 말기 환자였는데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그가 끝까지 성사를 거부하는 것이 안타까워 청했던 것입니다. 배에 이미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해할 것이 없느냐고 묻는 신부님의 질문에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말을 못 하나 싶어 십계명을 일일이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이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병자는 미동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뒤에서 환자가 크게 소리쳤습니다. 

    “나 죄 없어!” 

 

    바오로 사도는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로마 3,10)라고 말합니다. 천사도 하느님 앞에서는 부끄러워 얼굴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는 내 죄가 하느님을 피흘리게 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입니다. 그분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전에 자신의 어머니를 친구를 시켜 차로 치게 하여 보험금을 타내려던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다행히 돌아가시지는 않고 휠체어를 타셨습니다. 아들이 살인미수죄로 재판을 받을 때 어머니는 그 아들을 위해 자신을 대신 감옥에 보내 달라고 탄원을 했습니다. 아들을 잘못 키운 자신의 죄가 크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위해 어머니가 피를 흘리셨음을 깨닫지 못하면 그 아이는 또 어머니를 죽이려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정과 세상에 적응하려면 내가 어머니와 아버지를 피 흘리게 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가 해 주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이를 낳을 때만이 아니라 계속 피를 흘려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끊임없는 작은 피 흘림을 통해 자신이 태어날 때 엄청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까지 다다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을 보여주지 못하면 나를 낳기 위해 그런 고통을 겪었음을 믿는 것은 매우 힘이 듭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끊임없이 미사로 기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해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죽음이 나를 당신 세상에 살게 할 힘을 주시기 위함임을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다 주셨다는 말은 나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번 사순 동안은 내가 주님을 찌르는 한 번의 은총이라도 달라고 청해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도 심판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도 우리는 그 엄청난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내가 못 박았음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번이라도 내가 주님을 죽였음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진짜로 죽이는 사람이 되어 유대 지도자들처럼 하느님 나라에서 살 자격을 잃게 됩니다. 내가 주님의 피를 흘리게 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짜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입니다. 아기에게 세상이 자신이 찢은 어머니의 배 다음에 있듯, 하느님 나라는 내가 찢은 그리스도의 심장 뒤편에 있습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NMLNvrRRuo

오늘 우리는 생명과 죽음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는 신명기의 말씀과, 참 생명을 선택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예고하시는 복음 말씀을 들었습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생명을 선택하면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을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준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아직까지 육신 생명이요 행복은 현세적 번영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과 행복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뚜렷한 경계를 지닌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정치적이고 지리적인 경계를 초월할 뿐만 아니라 현세적인 한계도 넘는 보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내세에까지 열려 있되 현세의 어느 지리적 범주도 다 포괄하는 보편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진리로 열리고 진리가 다스리는 이 나라에서 누릴 생명 역시 지금 여기서부터 육신과 영혼이 모두 충만한 생기를 누릴 전인적인 생명이었습니다. 이렇게 보편적인 현실에서 전인적인 생명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임을 예수님께서는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사랑하듯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되, 특별히 보잘것없는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던 청중은 주로 갈릴래아 유다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들의 땅을 차지한 예루살렘의 부유한 유다인 부재지주들로부터 착취당하면서도 무시당하고 있었던 데다가, 갈릴래아 평원이 비옥했던 그 만큼 그들을 수탈하고자 로마제국이 부과한 과중한 세금까지 겹쳐서 이중으로 억눌리고 있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행복과 번영을 누리기는커녕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던 가난하고 힘 없는 유다인들 한가운데에서 행하시던 복음선포는 “영과 진리 안에서”(요한 4,23) 하느님께 바치신 진실한 제사였습니다. 하지만 이렇듯 하느님의 약속과는 반대로 역설적으로 상황이 엄중한 만큼 그 제사는 비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초대교회의 신앙인들은 유다교의 박해 속에서도 예수님께서 사셨던 바를 따랐습니다. 이러한 신앙 증거는 로마 제국의 전 영토에 퍼져서 로마의 박해를 받던 고대교회 3백 년 동안에도 이어졌고, 신앙 진리와 정의의 가치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폭발하듯이 늘어나 인류 역사의 신기원을 이루었습니다. 이 3백 년 동안에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무신론자들과 우상숭배자들에게 배척당하고 권력자들에게 박해를 받으면서도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 않고, 신앙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영원한 생명을 얻었으며, 빛나는 별처럼 후대 신앙인들을 비추어주고 있습니다. 비록 박해 받은 육신 생명은 한 알의 밀알처럼 땅에 떨어져 죽임을 당했어도 땅 속에서 더 많은 싹으로 불어난 이 밀알은 더 많은 입교자들로 열매를 맺음으로써 십자가로 부활의 역설적 진리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죽음과 불행보다는 생명과 행복을 선택한 후대 신앙인들은 조선 시대 후기에 이 땅에서도 이어졌습니다. 실로 오묘한 섭리로 들어온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여 교회를 세웠고, 성직자 없는 평신도 교회에서도 스스로 성사에 대한 갈망으로 성사를 베풀어 놀라운 선교 성과를 이루어냈습니다. 그러다가 제사금지령으로 박해가 시작되자 자발적으로 조직했던 성사조직을 해체하고 성직자 영입운동을 벌이는 한편, 박해를 피하여 전국의 심산유곡으로 찾아들어 모두 189군데에 교우촌을 세우고 신앙의 가치를 지켜나갔습니다. 신분으로 백성을 나누어 차별하던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여, 하느님을 닮도록 창조된 사람이 귀하다는 천주교 교리를 의롭게 증거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도 없었고, 개인들은 양심의 자유가 인정되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임금 혼자서만 자유롭고 양반들만 평등하던 조선 사회에서, 교우촌 신자들은 공소에 모여 기도를 바치며 영과 진리 안에서 진실한 제사를 하느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수많은 신자들이 조정과 유림의 박해로 죽어갔습니다. 칼에 목이 떨어져 죽고, 매맞아 죽고, 바위돌에 패대기쳐져서 죽고, 얼굴에 바른 젖은 창호지로 숨막혀 죽고, 굶어서 죽고, 매맞으며 퍼진 장독으로 죽고, 나중에는 수십 명씩 생매장당해서 죽어갔습니다. 그렇게 죄 없는 자기 백성을 죽인 조선 왕조는 국력이 소진되어 일제에 멸망했고, 입술로 배교했다가 풀려나와서는 후손들에게 순교정신을 가르친 배교자들 덕분에 조선의 천주교회는 살아남았고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이 자유를 누리는 땅이 반쪽입니다. 

 

  이 고귀한 희생으로 얻은 신앙의 자유는 우리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 겨레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식민지배와 전쟁, 가난과 독재의 가시밭길까지 무사히 건너온 우리 교회와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와 진리와 정의의 가치를 온 겨레에게 나누어주어야 할 소명과 십자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또한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 중에 선택하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속합니다. 갈라진 겨레, 나누어진 국토로 인한 불행을 딛고 하나된 겨레, 통일 조국을 향하여 우리의 올바른 선택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신부-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분임을 밝혀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날 일 네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수난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둘째는 버림을 받으신다는 것이요, 셋째는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이요, 넷째는 죽은 후에 살아나시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네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지속적으로 날마다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주권이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믿고 오로지 하느님께만 신뢰를 둔다는 것이요,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기꺼이 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린다거나 자기 십자가를 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왜 지는지’가 중요합니다.

곧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것들을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바로 여기에 우리의 결단이 요청됩니다.

 

제1독서에서도 생명과 죽음의 길에서 결단을 촉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길을 이렇게 말해줍니다.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신명 30,20)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루카 9,22)

 

주님!

오늘도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갑니다.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입니다.

한두 번 겪고 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죽을 때까지 겪는 일입니다.

어쩔 수 없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겪는 일입니다.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일입니다.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일입니다.

아멘.

「십자가는 천국의 열쇠」

-반영억신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기도입니다.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님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이 십자가를 감당하게 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하늘로 올라가는 사다리이며, 천당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예수님께서는“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9,24).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사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모두를 잃어버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바라보면 답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앞에서 당신의 뜻을 버렸기 때문에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었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결국 십자가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데서 오는 희생입니다. 알퐁소 성인은 “당신이 제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를 맞추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를 버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는 주님의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선택하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상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주장, 뜻을 양보한다는 것이 정말 마음 같지 않습니다. ‘날마다’는 아니라면 오늘 하루만이라도 내 공로를 내세우지 말고 또 내 생각에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십자가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신명기의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 놓는다.”“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신명11,26;30,19-21).

 

마땅히 생명과 행복을 선택해야 하지만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양보하는 것 하나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그 시작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요까짓 것’ 하는 것이 정말 대단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고까짓 것’일 수 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매사에 신중한 선택을 하시기 바랍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지금은 십자가이지만 그 십자가가 더없이 큰 축복임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 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고 순종하며 십자가를 지십시오! 그러면 마지막에는 그 십자가가 여러분을 져줄 것입니다”(성 토마스 아 켐퍼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송영진신부-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루카 9,22).”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말리다가

크게 혼났습니다(마태 16,22-23).

(아마도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활’에 초점을 맞춰서 읽어야 합니다.

“나는 부활한다. 수난과 죽임을 당하더라도.”

부활을 먼저 생각하고, 부활을 먼저 믿는다면,

그 앞에 있는 수난과 죽음은 충분히 참고 견딜 수 있습니다.

(수난과 죽음이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부활 신앙이 있다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려고 죽으셨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활하시려고 일부러 죽으신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고,

부활이 있어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의미를 갖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 이 말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우리 앞에 놓은 고난과 시련들을 받아들입니다.

<목적지는 정해져 있고, 그곳까지 가는 과정은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루카 9,23-25)”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이 가르침대로 살면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된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일이고,

“이 가르침대로 살 것인가?”는 우리 자신이 선택하고 결단해야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누구든지’ 라는 말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부활 전의 십자가를 면제 받는 경우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았는데도 부활에 참여하지 못하는

‘억울한’ 경우는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특권도 없고, 차별 대우도 없고, 불공평한 일도 없습니다.

 

“내 뒤를 따라오려면”은 “내가 주는 부활과 생명을 얻으려면”입니다.

예수님의 초대는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자는 초대가 아니라,

부활과 생명을 함께 누리자는 초대입니다.

십자가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입니다.

“자신을 버리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입니다.

철학 용어와 신학 용어를 동원해서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부활과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고,

모두 물리치는 것이 곧 자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장 크게, 가장 많이 방해하는 것이

내 안에 있는 육적이고 속된 욕망과 욕심들입니다.

그것부터 버려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버린다.’ 라는 표현이 사용됩니다.)

“날마다”는 “끊임없이”입니다.

신앙생활은 하고 싶을 때만, 또는 하기 쉬울 때만 해도 되는 생활이 아니라,

단 한 순간도 중단하지 않고 꾸준히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십자가를 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래야만 예수님을 잘 따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고 끝나버린 분이 아니라 부활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처럼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이지 죽이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 생명을 얻는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온 세상’을 버려라.” 라는 뜻입니다.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는 경우가 있다고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온 세상을 얻으려고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는 것은

참으로 허망하고 어리석은 일이다.”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일과

지상에서 ‘온 세상’을 얻는 일은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영원’과 ‘허무’는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을 영원한 것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도 안 믿고, 영원한 생명도 안 믿는 사람들은?

그들은 자기들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을 모르는 채로 살다가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십자가가 너무 크고 무겁다고 느껴질 때가 있고,

그 큰 십자가가 목적지를 가려서 그곳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때도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고, 실감나지도 않고,

눈앞의 십자가만 생생한 현실일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 주는 힘이고,

막연한 이론 같은 교리를 현실로 만들어 주는 힘이고,

십자가를 극복하고 부활과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게 해 주는 힘입니다.

‘믿음’은 나를 살아 있게 해 주는 힘이고, 죽음에서 살아나게 해 주는 힘입니다.>

말씀 나누기 - 재의 수요일 다음 목요일-살려면 (ofmkorea.org)-김찬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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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 18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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